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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wi (키위) - 21. 두 남자 만나다

나비 |2004.12.23 17:40
조회 1,645 |추천 0

kiwi - 21


“오빠! 바빠? 어디야?”


월요일로 잡힌 상견례 날짜를 말해주기 위해 서루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어 시간 전에 엄마와 아빠가 상의한 끝에 내려진 결정이었지만 기쁜 마음으로 바로 전화를 걸 수는 없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병진이가 서루 오빠에게 할 말이 있다고 어서 전화를 하라며 성가시게 굴었기에 할 수 없이 전화를 건 것이다. 가사도 알아들을 수 없는 힙합풍의 컬러링을 들으며 상견례가 토요일이 아닌 것만으로도 감사해 하자고 마음을 다스렸다.


- 병원 가는 길.

“운전 중이겠네. 이따가 할까?”

- 아니야. 괜찮아. 말해.

“우리 부모님이 월요일이 어떻겠냐고 하시네. 시간은 편하실 대로 정하셔도 좋다구 하시구.”

- 월요일 좋아. 어머니께 말씀 드려볼게. 아마 괜찮으실 거야.

“알았어. 아야.”


병진이가 바꿔달라고 내 귀를 사정없이 잡아당겼다. 자기 서방도 아니면서 왜 저렇게 목을 메고 통화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긴 병진이는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할 때가 더 많으니까.


- 왜 그래?

“아니야. 잠깐만. 병진이가 바꿔 달래. 할 말이 있다고.”


아픈 귀를 어루만지며 병진이에게 전화기를 넘겨주었다.


“오빠, 그 날 잘 들어가셨어요? 집까지 데려다주시고 감사했어요. ······. 네. 저도 잘 들어갔죠. 그나저나 혜림이 빨리 데리고 가셔야겠어요.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찜질방으로 남자가 찾아오지 않나, 여기 손님 중에 끈적한 눈빛을 보내는 손님이 있지 않나, 그리고 제 남자 친구의 친구도······”


‘그럼 민성 오빠가?’


순간 병진이도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서 자신이 실수했구나하는 놀람의 빛을 볼 수 있었다.


“······혜림이 보고 예쁘다고 하더라구요.”


분명 수습용 멘트. 나를 보고 말을 바꾼 듯 했다. 그렇다면 민성 오빠도 나에 대한 마음을 비친 것일까?


“오빠! 일요일에 시간 괜찮으세요? 그날 아는 오빠가 아이스하키 시합 있는데 오라고 했거든요. 혜림이가 서루 오빠가 가야만 그 날 찜질방을 빼준다고 하잖아요. 오빠가 안 가시면 저는 그냥 일하래요. 치사한 기집애.”


‘내가 언제?’


공포 영화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미져리, 폰, 링 원, 투, 쓰리를 다 합해도 이보다 무섭지는 않을 것이다. 어쩜 천연덕스럽게 저렇게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언제 또 저렇게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운 것인지.


“어떠세요? 시간 있어요? ······. 그래요? 잘됐네요. 그럼 일요일에 뵈요. 혜림이 바꿔 드릴께요,”


내게 핸드폰을 도로 건네자마자 병진이는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마치 신기루처럼.


“어, 오빠.”

- 왜 니가 말 안하고?

“지금 말하려고 했지. 병진이 말에 신경 쓸 것 없어. 바쁘면 일 봐도 돼.”

- 그럼, 우리 둘만 갈까?

“말 했는데 어떻게 그래. 가면 같이 가야지.”

- 그래. 알았어. 일단 운전 중이니까 어머니에게 말씀드리고 시간 잡히면 다시 전화할게.

“응. 운전 조심하고.”


운전 중이면 일찍 끊던가. 병진이와 서루 오빠의 환상 호흡에 정신이 멍해졌다. 눈치 빠른 기집애가 일요일에 혼자 갈 것을 눈치 채고, 이런 음모를 꾸미다니. 정말 병진이의 짐작대로 혼자 링크장에 갈 생각이었다. 친구 미림이와 같이 갈 생각도 해보았지만 민성 오빠의 진심을 알아내고 싶었기에 혼자 가리라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나 혼자만의 애틋한 감정이었음이 확인된다고 하더라도 좋은 동생으로 민성 오빠의 주변에 남고 싶었다. 하지만 서루 오빠와 같이 간다면 그건 다른 마음은 품지마세요라고 광고를 하는 것과 같았다. 그것도 아주 효과가 큰 광고를.


