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사람이 있어요.
도대체 종일 잊혀지지가 않아서 너무 잊고싶은 사람.
며칠뒤면 함께한 지 100일이 되지만
그 애와 함께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 애는 지금 여행중이거든요.
여행간지 이제 스므날쯤 되네요.
통일 전망대에서 시작한 발자국이
전북 진안 즈음을 지나고 있을 테니까.
친구로 오래 만났어요.
6,7년쯤... 어찌어찌 연락하고 지내다보니
서로에게 참 중요한 사람이 되어있었네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하지만 오랜 친구를 잃어야 하는 만큼
많은 망설임 끝에.. 우리는 시작했습니다.
한결같은 사람이에요.
감정에 좌지우지 되지 않고
무슨 일이든 신중하고 어른스럽죠.
전 반대에요.
감정의 기복이 무척 심하고
맨날 애기 같다는 말을 듣거든요.
전 하루종일 그 애 생각이 나요.
떠나지 않아요.
아침에 눈을 떠 세수를 하면서도,
학교에 공부하러 올라오는 비탈길의 돌담을 지나면서도,
시조문학에 대해 정리하고
까만 펜을 주홍색 펜으로 바꿀때도,
화장실을 내려가는 계단 하나하나를 밟을 때도,
집에 가는 길의 상점 간판들을 볼 때도,
엘리베이터의 '5'라는 숫자를 누르는 무심결에도,
다녀왔습니다, 인사를 하면서도,
컴퓨터 전원을 켜고 스팸메일을 삭제할 때도,
꼬린내나는 스타킹 양말을 빨래통 속에 쳐박을 때도,
내일 새벽에 나갈 때 먹을 밥이 있는지
밥통 속에 얼굴을 들이밀다 안경알이 흐려질 때도,
오른손에 든 칫솔의 방향을 아래서 위로 바꾸면서도,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마지막으로 이불을 눈 아래까지
끌어 올리면서도,
마지막 속눈썹이 눈 아래 다크써클을 차곡히 가릴 때에도,
다시 아침 알람소리에 깨어 어쩌면 기억도 하지 못한 채
시간 속에 잠겨버릴 꿈 속에서도,
끔찍하도록 그애가 잊혀지지 않죠.
고등학교 때 전 키가 작아서 맨 앞줄에 앉았었어요.
그것도 3분단 교탁 바로 앞,
수학 시간에는 낙서하기가 그만이었던 자리.
낙서 삼매경에 빠져 있었던 그 시간도 수학시간이었겠죠.
문득 교탁의 한 귀퉁에 칼로 새겨져 있는 글귀에
눈이 묶여 버린 적이 있었어요.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보이지 않는
위대함에 견주어보면..."
장미 꽃잎 한장을 표현해도
빨간 내 사랑의 핏빛이 잠긴 눈물...이라는 둥
뭔가 수사적인 노력이 가득 담겨 있어야
시라고 끄덕였던 여고생의 눈에
그 시는 참 별것도 아니었어요.
이렇게 간단한 말은 나도 하겠다, 싶을만큼.
그런데 이말,
요즘은 공부해 놓은 필기보다
제 노트에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요.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보이지 않는 위대함에 견주어보면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보이지 않는 위대함에 견주어보면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보이지 않는 위대함에 견주어보면
보여줄 수..................
..................................
...........................
..................................
...........................
..................................
혹시 그 애에게 내 마음이 너무 많이 가서
무거워 놓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
혹시 그 애에게 내가 너무 막무가내로 뛰어가서
뒷걸음질 치게 하지 않기 위해서
너무 많은 생각 가운데 어쩌다 한번만,
그런데도 그 애보다는 몇 번이나 넘게
너무 잦은 생각 가운데 어쩌다 한 순간만,
그런데도 그 애보다는 몇 날이나 넘치게
그렇게 낮추고
접어두고 잘라내고 마름질하고
까만 색실로 박음질 해서 꽁꽁 잠궈두었거든요.
이만하면 보이지 않는 위대함을 절대 알아채지 못하겠지,
알아채지 못할 만큼 작은 마음만 보여줘야지, 라고
그 애는 전혀 알 수없는 노력을 얼마나 애써 해대는지요.
