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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처럼 노래처럼 살다 가리라.

아이스크림 |2004.10.05 22:30
조회 601 |추천 1
시처럼 노래처럼 살다 가리라. 인생이 어차피 장편의 연극같다면 멋진 대사를 줄줄히 외우고 울기도 웃기도 잘하는 드라마 속의 주인공 처럼 내 감정에 충실하며 살리라.. 이렇게 저렇게 살아도 외롭고 가슴 시린 세상이라면 살아 간다는것이 그렇고 그런것이라면 가슴에 비 내리는 날엔 사랑의 시를 쓰고 쓸쓸히 허파에 바람부는 날엔 그리움의 노래를 부르리라.. 그렇게,, 시처럼 음악처럼 가슴을 적시며 이 한 세상 흘러 가리라.... - 풀꽃지기/ 혜원 -

 

 

 

§.2002년, 삼성 2002년 4월 2일, 미국 뉴욕 주식시장의 발표에 따르면, 삼성전 자의 시가 총액은 65조 6,800억 원으로서 소니의 63조 5,600 억 원보다 2조 1,200억 원 앞섰다. 사상 최초로 삼성전자와 소 니의 위상이 역전됐음을 알린 것이다. 뉴욕 주식시장의 보도 자료가 발표되자 한국과 일본의 언론들은 일제히 삼성전자의 소니 추월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삼성전자는 2002년 1/4분기에 총매출 9조 9,300억 원, 영업이 익 2조 1,000억 원, 순이익 1조 9,000억 원을 기록했다. 이 같 은 삼성전자의 실적은 세계의 IT 시장과 반도체 시장의 경기 침체를 딛고 일구어낸 성과이기에 더욱 의미가 컸다. 또] 「Time」은 삼성전자의 성공 배경을 공격적인 경영과 강도 높은 구조조정으로 분석했다. 특히 삼성이 탁월한 디자인과 첨단 기술력을 통해 차세대 패키지 상품인 홈미디어 센터 개 발 부문에서 소니, 마이크로소프트 등을 앞서고 있다고 평가 했다. 국내 언론들도 일본에서 전자기술을 배워온 삼성전자가 30년 만에 일본을 추월했다고 일제히 대서특필했다. 일본의 전자업 계도 큰 충격을 받았다. 소니의 불편한 심기가 드러난 것은 며 칠 후다. 소니의 계열사인 미국의 콜럼비아 픽쳐스가 개봉한 영화 〈스파이더 맨〉속에서 뉴욕 타임스퀘어 빌딩에 부착되 어 있는 삼성전자의 광고를 「USA 투데이」의 신문광고로 대 체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 영화에서는 뉴욕의 번화가에 자리 한 타임스퀘어 빌딩이 세 차례 나오는데, 다른 기업의 광고판 은 그대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삼성전자의 광고만 엉뚱 한 것으로 바뀐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영화를 홍보하기 위한 TV 광고 속에서도 삼성전자의 광고는 다른 회사의 무선전화 광고로 교체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은 소니를 자극 할 만한 어떤 발언도 자제하라고 사장단에 엄명을 내리는 한 편, 소니의 이데이 회장에게 삼성전자의 윤종용 부회장을 보 내 오해가 없도록 정중한 예를 표했다. 삼성전자의 소니 추월 로 한국과 일본이 온통 흥분하고 있던 4월 22일, 도쿄의 중심 가에 자리한 일본 현지법인 삼성 재팬에는 진귀한 손님이 한 사람 찾아왔다. 그는 바로 이우에 사토시 산요전기 회장이었 다. 이우에 회장은 1969년,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 12인치 흑 백 TV를 산요 상표가 붙은 주문자상표부착방식으로 생산하고 자 했을 때 기술을 가르쳐준 설립자 이우에 도시오 사장의 아 들이다. 그는 “삼성전자가 어떻게 소니를 이길 수 있었는지 알 고 싶어 직접 찾아왔다.”라고 말했다. 삼성전자의 이 같은 대역전극의 이면에는 몇몇 뛰어난 경영자 들이 있었다. 삼성전자의 부회장이면서 삼성전자의 경영을 책 임지고 있는 윤종용과 이윤우 반도체 총괄사장, 진대제 디지 털 미디어 총괄사장, 한용외 디지털 어플라이언스 사장, 삼성 의 휴대전화인 애니콜을 책임지고 있는 정보통신 총괄본부의 이기태 사장 등이다. 또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삼성그룹의 내 부 지휘를 담당하고 있는 구조조정본부의 이학수 사장 등도 빼놓을 수 없는 공로자다. 그러나 가장 큰 공로자는 역시 이건 희 회장이다. 이건희 회장의 비서진은 드디어 삼성전자가 소니를 이겼으 며, 아울러 삼성전자 임직원 모두 매우 기뻐하고 있다고 보고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건희 회장은 냉담하고 굳은 표정을 지었다. 아직 소니와 기술격차가 큰데 교만에 빠질까 우려해 서였다. 얼마 후 그룹 차원에서 다음과 같은 5계명이 하달되었 다. 첫째, 회사 자랑하지 마라. 둘째, 거래처에게 골프 향응을 받지 마라. 셋째, 무리하게 상을 받으려 하지 마라. 넷째, 과 대 선전하지 마라. 다섯째, 모임에서 말을 많이 하지 마라. 이 는 잘 나갈 때일수록 자만에 빠지지 말라는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한 지침이었다. 삼성을 물려받은 지 16년, 이제 그의 경영능력은 누가 뭐래도 한국에서는 최고의 위치에 와 있으며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단계에 올라선 것이다. 삼성그룹이 온통 축제 분위기였을 때 이건희 회장은 긴급회의 소집을 지시했다. 2002년 4월 19일 오 후, 삼성전자의 최고위 수뇌부들이 용인에 있는 삼성인력개발 원에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창조관’에서 저녁 회의가 시작됐 다. 삼성전자가 워낙 잘 나가고 있을 때여서 자축 파티라도 벌 어지는가 싶었는데 사정은 영 딴판이었다. 회의에 앞서 우선 세계 1위 상품과 삼성제품의 비교 품평회가 열렸다. 이어 삼성의 수뇌부는 회의에 들어갔다. 총사령탑인 이건희 회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얘기는 무려 4시간이 나 이어졌다. 