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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일기1

겨울나무 |2004.12.25 18:44
조회 3,216 |추천 1

나는 천성이 꼼꼼하고 소심한 편이고

집사람은 화통하지만 덜렁거리는 성격이다.

그런데 집안 일에는 무척 서툴다. (서투르기 보다는 게으르다고 해야할 것 같다.)

쉽게 비유를 하자면 나는 치약을 끝에서부터 눌러 보기좋게 짜는 타입이고

집사람은 아무렇게는 푹 짜서 쓰고 칫솔통이 아닌 변기통 위에다 올려놓는 타입이다.

 

사람은 누구나 타고난 성격이 있고 장단점이 있기때문에

그걸가지고 트집을 잡는 다면 나만 나쁜 놈이 된다.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다.

그렇다고 해서 똑같이 맞벌이하는 처지에 깔끔하고 윤기있는 집안을 바란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자기가 쓰던 물건은 정리를 좀 하고 살자.

힘들게 일하고 집에 들어와서 누울 공간이 없을 정도로 집안이 어질러져 있으면

치우다가도 화가 난다.

 

이 놈의 헤어드라이어기는 내가 안치우면 일년 열두달 거실 바닥에서 굴러다닌다.

 

처음에는 나도 저기 저 "신혼일기" 코너의 여자분들이 열나게 자랑하는 신랑들처럼

정말 가사분담이 아닌 전담에 가까우리만치 열심히 했다.

화장실은 1주일마다 광나게 닦아 놓았고 거실에는 먼지하나 없게 청소해 놓았다..

 

그러나 가정이라는 것이 어느 한사람의 노력만으로 되는 일인가?

 

어제도 말이다.

나는 가스렌지 후드를 닦으면서 정말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여자분들은 알겠지만 후드는 제때 청소를 안해주면

기름때가 덕지덕지 얹어져서 일단 돌처럼 굳어지고 난 후에는

여간해서는 때가 잘 지지도 않고 쇠수세미로 박박 문질러야 겨우 떨어진다.

어디 뿐인가. 그렇게 거칠게 벗기면 후드 표면도 장난 아니게 상한다.

 

한시간 동안 닦았더니 손톱이 다 벗겨지고 손이 부어올랐다.

집사람은 그 동안에 거실에서 이불 둘러쓰고 앉아 드라마를 보고 있다.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어휴~ 저 주방벽 좀 보라지..

기름때에 벽지타일 색깔이 아예 누렇게 되다못해 꺼멓게 변해있다.

기왕에 닦는 김에 매운 홈스타 먹어가며 열나게 닦아 줬다.

다 닦고 나니 시간이 밤 11시 30분이다.

 

열받지만 참아야지.. 원래 천성이 저런 여잔데 어쩌라는건가..

그런데 손을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다가 그런 조그마한 인내의 끈마저 놓쳐버리고 말았다.

 

이 사람이 샤워하고 난뒤 샴푸찌꺼기, 머리카락 덕지덕지 묻은 욕실을

그대로 하고 나온 것이었다.

터져나오는 화딱지를 가까스로 누르며 참자.. 참어..으~ 어디 하루이틀 일인가..

휴~ 추접스러운 지집애. 혼잣말로 삭이며 또 치웠다.

화장실 휴지통은 반쯤 열려져 그 사이로 물이 들어가 반쯤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집 사람이 휴지를 버리고 뚜껑을 제대로 안닫은 탓이었다.

저걸 치우려면 또 락스질을 해야한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참았던 스팀이 폭발하면서 꼭지가 확 돌아가버리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모냥~ 장난해? 지금?

내가 한 말은 이 딱 세마디다..

그리고 지금도 냉전 중이다. 몰 잘했다구?

맞벌이하니까 가사분담? 아~ 좋다 이거다..

어지르지 않으면 치울 일도 없지..

두 사람 밖에 안사는 이 집구석이 무슨 애새끼덜 둘 셋 난 집보다 더하니..

정말 너한테 할 말을 잃었다.

 

요리하고 남은 찌꺼기나 비닐봉투를 개수대에 쳐박아 놓지 마라고 했나 안했나..

 

퇴근하고 집에오면 그 역한 썩는 냄새를 왜 날마다 맡아야 하는건데?

여름철에 파리 꼬이고 그 파리새끼들이 말이당..

내가 먹는 요리에 도마에 수저에..그릇에..기어 올라앉아서 똥오줌 찍찍 갈기고

사방팔방 풍구질해댄 잔해물이 서방이나 아이들 입속으로 들어가도 괜찮다는 말인가?

그렇게 지저분하면 니가 치우라고?

씨바. 처음부터 잘 치워버렸으면 이렇게 이중 일을 안할 거 아닌가?

 

베란다에 좀 나가봐라.

이게 베란다냐 쓰레기 하치장이냐.

내가 바빠서 쓰레기봉투를 안치우면 일년 열두달 치울 생각을 안하는군.

 

모가 그렇게 힘들어?

주말이면 잠 보충한다고 12시까지 늘어져 자구 밥먹고 또 자고..

혼자 치우는 것도 한계가 있지..

내 발에 밟히는 이 프린트물, 책, 화장품, 머리빗, 속옷..

