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은을 아파트까지 데려다 준 레오는 돌아오는 길에 요한센의 집에 들렀다. 요한센의 집은 효은의 아파트와 레오의 아파트, 그 중간 지점에 있었다.
-왠일이에요, 에드워드?
신디가 너무 반갑게 그를 맞아 주었다.
-요한센은 있습니까?
-아, 있어요. 잠깐 씻고 있는데. 어디 데이트 다녀오는 거에요?
신디가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며 물었다. 그녀의 말에 레오는 피식 웃었다.
-그렇기도 하죠. 이 반지 어때요, 신디?
-와우!
신디가 놀랍다는 표정을 짓고는 다가와 반지를 들여다봤다.
-너무 예쁘다. 그런데 정말 그 아가씨한데 반 한거 아냐? 10년 동안 한번도 안 끼고 다니던 반지를 다 끼고?
신디가 놀리듯 말하고 주스를 잔에 따랐다. 그때, 요한센이 방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제가 하라는 대로 했습니까, 사장님?
-물론, 요한센.
레오는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자네가 하라는 대로 무작정 끌고 들어가서 반지도 껴주고 서툴게나마 사랑고백도 했네. 거기까진 좋았는데..
-무슨 문제가 생겼나요?
요한센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미란다를 만났어.
-맙소사!
신디와 요한센의 입에서 동시에 맙소사! 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덕분에 신디는 들고 있던 호두파이를 떨어뜨릴 뻔 했다.
-미란다가, 세상에, 별 말을 다 했나봐. 효은이에게.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죠. 그 아가씨는.
요한센은 호두파이 한 조각을 입안에 넣으며 말했다. 레오도 파이 한조각을 손에 들었다.
-그 아가씨의 가장 나쁜 점이 뭔지 아십니까? 그 아가씨는 사장님을 사랑에 있어 만큼은 너무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만들어 놓았어요. 다른 일에는 적극적이고 자신감 있는 사람을 말이에요. 그래서 다른 사람까지 사랑하지 못하도록 만든 것. 그게 그 아가씨의 가장 나쁜 점입니다.
-나도 인정해. 내가 얼마나 사랑을 두려워하는 지.
레오는 호두파이를 처량하게 바라봤다.
-파이나 먹어요, 에드워드. 그렇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지금부터라도 잘하면 되지.
신디가 레오의 어깨를 두드렸다. 레오는 침울한 표정으로 파이를 씹었다. 그러나 신디의 호두파이는 그런 레오의 기분까지 바꿔놓을 만큼 맛있었다. 곧 레오는 기분이 좋아져 호두파이 한 조각을 더 들었다.
-그건 그렇고 잡지사 말입니다.
-아, 그거.
레오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괜찮은 건물이 하나 나왔더라구요. 계약을 할까 하는데.
-그런거야 자네가 다 알아서 하고. 그런데 그 스튜어트란 여자는 어때?
-아, 그 아가씨요?
요한센이 피식 웃었다.
-글쎄요. 당황스러울 만큼 재기발랄하죠. 그렇지만 일처리만큼은 꼼꼼하고, 또 실수를 하더라도 애교로 넘어가버리는 능력이 탁월하더군요. 괜찮게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레오는 다시 몸을 소파에 묻었다.
-흠, 이것 좀 봐.
아침에 일어난 효은은 베스가 가리키는 컴퓨터 모니터를 쳐다봤다. 주로 연예계 가쉽이 실리는 기사였다. 사진은 레오와 효은이 손을 잡고 헤롯 백화점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이었고, 내용은 티파니에서 커플링을 샀다는 것이었다.
-이게 그 반지야?
베스가 효은의 손을 내려다 봤다. 효은은 왠지 챙피한 생각이 들어 손을 뒤로 감췄다.
-그러지 말고 좀 보여주라. 이뿌그만..
효은은 욕실까지 따라온 베스를 밀어내고 욕실 문을 닫았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레오가 자신에게 사랑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한 것은 사실이었다.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졌다. 그래, 울지 말자. 행복해지자. 나도 그런 남자 만나서 사랑할 자격은 있잖아. 내가 어때서? 효은은 물을 맞으며 속으로 다짐했다.