그래서 얼마나 자주 지치는지..
잊으려고 노력하려니 막상 지치지 않을 수 없겠지요.
마음을 숨긴다는 건 어렵잖아요.
마음은 몸을 떠나서 자꾸만 자꾸만 자라는데
어차피 어쩌지 못하는 마음의 키를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손도 발도 닿지 않는 틈으로
저혼자 저렇게 무럭무럭 자라는 키를
어차피 어쩌지 못하잖아요.
몇 번이고 써 뒀다가 보관함에 저장만 해 두었던 메세지를
어젠 용감하게..., 하긴 별로 용기낼 것 까진 없었어요.
자꾸자꾸 생각하다 보면 무엇에 대해서도 아무렇지 않아지는,
손가락 가는 일이 이미 내가 하는 일이 아니게 되는
그런 날이 있겠지요.
어제가 그런 날이었는지 그냥 별 마음 먹을 것도 없이
보관되어 있던 메세지를 꺼내서 그 애의 번호를 누르고
-번호도 그리 긴장하거나 꼭꼭 누르거나 할 필요가 없었어요-
전송을 눌렀어요.
"너를 좋아하는 게 자꾸만 미안해져.
내 감정을 너에게 강요하는 것 같아 너무 힘들다.
우리 각자 생각할 시간을 가져보자..."
아무 느낌이 나지 않았어요.
그앤 바로 전화를 했겠지요.
전 받지 않았겠구요.
답장이 왔었나봐요.
"네가 내 안에서 헤엄을 치든 뭘 하든
네가 내 안에 있다는 게 중요할 뿐야.
전화해 바보"
웃음이 났죠.
내가 뭘 해도 자기는 변하지 않을 거라는 기다렸던 대답에
바로 통화를 누를 뻔 했어요.
마음이 놓였죠.
고마웠어요.
너무 고마워서
전화기의 번호 버튼마다 고여 넘칠만큼
눈물을 닦고 또 닦았어요.
퇴근 길... 다시 전화가 왔죠.
긴 통화를 했어요.
어제는 일찍 자야되는데, 하는 볼멘소리도 없고
목소리도 평소에 보다 씩씩하고
단답형 대답도 하지 않고
묻지 않아도 하루동안 있었던 일을
재미있게 얘기해 주었어요.
내가 내 얘기를 좀 길게해도 피곤한 기색 하지 않고
오히려 일찍 자야되지 않아?, 하고 물었더니
15분쯤 더 있다 자도 돼, 하더라구요.
난 자꾸만 눈이 슬퍼지는 걸 알았어요.
여행중인 그애... 오늘은 경운기 탄 할머니를 만나서
포도송이도 얻어먹었다는,
껍질 째 씹어먹었는데 그런 포도는 처음이라는
조분조분 이어가는 그애의 목소리에,
손을 뻗으면 포도송이를 쥔 한낮의 그애의 손이
닿을 것만 같았어요.
눈을 감으면 그애의 그 일과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그 할머니에게 나도 그애와 같이 포도한송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꼭 그 포도를 얻지는 않아도
그애가 받은 포도를 나눠 먹으면서
껍질째 먹으면 맛있어?, 하고
따라해볼 수도 있었을 것 같았어요.
VJ 특공대를 보고 있어,
중국 어느 가정집 얘긴데
마루가 대리석이라서 애가 집안에서 인라인을 타고 다니네,
감탄을 해대는 목소리를 따라
한 글자, 한 글자를 발음하는 그애의 표정을 상상해 봤죠.
'V'라고 발음할 때와
'J'라고 발음할 때와
'특'이라고 발음할 때와
'공'이라고 발음할 때,
그리고 '대'라고 발음할 때까지,
그애의 안면 근육들은 그애의 얼굴을
얼마나 요리조리 쏘다녔을까요.
어쩌면 내 마음이 그애 얼굴의 구석구석을
닿고싶은 마음보다 더 재빠르고 날쌔게
갖가지 표정을 만들어 놓았을지도 모르죠.
