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외계인은 싫어!
“아, 집에 오니까 좀 살 거 같아.”
“응, 지난 며칠간은 너무 길었다.”
“세진 오빠 정말로 유학간 거야? 인사도 없이?”
“의외로 독한 데가 있으니까.”
“그래도 서운하다.”
“잘 살 거야, 세진이는.”
아이스크림을 물고 거리를 걸으며
윤과 유진은 폭풍처럼 지나간 며칠을 애써 지우려 했다.
윤은 생각도 하기 싫은 모양인지 아예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평소 같으면 수상하다며 납득이 갈 때까지 캐물을 텐데 다행이다 싶은 유진이었다.
그러나 실상 윤은 요즘 자꾸 떠오르는 이상한 기억 때문에
거기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는 것뿐이었다.
유진이 다친 날부터 계속 이상한 백일몽이 눈앞을 스쳐가는 바람에
하루에도 몇 번씩 현기증이 났다.
하지도 않은 일들이 또렷하게 기억나는가 하면 가 보지 않은 장소에서
자신과 유진이 웃는 모습도 떠오르는 것이다.
윤은 스스로 미친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어? 누나!”
저만치서 뛰어오는 아이를 보며 윤은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딘지 기억이 날 듯한 아이다.
“아저씨도 같이 있네.”
입술을 삐죽거리는 꼬마에게 유진이 인사를 했다.
“하운이였지? 오랜만이네. 그 동안 많이 컸는걸.”
“하운이?”
“왜, 전에 너랑 같이 집 찾아준...”
헛, 하고 입을 다무는 유진을 수상하게 바라보다 윤은 하운에게로 눈을 돌렸다.
“오랜만이다. 혼자 멀리 나오면 안 된다고 그랬는데... ”
“응, 오늘은 엄마랑 같이 나왔어.”
하운이가 가리키는 방향에 서 있던 여자가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한 눈에 보기에도 아이랑 많이 닮은 모습이었다.
하운이 다시 엄마한테로 뛰어가는 모습을 보며 윤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
두통이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윤은 잠에서 깨어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오늘 그 애... 분명히 아는 애였어. 희미하게 기억이 나는데... 어디서 봤는지를 모르겠어.”
그 아이뿐이 아니다.
언뜻언뜻 스치는 장면에 유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윤은 그것이 언제였는지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어디가 어떻게 됐나봐.”
윤은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에 턱을 괴고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
“유진아!”
유진의 방에 들어간 윤은 빈 방을 둘러보다가 혀를 찼다.
“아무튼... 문 좀 열어놓고 다니지 말란 말야. 이러다 큰일나지, 정말.
세진 오빠도 없는데 문단속이나 잘 하고 살 것이지.”
윤은 유진의 책상에 앉아 펼쳐진 책을 넘겨보았다.
“온통 영어네. 쳇, 의대생이다 이거지? 이게 뭐지?”
책을 덮은 윤은 그 아래에서 깨진 목걸이를 발견했다.
“이거... 설마...”
윤은 목에 걸린 목걸이를 풀어 그것과 대조해봤다.
“똑같아... 내가 언제 유진이랑 같은 목걸이를 샀지?”
-정말 예쁘다... 고마워.
-내 목걸이! 미안해... 평생 소중하게 간직하겠다고 해 놓고...
-우리 이걸로 연결되어 있는 거니까...
-빨리 와... 보고 싶어.
꼬리를 물고 스쳐가는 장면들... 윤은 극심한 두통에 머리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그 와중에도 하나둘씩 떠오르는 기억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봇물이 터지듯 밀려오는 기억들... 그 가운데 있었던 자신의 모습.
윤은 눈을 감았다.
“윤아! 왜 그래? 윤아! 정신차려, 윤아!”
유진은 윤을 안아 일으키다가 윤이의 손에 들린 두 개의 목걸이를 보았다.
“설마... ”
떠오른 생각에 유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윤을 침대에 눕힌 유진은 다급하게 에이피를 불렀다.
“에이피, MIB를 연결해라!”
-연결되었습니다. 직접 통화하시겠습니까?
화면이 몇번 깜빡거리더니 관장의 얼굴이 나타났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기억을 지우는 약에 대해서 알고 싶소!”
-무슨 문제라도?
“윤이가 요즘 계속 두통으로 쓰러져.
아무리 봐도 평범한 두통이 아닌 것 같아서 묻는 거요. 부작용이 있는 거요?”
-부작용은 없습니다만... 만일 지워진 기억 속의 상대와 같이 있다면
기억에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최초의 전제인 유진님의 정체가 외계인이라는 사실은
가장 밑바닥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무시하려고 하는데
이후의 일들이 떠오르면 극심한 혼란상태가 될 겁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더 이상 대상을 만나지 않는 것입니다.”
“만나지 않는 게 좋다고?”
-그렇습니다.
“그 말은... 나를 보면 계속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거요?”
-유감입니다.
유진은 멍하니 윤을 돌아보았다.
자면서도 머리가 아픈지 움찔거리는 모습이 가엽기 그지없었다.
