15. 아이는 생활의 독
“같이 먹는 거야?”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하고 세진을 노려보는 라니의 얼굴에
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라니!”
유진의 나무라는 외침에도 라니의 찡그린 인상은 풀릴 줄 몰랐다.
아니, 오히려 더 싸늘한 시선을 세진에게 겨냥했다.
“돼, 됐어. 내가 나중에 먹을 테니.”
결국 세진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세진형, 앉아.”
완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화를 내는 한은 위험하다.
식탁에 모여앉아 있던 사람들은 위험하다는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일어나려던 세진까지도 한의 한마디에 얼른 엉덩이를 내렸다.
“먹자.”
한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숟가락을 들었다.
짓눌릴 것 같은 침묵 속에서 여섯 사람은 넘어가지 않는 밥을 열심히 씹었다.
‘라니가 왜 그런 거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윤은 계속 라니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고 오히려 더 꼬여만 갔다.
‘유진이한테 물어봐야겠어.’
차마 온 몸으로 나 화났어 오러를 뿜어내는 한에게는 묻지 못하는 윤이었다.
힘들게 저녁식사를 마친 윤은 유진을 슬쩍 마당으로 불러냈다.
“그게 정말이야?”
윤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가 얼른 입을 가렸다.
유진이 곤란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세워 쉬이 하는 모양을 만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재빨리 주위를 둘러본 윤은 라니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구나. 몰랐어. 그냥 귀엽다고만 생각했는데...”
“모른 척해. 라니 자신도 모르니까. 그냥 다른 아이랑 똑같이 대해주는 게 좋대.”
“알았어. 어린 애가 가엽게도... 근데 넌 라니랑 어떻게 아는 사이야?”
“응? 어, 그, 그게... ”
“왜 그렇게 뜸을 들여? 말하기 곤란하면 안 해도 돼.
아무래도 환자니까 말하기 그런가 보구나.
제법 의사같은 데도 있네. 아직 날달걀 주제에.”
풋 웃는 윤의 얼굴에 유진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렇게 웃을 때의 윤은 정말로 여리고 순진한 아이같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과도 닮은 기분으로
언제까지나 눈을 떼지 못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웃음은 여름날의 실바람처럼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고 만다.
그것이 아쉬워서 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윤을 끌어안았다.
“얘가 왜 이래?”
질겁하고 유진을 떨치려 하지만 강하게 끌어안으면
윤은 결국 못 당하겠다는 듯 한숨을 쉬며 등을 톡톡 두드려 준다.
그 느낌이 좋아서 유진은 윤의 어깨에 이마를 댔다.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이대로 굳어 버렸으면.
네가 날 좋아하는 마음이 없더라도 이대로 화석이 된다면
후세의 사람들은 우리를 한 몸이 된 연인이라고 생각해 주겠지.’
“뭐 하는 거냐?”
불현듯 들린 한의 음성이 유진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던 윤이
화들짝 놀라 유진을 밀어냈다.
‘헉, 내가 뭐 하는 짓이냐? 아악, 한이 오빠한테 이런 걸 보이다니.
유진이 자식, 요즘 툭 하면 끌어안는단 말야. 설마 세진 오빠가 본 건 아니겠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그대로 집안으로 도망쳐 버리는 윤이었다.
유진은 망연히 그 뒷모습을 보다가 한에게 사나운 눈을 돌렸다.
“방해하기로 한 거야?”
“특별히 방해랄 것은.”
쿡쿡 웃으며 딴청을 피우는 한의 모습에 유진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한에게는 한없이 약한 입장인 것이 사실이다.
결국 한숨을 쉬는 유진에게 한이 비웃음을 날렸다.
“그렇다고 라니를 정신병자로 만든 거냐?”
“설명할 길이 없잖아.
설마 라니가 세진이랑 겸상 못 하겠다는 이유를 그대로 말하라는 건 아닐 테고.”
“아아, 뼛속까지 공주님이더군.
세진형은 어디까지나 아랫사람이다, 이거지?”
“라탄은 철저한 신분사회니까.
라니 입장에서는 용납될 수가 없는 일이지.
세진이 특별하다는 걸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너부터 조심해. 네가 세진형을 그렇게 대하니까
라니도 나나 온이와는 다르게 보는 거야.”
“반성하고 있어. 마음은 안 그런데 버릇이 돼서.”
“그나저나 일석이조로군.
라니가 네 약혼자라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윤이한텐
정신나간 어린애의 투정으로밖엔 안 들릴 테니까.
역시 화성의 지도자감이라 일처리가 철저해.”
“그런 식으로 비꼴 건 없잖아. 그리고 라니는 내 약혼자 아니야.
약혼시키려고 했던 건 사실이지만 말이 나오자마자 도망쳤다고.”
“그래, 그래서 불씨를 여기까지 끌고 들어왔지.”
유진이 인상을 찡그렸다.
