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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wi (키위) - 16. 터프, 그 이상

나비 |2004.12.13 16:40
조회 1,804 |추천 0

kiwi - 16


“니 친구라고 하지 않았어? 진짜 결혼해? 나이가 어린데.”

“아직은 몰라요. 부모님 인사도 안 드렸는데요. 부모님 허락 받은 것도 아니구요.”

“그래도 결혼할 남자는 있는 거잖아. 역시 이쁜 여자들은 다 임자가 있다니까. 병진이도 그렇고, 혜림이? 혜림이도 그렇고.”

“민성 오빠, 쟤 결혼하면 찜질방 사장 된대. 내가 일하는 찜질방 있지? 거기 딸이거든. 결혼하면 물려준다고 했다더라. 좋겠지? 그래서 내가 친하게 지내잖아.”


‘태클녀! 제발 입 좀 다물어라. 아주 시끄럽구나.’


예전 수업에 감추고 싶은 사건을 들춰낼 때보다도 병진이가 밉살스러워 보였다. 예쁜 입으로 내 무덤을 예쁘게 파주고 있었다. 하지만 절대 그 무덤에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진짜에요? 사장님 되시면 저도 취직시켜 주세요.”


병진이의 남자 친구인 영규오빠가 말했다.


“왜요? 지금 일하신다고 들었는데.”

“백화점 그만두고 병진이랑 같이 일하게요. 매일 붙어있으면 좋잖아요.”


같이 살면서도 꼭 붙어있고 싶은 모양이었다. 꼭 영규 오빠의 말을 듣지 않고서도 아까부터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병진이가 옆에 앉기가 무섭게 머리를 만져주고, 손을 꼭 잡고 있는 다정한 모습은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오빠, 혜림이 남자 친구는 돈도 진짜 많대.”

“얘는 내 얘기 재미없잖아. 다른 얘기하자.”

“맞다. 오빠 얘가 닭가슴이야. 나한테 별명 붙여준 애.”


영규 오빠는 이미 얘기를 다 들었는지 나를 보며 묘하게 웃었다.


“아, 고등학교 때 친구시죠?”

“네.”

“그게 뭔데? 닭가슴이 뭐야?”


내용을 알 리 없는 민성 오빠가 물었다.


“내 별명이 닭가슴이잖아. 혜림이가 붙여줬어. 수업 시간에······.”


병진이는 자신에게도 좋을 리 없는 얘기를 즐겁게 해주었다. 저런 애를 왜 좋다고 만나는지 영규 오빠가 이해되지 않았다. 여자는 예쁘면 다 용서가 된다는 말이 확실하게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 그렇게 내 별명이 닭가슴이 된 거지.”

“와하하하.”


병진이의 이야기가 끝나자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해졌다. 그와 반대로 나는 우울모드였다. 내숭으로 밀어붙일 생각은 아니었지만 인생에서 감추고 싶은 기억을 첫 대면에서부터 풀어놓을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어서 취하고 싶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모두 취해서 지금의 기억을 잊게 되길 바랬다.


“저는 술이 고프네요. 다들 술 안 드세요? 자, 완샷!”


모두에게 바쁘게 술을 권했다. 처음 본 사람들이라 주량은 알 수 없었지만 속이 쓰리는 아픔이 있더라도 모두를 취하게 만들어야 할 사명이 생긴 것이었다. 본격적인 술판이 벌어졌다. 이미 전작이 있던 남자들은 가끔 술을 거부하기도 했지만 간단한 게임을 하면서 모두 얼큰하게 취하게 되었다.

흥겨운 분위기를 이어 2차로 간 곳은 생맥주 집이었다. 자리도 자연스레 다시 민성 오빠 옆에 앉게 되었고, 둘이 대화하는 시간도 많았다. 오빠는 말을 편하게 하라고 했지만 말을 놓기가 어려웠다. 오빠가 편하게 해주었는데도 말 한마디, 한 마디 하는 것은 처음처럼 긴장되고 떨리는 일이었다.

2차를 와서도 게임은 이어져 정말 모두 정신이 없을 정도로 취하게 되었다.


“어, 담배가 떨어졌나봐. 내가 가서 사올께.”

“나도 같이 가.”


담배를 사러 병진이와 영규오빠가 나가버리고 단둘이 있게 되자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오빠는 여자 친구 있어요?”


나의 질문에 민성 오빠는 대답대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상당히 취했다고 생각했는데 초점이 흐린 눈빛은 아니었다. 오빠의 눈동자는 내 눈동자를 정확하게 응시하고 있었고, 그 눈망울에 내 얼굴이 다 보일 정도였다.


“왜 물어봐? 어차피 넌 상관없잖아.”


말에 안타까움이 묻어있었다고 생각이 든 것은 나의 착각이었을까? 순간이었지만 그런 느낌을 받았다. 안타까움이 과장이라면 적당한 사심을 담은 말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상관이 있을 수도 있죠.”


술김에 용기가 생긴 건지 난 당돌한 말을 하고 말았다.


“상관이 있다······. 없다면 유혹이라도 하게?”

“그야 모르죠.”

“네가 유혹하면 내가 넘어가 줄 것 같아?”

“네.”

“자신감이 넘치는 구나.”