그리움은 늘 괜한 생트집을 잡아서
죄없는 무정물들에게도 화를 미쳐요.
나는 그 애의 씩씩한 말투와 정돈된 하루 일과들을
귀담아 들었다기 보다
손 끝에서, 코 끝에서, 눈썹 끝에서
아찔아찔 어리는 위기를 감추느라 가슴이 무척 아팠었죠.
계절은 참 시립니다.
그 애와 함께 맞을 줄 알았던 단풍도
어쩌면 하나같이 혼자서 검붉은지요,
계절은 또 애틋합니다.
검붉은 단풍에 얼룩덜룩해져 숨죽인 폐부에
이렇게 그 애를 알아가는 것 같지 않니,
이렇게 그 애와 가까워지는 것 같지 않니,
거절할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여요.
너무 많이 이해하지는 않을 거에요.
하지만 너무 강요하지도 말아야죠.
이미 내 삶의 3할을 함께 한 사람,
그 애를 다시 한 번 기억합니다.
3할은 학교를 다녔고, 3할은 가족과 보냈다면
그리고 3할의 시간에는 그 애가 있었습니다.
애초에 그 애가 내 삶의 10할이 될 수는 없었어요.
나 또한 그 애의 삶의 10할이 되는 날은 오지 않을거죠.
우리가 서로의 삶의 전부가 되는 인연이었다면
이렇게 서로를 알고싶은 혹은 알아가는 기쁨은
시작도 없었을거라는 생각에 안도의 숨마저 쓸어 내려요.
어떤 연인에게나 여자와 남자에게는,
서로가 절대로 채울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부분을 욕심부리고 전부이지 못함을 탓하는 일은,
먼 훗날 서로의, 오래 터울진 삶 속에서
지금까지 함께 해 온 3할조차도
2할로 1할로.. 어쩌면 소숫점 이하로
그보다도 어쩌면 기억의 아주 미세한 티끌로
잊혀지게 하는 어리석음이 될 뿐입니다.
그 부분을 욕심내지 않고
그래서 더욱 알아갈 수 있는 것을 감사해 하는,
우리는 살면서 그런 사람을 바라지 않았었는지요.
그래서 지금의 3할이 4할로 5할로.. 늘어가고
먼 석양의 끝에서는 서로가 나누지 않은 시간이 잊혀지고 마는,
그런 연인이 되자고,
우리가 약속하는 영원이란 그런 것이 아니었는지요.
나는 어리석어요.
그래서 내 어리석음을 한없이 고백하게 하는
그 애의 넓은 품이 내겐 진실로 소중합니다.
지금 그 애의 품 안에 든 나의 양볼이
심술맞은 어리석음조차 잊을만큼 어찌나 너울대는지요.
밥 먹었니, 세숫물은 차지 않았니, 옷 따뜻이 입었니,
보고싶다, 어제 너 닮은 사람 봤어,
같이 듣고 싶은 음악이랑 같이 보고싶은 영화랑 많은데.., 라고
대신 하던 말들은 오늘은 좀 멀리 하고 싶습니다.
전화를 겁니다.
*** - **** - ****
그 애의 손이 목소리를 전하러 달려오는,
매일매일 일어나는 고마운 기적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심호흡을 하겠지요.
데미안, "여보세요--"
바다미, "저기, ...... ...... "
조금은 부끄러운 음성도 좋겠지요.
데미안, "어-,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
웃는 그 애의 표정이 후툭후툭 심장에 빗발칩니다.
바다미, "음, 공부 열심히 해서 정답도 찾았어."
데미안, "이야.. 공부하기 어렵다더니.. 뭘 찾았는데?"
영문도 모르는 그 애가 놀라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바다미, "........., 사랑합니다. "
조금 놀라더라도
영문을 아는 것보다는
영문을 모르는 목소리 위에
이렇듯 무책임하게 마음을 겹쳐놓을 때,
어쩌면 그 애가 더 행복할 것 같아요.
나로부터 행복해질 수 있는 그 애를,
어쩌죠..,
이렇듯 무책임하게
사
랑
합
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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