“나를 만나면... 안 되는 거래. 하지만...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어... 그럴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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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윤 곁에서 유진은 생전 처음으로 손을 모아 기도했다.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그저 마음을 다 해서 빌고 또 빌었다.
“왜? 나는 윤이랑 못 헤어져. 윤이가 없는 삶은 생각도 안 해봤는데...
윤이가 있어서 지구를 택한 거야. 그런데 왜 내가 윤이를 만나면 안 돼?
제발 그러지 마. 가슴이 아파서 죽을 것 같아. 그런 잔인한 말 듣고 싶지 않았어.”
윤의 손에 얼굴을 묻고 유진은 흐느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경험은 한번으로 족한데 왜 또 그런 기분을 느껴야 한단 말인가.
윤이를 두고 화성으로 떠나던 때, 유진이 바란 것은 단 하나였다.
이제야 겨우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윤아... 우리는 왜 이러냐? 너랑 나, 지독하게도 악연인가 봐.
이렇게 사랑하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걸까?
너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도 줄 수 있는데...
뭐든 다 내놓아도 너만 있으면 되는데... 그걸로는 부족한 걸까?
다 줘도 좋으니까 네 곁에만 있으면 좋았는데...”
“유진아...”
유진은 급하게 눈물을 닦았다.
“어, 일어났어?”
“나 어떻게 된 거야?”
“또 쓰러졌어. 요즘 너 몸이 허한가보다. 한이 형한테 보약이라도 지어 달래야겠어.”
“됐어. 그냥 현기증인데 뭐.”
“윤아...”
일어나려던 윤은 유진의 무게때문에 다시 누워버렸다.
윤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유진은 이를 악물어 눈물을 감췄다.
“왜 이래? 무슨 일 있어? 유진아?”
가슴에 안긴 유진의 머리를 쓰다듬던 윤이 손을 멈췄다.
유진의 얼굴이 있는 쪽에서 미지근한 감촉이 느껴졌다.
“너 우니? 우는 거야? 왜 그래?”
“울기는 누가... 침이야.”
“에, 드러워! 얼른 비켜!”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윤은 다시 유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울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냥 모른 척 해 줄 생각이었다.
‘유진아... 나 기억났어. 너랑 나, 엄청 연애했더라.
왜 그 좋은 것들을 잊고 있었을까? 너, 엄청 귀엽던데.
내가 기억 못해서 그동안 속상했겠어.
근데 말이지... 아직도 희미한 게 몇 개 있어.
이가 빠진 것처럼 점점이 뚫린 기억 때문에 아직도 그게 다 꿈인 것 같아.’
“윤아...”
“응.”
“사랑해.”
“나도 사랑해.”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어. 더 이상 시간이 흐르지 않고 멈춰버렸으면.”
‘너랑 헤어지는 일 없이... 그냥 이대로...’
**
“세진형!”
한은 집으로 돌아오다가 놀라 멈춰 섰다.
거의 거지꼴이 된 세진이 한을 보고 멋쩍게 웃는다.
“꼴이 그게 뭐야?”
“그렇게 됐어.”
“유진이 집에 있을 텐데.”
“유진님한테는 말하지 말고 며칠만 지내게 해 줄래?”
“하지만 유진이 거의 우리 집에서 사는걸.
유진이가 알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거야?”
“물론 있지.”
세진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그 모습이 얼마나 처절했던지 한이 한걸음 뒤로 물러날 정도였다.
“일단 들어와. 유진이는 구실을 대서 못 오게 할게.”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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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그래서 도망쳐 온 거란 말이야?”
“난 유진님이 날 팔아넘길 줄은 정말 몰랐어.”
따뜻한 우유잔을 손으로 쥐고 우울하게 말하는 세진의 모습에 한이 내심 한숨을 쉬었다.
‘나라고 해도 그랬을 테지만... 충격이 컸나보군.
하지만 이렇게 되면 유진이가 다시 화성에 끌려가야 하는 거 아니야? 안 되는데...’
“오빠, 나 왔어. 어? 세진 오빠? 오빠, 유학갔다더니...”
“응, 사정이 좀 있어서.”
“우와, 반가워! 난 오빠가 말도 없이 가버려서 얼마나 서운했다고. 그것도 그런 난리통에.”
“고맙다...”
세진은 코를 훌쩍였다.
그래도 가족같이 지냈다고 반가워해주는 윤의 식구들이 너무 고마웠다.
세진을 팔아 치우려던 누구와는 아주 대조되게 말이다.
“유진이한테 언제까지 비밀로 할 수도 없는 일인데 그냥 불러서 이야기를 해보지 그래?”
“무슨 소리야? 유진이한테 왜 비밀로 해?”
“어? 그, 그게... ”
“유진이가 오빠한테 뭐 잘못했어?”
“잘못이야 크게 했지.”
이죽거리는 한의 말에 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지 마. 유진이 요즘 힘든가봐. 아까도 울었단 말이야.”
“왜?”