미란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짐을 싸는 첸을 바라봤다. 어쨌든 첸은 그녀의 잔심부름과 기사까지 다 써주었던 그녀의 오른팔이었는데, 이렇게 그만 둔다니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너무 힘들 것 같았다. 그때, 미란다의 눈에 커다란 상자를 뒤뚱거리며 들고 가는 효은이 보였다. 미란다는 살짝 발을 걸었다. 우당탕 하는 큰 소리와 함께 효은이 앞으로 넘어졌다.
-아니, 강효은씨! 괜찮아?
첸이 달려왔다.
-아, 네. 괜찮아요.
그러나, 효은의 무릎은 이미 벌겋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효은은 무릎을 문지르다가 미란다를 올려다보았다.
-어머나. 왜 그런 눈으로 날 쳐다봐?
-왠지는 선배님이 더 잘 아시겠죠?
효은은 일어나서 다시 상자를 들고 뒤뚱거리며 걸어갔다. 그 뒤를 첸이 따랐다. 첸은 사무실 사람들에
게 인사를 하고 효은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어떡하죠? 윈즈버그 양, 장난이 아닌데.
-뭐, 괜찮아요.
효은은 웃어보였다. 그러자 첸이 깜빡했다는 듯
-이런, 미안해요. 짐 줘요. 내가 들게요. 다리 많이 다친거 아니에요?
효은은 짐을 첸에게 넘겨주고 살짝 웃어보였다.
-아뇨. 괜찮아요.
-그래도 씩씩하네. 저번에 서울에서 본 거 같은데. 포럼장에서. 몰라보게 예뻐져서 처음엔 같은 인물일 거라고 상상도 못했다니까.
그때서야 효은은 미란다 옆에서 서있던 기자를 생각해 냈다.
-맞다. 기억나요.
-그때부터 그로스베너씨랑 이상한 기운이 있다 했더니.. 잘해봐요.
-넵!
효은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첸에게 경례를 붙였다.
-잘 있어요. 놀러올게.
첸은 손을 흔들고는 쓸쓸히 문 쪽으로 걸어갔다. 효은은 잠시 동안 그 뒷 모습을 바라보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파이팅! 효은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거울을 보고 스스로에게 격려했다.
-강효은씨.
자리에 앉자마자 미란다가 효은을 불렀다.
-네, 선배님.
효은은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취재 가야하니까 이거 들고 따라와.
미란다가 손가락으로 노트북을 가리켰다.
-이건 선배님 노트북 아닌가요?
-그렇지. 왜? 들기 싫어?
-저도 노트북 들고 가야하는데요.
효은이 또박또박 말했다.
-뭐라구? 얼마나 사무실 생활 했다고 그러는 거야, 지금? 선배가 들고 오라면 들고 와야지. 까마득한
선배한테 지금 말대꾸야?
미란다가 소리를 지르자 사무실 기자들이 모두 그녀를 바라봤다. 다들, 드디어 시작이구나, 하는 표정들이었다.
-죄송하지만, 선배님 노트북은 선배님께서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저도 노트북을 들어야하고 저와 선배님이 취재할 기사 주제도 다르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효은은 똑 부러지는 말투로 조목조목 따지기 시작했다. 미란다의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 빨갛게 변했다.
-왜 그런가, 윈즈버그양?
스미스가 다가왔다. 미란다와 효은 모두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닙니다, 편집장님.
-그런데 둘 다 취재 안나가고 뭐해?
스미스가 짐짓 화난다는 말투로 말했다. 그리고는 효은을 돌아보고 윙크를 하더니 효은의 등을 떠밀었다.
-신입이 처음부터 게으름이나 피우고! 빨리 가서 기사나 사냥해오지 못해?
효은은 알았다는 듯, 허둥지둥 짐을 챙겨 사무실을 나갔다. 짜증난다는 듯 의자에 털썩 주저 않은 미란다는 옆 자리 기자에게 물었다.
-근데 강효은 기사 주제가 뭐야?
-아, 모르셨어요? ‘유럽을 공략하는 영국 무역업’ 이잖아요. 그거 시리즈 잖아요. 첸이 쓰다 만 거.. 아마 이번 주는 그로스베너 그룹일걸요?
