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적절한 남자(26)
난 버릇대로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로 나름대로 프로필을 추정하고 있었다.
정훈의 여동생이라면 난 목소리를 기억한다. 일단 제외.
더구나 나이는 20대 중후반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억지 추측이지만 어머니라는 것도 제외.
거기다 당당하다. 애써 친절하게 말하고 있지만 나에게 전화가 걸 이유가 있다는 말투다. 정훈에게 빚이라도 있는 여자일까?
그건 말도 안된다. 난 가족도 아니고 거기다 만난지 일주일도 안되는데 추정해서 전화가 올 일도 없다.
결론은 거의 정훈의 애인쯤 된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난 모른다고 해야하나? 아니면 안다고 해야 하나?
일단 시치미를 떼고 정훈에게 물어볼 수도 있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할 이유도 모르겠다.
내가 유부남과 바람을 핀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저 옛날 애인이 다시 만나자고 찾아왔고 데이트를 몇 번 했을 뿐이다.
지금이라도 아무 관계가 아닌 상태로 돌릴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거기다 난 거짓말을 못한다.
인정하고 부딪혀 보자 생각했다.
"네. 아는 사람이에요."
"제가 알기론 예전에 사귀었던 사이로 아는데요."
여자는 굉장히 정확한 정보를 알고 있는 듯했다. 정보면에선 내가 불리하다 싶었다. 거기다 정훈이 나와 헤어지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그저 알만한 직장에 취직했다는 것 외에는...사실은 사실이니까 예전에 사귀었다는 사실도 인정하기로 했다.
"네..."
"요즘에 만나셨나봐요."
나도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누구길래 정훈과 해결하지 나에게까지 전화를 걸어 일방적으로 공격을 해대는 것일까.
"네..."
난 그렇게 대답하고 여자의 반응을 기대했다.
"별거중이란 사실을 아셨나요?"
이건 분명히 뒷통수다. 정훈이 결혼을 했고 별거중이라고? 전혀 들은바도 없고 추측하게 만든 것도 없다. 내가 그렇게 감이 둔한 사람인가? 그러고 보니 지난 번에 미사리에 갈 때 여자 이름인 '김미라'로 전화가 왔던 것이 기억났다. 어떻게 그런 기억은 이렇게 정확하게 기억나는지...
"아뇨..전혀..."
"네..그러셨겠지요..그걸 알고 만나셨을 거라고는 생각 안해요."
나의 솔직한 놀람이 전해졌는지 여자는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바로 욕설이라도 튀어나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여자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이해한 것 같았다.
나는 다음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놓인 상황이 삼각관계 이상이란 것밖에는...정훈과 나는 결국 악연에 지나지 않는 걸까?
사랑의 상처와 재회의 상처에...도대체 언제까지 나에게 상처만 주는 걸까...
"갑자기 연락이 와서요...."
변명 같아 보이는 말로 대답했다.
정말로 아무 것도 몰랐다. 나와 헤어진 3년 동안 다른 여자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것은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이지만 결혼을 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남자들 첫사랑 못잊고 그런 거 저도 알아요."
여자는 거의 울듯한 목소리다. 정훈이 미워졌다. 왜 이렇게 두 여자를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만드는 걸까. 왜 나를 다시 찾아와서 다시 만나자고 한 걸까...
"저도 이혼 생각했는데 별거 중에 알았는데 임신을 해서..."
정말 이제 그만 듣고 싶었다. 정훈의 부인인 그 여자에게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얼마나 진부한 얘기인가....결혼을 해서 부부관계가 안좋아 별거를 했고 나중에 임신한 사실을 알았다, 그건 소설에서도 쓰이지 못할 진부한 상황이다.
그리고 난 그 상황에 내가 엮여 있다는 것이 끔찍하게 싫었다.
"네..다시 정훈씨 안만날 거에요. 걱정 마세요."
난 그렇게 대답했다. 더 이상 그 여자에게 적대감을 느낄 것도 없었다. 정훈은 나에게 과거였을 뿐이다. 다시 나타난 것은 꿈에 나타난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훈은 아마도 옛사랑이 그리웠을 테고 다른 사람과 다르게 다시 만나는 용기를 내었을지도 모른다.
