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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시기적절한 남자(43)
맥주를 한 잔 하고 밖으로 나오니 스산한 가을 바람이 느껴졌다.
"영낙 없는 북경의 가을 바람이네요."
현수가 밤하늘을 올려다 보며 말했다.
"한국 가을 바람하고 비슷하면서도 약간 건조하게 느껴져요."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이상해요. 과학적으로는 그러잖아요. 여자들이 피하지방이 많아서 추위를 덜탄다고..그런데 꼭 먼저 추위를 느끼는 사람은 여자더라고요."
문득 그런 말을 들으니 전에 현수가 좋아했다던 여자 생각이 났다.
북경에서 둘이 그런 대화를 했을까?
밤하늘을 올려다 보며 북경의 가을바람에 대해서, 그리고 남녀의 차이에 대해서...
"혹시 추위를 먼저 느끼지만 또 오래 견디게 되어 있는 거 아닐까요?"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자들 피부는 민감하면서도 오래 견디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현수는 겉옷을 나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거 걸치세요."
"괜찮아요."
나는 거절했다.
추운 날씨에 남자 자켓을 얻어 입는 것처럼 세상에서 추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건 별로 무겁지도 않은 여자 핸드백을 남자가 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쓸데 없는 배려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사랑을 흔히 희생이라고 하죠. 그러니까 지금 나도 추운데 옷을 더 벗어서 민아씨에게 건네주는 거, 이런 게 희생이고 사랑이라고 할지 몰라요. 그런데 희생만이 사랑이 아니에요. 상대방의 희생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사랑의 한 모습이에요. 미안해하지 않고 말이에요. 사랑은 어느 한면만 보고 말할 수 없는 거에요. 오늘 내가 민아씨 보다 조금 더 춥더라도 쟈켓을 벗어주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민아씨에게 도움받을 일이 있지 않을까요? 사랑도 사람과의 관계도 오래 보아야 하는 것 같아요. 지금 미안해하지 말고 나중에 저한테 무언가 해주면 되잖아요."
현수가 그런 말을 하며 두번째 쟈켓을 건넬 때는 받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별로 두꺼워보이지도 않는 옷한겹이 찬 가을 바람을 완벽히 막아주고 있었다.
따뜻했다.
현수의 말대로라면 나 때문에 조금 더 추울지 모르는 현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일까?
"제가 아까 민아씨한테 융통선이 없다고 했었죠? 그게 이런 거에요. 남에게 폐를 끼치기 싫다라는 것부터 생각하는 거요. 사람은 서로 폐를 끼치며 살게 되어 있는 거에요. 그게 서로서로 어느 정도 섞이면서 정도 들고 그러는 건데...민아씨는 그런게 너무 확실해요. 틈이 없어 보인다고 할까.."
정훈과의 상처 때문이었을까. 그 후부터 변했던 것 같다. 남자들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무의식적으로 마음의 거리를 두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따뜻하고 고맙네요."
그냥 지금 따뜻하고 좋았다. 쟈켓 하나 때문에 마음까지 편안해지는 듯했다.
"이제 택시를 탈까봐요."
이제 택시라니? 북경지리를 모르는 나는 걸어서 호텔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냥 좀 걷고 싶었어요. 북경엔 삼년만인데 많이 변했어요. 여기 전엔 그냥 흙바닥 길이었어요. 언제 이렇게 포장된 길이 생겼는지...전에는 무명배우였는데 스타가 된 애인을 만난 느낌이에요. 멋있어 보이지만 전보다 정감은 없네요."
현수의 말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나간 사랑이란 그런 걸까? 멋있어 보이지만 정감은 점점 엷어져가는 걸까...
그렇다면 난 다시 나타난 첫사랑인 정훈이 멋있어 보이는 부분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전과 같은 정감은 없는 것일까?
아니다. 그가 결혼만 하지 않았다면 우린 완벽히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민아씨...새로운 사랑도 올 수 있어요. 왜냐면 본인이 변하니까요. 삶이 축적되는 만큼 사랑에 대한 관점도 이해도 달라지는 것 같아요."
새로운 사랑이라...정훈과 헤어지고 또 정훈 때문에 힘들어할 때 그리고 정훈의 상처가 아물 때도 민석이 그런 말을 했었다.
사랑은 꼭 다시 온다고...
그 이유가 내가 변하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난 얼마나 변했을까?
현수는 유창한 중국어로 택시를 잡고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나는 잠시 입고 있던 현수의 쟈켓을 돌려줘야하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호텔까지 그냥 입고 가기로 했다. 현수의 쟈켓이 주던 따뜻함을 조금 더 느끼고 싶었다.
택시 창밖으로 보이는 북경의 풍경들은 몇 개의 불빛과 잠깐 지나다니는 사람만 보일뿐 고요했다.
"다음에 오면요. 북경 최고의 야경을 보여드릴게요. 오늘은 너무 늦었네요."
다음이라...우리는 얼마나 그렇게 많은 약속을 하고 사는 걸까...다음에는 이란 말로 말이다.
그러나 다음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약속에 대해서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다음이란 말은 그냥 희망사항일 뿐이라는 속뜻도 이미 알게 되어버린 우리는 어른일지도 몰랐다.
호텔에 도착해서 로비에서 키를 돌려받고 방에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탔다.
"북경에선 엘리베이터도 자주 고장나는 거 알아요?"
"그래요?"
"들은 얘기에요. 저도 겪어본 적은 없어요. 그런데 한번쯤 겪어보면 어떨까 싶네요. 대신 적당한 시간에 구출되어야 한다는 보장이 있어야겠죠."
엘리베이터에서 남녀 단 둘이 있을 때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장면은 영화에서 자주 보았던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 남녀사이에선 꼭 로맨스가 일어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언젠가 구조된다는 희망도 없이 로맨스만 생각하고 있을 사람은 없다. 우선 죽느냐 사느냐는 걱정을 하게 될 것이다.
현수는 갑자기 엘리베이터 버튼앞으로 다가가 '비상정지' 버튼을 눌렀다. 요란한 벨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는 영화의 한장면처럼 멈추었다.
"현수씨!"
나는 당황해서 현수의 이름을 부르는데 현수는 나를 꼭 끌어안았다.
"우리...구조될 때까지 이렇게 있어요."
내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현수는 내 입술에 키스를 했다. 밀폐된 공간이라서인지 아니면 갑작스런 키스의 충격인지 아찔한 현기증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