그 동안 열심히 일한 사장단에 대한 칭찬만 해 도 시간이 모자랄 자리였지만, 칭찬은커녕 사장단에 대한 따 끔한 질타와 지시가 이어졌다. 그 핵심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경영성과가 좋다 고 자만하지 말고 위기의식을 지녀야 거센 도전을 이겨낼 수 있다. 즉 미리미리 앞날에 대비하는 ‘준비경영’을 해야 한다. 둘째, 5~10년 뒤 우리가 세계 1등을 할 수 있는 분야가 무엇 인지, 시장점유율은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지 대비해야 한다. 셋째, 전자제품 수명이 갈수록 단축되는 빠른 시장변화에 맞 서려면 사업부문 간 협동을 통해 첨단기술과 우수인력을 하 루 빨리 확보해야만 한다. 넷째, 반도체를 포함한 핵심부품과 홈시어터, 모바일, 오피스 네트워크 등 4대 전략사업에서 1위 제품을 중심으로 사업구조를 재구축하고, 중복ㆍ한계 사업은 교통정리 한다. 다섯째, 반도체를 비롯해 휴대전화 등 삼성 제 품의 수출 비중이 커짐에 따라 국민기업으로서 역할과 사명 을 다해야 한다.” 기조연설이 있고 나서 이건희 회장과 사장단은 새벽 2시까지 마라톤 회의를 가졌다. 그리고 4시간 동안 수면을 취한 후 다 시 오전 6시에 일어나 세면과 운동, 식사를 한 후 오전 8시부 터 회의를 계속했다. 회의는 이튿날 오후 6시에 이르러 비로 소 끝이 났다. 무려 50시간에 걸친 길고 긴 회의였다. 하지만 분위기는 시종일관 진지했고 긴장감이 감돌았다. 50시간에 걸 쳐 진행된 수뇌부 회의를 통해 삼성은 2010년까지 전자업계 분야의 ‘세계 3강’에 진입한다는 중장기 전략을 수립했다. 이를 위해 앞으로 삼성의 전기ㆍ전자사업 부문은 홈시어터, 모바일, 오피스 네트워크, 반도체 등 4대 전략사업군으로 나누 고, 그 중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제품을 중심으로 사 업구조를 재구축하기로 결론지었다. 아울러 우수한 인재를 확 보, 5~10년 후의 미래 사업 아이템을 모색함으로써 디지털 융 합을 주도하자는 결의를 다졌다. 말하자면 앞으로 갈 길이 먼 데, 벌써 승리에 들떠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삼성은 일 찌감치 5~10년 후의 사업 아이템을 모색해왔고, 인재 확보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지만 축제 분위기로 어수선한 사내 분 위기를 정리하고, 긴장감을 재고시키며 그룹 경영자로서 정확 한 지침을 내리기 위해 사장단 연수회의가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카리스마를 가진 후계자 이건희 회장은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이건희의 어머니 박두을 여사는 3남인 이건희가 젖을 떼자마자 의령의 시어머니 댁으로 보냈다. 의령의 친가로 보내진 이건희는 갓 난아기 때부터 친할머니를 어머니라 부르며 유모의 손에서 컸 다. 네 살 무렵 그는 대구의 어머니에게 다시 보내졌다. 그는 대구에서 유치원을, 서울에서 혜화초등학교를 다녔다. 혜화초 등학교 2학년에 다닐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1950년에 마산 에서 그리고 나서 대구에서, 다시 부산에서 초등학교를 다녔 다. 한국에서만 무려 다섯 군데의 초등학교를 다녔던 것이다. 어린 시절의 이건희는 말이 별로 없고, 혼자서 골똘히 생각에 빠지거나 장난감을 뜯어보는 것을 좋아하는 내성적인 성격이 었다. 그는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53년,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선진국을 보고 배우라.”는 아버지의 지시 때 문이었다. 이건희는 둘째형과 일본인 가정부와 함께 살면서 도쿄의 초등학교를 다니게 된다. 중 1때 그는 집에서 페키니스 라는 개를 기르기 시작했다. 그 후 지금까지 개는 그의 평생 친구다. 유난히 개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거짓말 안 하고 배신할 줄 모르는 충직함” 때문이라고 훗날 술회했지만, 외로운 유학 시절 친구 삼아 데리고 놀 수 있었기 때문일 것으 로 짐작된다. 또한 그는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일찌감치 골프를 배 우게 된다. 이병철 회장은 아들 이건희에게 일본의 일류 골프 선수를 붙여 직접 배우게 했고, 골프채나 장구의 지원에도 돈 을 아끼지 않았다. 왜냐하면 ‘골프를 이해하게 되면 세상의 이 치를 알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일본 유학 시절에 있어 특기할 만한 것 중 하나는 1,200~1,300편에 이르는 영화 를 보았다는 것이다. 초등학교를 마친 후 일본에서 중학교에 진학했다. 초등학교 2 년과 중학교 1년을 합쳐 모두 3년간 일본에 머물면서 그가 영 화 외에 또 하나 관심을 가진 것은 레슬링이었다. 중학교 1학 년을 마치고 귀국하여 서울사대부중에 편입하고, 졸업 후엔 서울사대부고를 다녔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그는 레슬 링부에 들어가 2학년 말까지 계속했으며, 웰터급 선수로 전국 대회에 나가 입상을 하기도 했다. IOC 위원이 되고 싶다는 꿈 이 이 때부터 싹텄다. 그 꿈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때 비 로소 이루어졌다. 그의 레슬링부 생활은 2년 만에 막을 내렸 다. 연습 도중 눈썹 근처가 찢어지는 바람에 가족들이 더 이 상 운동을 하지 못하도록 말렸기 때문이다. 그 후 이건희 회장은 국내에서 대학 진학을 하지 않고 일본 와 세다 대학 서캠퍼스의 상학부에서 공부했다. 와세다 유학 시 절의 특기할 만한 사실은 스포츠와 영화에 대한 관심이다. 그 는 또한 와세다 시절 골프부에 가입했다. 그가 골프에서 중시 하는 것은 실력보다 에티켓이다. 그가 존경하는 골퍼 중에 바 비 존스가 있다. 