정훈도 정훈의 부인도 다 이해가 간다.
그러나 정작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내 자신이다. 왜 이런 얘길 들으며 가슴 아파하고 있는 걸까...그리고 정훈에게 말할 수 없는 원망이 드는 걸까...
정훈과 다시 만나 가슴 설레이고 그리고 다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할지도 모른다는 은밀한 기대를 했던 내 자신이 밉기만 했다.
그래...이건 사랑도 연애도 로맨스도 아닌 그저 해프닝이다. 그저 갑자기 찾아온 홍수 같은 사건일 뿐이다. 홍수가 지나가면 물을 빼내고 다시 원상복구 노력을 해야 한다. 홍수는 일상적인 일이 절대 아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내 자신도 싫었다.
사랑이라면, 진짜 사랑이라면 나 그 사람 사랑하니 당신이 포기하라고 말해야 하는 거 아닐까? 별거한다면 이미 끝난 사랑 아니냐고 나 그 사람하고 함께 있고 싶다고 권리 주장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왜 난 아무 것도 못하고 그 여자의 입장을 이해하는 마음까지 가지면서 이렇게 비참해져야 하는 걸까?
"그럼 실례했습니다. 민아씨 결혼 전부터 궁금했어요."
여자는 묘한 여운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남긴 그 여자의 번호를 다시 보았다. 뒷자리 번호가 0815다. 정훈의 뒷번호와 같았다. 웃긴 건 0815는 내 생일이다. 정훈은 내 생일로 뒷번호를 썼고 그 여자도 정훈과 함께 뒷번호를 0815로 썼나보다.
다른 건 그 여자가 다 알아도 전화번호의 사연만은 모르기를 바랬다.
정훈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 걸까?
현재 꼭 한번 다시 만나고 싶은 과거의 사랑?
그럼 나에게 정훈은 무엇일까?
감정적인 해답은 없지만 이성적인 대답은 있다.
정훈은 유부남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정훈에게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정훈에게 전화를 해볼까 하다가 말았다. 부인과 함께 있을지도 모르고 내가 다시 연락하는 것은 기름통을 안고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뿐만이 아니라 3사람이 한꺼번에 불에 타 죽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인생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일까?
늘 예상할 수 없는 사건들에 부딪혀 자신의 무능력함 왜소함 억울함을 느끼게 만드는 걸까?
머리속과 마음 속엔 전부 물음표로만 도배되어 있는 것 같았다.
아무런 해답도 없는데 몸은 움직여야 하는 상황일지도 몰랐다.
퇴근 시간이 지나서도 멍하니 있는데 현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민아씨...어쨌든 위기는 넘겼습니다만 상의할 일이 있어서요. 오늘 집에 언제쯤 돌아오시나요?"
그렇다. 나에겐 해결할 문제가 또 있었다.
특별히 다른 할 일도 없고 내 주위의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지금 들어갈게요."
"저녁 안드셨죠? 그럼 제가 마지막 저녁이라도..."
마지막 저녁이란 말에 난 모든 상황이 짐작되었다. 그래도 대화를 하며 마무리를 할 수 있다는 건 좀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훈은 대화도 없이 이대로 떠나 보내야 할 것이다.
오피스텔에 도착했을 땐 카레 냄새가 온 집안에 배어 있었다.
"할 줄 아는 게 카레 밖에 없어서요...."
현수는 멋적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괜찮아요."
사건의 연속 속에서도 배는 고팠다. 지금은 독약이 들어 있다 해도 아무 거라도 먹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막상 현수가 카레와 밥이 담긴 접시를 내 앞에 놓았을 때 입맛은 사라져 버렸다. 겨우 몇 숟가락을 뜨다가 내려놓고 말았다.
"왜요? 맛없어요?"
"아뇨. 입맛이 없어요."
"이런...아침에 충격이 컸나봐요?"
충격...맞다. 그 말이 왜 이제야 생각난 걸까...충격의 연속이었다.
"네..뭐..."
"어떻게 됐어요?"
"나름대로 선택이 있어요."
선택이라고? 선택이라는 게 나한테 남이 있었나 싶었다.
"뭔데요?"
"3천만원을 받고 이 집을 나가느냐, 아님 제가 나가느냐..."
