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우..."
태준이 무겁게 한숨을 토해내며 자신의 매장에서 헤네시 한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미 문을 닫고 마감시간이 지나있는 때라 매장에는 매니저인 한지석외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태준의 머리속은 아까 유채와 주고 받았던 이야기들로 미칠만큼 복잡했다. 어쩌자고 이성을 잃고 온갖 독설을 잔뜩 지껄여버린걸까? 자신이 유채에게 내뱉었던 온갖 추악한 단어들을 떠올리며 태준은 머리카락을 쥐어 뜯었다. 누군들 이런 날 좋다고 할까...
"사장님."
매장의 매니저인 한지석이 태준의 옆으로 다가왔다.
"어."
태준이 힘겨운 눈으로 지석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만 드시죠."
"......"
책망하는 듯한 지석의 말에 태준이 시선을 이내 술잔으로 떨구었다. 붉은 꼬냑이 태준의 손안에 쥐어져 휘청휘청 흔들렸다.
"난... 헤네시가 제일 좋더군."
태준의 검은 정장의 원단에 섞인 푸르스름한 기운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불빛으로 묘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차가울만큼 날카로운 얼굴 선을 가진 태준의 외모와 푸르스름한 정장,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붉은 꼬냑... 그 기묘한 조화로움에 지석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많이 취하셨습니다."
"알고 있네."
"대리 운전 불러놓겠습니다."
"이봐, 한지석..."
"네."
태준이 사람을 꿰뚫는 듯한 눈빛으로 지석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자네는... 사귀는 사람이 없나?"
"네."
"왜지?"
"...그럴 시간이 없었습니다."
"아..."
태준이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그래, 자네와 나... 우린 시간이 없었지. 그만큼 바빴으니까..."
그랬었다. 메이플 레스토랑을 시작하면서 태준과 지석은 정말 삶의 모든 것을 걸어서 최선을 다해왔었다. 그래서 차마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질 만한 시간조차 없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자네는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있나?"
"......"
지석은 말을 아꼈다. 자신의 감정에 대해 지석은 태준에게 어떠한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지석은 바보가 아니었으니까...
"전에 같이 오셨던 그 여자분 때문에 그러십니까?"
"전에? 아... 이유경을 말하는가보군. 아냐, 자네는 아직 못 본 여자야..."
"그런가요."
태준의 말이 길어질 듯한 분위기를 자야내자 지석은 의자를 끌어 태준의 앞에 앉았다. 지석이 의자에 앉자 태준이 빈 잔에 붉은 헤네시를 잔뜩 부어주었다. 그 과도한 양에 지석은 태준이 아주 많이 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떤 여자이길래 이렇게 사장님을 힘들게 하나요?"
"어떤...?"
지석의 질문에 태준이 피식 소리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 차갑고도 쓸쓸한 미소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태준의 괴로움을 전달할 수 있었다.
"자네 제주도에 가 본 적이 있나?"
"예."
"그럼 유채꽃도 본 적이 있겠군."
"예."
"그 여자는 유채꽃같은 여자야. 그래서 이름도 유채야. 그 조그만 꽃이 강렬한 노란 색으로 보는 사람의 정신을 쏙 빼놓지. 딱 그래... 그래서 정신을 못 차리겠어..."
태준이 눈빛은 금새 유채꽃밭에 파묻힌 듯 묘한 감상에 젖어들었다가 이내 쓸쓸한 바람에 흩날리는 갈대마냥 흔들렸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이 실제로 존재할꺼라 난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 그런데 생각해보면 난... 유채에게 첫눈에 반했던 것 같아. 처음 보자마자 막무가내로 시비를 걸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말이지. 글쎄 내가 화장실 갔다가 나오는 여자를 화장실 문 앞에서 지키고 있다가 시비를 걸었다면 믿겠나?"
"설마요..."
"술도 취하지 않은 맨정신에 미쳤던거지. 후후..."
태준이 헤네시를 한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태준이 신뢰하고 있는 한지석이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가능한 것이었지만 도통 사람들과 이런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는 태준에게 맨정신으로 떠든다는 것은 또 하나의 괴로움이었다.
"원래 사랑은 제정신으로는 못한다 하더군요."
"그런가? 후후... 난 메이플을 성공시킨 후 정말 나에게 덤벼드는 여자들을 피해야했었네. 내가 아닌 우리 집안과 나의 돈... 그런 것만 보고 있는 여자들이 세상에서 젤 한심해보였었지. 그런데, 왜 유채는 달랐을까... 왜 달랐을까...?"