존스는 전 세계 골퍼로부터 구성(求聖)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또 와세다 대학 시절, 일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어느 분야에서나 최고에게는 뭔가가 있게 마련이므로 연구해볼 만 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나름 대로의 결론도 내렸다. 일류란 자신이나 일에 대해 철저한 사 람들이고, 인간미가 넘치며, 벌을 줄 때는 사정없이 벌을 주 고, 상을 줄 때는 깜짝 놀랄 정도로 준다는 것이다. 와세다 유학이 끝나자 이번엔 미국의 조지워싱턴 경영대학원 에서 경제학과 부전공으로 매스컴학을 공부한다. 미국 유학시 절, 그는 자동차에 심취했다. 서너 달 차를 타고 다니면서 차 의 구조와 특성을 파악하고는 깨끗이 분해ㆍ청소한 후 얼마 를 남기고 팔았다. 그런 식으로 1년 반 동안 차를 여섯 번이나 바꿨다. 돈도 600~700달러쯤 벌었다. 그러는 사이 자동차의 구조에 관해 점점 전문가가 되어갔다. 이건희가 귀국한 것은 그의 나이 25세에 이른 1966년이었다. 미국에 유학 중이던 이건희는 멕시코로 관광여행을 갔다가 비 자가 만료되어 미국 입국을 거절당했다. 공부를 더 할 것인 지, 아니면 이참에 아예 귀국할 것인지를 망설이다가 그는 일 단 도쿄로 돌아왔다. 그 때 일본으로 연락이 왔다. 맞선을 보 라는 것이었다. 당시 중앙일보 홍진기 회장의 장녀인 홍라희 는 서울대학 응용미술과에 재학 중이던 학생이었다. 두 사람 은 연애시절을 거쳐 그 이듬해에 결혼했다. 결혼 후 이건희는 삼성 비서실에서 견습사원으로 근무했다. 1968년 12월, 그는 비로소 공식적으로 첫 직장 중앙일보, 즉 동양방송에 입사한다. 이는 대학원에서 그의 부전공이 매스컴 학이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직책은 동양방송, 중앙일 보의 이사였다. 그는 신생 TV 방송국인 동양방송을 하루 빨 리 궤도에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TV의 시청률은 드라마가 좌우하며, 드라마가 살기 위해서는 주연보다 조연이 절대적이 라고 그는 생각했다. TBC 시절의 그는 좋은 조연배우를 확보 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의 판단대로 조연들은 연기를 잘 해주 어, 1970년대의 TBC는 타 방송사에 비해 시청률 면에서 앞서 갈 수 있었다. 그밖에 그는 월간지 「여성중앙」과 주간지 「주간 중앙」의 창간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약 10년 간 TBC와 중앙일보 이사로 일하던 이건희는 1970년 대 중반에 새로운 분야인 반도체 사업을 추진했다. 1974년 그 는 TBC 이사의 자격으로 이병철 회장에게 반도체 산업에 진 출할 것을 건의했으나 이병철 회장은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판 단했던 것 같다. 자신의 건의가 무산되자 이건희는 사재 4억 원을 털어 부천의 한국 반도체라는 작은 회사를 스스로 인수 한다. 그 후 불과 10년이 채 안 된 1983년, 삼성은 본격적으로 반도체 개발에 나서게 된다. 아울러 삼성의 반도체 산업은 한 국을 먹여살리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는 업종으로 발전한다. 1979년 2월 27일, 이건희는 중앙일보 이사에서 그룹 부회장으 로 승진하면서 삼성본관 28층의 이병철 회장 집무실 옆방으 로 자리를 옮겼다. 본격적인 경영수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가 삼성 부회장으로 첫 출근하던 날, 이병철 회장은 그를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그리고 붓을 들어 직접 ‘경청(傾聽)’이라는 휘 호를 그에게 써주었다. 경청, 즉 남의 말을 잘 듣는 것이야말 로 대기업을 이끄는 총수로서의 금과옥조임을 강조한 것이 다. 이병철 회장은 아들 이건희 부회장에게 계열사를 둘러볼 때마다 항상 수행하도록 지시함으로써 현장 경험을 쌓게 했 다. 또한 계열사 사장들로부터 업무 보고를 받을 때 늘 이건희 를 배석시켰다. 이건희는 1978년부터 이병철 회장이 타계한 1987년에 이르기까지 약 10년간 이 같은 철학에 바탕한 경영 수업을 받았다. 이병철 회장이 이건희에게 물려준 교훈 중에 ‘목계(木鷄)’가 있다. 목계는 글자 그대로 나무 닭을 의미한다. 이병철 회장 은 거실에 목계를 걸어놓고 늘 자신을 경계했다. 이건희도 그 런 부친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경계해왔다. 목계란 무엇인 가. 목계는 『장자』의 「달생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장자 가 여기에서 얘기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세 파에 대한 초연함이다. 평소 과묵하고 자기 자신에게 엄격했 던 이병철 회장도 기업을 50년간 경영해오면서 많은 세파에 시달렸다. 그 세파에서 자기 자신을 달래고, 그것을 의연하게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상징물이 바로 목계였다. 이병철 회장 이 이건희에게 가르쳐준 교훈은 ‘경청’과 ‘목계’였다. 삼성그룹의 부회장이 된 이건희는 ‘해외사업추진위원회’ 위원 장도 겸임했다. 그는 중화학과 에너지 사업 부문을 맡았다. 이 것이 이건희가 사실상 재계에 입문하면서 첫 선을 보인 사업 이다. 2차 오일 쇼크가 터지면서 그도 원유 확보를 최우선 과 제로 삼았다. 해외사업추진위원회의 목표도 원유 확보 쪽으 로 급선회했다. 그 결과 1년 만에 멕시코 원유가 한국에 도입 될 수 있었다. 멕시코 원유 확보에 성공한 그는, 이어 한국과 가까운 말레이시아로 날아가 다시 원유협상에 들어갔다. 끈질 긴 노력 끝에 결국 석 달 만에 말레이시아 원유의 확보에도 성 공했다. 