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 버튼 눌러야 음악 나옴다...이제 말안해도 알져..음악 듣다 졸지는 마시고..명상만 하옵소서..>
"너는 무엇으로 그림을 그리느냐..."
"나도 모른다....눈으로 보아 옮겨지는 것인지 마음으로 보아 그리 되는 것인지......"
"네게는 특별한 제주가 있다..."
종현이 히죽 웃으며 또 한잔을 비웠다.
"무엇이냐...그것이"
그의 얼굴에 정을 담은 미소가 번졌다.
"너는 천심을 가졌다....재주만 있어 가져지는 것이 아니니 내가 너와 마주하면 편한 이유가 그것일 것이다....사람들이 눈으로 보고 그 짧은 찬라에 머리로 전달해 버리는 그것들은 너는 심안으로 보고 영안으로 본다....그러니 니 붓끝에 닿은 그림속엔 영혼이 실려있다."
"나는 잘 모른다....너와 같은 귀품도 학식도 지니지 못하니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도 나는 모른다...다만....."
종현이 술잔을 내리고 효원을 깊이 응시했다.
"내가 몽매하지 않은 것이 이처럼 고마울 때 없었다.... 넘어설 수 없는 세상과 신분의 틀에 포박돼 인생을 감당할 기력조차 없이 지지멸렬하게 나를 방치했었다. 그런 내 포박을 니가 풀었다. 배워 깨달아 지는 것이 많을수록 허망해지는 삶이 나는 견딜 수 없이 억울하고 서러웠다. 천한 신분에게 얻어지는 깨달음은 죄악이나 마찬가지다. 세상이 뒤집히지 않고서는 바꿀 수 없는 일들이 가슴에 한처럼 쌓이고 내 목을 조였다. 배우지 말아야 했고 눈뜨지 말아야 했다"
그가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고 종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 속에 세선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 시선이 너무도 몽환적이어서 세속에 살고 있는 신선처럼 그렇게 느껴졌다.
[얻어서 한이 되는 그것들을 니가 귀하다 했고 귀품 있다 했다....
너와 마주 앉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내가 몽매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 했다.
니가 알아주는 그것으로 산처럼 버티고 있던 그 원망들이 사라졌다.
그래서....
너를 기다렸었다]
"내가 너로 인해 마음을 쉬었고 니가 나로 인해 원망을 버렸다면.....
우리는 서로의 기운을 얻어가진 것이다....
나는 그것이 수만 가지를 말해 가져지는 친교보다 더 깊고 귀한 것이라 여긴다.."
종현이 얇게 웃어 보이며 그의 말을 받았다.
"그래서 말하지 않는 것은 굳이 묻지도 말라는 말이냐...."
그의 몸이 느슨해지고 얼굴에 홍조가 돌았다. 술병을 들어 종현에게 술을 따르던 그가 술병을 흔들어 보였다. 이미 세병 째 술이 비워지고 있었다. 종현은 때를 놓치지 않고 술상을 물릴 말미를 잡았다. 그가 거침없이 술잔을 비우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고 있었다.
"오늘 마무리를 지어볼까 했는데 아무래도 무리인 모양이다...산을 오른지가 나도 까마득해서 몸이 쇠 덩어리처럼 무겁다...오늘은 이만하고 내일 이어보자..."
그가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머금고 종현을 보았다. 아마도 종현의 의도를 다 읽고 있는 듯 보였다.
"검은 잡아 보았느냐..."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 아직 손에 익지 못했다"
"내일은 검술을 한수 알려주마..."
종현이 상을 물리고 이부자리를 폈다.
"그냥 두어라...."
종현이 말없이 그의 이부자리를 살펴주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 잠시 그의 방문을 바라보다 뒷채를 돌아 자신의 방에 앉았다. 쉬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봇짐에서 집필묵을 꺼내 먹을 갈았다.
[내게 보이는 세선 같은 미소 뒤에 태산처럼 버티고 선 너의 고뇌가 내 손끝을 붙잡고 놓지를 않는다. 척박하기 그지없던 황무지에 한여름 쑥대풀처럼 무성하게 염원이 자란다...
나는 두렵다....
너무 좋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늘 함께 있는 법이니....
환희와 두려움이 늘 나와 함께 있다.]
문틈으로 새어든 산사의 아침이 무거운 종현의 몸을 부드럽게 흔들어 깨웠다. 늦게까지 뒤척이며 잠들지 못하다 겨우 새벽빛을 보고서야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곤한 잠속에서 또 다시 그를 만나 묻지 못한 얘기들을 나누며 끝도 없는 산길을 걸었다. 종현은 깨어나서도 그 꿈을 털지 못하고 잠시 그렇게 여운을 붙잡고 있었다.