나에겐 후자가 유리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아버지가 그러시더라고요. 아무리 돈 때문이라도 젊은 남녀가 동거하는 꼴은 못본다. 3천만원을 아버지가 마련해주거나 아니면 나더러 집으로 돌아오래요."
후자가 유리한 것이 아니라 애매한 상황이다. 거기다 3천만원을 보증금으로 둔다면 월세를 내야 한다. 현재 레종도 없지 않은가? 현수에게 월세까지 내지 않겠다고 말할 이유도 없었다.
돈만 생각하자면 내가 3천만원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나아 보이기도 했다.
"아버진 당장 해결하라고 했지만 제가 잘 말씀드려서 내일 아침까지는 결정하겠다고 했어요."
내일 아침까지 결정을...전화 한통으로 이별을 결심한 정훈과의 관계보단 시간이 있는 것일까...
"남자 친구 있으니까 뭐 곧 결혼하면 그렇게 바라는 독립도 멋있게 합법적 동거가 될 거에요."
남자 친구?
정훈이 나를 위로한다고 한 말에 나는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아무리 관계 없는 남자라고 해도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나는 황급히 식탁에서 일어났다. 좁은 원룸에서 어디 숨을 곳도 없었다. 그냥 뒤돌아서서 눈물을 닦을 수밖에 없었다.
"왜요? 요새 행복해 보이던데..."
행복에도 진실과 거짓이 있다. 그건 거짓 행복이었다.
현수의 그 말에 난 더 눈물이 쏟아졌다. 울고 싶었다. 실컷.
기댈 사람이 없더라도 혼자 울고 싶었다.
이런 게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인가...
내가 원하던 사랑, 그리고 독립의 공간...어느 하나 남은 것이 없었다.
지구밖으로 밀려난 기분이었다.
"남자친구랑 잘 안됐어요? 내가 괜한 말을 했네..."
현수는 내 눈물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 듯했다.
"이런...나 처음 만나서 화 내던 강한 모습은 어디 간 거에요? 하도 당당하길래 숨겨 놓은 애인이 10명쯤 있는 줄 알았는데.."
놀리는 것인지 위로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현수는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만 울고 내 얘기 들어봐요."
현수는 나에게 티슈를 건네주었다.
"나요..나도 참 우울해요. 30살이 넘어 도전했던 일이 물거품 되고 애인도 없고 그나마 마음을 주던 레종도 죽었어요. 거기다 원래 내 집에 더부살이도 하게 됐고요. 근데요. 난데 없는 승부욕이 생기는 거에요. 그 전까진 세상이 나한테 우호적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세상은 날 도와주고 있다. 그런데 이젠 세상이 날 방해하는 것 같아요. 난 선택해야 했지요. 날 방해하는 세상에 지느냐, 아님 싸우느냐...싸우기로 했어요. 세상 살면서 협력하는 것도 배워야 하지만 싸우는 것도 배워야 하는 것 같아요. 내가 그래도 민아씨보단 몇 년 더 살았죠? 인생 선배라 생각하고 들으세요."
세상과 싸워야 한다고?
난 이미 정훈과의 사랑에 져버린 패배자인데...도대체 무엇과 싸워야 한단 말인가...
세상의 도전에 난 백기를 들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인생 뭐 별거 있나요? 지금 나이면 둘 중 하나에요. 싱글이거나 결혼해서 애가 있거나...그런데 웃긴 건 그것도 자기가 선택한 것 같지도 않은 억울함이 있다는 거죠. 하지만 억울하다고 생각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그냥 주저 앉아 버리는 수밖에...근데 주저앉기에도 인생은 별 거 없어요. 뭐 대단한 거라고 포기하나요?"
어느 새 눈물이 그쳐 가고 있었다.
"민아씨가 원하는 대로 할 게요. 여기 있고 싶음 제가 나가고요. 민아씨가 나가고 싶음 나가세요. 레종 때 도와줬던 선물이에요."
"네..."
현수는 설거지를 하겠다고 일어섰다. 한참 동안 오피스텔에는 현수가 설거지하는 물소리와 그릇닦는 소리만 들렸다. 설거지하는 남자의 뒷모습이 참으로 편안해 보였다.
그냥 잠시 이 편안함 속에 머물고 싶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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