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이별 예행연습
언제나 그렇듯 집 안에서 벌어진 일들은 언제나 그 순간으로 일단락 지어졌다.
이번에는 하연도 먼저 말을 꺼내거나 묻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은 반복적으로 행해졌다.
식사와 산책. 그리고 서로간의 휴식.
민혁의 호출.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하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혀졌다는 사실이었다.
민혁도 하연에게 산책을 요구하지 않았다.
한 달이 꼭 차기 바로 하루 전 날.
잠이 오지 않아 새벽부터 깨어 있던 하연은
자신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가져왔던 가방들을 하나씩 차곡차곡 챙겼다.
옷장에 아직 입지도 않은 새 옷들은 그냥 두고 가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하연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냥 미리 정해진 대로 따르면 그 뿐 이었다.
태엽을 감듯 시간을 뒤로 돌릴 수만 있다면.
처음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그가 인정을 베풀어 주리라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달이라는 시간이
그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날들로 남겨 놓기엔
너무나도 안타깝고 아쉬웠다.
엷은 안개처럼 그의 마음을 둘러싸고 있던 얇은 막이 걷힌다는 느낌이 들자마자
헤어짐을 준비한다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사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민혁을 대하는 것 자체가
하연에게는 무언(無言)의 고문이었다.
사사로운 감정 따위로 치부해 버리기엔 너무나 진실했고 간절한 감정들.
뿌윰하게 밝아오는 새벽빛을 바라보면서 난 지금도 당신 생각을 해요.
제대로 추스를 수조차 없는 만신창이 심장을 가진 당신이 뭐가 좋다고.
당신과 나 사이에 떠다니던 그 공기들은
정말로 하얀 거품처럼 소리 없이 사라져야 하는 건가요?
당신은 그게 될지 모르지만 난 안 그래요.
난 그런 식으로 끝내는 것에 별로 익숙하지 못해요.
어쩌면 나만 시작인 지도 모르지만.
깊은 물 속으로 끊임없이 내 몸이 가라앉는 것 같은 기분.
느낄 수 있어요?
당신은 저절로 전해진다고 그랬죠?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고 온 몸의 세포를 산소 대신 물로 채우면서 가라앉는 날 보면
그냥 놔둘 건가요?
물끄러미 그렇게 메마른 표정으로 바라만 보고 있을 건가요?
손만 내밀어 주면 되는데.
난 이미 준비가 끝났는데.
당신은 손을 내밀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아요.
똑― 똑― 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꿈결처럼 들렸다.
침대 곁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부스스 고개를 든 하연은
잠깐 멍한 정신을 되돌리기 위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까무룩 잠이 들었나보다.
눈물자국이 말라붙어서 눈 밑에 여린 살이 쓰렸다.
하연은 방문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열었다.
“…왔어요…?”
상현은 하연의 말투에 묻어나는 옅은 실망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재빠르게 눈치 챘다.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살짝 고쳐 쓰며
상현은 겉으로 보기에도 슬픔에 잠긴 표정이 역력한 하연의 모습을 살폈다.
“밤낮 없이 선글라스를 쓰시네요.”
“…은테 안경도 씁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무슨 볼 일이라도 있나요?”
“하연씨가 협조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오늘 하루.”
“…미리부터 겁주지 마세요. 제가 협조할 일이 뭐죠?”
“오늘은 저와 함께 지내셔야 할 겁니다.”
“…그런 것도…따로 지시하셨나요?”
이젠 제가 집에 서성이는 것조차 불편하신가보군요, 하는 말은 억지로 삼켰다.
참 매정도 한 사람.
단 하루 남은 것도 빨리 끝을 내고 싶어서 안달이 났나보다.
하연은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서 방문 앞에 섰다.
상현은 속으로 선글라스를 쓰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표정을 감추기엔 선글라스처럼 좋은 게 없었기에.
“…전 곧장 조 비서님을 따라나설 수 있습니다. 가죠.”
“가시죠. 짐은 제가 나중에 빠트리지 않고 챙겨 갈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온 몸의 살갗으로 느낀 어둠마저도 헤어짐을 앞두게 되자 아쉬워졌다.
정신 똑바로 차려!
이곳에서 있었던 모든 시간들이 마법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절대로 울지 마!
집 안을 감싸던 공기들과 민혁의 따스한 손길이 사무치게 그리워 질 것 같았다.
영원히 그 그리움이 달래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야속한 사람!
방에서 나와 보지도 않는 그 사람의 야속함마저도 이렇게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다.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조차 해주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헤어지는 날이 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하연은 민혁의 방문 앞을 지나갈 때
목에 힘을 주고 등을 곧게 펴고, 턱을 앞으로 살짝 내민 채
일정한 보폭으로 지나쳤다.
