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wi - 25
“남자들은 군대 갔다 오면 다른 사람이 된다더라.”
“옛날이야 고무신 거꾸로 신지 요즘엔 군화 거꾸로 신는다면서?”
“제대하고 나면 나이 어리고 이쁜 애들이 엄청나게 많잖아. 제대하고 나서 변하는 남자들도 많대.”
“기껏 기다려주면 고마운 줄을 모르고, 다른 남자에게 인기가 없어 못간 줄 안다잖아.”
“그럴 수 있지.”
“언니들 이제 좀 그만들 좀 해!”
참다못해 겁을 상실하고 소리를 질렀다. 대놓고 얘기 안하면 모를 줄 알고. 다 민성 오빠 흉보는 거잖아. 누굴 바보로 아는 거야?
“너 왜 그러니? 족발이 맛없으면 그냥 들어가자던가. 왜 언니들한테 승질을 내.”
“내가 왜? 이 족발 값 내가 냈는데.”
“그럼 닥치고 먹던가. 지금 생색 내냐? 니가 사준 족발 먹으면 우리는 떠들어도 안 되는 거냐?”
“그 말이 아니잖아. 대놓고 욕을 하던가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니까 그렇지.”
“니 얘기 아냐. 그냥 우리들끼리 말하는 거야. 그지, 언니?”
셋째 언니는 둘째 언니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럼 그냥 우리끼리 말하는 거지. 언제 우리가 남자 얘기 한 게 한두 번이야. 니가 과민해.”
간접적 공격이라 더 이상 말을 하기는 힘들었다. 다들 아니라고 하는데 반박할 말도 없고.
“서루라는 애가 대학교 때는 어땠어?”
첫째 언니가 셋째 언니에게 물었다. 이번에는 서루 오빠를 도마위에 올려둘 모양이었다. 그래. 이래야 공평하지.
“인기 많았어. 옷 잘 입고. 선배들한테도 잘하고. 옷도 비싼 것 입는 건 알았는데 그 정도로 잘 살지는 몰랐네. 잘 사는 티도 한 번 안냈거든. 돈 번다고 과외도 했잖아.”
“인간이 됐네. 돈 많다고 잘 난 척하는 것들은 재수 없잖아.”
“특히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어. 먼 후배라 잘 모르지만 동기들이랑 후배 중에서 고백한 애들도 많다고 하던데.”
“그 정도면 정말 괜찮지. 아까 봤는데 인물도 훤하고 부티가 나더라.”
“아버지 때문에 결혼 서두는 거라고 하잖아. 엄청 효잔가부다. 그런 애가 결혼해서 친정에두 잘해요. 지 자식한테는 끔찍하구. 그래야 가정이 편안한 거지.”
“가정적인 남자가 문제 일으킬 것이 뭐가 있겠어?”
그래. 서루 오빠는 부자에다 엄청 효자구, 가정적이구 민성 오빠는 철없이 얼굴 값이나 한다. 더는 들을 수가 없어 입 안에 족발을 왕창 넣고 일어났다.
“나 잘래.”
“뭐래는 거야?”
입 안에 가득 든 음식물로 알아들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든 말든 대충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민성 오빠, 우리 편은 아무도 없나봐.’
오빠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핸드폰 번호도 알 길이 없었다.
‘잘 자. 오빠. 나 이제 잘께.’
마음속으로 인사를 건네고는 눈을 감았다. 정말 긴 하루였다. 오빠를 만나기 위해 아침 일찍 부산을 떨다가 민성 오빠를 만나고 서루 오빠에 적이 되어버린 언니들까지.
내일은 조금 더 편안해지길 바라며 이불 속 깊이 몸을 묻었다.
다음 날 열시.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핸드폰 찾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나가야했다. 나가기 전 거울을 보며 길게 심호흡을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은 어른들께 말씀을 드려야해. 이러다가는 모두에게 상처만 크게 입히게 될 거야.’
마음을 강하게 먹고 집 밖을 나섰다. 서루 오빠는 바로 집 앞에 차를 세우고 기다리고 있었다.
“얼른 타.”
“내가 꼭 가야해? 오빠가 그냥 말씀드려. 어제 곰곰이 생각해봤어. 나 진짜 이 결혼 안할 거야.”
“너랑 장난칠 기분 아니야. 아버지 많이 안 좋으셔.”
서루 오빠의 표정이 정말 심각했다. 아버님이? 그 때는 그래도 괜찮아 보이셨는데.
아버님이 위중하시단 말을 듣고 끝까지 버틸 수는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직접 뵙고 말씀을 드리는 것도 좋은 방법 같았다. 많이 무섭고, 두렵기는 했지만 자기 아들 싫다는데 억지로 결혼하라고 하실 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서루 오빠는 아무 말도 없었다. 어색한 침묵을 참기 힘들어서 음악이라도 들으려고 라디오를 켰다. 그런데 서루 오빠가 내 손을 잡았다.
“미안해. 지금 음악을 들을 기분이 아니다.”
“알았어. 내 핸드폰부터 줘.”
오빠는 핸드폰을 건네 주었다.
민성 오빠의 문자가 무려 5통이나 와있었다.
[01:06 잘 들어간 거야? 걱정된다]
[01:21 왜 연락이 없니? 안 자고 기다릴께 전화줘]
[01:34 무슨 일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는구나. 혹시 부모님께 혼났니?]