때마침 걸프오일이 유공에서 철수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이건희는 유공을 인수하기 위해 뛰었다. 멕시코나 말레이시아 의 원유 확보도 유공 인수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1980년 12월, 유공의 새 주인으로 결정된 것은 선경그룹이었 다. 국내 최대의 에너지 회사 인수에 실패한 이건희는 다시 에 너지 확보를 위한 해외자원 개발에 눈을 돌렸다. 그러나 2차 오일 쇼크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원 유가는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가 집념을 가지고 추진했던 사 업들은 원유가의 하락에 따라 점점 빛을 잃었다. 이건희의 최 초 실패였다. 1980년대 초ㆍ중반, 이건희에겐 방랑의 세월이 있었다. 유공 인수의 실패, 원유가 하락에 따른 에너지 사업의 효율성 문제 제기, 3남의 그룹 승계에 대한 견제 등에 시달렸다. 그 무렵 그 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왜냐 하면 도쿠가와야말로 ‘인내심의 달인’이었기 때문이다. §.제2창업과 아버지 극복하기 1987년 11월 19일, 이병철 회장은 78세를 일기로 타계하고, 1987년 12월 1일, 호암아트홀에선 삼성그룹 신임 회장의 취임 식이 있었다. 이건희는 사장단의 추대 형식으로 삼성그룹의 승계를 인정받았다. 그리고 1년 2개월에 걸쳐 시간 날 때마다 국내 재계의 선배들은 물론, 미국 GE의 잭 웰치 등 전 세계 대기업 회장들에게 인사를 다녔다. 1988년 3월, 이건희는 ‘제2의 창업’을 선언하고, 이를 위해 신 규사업의 추진과 사업구조를 재편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건희 체제의 기틀을 다지기 위한 구조개편은 생각만큼 쉬 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기존의 장벽이 두터웠다. 삼성의 비서실이 1980~90년대 한국 최강의 정보 분석 조직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도 잘 했지만, 그만큼 권한도 막강했 다. 그러나 이건희는 비서실의 개혁 없이는 삼성의 개혁이 불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3년 탈상 시점인 1990년 12월, 이건희 는 소병해 비서실장을 삼성생명 부회장으로 전출시키는 전격 적인 인사를 단행하고, 신임 비서실장에 이수빈을 기용한다. 이른바 친정체제의 구축을 시작한 것이다. 제2창업 시기에 행해진 것 중 하나가 삼성가의 분할이다. 마지 막 쟁점인 삼성생명의 주식 분할에서는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 로 보인다. 삼성생명은 오늘날 한국 최대의 보험사이기도 하 지만, ‘현금장사’라는 측면에서 유사시 자금 동원의 창구가 되 기 때문에 누구도 양보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95년 2월, 미국 LA에서 이건희 회장과 장녀인 이인희 한솔제지 고문, 막내인 이명희 신세계백화점 상무, 그리고 이맹희의 아들이자 삼성가 의 장손인 이재현 제일제당 상무 등이 모임을 가졌다. 당시 삼성생명의 대주주는 신세계백화점(15.5%)과 제일제당 (11.5%)이었다. 신세계와 제일제당이 삼성 측에 얼마를 받고 주식을 넘겼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주당 20만 원대에서 매입했으리라는 것이 유력한 관측이다. 이로써 삼성은 삼성생 명의 인수를 종결짓고 삼성생명을 삼성그룹의 계열사로 완전 히 끌어들였다. 이로써 비로소 이건희 시대로 접어들게 된 것 이다. 삼성이라는 대조직을 불과 46세의 젊은 나이에 맡아 그 만큼 이끌었다는 것은 그의 경영능력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 다. 회장 취임 첫 5년. 그룹 전반에 대한 문제점 파악과 형제 간 재산분할 과정에 있어 교통정리는 대강 끝이 났다. §.바꾸지 않으면 죽는다 1993년에 이르러 삼성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자.” 는 혁신적인 수사를 구사하는 ‘신경영’을 선언한다. 이 신경영 의 핵심 표현은 ‘나부터 변하자’였다. 이 선언은 1993년 6월 7 일 프랑크푸르트의 캠핀스키 호텔에서 있었는데, 이미 그 해 2 월부터 그는 세계 대도시 - 2월 LA 회의, 3월에 도쿄 및 오사 카 회의, 그리고 프랑크푸르트에서 두 차례 회의 - 를 순회하 면서 해외지사 사원들을 대상으로 직접 강의에 나섰다. 도쿄 회의 시 이건희 회장의 발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정신 안 차리면 구한말과 같은 비참한 시대를 맞이할 가능성 이 크다. 잘 하고 있다는 삼성을 보라. 수십 개 기업이 수백 가 지 제품을 내놓고 있으나 단 한 가지, 반도체 중에서도 메모 리 말고는 모두 1.5류 내지 2류에 불과하다. 위험도가 심각한 수준에 와 있다. 제일 싸게, 제일 빨리, 제일 좋은 물건을 만드 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 삼성은 분명히 2류다. 삼성전자 는 3만 명이 만든 물건을 6,000명이 하루에 2만 번씩 고치고 다닌다. 이건 장난도 아니고 말도 안 된다. 애프터서비스가 왜 필요하냐, 고장 안 나게 만들면 된다. 조금만 서로 협력하 면 불량을 90% 이상 줄일 수 있다.” “삼성을 망치고 있는 게 관리 위주 경영방식이다. 관리 출신들 이 전부 간부하고 있다. 양 중심 사고로 몰아붙이는 건 모직 과 제당을 경영하던 1950년대나 통했다. 결론은 한 가지다. 나 자신이 안 변하면 아무것도 안 변한다는 것이다. 변하는 것 이 일류로 가는 기초다. 내가 바뀌어야 비서실이 바뀌고 각사 사장, 부사장, 임원, 부장, 과장들이 바뀐다. 