다행히 민혁의 방 앞에는 약간의 그림자가 있어서
하연의 눈가를 타고 내리는 눈물은 보이지 않았더랬다.
“차에 시동 걸어 놓았습니다. 먼저 나가 계십시오. 전 도련님 좀 잠깐 뵙고 가겠습니다.”
“…알았어요. 그렇게 하죠.”
현관문을 나선 뒤에야 하연의 어깨가 들썩였다.
하연은 몰랐지만 민혁은 커튼 뒤에 숨어서
언제나처럼 하연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늘게 들썩이는 하연의 어깨를 바라보던 민혁은
상현이 방으로 들어오자 가차 없이 커튼을 쳐 버렸다.
촤라락 창문을 덮는 커튼자락을 보면서 상현은 가만히 손바닥에 밴 땀을 닦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던가?”
“예. 아시다시피.”
“…내 원망도 하지 않던가?”
“마음속까지 들여다 볼 수는 없습니다.”
“정리는 끝났고?”
“…네. 벌써 끝내 놓았습니다.”
“그럼 시간이 가기만 기다리면 되겠군.”
민혁의 말처럼 방 안에는 째깍째깍하는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고 있었다.
민혁은 그 속에 뭐가 들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무엇인가에 대한 기대감이 충만한 느낌을 뿜어내며
손가락으로 휠체어 팔걸이를 톡톡 치며 민혁은 눈을 감았다.
상현은 눈을 감은 민혁을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서 조용히 방을 나갔다.
☆★☆
하연은 꼿꼿한 자세로 차 안에 타고 있었다.
눈은 똑바로 앞좌석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꽉 깨문 입술을 통해 감정상태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상현은 운전석에 타면서 하연을 향해 무심하게 말했다.
“오랜만의 외출이군요.”
“…돌아갈 준비를 하는 거겠죠.”
상현은 차갑고 냉정하려 노력하는 하연의 말투를 간단히 한 번에 무너트렸다.
차가운 건 정말이지 그녀에게 지독할 만큼이나 어울리지 않았다.
부르르릉, 차에 시동을 걸며 상현이 말했다.
“도련님께서 하연씨의 뒷모습을 보고 계시더군요. 창문에 서서.”
순간 하연은 전신에서 힘이 쭉 빠져 나갔다.
뻣뻣하게 힘을 주고 있던 몸이 풀리자마자 하연은 두 손을 꽉 맞잡았다.
그 사람이 내 모습을 보고 있었다. 내 뒷모습을.
그런데도 난 그 사람의 눈빛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하연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차는 대문을 빠져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언제나 뒤에서 지켜보는 역할을 맡기로 결심이라도 했나보다.
말없이 등 뒤에 서서 남몰래 지켜보는 사람은 남겨지는 사람인데.
왜 그렇게 아픈 역할만 고집할까.
날 세상 속으로 돌려보낼 예행연습 같은 건 필요 없는데.
단 하루 만이라도 곁에 있어 달라고 말해 줄 수도 있었는데.
마침내 하연의 시야에서 거대한 성처럼 우뚝 서 있는 집이 모습을 감추자
하연의 고개가 아래를 향해 푹 떨구어 졌다.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겠죠, 상현씨.”
“글쎄요. 달라지지 못할 것도 없겠죠.”
상현의 말을 들은 순간 하연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꽉 깍지 낀 손에서 뼈마디가 툭툭 드러났다.
백 분의 일이라도.
하연은 상현의 말에 기대를 걸었다.
의자에서 조금 떨어져 나와 운전석에 바짝 다가간 하연은 조심스레 상현에게 물었다.
“그럼…제가 더 머물게 될 지도 모른다는 소린가요?”
혹시라도 그가 마음을 바꿨을 지도 모른다. 제발. 제발. 한 번만 바뀌어 주길.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어쩌면…이라고 생각하던 하연은 정색을 하며 아니라고 말하는 상현의 태도에 의한 반작용으로
발끈하며 쏘아붙였다.
“상현씨, 정말 나쁜 사람이군요! 사람 감정 갖고 그런 식으로 장난치지 마세요!”
“당연한 일을 혹시나 하는 바램으로 묻지 마십시오.”
“저, 정말…!”
하연은 그냥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무슨 소리를 하든, 어디를 데려가든, 무엇을 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민혁, 당신이란 남자는 정말이지 대단한 사람이에요.
한 번쯤 져줄 법도 한데.
한 번쯤 당신의 예상에서 벗어난 일이 생겨날 법도 한데.
도무지 그럴 여지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나 봐요.