태준은 지석이 아닌 자신에게 질문을 하고 있었다. 달랐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유채는 유경과도 달랐다. 단순히 자신의 얼굴과 몸매를 믿고서 온갖 착한 척을 떨어대는 가증스러움과 달리 유채는 비싼 것만 보면 눈을 반짝였고 부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태준의 앞에 스스럼없이 드러냈다. 태준이 심한 말을 퍼부으면 눈물을 떨구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태준에게 심한 말을 되돌려 주었다.
그러고 보니, 단 한번도 유채는 태준의 앞에서 낮은 자세를 취한 적이 없었다. 늘 뻔뻔할 정도로 유채는 누구에게나 당당했다.
"사랑에는 어차피 이유가 없는거 아닌가요?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가 사라지면 사랑이란 감정도 사라지는건데... 사랑이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감정일까요?"
지석은 태준의 질문에 반문을 했다. 태준은 지석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시작에는 이유가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것들이 사라진다고 해서 유채에 대한 이 감정이 멈출 수 있을까? 태준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래...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가 않으니 내가 지금 술을 마시는것이겠지."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 깊은 침묵이 흘렀다. 어떨 때는 침묵이 그 어떤 말보다 강력한 효력을 발휘하고는 한다. 태준은 지금이 그런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가만히 지금까지 유채와 있었던 일들이 하나씩 지나갔다. 분명 유채가 태준을 받아들였던 때도 있었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태준에게서 뭔가 불만을 강하게 표출하고 그대로 등을 돌려버리고는 했다. 분명 지금까지는 그런 일들의 반복이었다.
"사장님, 그만 일어나시죠."
지석의 말에 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더이상 술을 마신다는 것도 무리였다. 이미 취할만큼 술은 적당량 이상으로 올라있었다. 지석이 먼저 의자를 밀고 일어나서 태준의 뒤로 가서 의자를 손으로 잡았다. 몸에 배인 직업적 습관이었다. 의자에서 일어나려던 태준의 몸이 순간 휘청였다.
"이런!"
당황한 지석이 서둘러 쓰러지려는 태준을 부축했다.
"갑자기 일어서니 어지럽군."
태준이 지석의 부축으로 발을 땅에 디디며 중얼거렸다. 앉아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일어서니 갑자기 술이 확 오르는게 제대로 취한 모양이었다.
"절 붙잡고 걸으십시오."
평소에 그렇게 군더더기 없을 만큼 깔끔한 태준이 이렇게 취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지석에게 무척이나 낯선 일이었다. 지석은 태준을 부축한 채 걸음을 옮겼다.
태준은 이미 취해있었고, 지석은 취한 태준을 신경쓰느라 둘은 자신들을 향해 돌아가는 카메라 셔터와 누군가의 인기척을 인지할 수 없었다.
* * * * *
깜빡... 깜빡...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깜빡이던 샐리가 또렷해져오는 얼굴 하나에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아, 깜짝이야! 이게 무슨 짓이야?"
샐리가 벗겨진 상체위로 이불을 끌어당기며 태민에게 소리쳤다. 간밤에 기억이 어릿어릿하게 머리속을 스치고 있었다. 어제... 아웅다웅 싸워대던 샐리와 태민은 술을 마시게 되었고 서로 질세라 계속 주고받고 하다가 순간 찌르르하면서...! 아차 싶은 생각에 샐리는 마음속으로만 애꿎은 머리를 홀랑 뽑았다 도로 심었다를 수차례 반복했다.
"그냥 자는 얼굴 보고 있었지..."
태민의 온화한 표정과 어울리지 않는 말투에 샐리는 어제 먹은 술이 역류하는 듯한 느끼함에 인상을 찡그렸다. 이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란 말인가...!
"너 미쳤어? 아니면 어디 아파? 간밤에 별로 힘 쓰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디 이상해진 거 아냐?"
샐리가 냉랭하게 소리치자 태민이 얼굴은 처참하게 구겨졌다. 그래, 이제야 김태민 같군. 쏘아붙여~ 그래야 싸우지! 샐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잔뜩 머금고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너야말로 어제 일을 다 잊은거야? 왜 여전히 틱틱거려?"
어제 일? 태민의 입에서 어제라는 단어가 떨어지기 무섭게 샐리의 머리속에서 발가벗겨진 남녀의 영상이 찰흙덩어리처럼 뭉쳤다가 떨어졌다를 반복했다. 아악! 기억하고 싶지 않아! 술김에, 취중에 달콤한 사랑고백과 더불어 태민과 나누었던 뜨거운 키스의 기억이 샐리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술김에 있었던 일 같고 유치하게 왜 이래? 술 깨고 나서 술 취했을 때 이야기하는게 제일 나쁜거 몰라? 빨리 씻고 나가서 해장국이나 한그릇 말아먹고 헤어져."