그렇게 되려면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 자기부터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 누라하고 자식만 빼놓고 모두 바꿔봐라. 막상 변하려면 어려 울 것이다. 어렵지만 변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낫다. 쉬운 것, 간단한 것부터 실천하자.“ 평소에 말이 없고, 조용조용하게 일을 처리해오던 이건희 회 장은 이 때 삼성의 위상에 대한 솔직한 진단, 경영진에 대한 질타, 자신의 경영에 대한 구상들을 사원들 앞에서 직접 설파 했다. 그것은 큰 충격이었다. 회장이 사원들과 8시간 이상을 토론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얘기했기 때문이다. 신경영 대장정 후 삼성의 수뇌부는 구체적인 실천방안 수립 에 들어갔다. 그 최종 결론은 ‘배우자.’였다. 즉 벤치마킹을 통 해 삼성의 취약점을 보강하자는 것이었다. 벤치마킹은 삼성 의 장점이다. 즉 외국에 나가서 배우고 국제화하는 것이 국가 발전의 첩경이라고 본 것이다. 한국의 근대사 200년 동안 일본 에 대한 대규모 벤치마킹은 두 차례에 걸쳐 실시되었다. 첫 번 째는 1881년 고종이 ‘물정사탐’이라는 말로 일본에 대한 벤치 마킹을 지시한 것이고, 두 번째는 1993~94년에 이루어진 이 건희의 벤치마킹이다. 고종은 벤치마킹한 보고서를 토대로 근 대화에 나서려고 했다. 그러나 자금 부족으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지 못한 조선은 그로부터 20년 후에는 결국 일본에 합 병된다. 이건희 회장이 자주 쓰는 표현 중에 '업의 개념‘이라는 말이 있다. 즉 사업에는 저마다 독특한 본질과 특성이 있다는 뜻이 다. 바로 그 업의 특성을 찾아 역량을 집중하는 일이 경영의 핵심이라는 것이 업의 개념이다. 이런 차원에서 그는 삼성이 배워야 할 업의 개념의 1인자, 즉 그 분야에서 세계적인 노하 우를 가진 회사를 벤치마킹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삼성이 벤치마킹 대상으로 확정은 기업은 다음과 같다. 전자 부문의 경우 소니와 마쓰시타, 중공업의 경우 미쓰비시, 섬유 부문의 경우 도레이, 재고관리 부문의 경우 웨스팅하우스, 고 객 서비스의 경우 노드스트롬, 생산 작업관리의 경우 HP, 마 케팅의 경우 마이크로소프트와 화장품 회사로 유명한 헬렌커 티스, 그리고 어패럴 소매점인 미국의 리미티드였다. 신제품 개발의 벤치마킹 대상은 모토로라, 3M, 구매 및 조달에 대한 벤치마킹의 대상은 혼다와 제록스, NCR 등이었다. 판매관리 벤치마킹 대상회사는 IBM과 P&G, 물류에서는 메리케이 코스 메틱과 허시가 벤치마킹 대상이었다. 당시 삼성은 이렇게 부문별로 벤치마킹 대상 기업을 정해놓 고 그 하나하나를 연구해나갔다. 삼성의 부문별 벤치마킹 대 상으로 미국과 일본의 기업이 주로 선정된 것은 모든 면에서 세계적으로 앞서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기술 수준의 경우 당시 미국을 100이라고 보았을 때 일본이 82, 독일이 52, 한국은 7.3정도였다. 미국과 일본을 비교할 때 미국은 원천기 술 면에서 앞서 있었고, 일본은 생산기술 면에서 앞서 있었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 LA, 도쿄, 프랑크푸르트 등지에서 있었던 현장경영과 몰래 카 메라 사건 이후 삼성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생겨났다. 삼성은 계열사 사장단 명의로 “모든 제품의 불량률을 일본 수준으로 낮춰 세계 최고의 품질 수준 달성을 위한 ‘질’ 우선 경영에 주 력할 것”을 선언하고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발표했다. 이를 위 해 품질의 수준에 문제가 있으면 생산ㆍ출하ㆍ판매를 중단하 고 품질 개선 후 다시 생산 라인을 가동시키는 쪽으로 변화의 가닥을 잡았다. 이것이 이른바 ‘라인 스톱제’이다. 이러한 질 위주 경영이 삼성 계열사 간에 확산되자 협력업체들 또한 변 신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에 따라 삼성의 협력업 체들은 자발적으로 품질혁신 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이건희는 삼성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한 또 하나의 대수술을 단행한다. 그것은 이른바 ‘7ㆍ4제’였다. 이는 오전 7 시에 출근해 오후 4시에 퇴근하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당시 이 건희 회장이 이 시스템을 도입한 의도는 업무효율과 강도를 높이고 임직원들이 퇴근 시간 후 건강관리, 어학연수, 동호회 활동 등 자기계발에 힘쓰도록 하며, 러시아워를 피해 출퇴근 함으로써 시간을 크게 절약하자는 취지였다. 7ㆍ4제가 삼성 에 도입되자, 처음엔 엉뚱한 발상이라고 생각했던 다른 기업 들도 그 장점을 깨닫고 따라가기 시작했다. 이 7ㆍ4제 도입은 1998년 7월부터 사원들의 저항에 부딪혀 부 분적으로 철회되었다. 당시 내부 설문조사에 따르면, 약 80% 에 가까운 직원들이 8ㆍ5제로 바꾸어야 한다고 응답했고, 7?4 제에 대한 찬성은 불과 10%에 그쳤기 때문이다. 그 후 7ㆍ4 제 도는 2002년 삼성그룹 차원에서 전면 폐지되었지만, 삼성본관 과 그 부근에 근무하는 구조조정본부 및 삼성전자 임직원 등 2,000여 명에게는 계속 실시되고 있다. 1993년 삼성이 일으킨 신경영은 경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문화혁명이었다. 기업이 그 동안 관행대로 해왔던 모든 사고의 틀과 방식을 바꾸는 일 대 전환점을 맞이했던 것이다. 1993년 삼성그룹은 창업 이래 최대 규모인 299명에 대한 인사 를 단행했다. 인사를 단행한 목적은 질 위주의 신경영을 실천 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또 하나의 특징은 관리담당 임원의 교 체와 쇠퇴다. 