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kiwi - 01
“혼자 티비를 보고 있는데 밥은 먹어 배는 부르지, 등은 따뜻하지. 눈이 스르르 감겨 오는 거야. 그때 누군가 초인종을 누른다. 몸은 천근만근 나가기 싫은데도 어쩌겠니 나가야지. 그래서 비척걸음으로 대문까지 걸어 나가. 그런데 막상 나가보면 길에는 아무도 없고 휑한 거야.”
둘째 언니는 자신이 결혼하지 못한 이유를 그렇게 설명했다. 똑똑 문만 두드리고 도망가는 나쁜 놈들 때문에 머리숱도 없는 노처녀가 되어버렸다고. 그 표현이 너무 근사해보여서 자신의 처지를 멋지게 표현만 할 수 있다면 나쁜 상황에 빠지는 것도 좋을 수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며 언니의 푸념을 오랜 시간 듣고 있었다.
그 때가 내가 고등학교 졸업 바로 전의 일이었다. 그 뒤로 언니에게는 몇 명의 나쁜 놈들이 더 있었는지 밤늦게 술 냄새를 풍기며 들어오는 일이 있었지만, 식구들의 늘상 있는 일이라는 반응 속에 잊혀져 갔다.
“나 결혼 할래!”
고스톱을 치고 있는 늙은 세 처녀들을 향해 말했다.
“아자, 쓸이야. 쓸. 자, 자 한 장씩 내놓으시고.”
“뭐야? 너 다 먹어라.”
“올해는 운이 좋으려나. 하하하.”
나의 폭탄선언은 셋째 언니의 싹슬이보다도 주목받지 못한 채 웃음소리에 묻혀지는 듯 했다. 하긴 이런 말 한 것이 처음도 아니니 예상은 했지.
그래도 말을 듣고도 화투장을 목숨인양 꼭 쥐고 있는 것은 적잖이 당황스러운 반응이었다. 말을 뱉었는데 아무도 주목해주지 않을 때의 기분. 오늘은 그 기분이 주눅이 아니라 오기와 닮아 있었다. 만약 그녀들이 만만하게 보이지 않았더라면 오기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그쯤에서 접었을 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그녀들의 모습이었다. 늘어진 츄리닝처럼 허벅지도 늘어져버린 큰 언니, 비싼 돈을 들이고도 눈가의 주름을 막아내지 못한 둘째 언니, 지수원 머리를 흉내냈다가 완전 아줌마가 되어버린 셋째 언니. 누가 봐도 만만하게 보았으리라.
그러기에 소리 한 번 더 쳐보자 마음을 먹었다.
“나 결혼한다구!”
“자, 큰 언니는 천 팔백원, 작은 언니는 피박이니까 팔이 십육, 삼천 육백원.”
“야, 그만하자. 쟤 얘기할 거 있나본데 그거 듣자.”
돈을 제일 많이 잃고 있던 작은 언니가 관심을 살짝 보이며 몸을 틀었다가 이내 셋째 언니에게 팔뚝을 잡히고 다시 패를 떼고 있었다.
‘때를 잘못 맞췄구나.’
때늦은 후회가 들었다. 시집가란 사람들의 말을 피해 친척집에 발을 끊은 지 5년째인 그녀들에게는 셋이 옹기종기 모여 치는 고스톱이 명절의 유일한 낙이자 이벤트였던 것이다. 한 명이라도 빠지면 배신이라는 룰을 암묵적으로 만들어 서로를 위안 삼고 있던 그녀들에게는 고스톱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서로에게 사명감을 부여한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언니들은 내게 같이 게임을 할 것을 권하지 않았고, 나도 그 무리에 낄 생각이 없었다. 비록 나도 집에서 그냥 처량하게 명절을 보낸다고 해도.
처음부터 그런 그녀들에게 결혼이란 단어는 들려도 들어서는 안 되는 단어였기에 나의 말에 무반응을 보이고 있구나, 하고 나름대로 해석해 보았다.
단어를 바꿔서 말을 해볼까 생각을 하며 적절한 단어를 찾아 조합을 하는 중에 큰 언니가
“키위야! 커피 좀 타와.”