“형, 지금 나한테 화내고 있는 거야?”
“그걸 이제 알았냐?”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그런 이야길 하면 어쩌라는 거야...‘
새삼 이한이라는 남자의 진면목을 들여다 본 것 같은 기분에
등어림에 차가운 소름이 돋았다.
‘역시 처음 봤을 때부터 어린 마음에도 거스르고 싶지 않더라니.
다른 건 몰라도 사람 보는 눈만은 정확하게 교육받았군.’
“방해하겠다는 뜻이야?”
어쩔 수 없이 목소리가 차가와진다.
상대가 이한이라고 해도 물러설 수 없는 것이 있는 법이다.
전투적으로 변한 유진의 얼굴을 흐음, 하는 표정으로 즐겁게 감상하던 한이
손을 뻗어 유진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그런 마음이 들지 않도록 더욱 분발하게, 유진군.”
발걸음도 가볍게 앞을 스쳐가는 한에게 또 당했다, 라고 생각하고 만 유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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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르르 하는 아이의 높은 웃음소리는 어느 샌가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준다.
늘 막내 역할을 담당해야 했던 윤에게 라니의 존재는 구원이고 기쁨이었다.
가끔 버릇없게 굴기도 하지만 그것마저 귀여워 보인다고 생각하고 만다.
하지만 어쩐지 뒤끝이 씁쓸한 적이 있다.
“어, 같이 보자!”
윤이 한참 요즘 열광하는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유진이 끼어들었다.
첫 회를 볼 때는 유치하다느니, 말도 안 된다느니 심술을 부린 주제에
언젠가부터 꼭꼭 챙겨서 본다.
“유치하다며?”
“어, 유치해.”
“유치한 걸 왜 보냐?”
“욕하려고.”
“그럴 거면 왜 보는데?”
“알아야 욕도 하지.”
당당한 유진의 말에 대꾸할 기력도 없어진 윤은 그냥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야, 다리 좀 펴 봐.”
“싫어. 그냥 앉아서 봐.”
그리고 드라마를 볼 때는 꼭 윤의 무릎을 베고 본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당연하다는 듯 윤의 무릎을 차지하고 있었다.
“너 요즘 좀 이상한 거 알아?”
“뭐가?”
“너랑 나랑 사귀냐? 왜 툭하면 스킨십이야? 내가 오빠들 보기 민망해서, 진짜.”
“친구 사이에 그런 것도 못 해? 너무 민감한 거 아니야?
세진이한테 보이기 싫어서 그러지?”
“그것도 있지만 이건 심각한 문제야.
누가 보면 너랑 나랑 사귀는 줄 알겠다.
이런 거 이상한 거야.
아무리 네가 현실이랑은 동떨어져서 산다고 해도 이상한 건 이상한 거라고.
오해받을 짓 하지 마.”
“오해?”
“그래.”
“오해라면...”
씩 웃는다 싶더니 유진이 갑자기 윤의 볼에 기습 뽀뽀를 했다.
“야!”
“이 정도는 돼야 오해를 사지.”
“너 미쳤어?”
뭐가 그렇게 좋은지 큰소리로 웃는 유진을 들고 있던 쿠션으로 팡팡 내리쳐도
웃음소리는 줄어들지를 않는다.
“아무튼 넌 그저 나 놀리는 재미로 살지.”
포기한 윤이 쿠션을 집어던져도 유진은 큭큭거리며 웃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라니가 다가와 탐색하는 눈길로 물었다.
윤은 새빨갛게 된 얼굴로도 애써 웃어보이며 라니를 유진과의 사이에 얼른 끌어앉혔다.
“아냐, 유진이 놈이 또 장난을 쳐서. 저건 언제 철들지 몰라.
라니보다도 정신연령이 낮다니까.”
투덜거리느라 라니의 차가운 눈을 보지 못한 윤이었다.
“나 이거.”
라니가 내미는 비디오 테잎을 보고 윤이 잠깐 망설였다.
‘드라마 보고 싶은데... 비디오니까 그냥 나중에 보라고 할까?’
“어, 그래?”
바람처럼 나타나 비디오를 트는 온에게 윤이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오빠! 나 이거 보고 있단 말야.”
“야, 야. 애가 보고 싶다는데 뭘 그렇게 따지냐. 그냥 재방송 봐.”
“온이 오빠, 진짜!”
“자, 시작한다.”
윤의 항의는 들리지도 않는지 온은 흐뭇한 표정으로 라니의 옆에 앉아
재미도 없는 만화영화를 열심히 감상 중이었다.
‘애랑 싸울 수도 없고. 온이 오빠 뭐야? 맨날 내가 최고라고 하더니... 아아, 기분 나빠.’
희희낙락 웃는 온이 보기 싫어서 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우, 얄미워. 뒤통수까지 밉게 생겼어.’
딱~!
“아야! 이윤!”