“모르겠어. 참, 오빠. 나 요즘 좀 이상한데... 나랑 유진이 사귄 거 맞지?”
“윤아, 너 혹시 기억이?”
한은 입에서 불을 토할 정도로 놀랐다.
세진 역시 눈알이 빠져나올 것 같은 모습으로 윤을 바라보았다.
“오빠도 알고 있었어? 나 요즘 계속 이상한 장면들이 떠올라서...
난 내가 미친 줄 알았지 뭐야.”
오랜만에 마음이 밝아진 윤이었다.
“근데 내가 어떻게 됐었던 거야? 나, 기억상실이나 그런 거였어?
근데 참, 이상하게 나, 유진이랑 있었던 거 말고는 다른 건 다 생각나는걸.
그래서 난 내가 진짜 이상해진 줄 알았지 뭐야. 휴우, 아니라니 정말 다행이야.”
윤이 말에 한과 세진이 모두 입을 떡 벌렸다.
“내 동생이 대단한 줄은 알았지만...”
“해약도 없고 완벽한 성능을 자랑한다더니...”
“응? 무슨 말하는 거야?”
“아, 아무 것도 아니야.”
어떤 의미로는 가장 대단한 것은 윤일 거라고 생각해 버리는 한과 세진이었다.
**
그날 저녁. 유진은 초조하게 세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화가 단단히 난 세진은 팔짱을 끼고 돌아앉은 채 유진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저기, 세진아...”
“흥!”
“그게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흥! 어쩔 수 없긴. 편하려고 날 팔아치워 놓고서.”
“뭐, 사실이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가는 것보단 낫잖아.”
“뭐라구요?”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는 세진에게 기가 죽은 유진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아니... 미안하다고...”
“이대로 내가 갔으면 유진님은 좋았겠죠? 흥, 못 그래줘서 미안하군요!”
“야, 이렇게까지 하면 좀 풀어라. 진짜로 끌려간 것도 아니고 도망쳤잖아!
이제 우리는 힘을 합쳐서 다음 방법을 생각해야 한단 말이야.”
“지금 누가 누구한테 화를 내는 거야?
그리고! 너 왜 계속 반말이야! 따지고 보면 너 내 조카뻘이야.
내가 언제까지 네 보좌인줄 알아?”
“그, 그게... 미안하다니까...”
유진과 세진이 싸우는 것을 구경하다가 윤이 온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왠만한 스포츠보다 더 재미있는 구경에 정신이 팔린 온은 그만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저기 오빠... 대체 어디를 간다 안 간다 싸우는 거야?”
“응? 어디긴 어디야, 화성이지.”
“화성? 경기도 화성?”
“장난하냐. 금성, 목성, 토성, 화성 할 때 화성 말이야.”
“거길 왜 가는데?”
“그거야 화성인이니까 화성에 가지.”
“뭐? 화성인?!”
네 쌍의 눈동자가 일제히 윤을 향했다.
윤은 몸을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유진을 가리켰다.
“화성인? 외계인?”
“유, 윤아...”
“내가 외계인을 좋아한다는 거야?”
“윤아...”
“아아아아악! 싫어어어어어어어~!”
epilogue.
처절한 온의 비명을 배경음악으로 윤의 방 앞에는 유진과 세진,
그리고 아직까지 온을 밟고 있는 한이 모여 있었다.
“충격이 큰가봐.”
“이게 다 이 웬수 때문이야.”
“난 기억을 찾았다길래 다 찾은 줄 알았던 거뿐이라고!”
“윤이랑 만나면 안 된다길래 헤어지려는 생각까지 했는데...”
“바보냐. 이제 다 알았는데 헤어지긴 뭘 헤어져.”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였던가?”
“그 말이 그거잖아. 결국 기억을 못 찾게 하려고 안 본다는 말 아냐? 너 머리 좋은 거 맞아?”
“그럼 난 대체 왜 운 거냐고...”
“조용히 해 봐.”
문 안쪽에서 들리는 윤의 목소리에 네 사람은 귀를 쫑긋 세웠다.
-엄마? 나 미국갈래!
“안 돼!” x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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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드디어 완결입니다. ㅠ.ㅠ
왠지 기분이 묘한 것이...
모두 그동안 여러분들께서 재미있게 읽어주시고 기다려 주신 덕분입니다.
뭔가 시원섭섭한 기분이네요. ^^;;
저희 패밀리분들께 특히 감사드려요.
누군지는 말 안 해도 다 이시죠?
특히! 한이를 넘보던 분들, 이제 그만 포기하시라니까요. ^^
즐겁고 꾸준히 글을 올릴 수 있었던 건
정말로 다 여러분의 공입니다.
사랑해요~!
수정맘님, 윤호사랑해님, 라엘님, 꽃송이님, 밥풀님,
비야님, 희동이마을님, 봄꽃님, 시온님,
그리고 이전부터 쭉 제 글을 읽어주시고 성원해 주셨던 분들,
이 글은 여러분의 것이기도 하답니다.
조만간 또 좋은 얼굴로 만나뵐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때까지 저 잊지 않으실 거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