드디어 일요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옅은 파마약 냄새가 코로 들어왔다.


‘엇, 머리.’


몸을 일으켜 어제 미용실에서 더욱 검어지고, 쫙 펴진 머리가 많이 구겨지지 않았나부터 살폈다. 다행히 어제처럼 찰랑거리진 않았지만 그다지 망가져 있지는 않았다. 또 어제부터 시작된 두근거리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우리 영원토록 기억할 수 없겠지만은 처음 만난 설레임만은 간직해주길 바래요 지금처럼.’


며칠 전부터 수백 번을 들었을 노래를 흥얼거리며 주방에 있는 냉장고로 향했다. 눈이 부을 것을 염려해 냉동실에 넣어두었던 숟가락 두개는 만족스러울 만큼 차가웠다. 그것을 눈두덩이에 대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자주색 벨벳 원피스를 입어야겠다.’


감겨진 눈 위로 민성 오빠가 나타났다. 바로 옆에서 오빠의 얼굴을 질리도록 오래 봤는데도 얼굴만은 희미한 것이 잘 보이질 않았다. 기억해내려고 애를 써도 웃어주던 얼굴이 아닌 혼자 택시에 올랐을 때 보여주었던 슬픈 표정의 얼굴만 기억날 뿐이었다.


욕조에 물을 받아 씻은 후에 약한 허브향이 나는 바디로션을 정성껏 발랐다. 살색 스타킹을 신고 자주색 벨벳 원피스를 입고는 녹색 토끼털 자켓을 입었다. 그리고 망설이다가 녹색 머플러를 둘렀다.

겨울이 가고 있었다. 좋아하던 이 녹색 옷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장롱 속으로 넣어야 했다. 민성 오빠를 떠올리며 이 옷처럼 오랜 헤어짐을 갖게 되지를 않기를 바라며 집을 나섰다.


엄마가 부탁한 것을 가져다주고 찜질방에서 나왔을 때는 벌써 병진이가 오빠 차안에 타 있었다. 병진이는 여전히 분홍 패딩 차림이었는데 오래 입은 듯 전체적으로 때가 탄 느낌이었다.


‘왜 고생을 사서 할까? 그냥 집에 들어가지. 집에서 연애만 하면 만나는 데도 지장 없고, 저럴 일은 없을 텐데.’


“뭐 좋은데 간다고 차려입고 왔냐? 추워. 얼른 문 닫어.”

“알았어. 오빠 일찍 왔네.”


차에 올라탄 나는 인사도 건성으로 건네고 빨리 출발하라는 듯 안전벨트부터 매었다.


“녹색 옷 예쁘다. 너에게 아주 잘 어울려.”


서루 오빠는 잠시 동안 날 쳐다보았다. 정말 여자를 바라보는 눈이었다.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서 나는 갈 길을 더욱 재촉했다.


“그래? 고마워. 빨리 가자.”

“여자는 돈 들이면 다 이뻐지는 거예요. 저렇게 입고도 안 이쁘면 죽어야죠.”

“그래두 아무나 예쁘게 보이나요?”

“제가 저렇게 입으면 길거리 사람들 다 쓰러지죠. 민폐 끼칠까봐 못 입는 건데 혜림이는 저렇게 입어도 그럴 일은 없잖아요. 좋으시겠어요?”

“예. 좋습니다.”


병진이의 농담에 어느새 익숙해졌는지 오빠는 웃음으로 넘기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찾아가는 곳은 한 대학의 아이스링크장이었다. 산 속에 있다고 하더니 찾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1시 시합이라 12시까지는 가야 장비를 착용하기 전에 만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미 12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뭐야? 오빠. 약도라도 인쇄해서 올 것이지. 내가 어디간다고 미리 말했잖아.”

“미안해. 찾기 어려울 줄은 몰랐네.”

“이 대학이 좀 넓어? 알면서 그렇게 준비성이 없어?”


12시가 넘어서부터 서루오빠에게 짜증을 넘어선 화를 내고 있었다.


“빨리 가. 뭐해?”

“빨간 신호인데 어떻게 가니?”

