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적절한 남자(24)
오후가 되서야 수요일이란 생각이 들었고 매주 월수금마다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던 엄마가 전화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전화를 해볼까 하다가 다른 일이 있겠지 싶어서 하지 않았다. 그리고 현아와 민석이 잘지내는지도 궁금해졌다. 계속 내 문제에만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닌지 나름대로 반성도 해보았다.
텔레파시였는지 그런 생각을 떠올린지 얼마 되지 않아 민석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민아야. 여기 병원인데 와주라. 현아가..."
현아가?
"어제 밤부터 배가 아프다고 해서 산부인과 왔는데..."
"무슨 일인데?"
"아무래도 너한텐 연락을 해야할 것 같아서..."
"현아는?"
"일단 입원하라고 해서 병실에 있어."
"알았어. 병원이 어딘데?"
나는 민석에게 병원의 이름과 위치를 듣고 불길한 느낌으로 택시를 탔다.
지금 현아의 상태에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임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리라...
엄마는 알고 있을까?
아니면 내가 엄마한테 알려야할까?
어쩌면 임신 후의 민석과 동거 생활이 스트레스가 된 것은 아닐까?
많은 걱정과 불안감 그리고 추측들이 내 머리속을 맴돌았다.
병원에 도착하자 나는 병실을 묻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민석에게 전화해서 병실을 확인했다.
내가 병실에 도착했을 때 현아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나는 일단 민석과 병실을 나와 복도의 의자에 앉아서 물었다.
"어떻게 된거야?"
"아무 이상 없이 밥도 잘 먹고 잘 지내는 거 같았는데 어제인가 하혈이 심하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아침에 병원에 왔는데 의시가 좀 기다려보자고 하면서 입원하라고 해서 말야."
민석의 걱정스런 표정을 보며 병원에 오기 전까지 민석을 원망하던 마음은 사라졌다. 아직이겠지만 그래도 민석은 이제는 친구가 아니라 가족이 되는 셈이었다. 그리고 현아가 엄마나 나보다 더 의지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번 일이 어찌되든 둘이 빨리 결혼해라. 내가 엄마랑 아빠를 설득해볼게.."
"그러게...나도 이번에 느꼈지만 결혼은 아무리 형식이라고 해도 필요한 것 같아. 산부인과에서 보호자란에 적어야 하는데 남편이 아니니까 좀 그렇더라고..."
민석이 이렇게 듬직하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그저 과동료로 마음이 통하는 친구 정도로만 생각했다. 남자친구 문제를 의논하기도 했지만 그게 민석을 의지하는 마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젠 현아의 문제라면 나보다 민석이 더 잘해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정과 사랑의 차이일까...민석은 나에게 친한 친구일 뿐이지만 현아에겐 인생의 동반자일 것이다. 그래서 민석은 현아에게 헌신적이고 무조건적인 애정을 쏟을 수 있으리라...
그럼 나는 누구에게 의지를 하고 나를 의지할 사람은 누구인가?
길을 걷다 지치면 주저 앉아 울면서 힘들다고 말할 수 있고 혹은 무거운 짐을 지고 걷다가 무거우니 잠시 들어달라 말하고 혹은 나보다 앞서 걷고 있으면 잠시 기다려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지금까지 혼자였던 거 같다. 길을 걷다 지쳐도 혼자 잠시 주저 앉아 있었고, 무거운 짐이 있으면 그냥 혼자 조용히 내려놨었고, 앞에서 걷고 있는 사람은 불러 세우면 안된다고 생각했었다.
나에게 정훈이 그런 존재가 되어줄까? 아니면 내가 정훈에게 그렇게 의지할 수 있을까?
아니면 영원히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없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사람을 만나 그럴 수 있도록 애정을 주고 받아야 하는 걸까...
모르겠다.
그저 민석과 현아가 부럽단 생각이 들었다. 서로가 사랑한다면 고통은 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다시 병실에 들어갔을 때 현아는 깨어 있었다.
"언니, 왔네."
"응. 괜찮아?"
"아니..아직도 배가 많이 아픈데..."
언제였던가, 현아가 학교 가기 전이었던 것 같은데 엄마 아빠가 집을 비웠을 때였다. 현아가 학교 운동장에서 놀다가 넘어져 무릎이 깨졌다고 현아친구가 집으로 왔던 적이 있었다. 나는 놀라서 학교 운동장으로 갔고 한 구석에서 울고 있는 현아를 발견했다. 나는 준비해간 빨간약과 솜으로 간단 처치를 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무슨 효과가 있을까 싶었지만 현아는 금방 눈물을 그치고는 벌떡 일어나서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날 엄마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래도 큰 딸이라 틀리네..민아가 없었으면 현아가 큰 일 날뻔했어.."
