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 반칙사랑 - 11. "그녀는 죽었습니다"

나비 |2004.12.02 22:28
조회 2,638 |추천 0

** 반칙사랑 - 11. “그녀는 죽었습니다.”


졸업을 하고 결혼을 두 달 앞둔 추운 봄날이었다. 좋지 않은 성격이었는데도 운이 좋았던지 면접관이 내가 쓸만하다고 판단을 했는지 꽤 좋은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큰어머니의 바람이기도 했고 진이도 좋아하는 것 같아 불만을 갖지 않았었다. 이른 기상 시간만은 적응이 되지 않아 일요일은 늦잠을 자곤 했는데 그 날은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부족한 잠이 아쉬워 침대에서 빈둥거리고 있을 때 오후에 만나기로 한 진이에게 전화가 왔다.


“자고 있었지? 미안해.”

“괜찮아, 일어나 있었어.”

“웬일이야? 어제 일찍 잔 거야?”

“그런 건 아닌데 눈이 떠지더라고.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그게. 친구가 산에 가자고 전화가 왔어. 괜찮다면 거기에 가고 싶은데.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고등학교 친구인데 어제 밤에 통화가 됐거든. 어제는 그냥 끊었는데 지금 산에 같이 가자고 전화가 왔네. 오후에 만나는 것보단 좋을 것 같고 해서.”

“그럼 오늘은 못 만나는 거야?”

“아마도. 가도 괜찮아?”


조금 망설이다 말했다. 진이를 꼭 만나고 싶었지만 결혼 전에 친구를 만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래. 반가운 친구인 것 같은데 만나고 와. 밤늦게라도 볼 수 있음 보자. 전화해줘.”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끝내 내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진이가 차에 깔려 무참히 죽었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들은 건 그 다음날이었다. 전화가 되지 않던 그날. 난 전화를 하지 않는 그녀를 원망했었다. 결혼을 두고 고민을 하는 걸까, 동창이라던 친구가 남자가 아닐까 갖은 상상을 다했었다. 지금은 그녀도 내게 전화를 하고 싶어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를 원망하지 않는다.


미친 듯이 울었고, 항상 옷에 술 냄새가 뵐 정도로 술을 마셨다. 나중에는 먹고 싶어도 몸에서 술이 받지 않았다. 한모금만 넘겨도 구역질이 나와 먹은 술을 모두 뱉어내야 했다. 맨 정신으로 있을 때 진이에 대한 생각이 더 간절했다.


정신이 조금 들었을 때 바로 집을 나와 자취방을 구했다. 회사를 그만 둔건 물론이었다. 진이의 소식을 들은 날부터 회사에 나가지 않았고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친구 동현이는 지겹다고 하면서도 곧잘 술을 함께 마셔주었다. 내 생각에는 혹시 내가 죽어버리는 건 아닌가 염려했던 것 같다. 가장 값싸게 산 장판에 누런 신문지를 깔고 소주 두병과 참치 캔을 놓아두고 텔레비전을 보며 술을 마시고 있을 때 동현이가 집으로 왔다.


“또 소주냐? 오늘은 이거 마시자.”

“양주 갖고 왔어?”

“아니. 홍주야. 무지 독해. 너 먹고 죽으라고 갖고 왔다!”


그녀석이 소주잔에 따라준 홍주는 진이에게 끼워줬던 반지에 박힌 보석과 같은 색깔이었다. 슬프지 않고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밥 먹고 화장실가고 술 마시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 그런데 눈뜨면 살아있어. 사는 게 이렇게 쉬운데, 죽는 게 더 어려운데 어떻게 죽었을까? 질긴 게 목숨이라는데 너무도 간단히 죽어버렸어.”

“그만 좀 해라, 자식아. 정신 좀 차려. 너도 내가 보기엔 살아있는 것 같지 않아. 죽은 놈처럼 보인다고. 5개월 동안 청승 떨었음 됐잖아. 돈도 벌어야지, 아버지도 아니고 큰아버진데 돈 받아쓰기 좀 꺼려진다면서?”

“미친 자식아! 5개월 지나면 잊혀지는 거냐?”

