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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율(礎律) 제 30화

피바다 |2004.11.21 22:22
조회 401 |추천 0

  " 그래서...그녀는 어찌 되었습니까?"

 설무랑은 이야기 도중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 음...뒷 이야기는 자네의 상상력에 맡겨두겠네."

 천제는 잔뜩 설무랑의 호기심을 자극해 놓은 상태에서 무책임하게 이야기의 끝을 얼버무렸다.

 " 그녀가 반란군 수장의 연인이었다면 이야기를 마무리하는데 조금 도움이 되겠나? 연인을 죽인 남자와의 로맨스? 결말이 꽤나 흥미롭게 나올 것 같군. 이건 자네 몫이야."

 " ........."

 " 이거 술이 얼마 남지 않았군."

 천제는 술병을 살짝 흔들어 남은 술의 양을 가늠하면서 투덜거렸다. 그리고 한 모금 입안에 털어넣으면서,

 " 이젠 자네 이야기를 듣고 싶군."

 천제는 설무랑을 곁눈으로 쳐다보며 분위기의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설무랑은 기다렸다는 듯 서슴없이 이야기를 시작하였는데, 그 전에 대뜸 천제에게 질문부터 던졌다.

 " 전하, 히비어의 꽃말을 알고 계십니까?"

 ".......선택 혹은 스스로 찾은 행복이지."

 설무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제는 비교적 꽃말을 잘 알고 있었다.

 "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전하께서 좋아하실 듯하옵니다."

설무랑은 꽤나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이에 천제는 만족스러운듯,

 " 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일세. 자자, 이제 뜸은 그만 들이고 시작해보게나."

 " 저도 들은 이야기인지라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아는 바가 없사옵니다. 전하께서 판단하셔야 할 듯 하옵니다."

 " 그러도록 하겠네."

 " 수라계의 지배층에 관한 이야기지요. 수라계의 역사는 새 왕족이 탄생할 때마다 새로 쓰여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항상 왕족은 둘로 시작해서 둘로 끝난다지요."

 천제의 눈빛이 빛났다. 베일에 쌓인 수라계에 대한 이야기는 천제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사실여부를 떠나서 설무랑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느 책에도 쓰여진 바가 없는 수라계의 비밀스러운 부분이었고, 천제는 그런 희귀한 소식에 기대를 가지고 이야기를 들었다.

 

 수라계의 계급은 몇 단계로 철저히 나뉜 천계나 마계의 계급과는 달리 단 두 계급으로 나뉜다.

  최상층엔 지존인 수라왕과 그, 혹은 그녀의 배우자인 귀왕(貴王)이 있고 그 밑으로는 아무런 서열도 없이 그저 수라왕과 귀왕을 군주로 모시는 수라족일 뿐이다. 심지어 수라왕의 자식들조차 어떤 특권도 가지지 못한 채 아래층인 수라족에 포함될 뿐이다. 수라계의 생존 법칙은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라 수라왕의 자식이라도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먹혀 사라질 뿐이었다.

  물론 수라왕에게도 자식에 대한 본능적인 애정은 존재했지만 그것과 생존 규율은 달랐다. 그는 자식들의 생존과 죽음 사이에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모든 것을 스스로에게 맡겨둘 뿐이었다. 결국 수라족들은 자기 힘으로 살아남는 것 말고는 어떤 방도도 없었다.

  수라왕의 자식들에게 일반 수라족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다음 세대의 수라왕이 될 수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다음  대(代)의 수라왕은 수라왕의 자식들 중에서만 나오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선대 수라왕이 공포를 할때까지 어쨌든 살아남아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수라계의 새로운 역사는 단 둘의 왕족으로 시작된다. 그것이 수라계가 살육이 판치는 자신들의 세계를 유지해나가는 비밀이었다.

  선대 수라왕은 스스로 자신이 물러날 시기를 결정했다. 그 시기에 앞서서 선대 수라왕은 자식들 가운데 가장 강하다고 생각되는 한 명을 후계자로 지명하여 공포를 한다.