라고 대뜸 한 마디 뱉는 바람에 할 말이 없어져 버려 털래털래 부엌으로 향했다.
‘사실 나만 키위 같은가? 자기들도 다 키위 같으면서.’
어렸을 때는 그 별명이 지독히도 싫었다. 사춘기가 지나면서 나에게도 2차 성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슴이 봉긋해지고, 엉덩이도 커지고.
언니들이 많았기에 그리 당황스럽지 않았는데 어느 날은 거울 속의 내 모습에 놀라 ‘악’소리를 낸 적이 있었다. 식구들은 놀라 화장실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들어왔는데 왜 그러느냐고 묻는 식구들에게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놀란 식구들을 안심시키고 돌려보낸 후에 문을 잠그고 다시 거울을 보았다. 코밑에 거뭇거뭇 거리는 것이 수염이었다. 그 후 한참을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의심하며 보낸 기억이 있다. 나중에는 그냥 솜털이 많은 체질이라 그런 거겠지, 하고 말았지만.
비록 가족이었지만 터울이 있는 언니들에게 속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 터라 고민을 숨기고 매우 조심스럽게 처리를 했으나 예리한 노처녀들의 눈은 피할 수가 없었다.
“어머, 쟤 수염 났어.”
제일 먼저 발견한 큰 언니가 붙여준 별명이 키위였다. 물론 깍지 않은 털 난 키위 같다는 뜻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남자 동생을 두게 되었다며 즐거워한 언니들도 서로 모르게 했을 뿐 모두 수염이 나 있었다. 항의를 해볼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키위라는 어감이 나쁘지 않게 들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별명을 버린 후에 생길 다른 별명이 두렵기도 했다.
부엌에서 커피를 타고 쟁반에 담아 걸어오면서 본 그녀들의 모습은 작년보다도 더 슬퍼보였다. 왁자지껄 시끄러운 소리는 지워지고 슬픈 음악이 나오는 흑백 영화를 보는듯한 기분.
35, 34, 31이 숫자에 불과하다고 넘어가기에는 의미가 특별한 그녀들의 나이였다.
프림 두 스푼의 커피는 큰 언니꺼, 블랙 커피는 작은 언니꺼, 설탕 세 개짜리는 셋째 언니꺼 그렇게 커피 잔을 언니들 앞에 내려놓고 있는데 커피를 홀짝거리던 큰언니가
“남자 있으면 부모님 없을 때 일단 데려와 봐. 언니가 봐줄게. 우리 생각하지 말고 갈 수 있으면 먼저 가.”
라는 말했다. 이에 셋째 언니가,
“언니는 얘 이런 게 벌써 세 번째야. 또 속아주는 거야? 난 이제 결혼식장 들어가기 전에는 안 믿을래.”
라고 응수했다.
“아니야. 이번에는 진짜야. 내일 만나서 데리고 올게.”
“그 남자가 결혼하재?”
둘째 언니가 조금 관심을 갖고 물어왔다.
“그럼.”
아직 현상 오빠에게는 결혼이란 말을 꺼내지도 않았지만 내일은 일이 잘 될 거라고 믿었다. 모든 준비도 완벽했다. 만약을 위해 결혼 보증서도 작성해 놓은 것이다. 결혼 후 일년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무 조건 없이 이혼을 해준다. 누구라도 솔깃할 것 같은 제안이지 생각하며 언니들 몰래 웃음을 짓고 있었다.
kiwi - 02
결혼이란 말에 현상 오빠가 놀라 죽는 줄 알고 나도 꽤나 놀랐다.
“결, 결혼을 하자고?”
“오빠 군대 갈 때 얼마 안 남았잖아. 군대가면 다들 고무신 거꾸로 신을까 걱정이라던데 내가 걱정되지 않아?”
“넌 이제 갓 스물 하나된 거고, 난 이제 스물 둘이잖아.”
현상 오빠는 기대하고 있는 내 기분을 깨며 나이 이야기를 꺼냈다.