“너 5개월만큼은 잊었어. 모르겠냐? 네가 생각해봐. 처음보다 지금은 마음이 덜 괴롭지? 잊혀지는 거야. 주저리주저리 떠들면서 술 마시면서 잊어가고 있는 거라고. 세상 문제는 두 가지면 다 해결돼. 돈 아니면 시간. 이후로는 시간에게 맡겨. 넌 할 만큼 했다고.”

“아니야. 아무것도 못했어.”

“결혼한 사이도 아니잖아. 이제 그만 좀 해라!”

“난 진이랑 결혼한 거야. 결혼식이 뭐가 중요해? 결혼을 하기로 했는데 두 달만 있음 했을 거라고. 그럼 진이가 두 달 있다가 결혼하고 죽었다면 더 슬퍼해도 되는 거냐? 난 그 애랑 결혼했다고. 진이도 그렇게 알고 있을 거야.”

“평생 혼자 살 거라는 거야, 지금?”

“당연하잖아. 내 인생에 이젠 다른 여자는 없어. 아마 내가 여자를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을 거야. 이 가슴 밑바닥에 끈끈하게 붙어있는 그 애를 뗄 수가 없다고!”

“세상엔 잊기 싫어도 잊혀지는 게 있지.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게 있고. 지금은 네가 전자쪽이라 해도 후자가 되는 날이 있을 거야. 그 땐 자책하지 말고 눈앞의 여자를 잡아. 산 사람은 살아가야 하는 거니까.”

“이 새끼야! 난 잊지 않을 거라고!”


그날 그렇게 소리를 쳤었다. 절대 진이 널 잊지 않겠다고. 하지만 너무나 일찍 내게 다른 여자가 나타났다. 한참 술에 빠져서는 혼자 술을 빚고 했던 나는 민속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민속주를 만드는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집안에는 조금 복잡한 일이 생겨 왕래를 거의 하지 않고 있었고 혼자 사는 것에도 적응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진이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진이의 그림자를 하나도 갖지 않은 여자였다. 날마다 조금씩 그녀에게 마음이 기우는 것을, 그녀도 날 의식하고 있음을 알았을 때는 무척 당혹스럽고 괴로웠다.


“퇴근안하세요?”


집에 가도 별로 할 일도 없어서 한참 야근을 즐겨 하고 있을 때 최근 들어 퇴근이 늦은 그녀가 물었다.


“예. 할 일이 좀 남아서요.”

“저도요. 에잇! 일은 왜 이렇게 많은 거야!”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돌아섰지만 늦게까지 남아 공연히 오락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저녁이나 먹자고 할까, 하다 그만두었다. 그녀와 가까워지는 것이 두려웠다. 점점 진이를 생각하는 시간보다 검은 옷의 그녀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단 일년 만에 다른 여자를 마음에 두고 있다니 죄책감에 괴로운 날들이었다.

창고에서 그녀와 함께 있게 되었을 땐 억눌렀던 감정이 폭발하는 듯했다. 어스름한 새벽 내 곁에 잠들었던 그녀는 눈을 조금 뜬 채로 자고 있었고 그 모습이 귀여워 만져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추워.”


잠꼬대를 하는 건가? 하긴 나도 춥긴 하니까. 공기가 점점 차가워졌고 술이 깨자 바닥의 냉기는 맨살을 파고들었다.


“추워, 추워!”


그녀가 점점 내 쪽으로 왔다.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좁은 창고에서 더 뒤로 갈 곳도 없었다. 곤히 잠이 든 듯했다. 가까이 있는다고해도 기억을 못할 테지.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체온이 전해져 덜 추웠다. 아니 내 몸이 뜨거워져서인지도 모르겠다.


“안아줘요!”


그녀가 내 목에 팔을 둘렀다. 갑작스런 말에 놀랐지만 다행히 잠결에 뱉은 말인지 잠에서 깨어나진 않았다. 이대로 있다 먼저 일어나자. 그녀가 모르게. 작은 입술은 계속 우물거리며 춥다고 말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입을 맞추니 마법처럼 조용해졌고 나도 그녀를 뒤따라 잠이 들었다.