“메롱~”
혀를 쏙 내밀어 보인 윤은 그대로 도망쳐 방문을 잠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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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 본 윤은 갑자기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콜라가 없어!’
삼남매가 모두 콜라 중독에 가까운 애호가들이니 집에 콜라가 떨어지는 날은 없었다.
“뭐야? 우유랑 요쿠르트 뿐이네. 언제부터 우리 집 냉장고에 이런 게 들어있었냐.”
우유를 심하게 싫어하는 윤은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리 라니 때문이라고는 해도 너무하잖아!
라니를 못 마시게 하면 되지, 왜 콜라를 안 사다놓는 거야?”
화가 난 윤이 쿵쿵거리며 온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오빠가 장 봤지? 콜라 왜 안 사다놓은 거야?”
“야, 애가 있잖냐. 어렸을 때부터 콜라 먹으면 안 좋아.”
“라니한테 안 주면 되잖아. 왜 우리까지 안 먹어야 해?”
“불쌍하잖아. 콜라 엄청 좋아하는데 어떻게 있는 걸 안 주고 우리만 마셔.
그럴 바엔 차라리 안 사다놓는 게 낫다 싶어서.”
“라니만 입이야? 내가 콜라 마시는 것까지 라니 눈치를 봐야 돼?”
“너 너무 민감하게 구는 거 아니야? 잠깐 있다 갈 앤데 그 정도도 이해 못 해 줘?”
“그 잠깐 있다 갈 애 때문에 왜 내가 피해를 봐야 하는데? 왜 우리 생활이 달라져야 하냐고?”
“윤이 네가 피해 본 게 뭔데? 콜라 좀 못 마신다고 그렇게 길길이 뛰어야 하냐?”
“됐어! 오빠가 그렇지 뭐.”
“이윤, 너 이리 와서 다시 말해봐. 그 말이 무슨 뜻이야?”
온이 화를 내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지만
한번 화가 나면 한 말고는 아무도 못 말린다.
겁이 덜컥 난 윤은 온의 부름을 무시하고 도망쳐 나왔다.
“이윤! 너 이리 오랬지?”
쫓아오는 온을 피해 동네 어귀까지 달아난 윤은
골목 끝에 숨어서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땀과 함께 눈물이 흐른다.
서러워서 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진짜 너무해. 왜 나한테 화는 내고 난리야?
그렇게 좋으면 라니를 동생해. 그러면 되잖아. 치사해서 나도 오빠 동생하기 싫어.’
소리내서 엉엉 울고 나니 조금 기분이 풀렸다.
윤은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닦았다.
‘흥, 오빠 따위 나도 무시해 줄 거야. 나도 한이 오빠가 더 좋다 뭐.’
한참을 쭈그리고 앉아 있었더니 다리가 저렸다.
“아야!”
일어나려던 윤은 다시 그 자리에 푹 주저앉았다.
“에? 방금 뭔가가 날아온 것 같은데.”
주위를 살피던 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닌가.”
“윤아! 무사해? 괜찮아?”
달려온 유진이 윤의 어깨를 잡고 일으켰다.
유진은 어리둥절한 윤의 앞뒤를 살펴보며 어디 다친 데가 없는지 살폈다.
“왜 그래?”
“너 왜 혼자 밖에 나오고 그래?”
갑자기 화를 내는 유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혼자서 나가지 말란 말야.
혼자 나와서 돌아다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야, 집 앞에서 무슨 일이 생겨. 호들갑떨지 말고 어깨나 빌려줘.
다리 저려서 도저히 못 걷겠다.”
“오해산다면서?”
“지금 난 환자니까 괜찮아.”
뻔뻔한 윤의 태도에 유진이 피식 웃었다.
“자, 업혀.”
“업어주게? 고오맙다.”
풀썩 유진의 등에 업힌 윤은 유진의 목덜미에 이마를 댔다.
“너 살 좀 빠졌냐?”
“무겁다고 구박해도 안 내려갈 거야. 진짜로 발 저려서 못 걸어.”
사실은 유진의 온기가 좋았다.
온과 그렇게 싸우고 서운한 차에 유진이 따스하게 대해 줘서 마음이 풀렸다.
친오빠인 온조차 라니를 더 챙기는데
유진은 그 잠깐 사이에 다치지 않았는지 물어봐준다.
늘 오빠들에게 감싸여 살아 몰랐다.
자신을 우선으로 생각해 준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마음 든든한지.
“유진아...”
“응?”
“유진아... 나는 네가 참 좋아. 평생 이렇게 친구로 지내고 싶어.
어렸을 때는 네가 너무 싫었는데. 이상하지? 우리가 언제 이렇게 친해졌을까?”
투정어린 윤의 말에 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가슴을 후벼 파는 소리만 골라서 한다.
‘난 친구같은 거 싫어.’
하지만 차마 맴도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유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