“결혼하는데 나이가 문제 되나? 어차피 오빠는 군대 갈 거니까 제대하면 스물넷이잖아. 지금 결혼하나 그 때 결혼하나 군대에서는 시간이 절로 간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그래도 결혼은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굉장히 복잡한 문제라고.”
“혹시 나랑 결혼하기 싫어?”
나의 돌발 질문에 오빠는 대답이 없었다. 사실 대답을 못하고 있는 현상 오빠의 기분을 알 것도 같았다.
예전에 초등학교 동창인 기랑이와 단둘이 밤늦게까지 술을 마신 날이 있었다. 꽤나 많이 먹었는지 속이 불편했지만 좀 참아보자 했는데 기랑이의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면전에서 구역질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기랑이는 내 등을 두드리다가 느닷없이 ‘내가 그렇게도 싫으냐’ 라며 농담 섞인 질문을 던졌다. 취중이었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나의 마음을 확인하려고 최대한 용기를 낸 질문이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마음에 없지는 않았지만 정말 좋아하는 감정이 있는지 확신이 없었기에 대답을 하지 못했었다.
오빠도 지금 그런 혼란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그 혼란을 내가 잡아 주어야 한다. 사명감을 가장한 집요함으로 한마디 던졌다.
“오빠도 내가 싫은 건 아니잖아. 그래서 내가 준비한 게 있어.”
‘싫은 건 아니지.’ 편리함에 요즘 들어 자주 쓰는 말이었다.
늦은 밤 친구가 전화를 걸어 남자 친구에 관해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번갈아 이야기하며 나의 수면 시간을 갉아먹을 때 ‘너도 싫지는 않잖아.’ 이 말 한마디면 최소 한 시간은 더 잘 수 있게 해주었다. 거기에 ‘일단은’ 이란 말을 붙어 잘 만나봐. 거리를 둬 정도의 말을 해주면 그 친구는 정말 좋은 충고를 들었다는 듯 고맙다는 말을 하며 얌전히 전화를 끊어준다.
정말 시기적절하게 말을 잘 했다고 생각하며 가방에서 준비해온 종이들을 꺼내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읽어 봐.”
“이게 뭐야?”
“결혼 보증서.”
“결혼 보증?”
“결혼 한 지 일년 안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위자료 없이 그리고 어떤 요구도 없이 즉시 이혼을 해 준다 그런 내용이야. 자세한 건 읽어봐.”
현상 오빠는 탁자 위에 내려놓은 문서들은 거들떠보지 않은 채 기가 찬다, 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표정은 점점 예전에 결혼 이야기를 꺼낼 때 볼 수 있었던 남자들의 표정으로 변해갔다. 싸늘함. 적절한 냉소.
“좀 황당하다.”
“일단 읽어봐. 오빠에게 유리한 이야기만 써있어. 손해될 건 없을 거야.”
“이런 거 읽을 생각 없다.”
현상 오빠는 내가 3일간 노력하며 작성한 결혼 보증서를 네게 휙 던져 버렸다. 묶어 놓지 않았던 석장의 종이들은 내 얼굴에 그리고 허공에 흩어져 버렸다. 오빠도 내가 맞은 것은 예상했지 못했던 일인지 짐짓 당황해하며 종이들을 줍기 시작했다.
“미안해.”
그리고 종이들을 모아 나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나쁜 놈.”
“뭐?”
“내 시간을 갉아먹고 있었어.”
“얘 참 이상한 소리를 하네. 누가 니 시간을 갉아 먹어. 내가 너 억지로 만나자고 끌고 왔니? 너도 좋으니까 만난 거 아니야?”
“결혼할 생각도 없으면서 만났잖아. 그게 시간을 갉아먹는 거 아니고 뭐야? 오빠가 정말 그럴 줄 몰랐어.”
“나도 너 이럴 줄 몰랐다. 어떻게 된 얘가 도매급으로 자신을 넘기려고 하니? 너 싸구려야?”
“싸구려?”
“지금 니 행동 진짜 싸구려같애. 결혼할 생각 없지 않았지만 있던 것도 다 없어져 버렸어.”