그 후에 급격하게 친해졌고 난 그녀를 집으로 초대했다. 하지만 밤이 늦어질수록 자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집으로 돌려보내려 할 때 그녀는 급기야 내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버렸고 난 그녀를 달려가 잡았다.


“홍주씨, 나 애인 있어요. 그래도 괜찮다면 키스하고 싶어요.”


애인이 있다고 말한들 내가 착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었다. 아니 눈앞의 그녀를 고통스럽게 하는 말인 줄 알았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진이의 존재를 무시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고 아직 난 완전히 진이를 떨친 것은 아니었다.

다행히 그녀는 뿌리치고 떠나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마음속으로 약속했다.


‘홍주야, 일년만 기다려줘. 그 땐 멋지게 프로포즈 할 게. 미안하다. 미안해.’


** 홍주 이야기 **


“너 정말 괜찮겠어? 소개팅은 홧김에 나가는 곳이 아니야. 그래도 사람을 만나는 일인데 진실해야 하잖아.”

“나 진실해. 다른 남자 만날 준비가 완벽해. 이제 여름휴가도 가야 하는데 혼자는 싫다. 어때 사람은 괜찮니?”

“사람은 괜찮지. 네가 콧소리만 잊지 않으면 성공할 거야.”


준지의 주변에는 꽤 잘나가는 남자들이 많았다. 지금 평범한 집 딸이라 해도 태어날 때부터 준지는 재력가의 딸이 아니었던가? 준지의 말대로 세상엔 매너 좋고 멋진 남자들이 넘친다고 믿기로 했다. 오늘은 그 중 한 명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브이로 파진 슬리브리스에 살빛이 비치는 얇은 가디건을 입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어색함을 염려한 준지도 함께 하기로 해서 걱정될 것은 없었다. 나를 여자로서 시험만 하면 된다.


‘이찬영! 네 마음 반밖에 못 얻는 여자가 다른 남자 마음을 송두리째 얻는 걸 보라고! 이젠 반쪽 마음 지겨워. 누구와도 나누어 갖지 않는 사람을 만날 거라고.’


그는 능력이 좋은 세무사라고 했다. 고리타분하게 생길 줄 알았던 그는 꽤 샤프하고 깔끔한 타입이었다. 첫인상은 마음에 들었다.


“아버님이 사업을 하신다고요?”


첫 질문이 아버지에 관한 거군. 내가 아니라.


“아버지가 사업하는 여자는 싫으신가요?”

“그럴리가요. 홍주씨가 이렇게 예쁘니 아버님이 뭘 하시든 상관이 없겠는데요.”


준지가 눈치를 주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기로 했다. 남자도 공격에 적절히 응수하는 걸로 봐서 만만하진 않았다. 좋았다. 만만한 상대를 적당히 사귈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영기씨는 취미가 있으세요?”

“진부하죠. 우표를 모아요. 가끔 외국에 나갈 때는 관광을 포기하고 우표를 살 정도죠. 홍주씨는요?”

“저는 술을 빚어요.”

“술이요?”

“각종 술이요. 두견주, 이강주, 막걸리, 소주, 홍주 모두 만들 줄 알죠.”

“하하. 오빠 그렇다고 홍주가 술을 잘 마시는 건 아니에요. 아빠 사업을 이을 거라서 그래요.”

“아뇨. 전 술을 잘 마셔요. 언제 같이 마시죠.”

“호쾌한 성격이군요. 좋습니다. 준지와 함께 술 마시러 갈까요?”

“그러기엔 너무 이르지 않아? 일단 둘이 서로 대화 좀 하고 있어. 난 화장실 좀.”


난처한 표정을 짓는 준지가 화장실을 가고 나자 바로 문자가 왔다.


[살살 해 기집애야! 남자 잡으러 왔냐? 유들유들!!]


‘그건 2단계야. 이 정도로 지는 남자는 싫거든.’


나의 가시돋친 질문이 이어졌지만 영기씨는 표정을 흐리지 않고 재미있게 대화를 이끌었다. 그런 그가 마음에 들었다.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