  " 수라계에서 후계자가 지명된다는 것은 그리 큰 의미는 없습니다. 천계나 마계처럼 후계자가 왕이 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지요. 그것은 단지 수라왕의 자식들, 즉 형제들간의 전쟁의 서막일 뿐입니다."

 설무랑이 말했다.

 " 역시나 독특한 곳이야, 수라계는...."

 천제가 덧붙였다.

 후계자가 공포되는 즉시 선대 수라왕의 자식들간에 동맹이 맺어지는데 남자와 여자 한 쌍으로 맺어지는 동맹이다. 이렇게 동맹을 맺는 순간부터 두 남매는 같은 운명의 배를 타게 된다. 둘은 같은 편으로 다른 형제들과의 전쟁을 시작한다. 전쟁을 치뤄내며 같이 죽거나 같이 살거나 항상 함께다. 그리고 최후에 둘 중 하나가 수라왕이 되었을 때 동맹을 맺었던 남은 하나는 귀왕으로 등극하면서 부부로써 수라계의 새로운 지배층이 형성되는 것이다.

 " 수라왕이 된다는 것은 생존 이상의 의미입니다."

 설무랑이 넌지시 비밀 하나를 꺼냈다.

 " 천계와 마계가 모두를 합친 수라족보다 오히려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바가 없는, 어쩌면 단지 수라족이 지어낸 전설일지도 모르는 수라왕을 두려워하는 이유를...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천제의 얼굴에 잠깐 어두운 기운이 스쳤다. 원초적인 공포와 금기 사항에 대한 두려움의 흔적이었다.

  " 그의 힘...이지. 끝을 알 수 없다는 태고의 힘. 그것은 모두가 갖고 싶어하는 욕망의 끝이지도 하지. 절대적으로 강한 힘 말이야."

 " 그렇습니다. 그 태고의 힘이 바로 그들의 계승 과정에 있는거지요."

 " 왕위 계승식에?"

 " 수라왕은 왕이 되는 과정에서 형제들 간의 전투를 벌인다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과정에서 패배한 혈족들을 모두 먹어치우지요. 그들의 영혼과 함께 그들이 가진 힘까지 말입니다."

 "............!"

천제는 뜻밖의 진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 수라왕의 자식들은 천성적으로 강한 자들입니다. 수라왕이 가진 절대적인 힘의 일부가 그들에게 나누어 전해지니까요. 강한 자들에게 계승식의 유혹은 뿌리치기 힘든 것입니다. 살아 남는 것 이상으로, 절대적인 그 힘을 가질 수 있다는 매력이 있지요. 그들은 단 하나가 남을 때까지 싸웁니다. 그것이 강한 자들의 욕망이지요."

 "........흠.."

 천제는 알 것같다는 표정이었다. 강한 자들은 언제나 더 강한 힘을 갈구하는 것이 본능이다. 그는 그 점을 충분히 이해했다.

 " 하지만 그들은 군대를 끌고 전투를 벌이지는 않습니다. 원칙은 일대일. 자신들 본연의 순수하고 원시적인 능력만으로 전투를 벌입니다."

 천제는 이 놀라운 이야기에 심장이 마구 뛰었다.

 대를 잇기 위해 이성의 단 한 명만 살려둔 채, 모든 형제자매를 죽여 그 영혼과 힘을 흡수해버린다는 수라왕족의 계승식. 둘로써 새로운 역사를 시작한다는 설무랑의 말 뜻을 알 것 같았다.

  선대 수라왕이 자식을 낳으면서 분산된 태고의 힘은 계승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스레 후대 수라왕에게 모이게 되는 셈이었다. 그리고 혈족들이 모두 제거 되어버리면 천계나 마계처럼 혈족간의 권력다툼이 생길리도 없었고 완벽한 지배구조가 완성되는 것이었다. 수라계가 자신들의 계를 유지하는 이 철저하고 소름끼치는 방식에 천제는 전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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