당돌한 말을 나누는 사이 병진이와 영규 오빠가 돌아왔다.


“휴우, 힘들다. 벌써 11시가 넘었네. 너 남친한테 전화 안 해?”

“너도 알잖아. 원래 통화 잘 안하는 거.”

“좀 심하다. 너도 그렇지만 그 오빠는 어떻게 하루 종일 전화를 안 하냐? 니 오빠 바람난 거 아니야?”

“······.”


‘그럴 지도 모르지. 저번에 그 여자랑 같이 있는지도.’


지금은 서루 오빠가 다른 여자와 있다고 해도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오빠는 내가 9시까지 안 들어가도 난리가 나는데. 전화를 얼마나 하는지 놀지도 못해.”

“나만 그런가? 사귀는 사람들 다 그래.”

“쟤는 안 그러잖아.”

“자기 여자 친구가 밤 늦게까지 집에 안 들어가는데 가만있을 남자가 어디에 있냐? 안 그러냐, 민성아?”

“그렇지. 자기 여자라는 생각이 들면 그러지 않지.”


점점 깊어가는 밤. 술에 취한 몸은 나른해지기 시작했다. 병진이와 영규오빠도 피곤했는지 둘이 함께 소파에 기대어 버렸다. 둘은 마주보면서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우리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우리가 작게 나누는 얘기들은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가 생겼다. 나도 의자에 기대 버렸다. 민성 오빠도 내 쪽으로 기대는가 싶더니 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오늘 하루만 넘어가 줄게.”


그리고는 몸을 일으키더니 사람들 모르게 테이블 밑으로 나의 손을 잡았다. 손을 어색하게 뺀다면 말 많은 병진이가 눈치 챌 것 같아 빼기도 힘든 상황이었지만 순간 얼어버려서는 내 손이 내 맘대로 움직여 줄 것 같지 않았다. 미끈하면서 부드러운 손이었다. 마치 만두피 같다고 할까. 곱게 반죽된 밀가루 반죽에 밀가루를 덮어 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말랑 말랑 하면서도 부드럽고 폭신한 느낌. 그러면서도 꽤나 남성적인 느낌을 주었다. 굵직한 손마디가 웃어젖힐 때 흔들리는 매력적인 목젖과 잘 어울리는 세트 같았다. 오빠의 손 안에서 작은 내 손이 움직이자 오빠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깍지를 끼더니 꽉 쥐었다.


“피곤하다. 집에 안가냐?”


민성오빠가 내 손을 쥔 채로 말했다.


“벌써 가게? 3차 가야지.”

“졸려. 집에 갈래.”


날 놓아줄 것 같지 않게 손을 꽉 쥐고 있으면서 입으로는 집에 가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순간 오빠의 말보다는 손을 믿고 싶었다.


“그래. 가자. 나 피곤해. 내일 출근도 해야 되고.”


병진이가 일어날 차비를 하고 있었다. 나도 은근슬쩍 손을 빼내서는 외투를 입었다.


“잘 가. 내가 혜림이는 집에 데려다 줄게.”

“오빠, 잘 부탁해. 혜림아, 내일 보자!”


병진이와 영규 오빠를 보내고, 민성 오빠는 어색하게 서 있는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한 잔 더. 오케이?”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는 지 오빠는 병진이가 사라진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빠가 자주 간다며 날 데리고 간 곳은 지하에 있는 바 분위기의 술집이었다. 우리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맨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병진이와 있는 내내 민성 오빠와 단둘이 있기를 바랐었는데 막상 그러고 보니 무척 어색했다. 마치 벌을 받는 학생처럼 시선은 자꾸만 아래로 향했다.


“기껏 넘어가 줬더니 이러기야?”

“예?”

“아까는 어떻게든 유혹해 올 것처럼 보였는데 내가 틀렸나봐. 너무 쉽게 넘어가서 실망이야?”

“그게 아니라 너무 의외라.”

“조건이라도 거는 건데 그랬다. 넘어가는 대신 소원하나 들어주기 그런 거.”

“제가 술 사드릴게요. 뭐 드실래요?”


민성 오빠 쪽으로 메뉴판을 밀었다.


“하하. 너 진짜 귀엽구나.”


완전 바보 버전이었다. 계속 버벅대면서 내숭 아닌 내숭을 떨고 있었다. 사실 민성오빠에게 갈 수 없게 가로 막는 것이 있었다. 바로 서루 오빠. 마지막 양심인지 결혼에 대한 자기 최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지 난 서루 오빠의 여자라는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어색함이 계속 되는 가운데 서루 오빠에게 전화가 왔다.


“오빠? 밖이야. 친구 만나고 있어.”

- 늦었는데 안 들어가?

“들어가야지.”


“야, 끊어.”

“예?”


통화하는 내게 민성 오빠가 전화를 끊으라고 하고 있었다.


“끊으라고.”

“...”


말을 잃고 있는 내 손에서 전화기를 뺏어든 민성오빠는 전화를 그냥 끊어버리더니 밧데리까지 빼 버리고 말았다.


“오늘은 내 여자야. 내 앞에서 딴 놈 전화 받지 마.”


막무가내로 터프한 민성오빠의 행동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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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특이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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