나는 그런 말을 듣고 뿌듯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엄마가 칭찬을 해준 것이기도 하지만 내게 책임의식을 심어준 게 아닌가 싶었다. 형제는 그렇게 의지하고 사는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려 했던 것인지도...내가 아니라 누구의 형이나 언니라도 했을 일일 것이다.
"어떡하냐..의사라도 불러야 하는 거 아냐?"
"아침까지 기다려보지..뭐. 여기 산부인과라 밤에 애낳는 사람들 때문에 나같은 가벼운 환자는 봐줄 여유도 없을 거야."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현아가 잠시 아픈 것이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민석오빠 있으니까 언니는 집에 가...내일 출근도 해야 하잖아."
현아는 오히려 날 걱정해주며 그렇게 말했다.
생각해보니 어제 외박하느라고 옷을 갈아입지 못한 상태였다. 오늘은 집에 들어가서 옷이라도 갈아입어야 했다.
민석에게 현아를 잘 부탁한다고 하고 아침에라도 무슨 일있으면 전화하라고 하고 병원을 나왔다.
병원을 나오면서 전화를 보았더니 정훈에게서 걸려온 전화가 몇 통 있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무음으로 해놓았고 정신이 없어서 핸드폰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다시 정훈에게 전화를 했으나 핸드폰이 꺼져 있었다. 잠시 왜일까 생각해 보았다. 어디에 있길래 핸드폰을 꺼놓은 걸까, 아니면 밧데리가 없는 걸까...
역시 정훈에게 마음이 많이 가 있는 것 같았다. 받지 않은 전화 한통에 대해서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정훈에게 전화 한통을 더 해봤지만 역시 꺼져 있었다. 그냥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전화는 켜져 있기도 하지만 꺼져 있기도 하는 것이니까...
하루를 집을 비웠을 뿐인데 꽤 오랜만에 집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현수는 여전히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인터넷으로 봤는데 애완동물 전용 장례식장하고 무덤 같은 게 있었네요."
현수는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여전히 레종의 상실감이 큰 듯했다. 내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의사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레종의 처분을 맡겼었다. 아무래도 그게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그래요?"
"네..국내 최초래요. 진작 알아둘 걸...레종을 키우면서 죽을 거라는 생각은 한번도 안해봤는데..."
어디 애완동물 뿐이랴...사랑을 하면서도 끝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현아때문이라도 더 이상 우울한 얘기는 하기 싫었다.
"근데 남자친구랑 외박??"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현수는 화제를 돌렸다. 돌린 화제치고는 얘기가 이어질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평소 거짓말을 쉽게 못하는 성격탓인지 바로 아니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맞구나....부러워요....난 애인이 있었던 때가 기억도 안나네요."
"왜요? 그렇게 인기 없어 보이지도 않는데..."
라고 말을 하고 나니 처음 현수를 만났을 때, 대한민국 여자란...이란 소리를 해서 기분 나빴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쩌면 현수는 무의식적으로 여자들에게 반감을 사는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긴..여자들 앞에서 여자들이란...이런 소리 하면 안돼요."
"아..그 때요? 그 땐 좀 나도 기분 나빠서 그랬어요. 전 최소한 자신의 처한 상황이 타의든 자의든 진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첫 눈에 민아씨가 선보기 싫어서 억지로 나온 건 알았는데 나한테 너무 도전적으로 대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수의 말대로 그랬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서로가 잘 모르는 상태에서 몇 마디 대화로 서로가 서로를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현수가 여자에 대해 보수적인 사람이고 현수는 내가 너무 도전적인 사교자세를 갖고 있다고...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현수와 함께 지내면서 그런 오해는 약간 풀어진 것도 같았다.
그러나 언제 현수와 나의 관계는 정리될 수 있을 것인가, 현수에게 일을 구했냐고 묻고 싶었지만 웬지 재촉하는 것 같아 그만 말하지 않았다.
"아...참 몇 군데 이력서 넣었는데 연락온 데가 있네요. 이런 불경기에..."
현수는 어느 새 내 마음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인지 내가 궁금해하는 것을 말해주었다.
"네...좋은 소식 있겠죠. 중국어도 잘하고 영어도 잘하시니까요."
나는 그렇게 위로를 해주고 이만 자야겠다고 말했다. 그냥 이것저것 생각 많고 몸은 나른한 밤이 될 것 같지만 잠을 좀 자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클릭, 시기적절한 남자 (25편)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