그로스베너라는 말에 미란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뭐야? 신입이 그런 기획기사를 맡았단 말이야? 나는 주식 시장 동향이나 체크하러 다니는데? 미란다는 컴퓨터를 노려보다 일어섰다.
-어디가요, 선배?
-주식거래소 간다!
미란다는 한번 쏘아 붙이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휴.
그로스베너 빌딩의 로비에 선 효은은 그제서야 레오가 어떤 사람인 지 실감이 났다. 엄청나게 화려한 샹들리에가 번쩍거리는 로비에는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걔 중에는 효은을 알아보고 수군대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쨌든 나는 기자니까, 하는 생각에 효은은 어깨를 펴고 걸어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감색 제복을 입은 안내 직원이 친절하게 물었다.
-아, 가디언 경제부 강 기자입니다.
-미리 약속 하셨나요?
직원은 컴퓨터를 보며 물었다.
-아, 아니오.
-미리 약속을 하지 않으시면 사장님을 만나실 수 없으십니다. 아시겠지만, 그로스베너 회장님은 지금 스페인에 계시기 때문에 모든 업무는 사장님께서 보십니다. 사장님 비서실 연락처를 알려 드릴까요?
-아, 알고 있습니다.
-그러시면 오늘 약속을 잡으시고 내일 오시겠어요?
직원의 말에 효은은 씁쓸하게 웃었지만,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직원은 전화를 들고 비서실 번호를 눌렀다. 번호를 누르며 효은에게 웃어보인 직원은 전화를 요한센이 받자 인사하고는 용건을 말했다.
-가디언 경제부 강 기자님께서 약속을 청하십니다만.
-뭐라고?
-가디언 경제부 강 기자란 분이 내일 약속을 청하시는데요. 어떻게 할까요?
-전화 좀 바꿔주겠나?
전화를 받은 효은은 요한센임을 알고 기분이 좋아졌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미리 전화를 주시죠. 모시러 갔을 텐데요.
-아, 저는 전에 있던 기자분이 연락을 다 해놓은 줄 알았어요.
-거기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시면 됩니다. 37층이에요.
-아, 네.
전화를 끊은 효은은 직원에게 전화를 건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뒤에선 안내 직원이 비밀스런 웃음을 짓고 있었다.
-누가 왔는지 보세요, 사장님.
레오는 잡지사 설립에 대한 기획안을 읽느라 정신이 없었다. 레오는 고개도 들지 않고 건성으로
-누군데?
하고 묻고는 다른 서류를 들었다.
-나에요.
-이게 누구야?
효은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레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효은에게 다가갔다.
-왠 일이야?
-취재하러 왔죠, 머.
-그래? 그럼 기사는 요한센이 쓰고 당신은 좀 쉬다 가면 되겠네. 그렇지, 요한센?
레오가 요한센을 보며 말했다. 그러자 요한센은
-분부대로 합죠.
하며 문을 닫고 나갔다. 효은은 노트북을 내려 놓고 레오가 권하는 소파에 앉았다. 레오는 갓 뽑은 커피 한잔을 내 밀었다.
-커피. 피곤해 보이네.
-응, 피곤해.
효은은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는 말했다. 커피 향에서 아몬드 향이 났다.
-맛있다.
효은이 중얼거리자 레오가 살짝 웃었다.
-맛있어?
효은은 커피 잔을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좀 쉬었다 갈래?
-어디서?
효은이 눈을 크게 떴다. 레오는 킥 웃으며 열쇠를 들고 비밀의 화원 문으로 다가갔다. 비밀의 화원은 겉에서 보기엔 그저 벽처럼 보였다. 레오는 벽 앞에 서서 카드키를 벽의 모서리 부분에 대고 긁었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벽이 문처럼 열렸다.
-우와.
효은은 신기하다는 듯 달려왔다. 밖에는 손잡이도 없는 그저 맨들맨들한 벽이지만, 안은 원목으로 된 방 문 그대로였다. 방문을 쓰다듬던 효은은 앤틱한 침대를 보고 달려가 뛰어 앉았다. 폭신한 감촉이 너무 좋았다.
-저건 머에요?
효은이 가리킨 것은 반투명 유리로 된 욕실과 화장실이었다.