씨뎅아.. 이게 다 누구거냐구..

 

글고 당신 성격 화통한거 좋다.

사람이 너무 참고만 살아도 병신같으니까 싸울때는 싸우고

따질것은 따지면서 사는 건 좋아..

근데 당신처럼 아무나 잡고 그러지 좀 마..

별일도 아닌 상황에서 사람들 이목 끌어가며..

당신보다 나이도 훨씬 많은 어머니뻘 되는 사람들 앞에서 싸가지 없이 그러지 마라고..

 

좀 붐비는 곳을 지나다니다 보면 부딪힐 수도 있고 밀 수도 있는 거 아냐..

그런 거 가지고 그렇게 꼴아보고 쌍욕을 섞어가며 나잇살 먹은 사람들하고 불편하게 그러냐구.

쌈닭이야 뭐야.. 뭐가 이렇게 어디 갈때마다 시끄러워?

한마디로 기본이 안된 애다. 니는..

 

앞으로 우리 부모님하고 같이 살 일을 생각하면 눈 앞이 캄캄하다.

니랑 계속 살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내가 참 맘이 여려서 그만 살자고는 도저히 내입에서 못하겠다.

 

한가지 분명 한 건..

나는 사람을 참 잘보는데 유일하게 실수한 사람이 바로 너다.

한번 아닌 사람은 끝까지 아니더라..

아니라고? 내가 냉장고 한번 뒤져보까..

우리 신혼 때 집에서 부쳐준 갓김치가 곰팡이가 찬연하게 핀 채 그대로 있더라..

나 며칠전 냉장고 정리하다가 뒤로 자빠질 뻔 한 거 있지..

 

모냥.. 이거 언제 산 양판데.. 아주 대파랑 같이 썩어 문드러져가지고

국물이 되다시피 한 게 아직도 비닐봉지 안에 있는 건데?

내가 얘기 했지..

애도 없으니까 필요한 물건만 조금씩 사서 쓰고..

뭐 사기 전에 집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한 후에 꼭 사야하는 물건만 사라고..

남자새끼가 그런 것까지 다 일일이 얘기해줘야 하냥?

 

어르신들 보는 눈이 틀린게 하나도 없더라..

우리 어머니. 그래서 결혼하지 마라고.. 그렇게 얘기를 했건만..

고쳐가며 살 자신 있다고 큰 소리 뻥뻥쳤다..

 

사람일은 모르니라.. 부부란게 한사람의 힘만으로는 안되는거야..

니도 살아봐라..라며 마지못해 결혼을 허락하셨던 어머니한테 면목조차 안생긴다.

 

니 임신 안된다고..맘 고생하제? 그건 니가 자초한거다.

그래서 내가 뭐랬니.

패스트푸드 먹지 말고 음식 골고루 잘 먹고 한의원에서 지어온 약 꼬박꼬박 먹으라고 했지.

하루에 물 8컵 이상 마시라구 했어 안했어. 했지?

 

니 혹시 상처받을까봐..

우리 집 부모님이나 동생들에게는 임신 얘긴 꺼내지도 마라고 했는데..

그따위로 몸관리하고 삼신 할매가 떡하니 애새끼 하나 안겨줄거 같나?

신혼 초부터 내가 그렇게 애부터 갖자고 했건만..

니 고집대로 1년을 피임하고

1년을 잠자리 기피하며 그냥 넘기다가..

이젠 빼도 박도 못하게 되어버렸네?

 

우리 Sexless 부부인거 맞지?

니랑 같이 누워본게 지난 9월달인게 마지막인거 같네?

속궁합이 잘 안맞는거는 그렇다 쳐.

그래도 말야. 좀 노력이라도 해보는게 부부간의 매너 아냐?

 

니는 걱정도 안돼? 그러다 내 바람나면 니 어쩔라고 그러냐?

 

같이 살기 너무 힘들다.

무엇보다 힘든건.. 이혼하기가 더 힘들다는 거다..

나만 나쁜 놈 되는 거 같아서..

너 버리고 딴데 장가들면 아마 천벌 받지 싶어서 그래도 내가 참아야지..

생각은 한다만..

니는 니 나름대로 잘했다고 생각할 거 아냐..

지금 이 나이 되도록 남에게 상처 한 번 안줘보고 살았는데..

아무래도 내 팔자가 요것 밖에 안되나?

 

그냥 요렇게 참아가며.. 그냥 죽은듯이 살아야 하나..

아니면 니 행복보다 내 행복이 더 소중하니 이제라도 과감하게 정리해야 하나.

정리하면 또 멋진 장미빛 인생이 올까? 과연 그럴까?

난 아니라고 본다. 혹시 내가 모자란 사람일 수도 있다.

 

내가 결혼하기 전에 참 많은 여자들을 사귀어봤고 지켜봤지만

정말 악독하고 사악한 여자들을 겪어봤고 상처도 너무나 받아본 사람이라..

그게 다 너 같은 여자를 받아들이라는 신의 선물이라 생각했었다.

 

휴~ 부모님 걱정할까봐 집에다 얘기도 못하고

속에서 부글부글하자니 속병 나겠다.

퇴근하면 들어가기 싫어지는 집이.. 너무도 한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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