“핑계 만들지 마. 어차피 너는 군대 갔다 올 때까지 기다려라, 돈 벌 때 까지 기다려라하며 결혼할 때 되면 비겁하게 도망갈 그런 인간이야.”
“너? 그런 인간? 마지막이라고 막 나가는 거냐?”
“그래. 어차피 너와 나 이제는 상관없는 사람이잖아.”
“결혼 안하면 아무 상관없는 그런 사람 되는 거냐?”
“그럼. 이제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는데? 왜 친한 오빠 동생 할까?”
“야. 됐다. 너 같은 동생 필요 없으니까 이만 우리 찢어지자.”
“그래. 더 이상 내 시간 뺐지 말고 당장 헤어져.”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우리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향했다.
“니 건 니가 내. 내건 내가 낼 테니까.”
내 것까지 계산을 하려던 현상 오빠, 아니 현상이는 웃기지도 않다는 듯 쳐다보았고, 나는 내 계산만을 끝내고 서둘러 밖으로 나와 버렸다.
이번에도 똑똑 문만 두드리고 도망가는 나쁜 놈을 만난 거구나. 세상엔 왜 이리 나쁜 놈들이 많은 거야? 언니들이 시집 못간 건 언니들 잘못이 아니야. 다 이상한 남자들 때문이지. 그래도 현상 오빠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네. 최소한 군대 다녀와서 하면 안 되냐고 말할 줄 알았는데. 아직 명단에 3명이나 남았으니 괜찮아. 분발하자.
예정대로라면 현상 오빠와 과일 바구니라도 하나 사들고 가야 할 길을 혼자 걷고 있었다. 남자와 멋지게 등장할 나를 기다리고 언니들의 빈정거림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지금 내 기분은 누구보다도 언니들이 잘 알아줄 것 같았고, 그 빈정거림을 듣다보면 오히려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아 집으로 가는 발걸음에 힘을 실었다.
“혼자야?”
문을 열어준 셋째 언니가 물었다.
“보면 몰라?”
괜한 성질을 내고 들어오는 나를 언니들 셋은 박장대소를 하며 반겨주었다.
“너 오늘 데리고 오려던 애가 걔지? 저번에 사진 보여줬던 눈 째진 애. 내가 그럴 줄 알았다.”
“눈이 째졌어? 그런 애들 중에 성격 이상한 애들 많지. 혼자 오길 잘했다. 얘.”
둘째 언니 말을 큰 언니가 받았다.
“성격이 이상하니 키위 같은 애를 좋아서 몇 번이라도 만났겠지. 털 난 여자애를 만나기가 쉽나?”
웃기지도 않은 셋째 언니 말에 언니들은 또 까르르 웃었다.
“그 이상한 얘, 너 소개시켜 달라고 해. 이상하니 널 만나줄지 아니?”
셋째 언니에게 건넨 둘째 언니의 농담에 또 까르르.
그녀들은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까르르거렸다.
‘저러니 시집들을 못가지.’
그녀들의 썰렁한 농담은 셋째 언니의 핸드폰이 울려대면서 잠시 중단되었다.
“여보세요. 뭐? 누구라고? 견서루? 너 오랜만이다. 웬일이니?”
서루 오빠? 견서루.
셋째 언니의 먼 학교 후배로 고등학생 시절 잠시 나의 과외 선생이었던 사람.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깨닫자마자 개인 사정으로 한달밖에 과외를 못하게 됐다며 마음을 고백하기도 전에 멀리 떠났던 남자. 태어나서 처음으로 예비 신랑감으로 생각했던 사람.
‘연락이 끊겼다던 서루 오빠가 언니에게 연락을? 이건 둘이 결혼하라는 신의 계시야.’
일부러 그런 자기 최면을 걸지 말자 생각하면서도 운명처럼 느껴지는 강렬한 느낌은 버릴 수가 없었다. 언니의 통화에 귀를 기울이며 마음속으로 결혼 후보 명단에서 현상 오빠를 지워내고, 서루 오빠를 맨 상단에 적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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