-욕실.
-너무 야하다.
효은이 욕실이란 말에 한마디 내 뱉고는 구경하러 갔다. 욕실 벽도 거울 유리여서 안에서는 밖이 다 보이지만, 밖에서는 안이 안보였다.
-멋진데. 돈 많은 거 너무 자랑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야. 대신 나 쪼끄만 독신자 아파트에서 자취하잖아. 집에 들어가기 싫을 때가 있거든. 그럴 때 여기서 잠도 자고 그래.
레오는 소파에 몸을 기댔다. 효은은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이상한 나라에 와 있는 엘리스라도 된 기분이었다.
-당신은 여기 들어온 최초의 여자야. 그거 알아?
-거짓말.
효은은 침대에 걸터 앉으며 말했다.
-정말이야. 믿든지 말든지.
레오는 소파에서 일어섰다.
-좀 쉬어. 두 시간 뒤에 깨워줄게. 기사는 요한센이 다 써 줄거야.
-안 그래도 되요. 내꺼 컴퓨터에 보면 바탕화면에 리서치 라고 있거든요? 그 항목에 있는 질문에 답만 해주면 돼요.
-그래, 알았어.
-미안해요, 내 일인데. 그런데 나 너무 피곤해서.
-괜찮아요, 아가씨.
레오는 효은이 침대에 눕는 것을 보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요한센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좀 수고 해줘. 컴퓨터에 기사 초안 있을거야.
-알겠습니다.
요한센은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자리에 앉은 레오는 서류를 펼쳐 들었지만, 도무지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얀 것은 종이이고, 까만 것은 글자인 것 같은데. 레오는 두 어번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물끄러미 종이만 바라보고 있던 레오는 벌떡 일어나 비밀의 화원으로 갔다. 살금살금 방안으로 들어간 그는 소파에 살짝 엉덩이만 걸치고 앉아 자고 있는 효은의 얼굴을 훔쳐 보았다.
잠에서 깬 효은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벌써 저녁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효은은 방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발견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레오의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겁이 난 효은은 핸드폰을 들고 레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에요?
-어? 일어났어?
레오는 뜻 밖에도 아주 밝은 목소리였다.
-뭐에요? 나, 참... 어디에요?
-자기 일어나면 먹일려고 저녁 사러 나왔지. 초밥 좋아해? 여기 회사 근처에 있는 일식 집이야. 조금 만 기다려.
-나 가봐야 해.
-아, 그거 요한센이 다 알아서 처리했어. 조금만 기다려. 갈테니.
요한센이 다 처리했다구? 아, 맞다. 편집장님이 요한센 이모부라고 했지.. 효은은 갑자기 화가 났다. 이러지 않기로 했는데. 내 힘으로 다 하기로 했는데. 그녀는 레오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조금 기다리니 문이 열렸다. 레오였다. 그는 활짝 웃으며 초밥 도시락을 들어 보였다. 그러나 곧 효은의 얼굴 표정을 보고 주눅이 들어 소파에 앉았다.
-어? 화났어?
-내가 깨워달라고 했었잖아요.
-너무 곤하게 자고 있어서 깨울수가 없었어.
-난 그런거 싫어.
효은이 일어서서 말했다.
-내 일이잖아. 그러니까 내가 해야지. 왜 당신이 해요?
-내 일이라고? 난 그저 도와주고 싶었어. 너무 곤하게 자길래.
-당신한테 도움받기 싫어!
효은이 소리쳤다.
-도움받기 싫다고?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레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레오의 태도에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든 효은은 레오에게 다가가 그 옆에 앉았다.
-말 심하게 해서 미안해. 그렇지만 나 당신한테 도움 안받고 내 힘으로 무슨 일이든 하고 싶단 말이야. 그냥 둬요. 내가 당신 도움 필요하면 말할게.
효은의 말에 레오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에서는 커플링이 반짝이고 있었다.
-미안해. 그렇지만, 난 정말 당신이 자는 걸 깨우고 싶지 않았어. 다음부턴 당신이 원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을게.
-어쨌든 고마워. 덕분에 푹 잤어.
효은이 웃어 보였다. 그제서야 마음이 놓인 레오는 초밥 도시락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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