대신에 해외업무 경험이 풍부하거나 기술 부문 에서 능력 있는 사람들이 대거 발탁되었다. 또한 삼성종합건 설 사장을 새 비서실장으로 임명하면서 비서실의 인원을 200 명에서 100명으로 축소시켰다. 대신 신경영 등 그룹의 주요 현 안에 대한 추진은 사장단으로 구성된 그룹 운영회가 맡기로 했다. 1987~96년까지 이건희 회장의 삼성그룹 10년 경영은 성공적인 것이었다. 그는 그동안 프랑크푸르트 선언, 라인 스 톱제, 7ㆍ4제 도입, 현장경영, 삼성용어집 발간 등 대대적인 삼성개혁을 추진해왔다. 결국 삼성의 비약적인 발전은 그의 개혁에 대한 노력이 성공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1987~96년에 걸친 경영 기간 중 이건희 회장은 의미심 장한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이른바 ‘베이징 발언’이 그것이다. 신경영 3년째인 1995년 4월 10일, 이건희 회장은 중국 출장에 나섰다. 출장이 끝나갈 무렵 그는 베이징 조어대의 국빈관에 서 한국 특파원들과 오찬을 겸한 인터뷰 모임을 가졌다. 그 자 리에서 이 회장은 뜻밖의 발언을 했다. “중국 국가주석은 반도체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반도체 공장을 지으려 해도 허가가 안 나오고, 허 가를 받으려면 도장 1,000개가 필요하다. 첨단산업이라는 반 도체가 이 정도이니 다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행정규제와 권위의식이 없어지지 않으면 21세기에는 우리나라가 제밥도 찾아먹지 못할 것으로 우려된다. 우리나라의 정치력은 4류, 행 정력은 3류, 기업능력은 2류다. 현 정권과 국민수준 모두 일 류 국가에 뒤진다.” 이건희 회장은 1시간 35분에 걸쳐 자신의 소신을 피력했다. 곁 에서 이건희 회장의 인터뷰를 지켜보던 삼성그룹의 임원들은 발언의 강도가 위험 수위를 넘어섰다고 판단, 사석에서 나눈 이야기이므로 ‘비보도’로 하자고 긴급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그의 인터뷰 내용은 ‘한국의 경제는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 류’라는 제하로 즉각 국내 언론에 보도되었다. 관료사회에서 도 이건희 회장의 베이징 발언이 달가울 리 없었다. 정치권은 대단한 불만을 표시했다. 결국 이건희 회장의 베이징 발언은 삼성그룹 비서실의 해명으로 4개월 만에 일단락됐다. 그러나 그 후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 한국의 기업들은 IMF 외환 위 기를 맞이함으로써 사상 최대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버려야 얻을 수 있다 1997년 태국을 필두로 한 아시아의 금융위기는 날로 확산되 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대만, 한국, 일본 등이 심 각한 경제위기로 치닫게 된다. 1998년 삼성그룹의 시무식 분 위기는 침통했다. “실물경제의 일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기업인의 한 사람으로 서 오늘의 경제 파탄에 대해 나 자신이 충분히 대처하지 못했 음을 후회한다. 선진국들은 한국 경제를 요리할 프로그램을 만들어놓고 그 시기만을 노려왔는데, 우리는 엔화 강세라는 호황의 착각 속에서 세계의 흐름을 외면해온 우물 안 개구리 였다. 이제 뼈저린 자기반성 없이는 새 출발을 기대할 수 없 다.” 한국 정부도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정부는 IMF의 요구에 따라 지배주주 및 경영진에 대한 책임 부과, 결합재무 제표, 상호지불보증 해소, 재무구조 개선 등을 실시하라고 기 업에 촉구하는 한편, 총수들은 개인재산을 털어서라도 회사 를 살리라고 요구했다. 이건희 회장도 버릴 것은 버리고, 합 칠 것은 합치는 ‘버리자.’ 경영으로 급선회했다. 삼성의 구조조 정위원회는 IMF 체제 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 다. 삼성은 삼성중공업의 건설기계 부문을 볼보에 5억 달러에 매각했다. 이것으로도 부족해 그밖에 자산 매각을 통해 2억 7,000만 달러, 외자 도입으로 17억 3,000만 달러를 확보했다. 이 돈으로 삼성은 2002년까지 200억 달러의 부채를 상환함으 로써 부채비율을 366%에서 2002년에는 124%까지 끌어내릴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구조조정위원회는 다음 수순을 밟아갔다. 조직의 30%를 감축 한다는 결의에 따라 59개 계열사를 45개로 정리했고, 무려 32%에 이르는 5만 4,000명의 직원을 감원했다. 이 같은 비상 경영을 통해 삼성은 동원 가능한 현금을 3조 원 가량 비축할 수 있었다. 이로써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적 경영은 빛을 잃 고 대신 글로벌 스탠더드 경영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글로벌 스탠더드 경영이란 주주를 중시하며, 기업의 지배구조를 바꾸 고, 회계의 투명성을 높이며, 인사제도를 능력주의로 바꾸고, 스톡옵션 등을 통해 이익을 분배하는 시스템이었다. 이 과정 에서 삼성의 자동차 사업도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삼성자 동차는 삼성그룹이 끌어안고 있다가 결국은 프랑스의 르노자 동차에 매각되었다. 1998년부터 시작된 이건희 회장의 ‘버리자.’ 경영은 2001년에 이르러 막을 내렸다. 그 기간 동안 삼성은 IMF 외환위기와 자 동차 사업 포기로 인해 매우 힘이 들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 룹의 역량을 핵심사업에 집중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로 전환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선택과 집중’이다. 