“빨리 갔으면 신호 안 기다려도 되잖아.”


서루 오빠도 차다 못해 조금씩 짜증을 내기 시작해서 차 안은 냉랭한 기운이 돌았다.


“혜림아! 거기 꼭 가야 되니? 내가 근처 좋은 데 아니까 거기서 밥이나 먹자.”

“그게 무슨 소리야? 약속을 했는데 어떻게 안 가? 잘해준다면서? 잘해준다고 시집오라고 할 때는 언제고 사람이 어떻게 자기 마음대로야?”

“내가 언제 안 간다고 했어? 꼭 가야하냐고 물어본 거지.”

“그게 그 소리잖아. 안돼. 꼭 가야 돼.”


병진이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때 갑자기 앞으로 한대의 차가 급하게 끼어들었고, 놀란 오빠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그리고도 분이 안 풀리지는 계속 궁시렁, 궁시렁댔다.


“그럴 수도 있지. 왜 그렇게 짜증을 내?”

“너한테 그러는 것 아니잖아.”

“내 눈엔 나한테 짜증내는 걸루 보이니까 이제 그만해.”

“너한테 그러는 것 아니래두.”

“가기 싫으면 싫다고 하든지. 왜 따라온다고 해서 사람 기분을 망쳐? 내려줘. 나 혼자라도 갈테니까.”


나도 내가 심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늦게 도착하게 되어 민성 오빠를 못 보게 된 것도 분했고, 서루 오빠와 같이 갈 생각을 하니 어떻게 하든 혼자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서루 오빠는 내 막말을 듣고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어렵게 찾은 링크장에 도착해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자마자 나는 급히 링크장으로 들어갔다. 2층에 관람석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사람들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2층에 올라 자리를 잡았다. 거의 맨 앞좌석이었다. 링크장은 밖의 날씨보다 더 추운 것 같았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이제야 민성 오빠를 보게 되었으니까.


‘어디 있는 거야?’


사람들은 모두 장비를 착용하고 있어서 얼굴 식별이 쉽지가 않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빨리 움직이는 사람들 때문에 한명 한명 얼굴을 확인하는 것도 어려웠다.


‘민성 오빠.’


너무나 그리웠던 얼굴이 내 앞에 있었다. 손에 잡히지도 않고, 얼굴을 제대로 보기도 힘든 거리었지만 내 눈앞에 있는 것이다.


“생각보다 사람이 없네. 어휴, 여기는 너무 춥다.”


병진이가 내 옆에 그리고 서루 오빠는 내 뒤에 앉았다. 차라리 잘 됐지 뭐.


“벌써 시작했나봐. 우리가 엄청 늦긴 늦었다.”

“그러게 말이야.”


병진이의 말에 동조를 하고, 난 계속 민성오빠만 바라보고 있었다.

시합을 보고 있었지만 골이 들어갔는지 어느 편이 이기고 있는지는 알 수도 없었다. 계속 내 시선은 민성 오빠만 따라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렇게 생겼었구나.’


이번엔 기억 속에 제대로 넣어두기 위해 눈 깜박거림조차도 아까웠다. 10여분 지났을까 민성 오빠가 나를 의식하는 것이 느껴졌다. 드러내고 아는 척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왔음을 알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는데도 마치 탁자 밑으로 손을 잡았던 그 때 만큼 떨렸다. 아무도 모르게 서로를 느끼고 있다는 것에서 어쩌면 같은 것일 수도 있으니까.


경기가 끝나고 우리 셋은 차에서 민성 오빠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경기장에서 언 몸을 녹이며 나의 떨림이 가라앉아 주길 바라고 있었다. 곧 민성 오빠의 모습이 보였다. 헐렁한 청바지에 캐주얼한 은색 패딩을 입은 차림이었다. 나는 오빠를 보자마자 차에서 뛰어 내렸다.


“안녕하세요?”

“혜림이 왔구나.”


민성 오빠는 주변 사람들이 다 알아챌 정도로 나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뜨거운 시선이었다. 내 떨림을 단박에 멈출 만큼.


“녹색 옷 예쁘다. 너에게 아주 잘 어울려.”


‘아까 서루 오빠가 했던 말?’


그제서야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자신이 뱉은 말을 다른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본 서루 오빠의 표정이 약하지만 묘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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