한 번 결정한 걸 되돌리는 게 그토록 힘든 일은 아닐텐데.
내 마음을 그곳에 남겨 놓고 왔는데도 꿈쩍하지 않는 당신이
왜 이렇게 벌써부터 그리워지는지 모르겠어요.
한 번만 져주면 안 되나요?
딱 한 번만 당신의 결정을 되돌릴 생각은 없는 건가요?
전화 한 통화만 하면 된다는 거 나도 그것쯤은 알고 있는데.
“…히터 좀 켜주세요.”
“이…더운 여름에 말입니까?”
“네. 에어컨 꺼주시고 히터 좀 켜주세요.”
“…진하연씨, 정말…진심으로 히터를 켜달라는 말씀입니까?”
“다시 말할까요? 히터 좀 켜 주세요. 상현씨 눈엔…제가 이렇게 떨고 있는 게 보이지 않나봐요?”
잠깐 신호에 걸려 차가 정지했을 때,
상현은 선글라스를 코 밑까지 내리고 백미러를 통해 하연의 모습을 보았다.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눈으로 덜덜 떨고 있는 하연.
선글라스를 다시 쓰고 히터를 켠 상현은 가만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것 보십시오, 도련님. 하연씨가 이렇게 힘들어하지 않습니까.
이제 겨우 한 시간 남짓 지났을 뿐인데도 말입니다.
도련님 그러다가 정말로 벌 받습니다.
인정사정없이 하시다간 정말로 벌을 받을 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더구나 원망 한 마디 입에 담지 않는 천사를 아프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전 모릅니다.
나중에 저까지 끌고 들어가실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전 정말 모릅니다.
“…사람이네요. 사람들이 길을 걷고 있어요.”
“예? 방금 뭐라고…?”
“사람들이 길을 걷고 있어요. 참…오랜만이네요.”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었으니까요. 핸드폰은 내일 돌려드릴 겁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 하나도 알지 못한 채 그냥 끝나는 거네요.
그 긴 시간 동안. 아무것도 알아낸 게 없어요. 그 사람에 대해서도, 그 어떤 것도 말이에요.”
“30분만 기다리십시오. 정확히 30분 뒤에 우울한 기분이 좀 나아질 겁니다.”
하연은 차창 밖에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늘 그렇듯 팔짱을 끼고, 어깨를 감싸 안고, 손을 잡고 걸어가는 평범한 사람들.
교복을 입고 아이스크림을 먹는 학생들과 유모차를 끌고 가는 엄마들의 모습.
이런 평범함도 없고, 활기도 없고, 있는 것이라고는
어둠과 우울함, 그리고 비밀 투성인 그곳이 왜 자꾸만 머릿속에 빙빙 도는 걸까.
한 달이라는 기간은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을 수도 있는 시간인데.
그 시간이 결코 짧지는 않았나보다고 하연은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길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토록 낯설 수는 없을 테니까.
“내리시죠.”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상현이 말했다.
어두컴컴한 주차장안을 아무리 둘러봐도 이곳이 어딘지
주차장 풍경만 가지고는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하연은 문을 열고 내리면서 상현에게 물었다.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서.
“…여기가 어디죠?”
“가시죠. 이 쪽으로 오십시오. 곧장 연결되는 옥외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죠.”
하연은 말 잘 듣는 인형처럼 상현이 손짓하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런 하연의 심정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상현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면서 짤막하게 일러두었다.
“아직 기간만료는 남았습니다. 오늘도 그 기간 중 하루라는 것을 기억하시죠.”
“…이곳이 어딘지도 모르는데요, 전? 어쨌든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기억하고 있을께요.”
이런이런. 이렇게 살짝 비껴나가는 취미가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상현은 3이라고 쓰인 버튼을 꾹 눌렀고 스르륵,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뒤
위이잉 하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지하 4층 주차장에서 3층까지는 금방 도착했다.
땡 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입구에서부터 알쏭달쏭한 곳이 나타났다.
유리문 앞에 선 하연이 머뭇거리자 상현은 살짝 손을 뻗어 하연을 독촉했다.
“대체 여기가 어딘데요? 적어도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는 해줘야 하는 거잖아요!”
“…들어가 보시면 압니다. 들어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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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인터넷이 말썽을 부려서 이제서야 글 올립니다.
늦은 밤 들어오셨다 그냥 가신 분들, 넘넘 죄송합니다..^^
어제 오전에 엄청난 비가 내렸거든요. 천둥, 번개...어마어마 했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더웠어요. ㅋㅋ
월요일, 힘차게 시작하시길...*^^* 또 한 주가 시작 되었습니다~!
아쟈! 를 외치며 열심히 하루를 보내려는 미강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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