즉 삼성 전자를 중심으로 한 전기ㆍ전자계열, 삼성생명과 삼성물산을 중심으로 한 금융과 무역 부문, 에버랜드와 신라호텔 및 제일 기획의 서비스 부문 등 잘할 수 있는 사업에 그룹의 경영역량 을 집중시킨 것이다. ‘선택과 집중’의 결과로 재무구조도 건실 해졌으며 드디어 2002년에 삼성이 한때 소니를 시가 총액 면 에서 앞서가는 것으로 그 빛을 발하였다. §.인재가 자산이다 2002년은 준비경영 시대의 원년이었으며 이는 또한 이른바 ‘찾아라.’ 경영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5~10 년 뒤 무슨 사업을 통해 먹고살 것인가를 찾아라. 둘째, 인재 를 찾아라. 한마디로 시장의 팽창속도가 워낙 빠르고 규모가 거대한 만큼 미리미리 대비하라는 것이 그의 주문이었다. 이 것이 이른바 ‘준비 경영론’이다. 삼성은 현재 반도체D램, 반도 체S램, 모니터, TFT-LCD, CDMA 휴대전화, 전자레인지, VCR 등 세계1위 상품을 7개 가량 갖고 있다. 그밖에 비메모 리 시스템 LSI 분야, PDA, 모바일용 SOC, LDI 등 세계 3위권 내의 품목을 향후 세계 1위에 올려놓기로 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삼성의 신수종 사업은 따로 있 다. 2010년경이면 초등학교 3~4학년 수준의 지능을 갖춘 64 기가 반도체 개발이 가능하게 된다. 이는 웬만한 심부름이나 잡일을 하는 3D 산업은 로봇이 대신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앞으로는 로봇이 가정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는 시대가 오는 것이다. 삼성은 여기에 대해서도 연구를 진행 중이다. 또 삼성 전자는 3차원 디스플레이 사업에 향후 10년 간의 사운을 걸기 로 했다. 2002년 10월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에 착수해 연구 중 이다. 삼성이 5~10년 안에 초일류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인재 를 조기에 발굴하고 체계적으로 키워내야 한다. 그렇다면 삼 성그룹이 원하는 핵심인재는 어떤 유형일까? 첫째, 향후 회사 의 신수종 사업을 주도할 인재, 즉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만들고 그 아이템으로 수요를 창출하 고 산업 전체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인재를 말한다. 둘째, 변 화와 혁신을 주도하는 인재, 즉 고정관념을 깨고 혁신적 아이 디어를 제시하며 그걸 추진하는 능력이 있는 인재를 말한다. 셋째, 투철한 가치관과 조직관을 갖춘 인재. 넷째, 인간미 넘 치는 인재 등이다. 그는 계열사 사장들에게 인재에 대한 욕심이 있어야 하며, 우 수 인재를 확보ㆍ양성하는 것이 경영자의 기본 책무라며 사장 단이 직접 뛸 것을 지시했다. 이 자리에서 자신도 경영업무의 50% 이상을 핵심인력 확보 및 양성에 쏟겠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지시가 떨어지자 삼성 계열사들은 핵심인력 확보를 위 해 사무국이나 임시조직을 만들고 삼성전자는 채용 팀을 인재 개발연구소로 확대ㆍ개편했다. 또 현행 입시 위주 교육체계로 는 키우기 힘든 우수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각 분야에서 재능 있고 끼 있는 인재를 중ㆍ고교 때 조기 발굴, 기업에 필요한 인재로 육성하는 멤버십 프로그램도 확대해나갈 계획을 세웠 다. 이에 따라 2002년 7월에는 이건희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그러나 이런 인재수급은 장기적 또는 특정 부문의 필요에 따 른 것이고, 삼성을 움직이는 일반 사원들은 공채로 선발된다. §.세계 속의 삼성 이건희 회장은 이병철 회장의 타계로 지난 1987년 12월 1일 삼 성그룹 회장에 취임한 이후, 삼성을 이병철 회장 때보다 더욱 성장시켰다. 지난 1987년에 17조 3,956억 원이었던 총매출이 또 2002년에는 매출 137조 원에 세전이익 15조 원이라는 사상 최대의 순익을 거둘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여기에는 삼성의 주력기업이라 할 수 있는 전기, 전자 계열사들의 활약이 두드 러졌다. 삼성이 이렇게 일취월장하고 있지만 이건희 회장은 여전히 고 민이 많다. 우선 큰 꿈을 가지고 있는 나노 기술과 바이오 사 업이 생각보다 부진하고 원천기술이 부족하며, 5~10년 후에 는 무엇으로 먹고살지 확실한 대안이 나오질 않았고, 금융 업 종은 구조개편이 시급하다는 것 등의 이유 때문이다. 더구나 후발주자인 중국이 요즘 맹렬하게 가전시장 쪽에서 치고 올라 오는 것도 위협적이다. 이제 당면하고 있는 삼성의 몇 가지 문제점을 살펴보자. 오늘 날 한국의 중소기업 중 상당수는 ‘상다리 자르기(납품가 인하 요구)’를 무자비하게 당하다 보니 밥상 뚜껑밖에 남지 않은 곳 이 많다. 당장 공장을 돌리기에 급급한 편이기 때문에 R&D 같 은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 삼성이나 한국의 대기업들도 수백, 수천 개의 중소기업 협력 없이는 완제품을 생산해내지 못한다. 삼성은 중소기업을 가장 우대하고 있는 편에 속한다. 이와 같은 폐해를 개선하는 일에도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상시 구조조정도 무자비한 해고로 보일 수 있다 삼성의 경우 도 회사의 방침을 따라오지 않는 일부를 해고하는 것은 이해 가 되지만 성실ㆍ근면하게 일하고 있는, 한창 돈이 많이 들어 가는 50대의 가장을 명예퇴직시키는 것은 좀더 신중하게 접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미국인들은 ‘소니’하면 곧 바로 전자제품을 연상하고 곧 비디오 카메라로 이미지가 이어 진다. ‘필립스’하면 역시 전자제품이란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 러나 ‘삼성전자’하면 딱히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다. 