[도곡선에서 산복숭아 꽃비를 맞으며 너와 마주했다.
얼음 같은 계곡 물을 떠 올려 보니 혀에 감기는 화주이고 한 잔 목을 추이니
시가 절로 목을 타고 나와 지나던 바람 한 점마저 붙잡아 희롱한다...
너무도 가벼운 육신에 아무런 시름이 없어...
사뿐히 내려놓는 걸음이 날개를 접어 앉는 나비인 듯 한가롭다.
멀리 산길의 끝이 보이고 희뿌연 빛줄기가 몸에 와 닿는다....
또 다시 무거운 육신의 뒤척임을 느끼고 이어고 산길의 끝에 섰다. 꿈이었구나...
잠시 한 마리 나비인 듯 육신의 무게를 버려....
바람처럼 흘러 다니든 호접몽이었구나....]
이미 해가 중천에 오른지 한참이 되어 있었다. 방문 앞에 절복이 얌전히 놓여있었다. 종현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소세를 했다. 뒤채를 돌아 나오는 길에 가까운 거리인 듯 한 곳에서 검이 부딪히는 쇠 소리가 깊은 산의 정적 속에 묻혀 들려왔다. 종현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산길을 밟아 내려갔다. 그가 시종과 검술을 연마하고 있었다. 도포를 벗고 절복으로 갈아입은 그의 모습이 한결 가볍고 힘차 보였다. 종현을 본 그가 눈으로 반가움을 보내고 잠시 후 시종과의 겨루기를 마쳤다. 시종이 다가와 진검을 종현에게 건내 주었다. 그가 그것으로 시작해 보라는 뜻을 눈으로 전했다.
"이것으로 하라는 것이냐..."
종현이 놀라 되묻자 그가 얇은 미소를 입가에 걸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 너머로 동냥질해서 익힌 것이다...아직 검이 손에 익지도 못한 신력인데 어찌 이걸로 하자는 것이냐..."
"마음먹기에 따라서 목검과 진검은 차이가 있고 없음이다......"
"그래도 지금 신력으로는 검을 잡는 것은....."
그가 허공에 검을 한번 휘둘러 보였다. 더 이상 종현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혹여 그 검에 내가 베일까 염려되느냐...."
그의 말속에 담긴 농을 종현이 모르진 않았으나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농을 할 만큼 자신의 검술을 믿고 있었고 종현은 정도가 없는 자신의 검이 두려웠다.
"그날 내가 그리 졌지만 무지랭이의 본능이 더 날카로울 수 있다..."
"사정을 두지 마라....그러면 다칠 것이다...목검을 휘두르든 그 마음으로 전력을 다해 보아라..."
종현이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수만 가지 감정들을 그 칼끝에 실었다. 종현의 검이 그를 맞아 몇 번의 몸살을 앓고 허공을 가르며 물러나기를 되풀이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검을 잡은 손이 조금씩 몸과 합일이 되어 갔다. 하지만 쉽게 칼끝에 힘을 실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런 종현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이번에도 니가 손에서 칼을 놓는다면 나는 한동안 술벗을 잊을 것이다.. 그러니 너는 너의 모든 수를 풀어서 내게 덤벼야 할 것이다.."
그가 갑자기 칼끝에 힘을 싫어 종현을 밀어 붙혔다. 종현도 더 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었다. 종현이 사뿐히 발을 옮겨 몸을 빼돌렸고 검을 잡은 손끝에 온몸의 사력이 모이고 있었다. 자신의 짧은 신력은 어찌해도 그에게 들킬 것이니 칼을 놓쳐 그와 마주하는 기회를 읽고 싶지는 않았다. 종현은 자신도 모를 힘을 얻어 그의 춤사위 같기도 한 검술을 본능적으로 몸에 싫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것을 버리고 한순간 그의 검법을 풀어냈다. 순간 종현의 칼끝이 그의 어깨 아래를 스쳤다.
순식간에 일어난 사태에 지켜보던 시종이 하얗게 질려 달려들었고 종현은 얼어버린 듯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도련님...."
그가 손을 내저으며 도진을 세웠다.
"괜찮다....살짝 스친 것뿐이다..."
종현이 그에게 다가가려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검을 보았다. 칼등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 순간 온 몸의 기운이 풀려 다리가 떨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