샐리가 이불을 말아쥐고 화장실로 도망치려 폼을 잡아 태민이 재빨리 이불을 눌러버렸다.
"유치하게? 넌 이런게 생활이냐? 술 취해서 남자랑 하루 자는게 생활이냐고!"
"너 정말 유치하게 왜 이래? 그래, 술 마시고 마음에 맞고 좋아서 잤어. 그러면 된거 아냐? 뭐 어쩌라고 그거 갖고 질질 늘어지는거야? 여기서 나가는 동시에 깨끗하게 잊을테니까 우리 구차하게 이러지 말자고. 너랑 싸우는 것도 이제 재미없어."
"나도 재미없어!"
태민이 격하게 샐리에게 덤벼들다 샐리가 별 저항한번 제대로 못하고 맥없이 침대위로 벌렁 누워버렸다.
"뭐야!"
기묘하고 야한 자세에 샐리가 격양된 소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아직 두 사람 모두 옷을 채 입지도 않은 상태였다. 19세미만 관람불가의 야할 수 밖에 없는 자세였다.
"너, 술 마시고 남자랑 이런거 처음 아니지?"
"그러는 넌 처음이냐?"
샐리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태민에게 되물었다. 물론 샐리도 이 상황이 일상적인 상황은 아니었지만, 남자와의 잠자리가 처음은 아니었기 때문에 태민의 질문이 어이가 없었다. 대체 지금 나이가 몇개인데 처음이 아니냐고 묻느냔 말이다.
"처음이야."
샐리의 질문에 생각지도 못한 태민의 대답이 되돌아왔다.
"뭐?"
천재라고는 하지만 태민도 꽤나 노는 애로 소문이 난 한량이었다. 샐리는 예상치 못한 태민의 대답을 믿을 수 없었다.
"믿든 안 믿든 자유지만, 넌 나한테 첫 여자야."
"말도 안돼!"
"믿은 안 믿든 네 자유라니까!"
태민의 의외성있는 대답에 샐리는 어느샌가 웃고 있었다. 그냥 이유없이 웃음이 나왔다. 처음이라...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은 대답이었다.
"왜 웃어?"
"그럼 안 웃기냐? 니 나이가 몇개인데... 진짜 처음인거야?"
샐리의 눈동자가 반짝거리며 태민에게 강한 관심을 나타냈다. 그런 눈빛에 태민은 그만 와락 샐리를 껴안았다.
"젠장... 대체 딴 기집애들은 안 벗겨준다고 징징거리는데 넌 왜 이리 힘든거야?"
"뭐?"
중얼거리는 태민의 말을 샐리는 정확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샐리야..."
한참을 샐리를 끌어안고 있던 태민이 고개를 들어 샐리와 눈을 맞췄다.
"제발 그렇게 닭살스럽게 부르지 좀 마. 안 어울려."
"앞으로 익숙해져봐."
"뭐?"
뭘 익숙해지라는거야? 닭살을...? 아니 아까부터 얘는 왜 계속 개풀 뜯어먹는 소리에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다 못 알아들을 괴상막칙한 이야기를 해 대는거야? 간밤에 심하게 기운이라도 뽑아서 돌아버렸나? 하긴 어제밤의 정사가 보통은 아니었었지. 샐리의 머리속에 또 다시 어제밤의 뜨거운 기억이 다이너마이트의 뇌관처럼 반짝반짝거리며 타 들어갔다.
"우리 결혼하자."
그리고, 태민의 말 폭탄 선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샐리의 머리속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울려퍼졌다.
"뭐?"
"난 무조건 옛날부터 처음 잔 여자랑은 반드시 결혼할꺼라고 마음 먹었었어. 그러니까 니가 나 책임져."
"허거걱!"
샐리의 입이 일순간 떡 벌어졌다.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이 사태를 책임지라는거야? 원래 샐리의 성격상 구차하게 이런 일로 남자에게 책임지라고 매달리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한번 잤다고 남자보고 책임지라고 하는 것도 웃기지 않은가? 억지로 한 것도 아니고 자신도 절반의 책임소지를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샐리는 어제밤 일을 잊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자신에게 책임을 지라고 우기는 태민에게 샐리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런게 어딨어?"
"여깄어. 만약에 니가 거부하면 그냥 매스컴에다 발표해버릴꺼야. 넌 무조건 날 책임져야해."
엄마야~!
샐리의 표정은 생강을 씹은 사람처럼 떨떠름해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