아직은 브 랜드 파워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삼성이 그동안 물산ㆍ생명ㆍ 가전ㆍ모직 등 여러 분야에서 제품을 생산하다 보니 이미지 가 분산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삼성전자는 아직 원천기술력이 세계적인 기업에 비해 떨 어진다. 원천기술은 그 나라 과학기술의 높이라고 할 수 있 다. 원천기술을 많이 갖기 위해서는 결국 천재적인 기술자를 많이 확보하는 수밖에 없다. 원천기술 개발은 삼성이 향후 인 재확보를 얼마나 많이 하느냐에 달려 있다. 삼성이 명심해야 할 것이 또 있다. 과거에 우리 국민들은 외국 제품에 비해 질은 떨어지지만 애국심을 가지고 국산품을 사용 해왔다는 사실이다. 또 과거 삼성제품의 생산 이면에는 국민 들에게는 저축을 강요하면서 대기업에게는 유리한 금융조건 으로 자금을 지원하는 정부의 특혜도 있었다. 정부의 특혜는 단적으로 말하면 국민의 돈이었다. 삼성은 이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삼성은 더 좋은 제품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보답해야 하 며, 기업의 이윤을 국민의 이익과 국가 경제에 보탬이 되게 하 겠다는 새로운 각오를 해야 한다. 이건희 회장도 우리 국민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기업가 정신을 가져야 한다. §.인간 이건희와 그의 경영관 그는 삼성 본관에 있는 회장 집무실보다는 승지원에서 주로 일한다. 승지원은 전통 한옥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내부는 최 첨단 디지털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내방객들이 개인정보를 담은 핀을 옷깃에 꼽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가 좋아하는 음 악과 향기가 흘러나온다. 이건희 회장은 승지원에서 그룹 경 영의 큰 방향을 잡고, 그 내용을 지시한다. 때로 계열사 사장 들의 경영방향이 틀렸을 경우 사장단을 불러 심야토론도 벌인 다. 일과가 끝나면 이건희 회장은 걸어서 2~3분 거리에 있는 자 신의 한남동 자택으로 돌아간다. 여기에서 그는 부인 홍라희 여사와 아들 이재용 상무 내외와 함께 산다. 이건희 회장은 슬 하에 1남 3녀를 두었고, 가정교육에 대해서는 굉장히 엄하다 고 한다. 오전 10시쯤에 기상하고 보통 새벽 2~3시에 잠자리 에 든다. 재산은 25억 달러이며, 2002년 4월 1일 현재 삼성그 룹의 계열사는 모두 63개이며 총 자본금은 7조 6,467억 원이 다. 전체 계열사 중 이 회장이 직접 갖고 있는 지분율은 0.45% 이며 친족ㆍ비영리재단ㆍ임원 등 특수 관계인을 포함한 지분 율은 1.54%, 계열사를 포함한 내부지분율은 42.25%다. 이건희 회장은 말을 많이 하지 않고, 눌변이다. 그러나 일단 말을 시작했을 때는 깊이 생각을 한 뒤이므로 각별히 새겨들 어야 한다. 그가 즉흥적으로 일을 지시하는 경우는 거의 없 다. 또 그는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일을 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 며 개인적으로 소신파를 좋아한다. 위기 때는 소신파가 도움 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의 취미는 세간에 알려진 대 로 사색과 독서다. 감명 깊게 읽은 책은 앨빈 토플러의 『권력이동』이며 생각 이 복잡할 때는 선친의 경영철학을 정리한 『호암어록』을 들 여다본다. 종종 소설을 읽기도 한다. 잡지로는 일본의 권위 있 는 경제 주간지 「닛케이 비즈니스」와 「트리거」「다이아 몬드」, 미국의 「포브스」 등과 월간지로는 「견」, 세계의 자동차와 예술 분야의 「Art in Asia」를 즐겨 읽는다. 국내 뉴 스 외에 미국 CNN과 일본의 NHK 방송을 즐겨보며 특히 신기 술이나 역사관련 다큐멘터리와 드라마는 가리지 않고 본다고 알려져 있다. 경영의 특징을 살펴보자. 먼저 인력중시 경영을 한다. “천재 한 사람이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전제 아래 그는 핵심인 력을 확보하거나 육성하는 데 아낌없는 투자를 하며, 책임과 권한을 동시에 부여하여 믿고 맡긴다. 또 일을 잘 하는 사람에 게는 상당한 인센티브를 준다. 그리고 투자결정이 과감하고 초일류를 향한 승부욕이 강하다. 또 과학기술을 중시한다. 기 술이 받쳐주고 디자인이 따라주면 마케팅의 절반은 성공했다 는 것이 그의 경영방식 중 하나다. 무엇보다 앞서서 대비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리고 구조조정본부(과거의 비서실)를 적 극 활용하며 사원복지에 최선을 다하고 신상필벌과 성과보상 주의를 철저히 적용한다. 경영진단팀을 활용하여 만성적 매너 리즘에 빠져 있는 적자 사업장을 환부를 도려내듯이 그 원인 을 찾아내 흑자로 전환시키는 마술 같은 능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삼성의 포트폴리오 능력은 재계 최고 수준이고, 계열 사마다 포트폴리오 팀장이 따로 있다. 삼성의 브랜드 가치는 390억 달러이며 해외법인과 세계적인 광고 대행사 55개를 동 원하여 ‘삼성 = 디지털’이라는 이미지를 심으면서 초우량기업 으로 이미지를 탈바꿈시켜가고 있다.

資料 出處 : 이건희, 그의 시선은 10년후를 향하고 있다. / 저 자 : 홍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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