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31. 가곡을 부르며

무늬만여우... |2004.10.09 06:06
조회 2,431 |추천 0

랑은 한국으로 사업차 나간다며 들어올 생각을 안했다.

아들넘을 데리고 시댁 식구들과 어울려 사는데 식구가 많아 버글거려도 참 외로웠다.

시어머님은 말도 제대로 안통하는 외국생활에서 우울증이 깊어지셔갔다. 말도 점점 없어지고, 허구헌날 집에서 젊은 나이에 손주들이나 보고 있으려니 답답하셨나부다. 사실 나이먹은 이에겐 한국, 내 고향이 최고지. 아무리 물자 싸고 풍부하다고 외국이 좋으려나. 어머님은 고국의 향수병에 시달리셨다.

그러는 와중에 어머님의 돈을 꿔간 분네 집 경제가 위험하단 정보가 들어오고, 어머님은 안그래도 지겹고 외롭던 외국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도로 들어가셔서 자리잡고 싶어 하셨다. 그래서 어머님은 한국으로 도로 들어가시게 되었다.

아주버님네랑 시누랑 나랑 그렇게 어울려 살게 되었다. 아버님은 한국과 아르헨티나를 왔다갔다 하셨다.

시누는 음대를 들어가서 성악을 전공하게 되었다. 워낙 피아노 전공을 시작했지만, 성악이 더 좋았나부다. 형님은 첼로를 시작했다. 나도 뭔가 하고 싶었지만, 난 그냥 집에 있는 피아노를 뚱땅거려보자 싶어 혼자 독학으로 바이엘을 떼고 체르니를 들어갔다.

모두 자기 취미 생활하며 같은 집에서 밥먹으며 지냈지만, 낮엔 정신이 하나없었다. 형님 방에선 첼로가 낑낑대고 아가씨는 발성연습하고, 난 가끔 피아노를 뚱땅거렸다. 그러다보니 난 손이 짧아서 더 이상 진도가 나가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저녁마다 일이 끝나면 아이랑 침대에 누워서 가곡집을 들춰가며 하나하나 부르기 시작했다.

가곡엔 내 마음이 다 담아져 있었다.

그 곡을 하나씩 부르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곤했다.

아주버님은 가족 모두를 이끌고 놀이동산도 데리고 가주셨고, 수영장에도 곧잘 우리 모두를 끌고 가곤했는데, 어린 아들넘을 끌고 거기 쫓아다니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랑이 있으면 아이가 힘들면 안아주고 했을텐데, 아이가 힘들어하면 내가 업어주고 안아주고 해야했으며 중간에 잠이라도 자게되면 그걸 들쳐업고 다녀야했다.

아르헨티나의 여름은 어둡고 슬픈 내 맘과 반대로 너무나 맑고 푸르렀으며 수영장의 물도 너무나 맑아서 아름답기까지했다. 넓은 수영장 옆으로 파랗게 잘 자란 잔디들..그 옆에 아사도를 해먹을 수 있는 시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다. 아름드리 커다란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난 그 바캉스 계절에 기를 쓰고 수영을 배웠다. 다른 수영 잘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관찰해가며 대학 시절 수영 시간이 있었건만, 그 때 못배운 수영을 눈으로 익히고 몸으로 익혀갔다. 짧은 바캉스도 끝나고 집에서 맴을 도는 시간이 다시 시작되었다.

어디에도 터놓을 데 없이, 교회라도 다니면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 있으련만 그마저도 금지된 상태라 난 날마다 달팽이 집 달팽이처럼 움츠려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아들넘 돌잔치도 하였고, 아빠가 없이 돌사진을 찍으러 한국인 사진관이 있는 백구를 갔다.

아이는 돌사진을 찍으려는데 그 의자가 무서운지 의자에 앉히기만하면 자꾸 울어댔다. 한시간의 실랑이 끝에 내가 안고 찍기로 했다. 난 그때 짧은 커트머리였는데, 한 시간 동안 아이한테 시달려서 땀 범벅이였다. 아이는 눈물을 가득담은 얼굴로 찍혔고, 나또한 웬지 울먹이는 듯한 표정으로 얼굴가득 땀으로 번뜩이며 찍혀서 지금도 그 사진을 보면 맘이 짠하다.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한국인 사진관에선 내 허락도 없이 우리 아들넘과 찍은 돌사진을 커다랗게 뽑아서 사진관 전면에 붙여놓았다. 어휴. 내가봐도 참 슬픈 돌사진일세. 그런걸 왜 저 아저씨는 저렇게 걸었을까. 내가 그 사진관에 가니 아저씬 미안한 표정으로 사진이 잘나와서 걸었다고 좀 걸게 해달라고 부탁해왔다. 내심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저렇게 크게 일부러 뽑아놨으니 조금만 걸다가 내려달라고 부탁하고 왔다.

저녁 나절 아이를 재우며 가곡을 부르다 잠이 들었다. 꿈에 날개 길이가 2미터는 족히 되는 커다란 호랑나비가 우리 거실로 들어와서 날아다녔다. 참 멋졌다. 너무 멋있어 감탄하다 깨었는데, 아버님이 날 부르셨다.

"한국에 다녀올래?"

아버님의 질문에 난 얼른 큰 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아버님은 이번에 가면 한달 밖에 못있고 몇 달 뒤에 가면 두 세달 있을 수 있는데 선택하라고 하신다. 난 지금 당장 가서 한달 있는걸 선택하겠다고 했다.

커다란 나비 꿈은 여행하는 꿈인가?

난 그래서 드디어 한국에...엄마가 있고, 오지않는 랑이 있고, 친구들이 있고, 내 형제 자매들이 있는 그리운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가슴이 설레였다.

아들넘은 내 품에 있으면 참 잘 놀았다. 생전 울지도 않는다. 젊잖은 아가였다.

비행기를 타면 아가를 넣을 수 있는 바구니가 따로 있었지만 그런 시설이 있는지조차 모르던 난 그 30 시간이 다 되는 비행시간 내내 아이를 안고 갔다. 그래도 하나도 힘든걸 모르고 마냥 즐거웠다. 엘에이를 거쳐 도쿄를 거쳐 가는 여행이었는데, 그땐 바보같이 비상금도 하나 마련해놓지 않아서 내 주머니엔 달랑 미국달러 11$밖에 없었다. 난 그 돈 갖고 아이를 데리고 여행하는 무식한 아줌마였고, 아버님은 당연히 내가 어느정도의 비상금은 있겠거니 하셨는지 비행기 표 값 밖에 주지 않으셨다.

그래도 좋았다. 너무 좋았다.

8개월 반만에 본 랑은 너무 낯설었다. 날보며 너무 반가워했지만, 난 반가운 표시도 못낼만큼 굳어있었고, 그만큼 반갑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원망스런 맘이 앞섰다는게 맞았을꺼다. 그렇게 난 한국에 첫 방문을 하였다.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