[02:20 혜림아, 전화 좀 줘. 기다릴께]
[03:55 집도 모르니 갈 수도 없구. 혹시 자니? 일어나는 데로 전화해]
내가 잠든 시간이 2시쯤. 자는 동안에도 내 전화를 이렇게나 기다렸다니. 이게 다 서루 오빠 잘 못이잖아. 남의 핸드폰을 자기가 왜 갖구 가? 자기가 뭔데? 무슨 권리로? 혹시 민성오빠에게 전화를 걸지는 않았겠지.
“노려 보지마. 전화 안했으니까.”
서루 오빠가 들으라는 듯이 바로 전화를 걸었다.
“오빠?”
- 혜림아, 어제 어떻게 된 거야?
“어제 집에 가자마자 잠이 들었어. 미안해”
- 다행이다. 정말 걱정 많이 했어. 밖이야?
“응. 어디 가는 중.”
- 어디 가는데?
“엄마 심부름.”
그리고는 나중에 전화를 하겠다고 하며 짧게 전화를 끊었다.
“너 그 사람 사랑하는 것 아니었어?”
서루 오빠가 가시 돋친 말을 뱉었다.
“사랑해.”
“사랑하는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이 신뢰라는 것도 모르냐? 어쩜 그렇게 태연히 거짓말을 하니?”
“내 사랑 방식은 그래. 사랑하는 사람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우선이야.”
“넌 사랑의 사자도 모르는 구나. 네가 거짓말한 것을 알았을 때 상대방의 마음의 상처는 그 두 배도 넘는 거야. 사랑의 바탕이 신뢰는 말도 못 들어봤냐?”
“만약 안다고 해도 왜 거짓말을 했는지 이해해 줄 거야. 난 그러리라 믿어.”
“거짓말도 이해하고 넘어가준다. 위대한 사랑이구나.”
‘민성 오빠, 내 맘 이해하지? 오빠에게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는 내 맘 알아줄 거지?’
우린 그 뒤로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실에 들어가자 환자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건강하지 않은 냄새. 이 곳에 오기 전 오랜 기침과 참기 힘든 고통이 존재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왔나?”
서루의 아버님이 너무 갈라지고 탁한 음성으로 날 맞았다. 이 정도로 안 좋으실 줄은 몰랐는걸.
“이리로. 가까이.”
“말씀하지 마세요.”
뼈만 앙상한 손으로 당신에게 가까이 오라고 하셨다. 생판 남인 나도 보기에 마음이 아픈데 가족들은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짐작하기도 힘든 깊이 만큼이겠지. 어머니는 못 보시겠다는 듯이 등을 돌리셨고, 나는 아버님께 다가가 날 부르며 허공을 젓고 있는 손을 잡아드렸다. 마치 마른 나뭇가지를 잡은 느낌이었다. 생명이 없고, 따뜻한 기운과 수분이 전혀 없는 듯한.
“결혼 준비는?”
“······.”
“말씀하지 마세요. 잘 되가고 있어요. 어제는 혜림이 부모님께 인사드렸어요. 두 분다 아주 좋게 봐주셨어요. 결혼 서둘러야 한다는 것 다 이해해 주시고. 정말 좋은 분들이었어요.”
나에게 던져진 질문에 서루 오빠가 말을 대신했다.
“이제 아버지나 쾌차하시면 되요. 제 결혼식장에는 건강해져서 가셔야죠.”
서루 오빠의 말에 아버님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혜림아, 내 아들······ 괜찮은 놈이야.”
“네. 알고 있어요.”
“우리 며느리······ 행복······ 해야지. 콜록 콜록”
아버지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셨다. 병실은 고통스러운 기침 소리와 어머니의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이 상황에서 결혼을 못하겠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기에 손을 꼭 잡아드리면서 행복하겠노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걱정 마세요. 행복하게 살께요.”
나도 끝내는 눈물을 보이고 병실을 나섰다. 어머님께라도 결혼 문제를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정말 이건 아니지 싶었다.
“집에 데려다 줄게.”
“아니야. 괜찮아. 오빠 병원에 있어.”
“우리 아버지 강한 분이야. 쉽게 안 돌아가셔. 많이 편찮으시지만 오늘 낼 하는 정도는 아니라구.”
강한 부정. 병실에 있는 것이 더 힘들겠지. 보는 것이 사실이 되니까.
어쩔 수 없이 또 앞서 가는 서루 오빠를 따라갔다.
“오빠 어디 가는 거야?”
서루 오빠의 차가 집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들를 곳이 있어.”
“그렇다면 나 그냥 택시타고 가면 돼. 아무데나 내려줘.”
“오래 안 걸려. 그냥 있어.”
곧 목적지에 도착을 했는지 어느 건물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이상한 건 지하 2층부터 빈자리가 많았는데도 지하6층까지 내려가고 있었다. 오빠는 주차를 시킨 후에 라이트를 껐다. 정말 사람이 전혀 없는 깜깜한 주차장이었다. 승강기 입구에만 조명이 있을 뿐 다른 곳의 조명들은 형광등 몇 개뿐이라 칠흑 같이 어둡다는 말이 과장되지 않을 정도였다. 막힌 곳에 나에게 화가 난 서루 오빠와 단 둘이 있다는 사실과 깜깜한 어둠에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여기 무서워. 나 기다려도 밖에 있을래.”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온 거야.”
“할 말?”
“난 이 결혼 처음부터 아버지 때문에 하기로 했었다. 너도 봤지? 아버지 편찮으신 거. 나 이 결혼 꼭 한다.”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
“꼭 할 거야. 꼭.”
서루 오빠는 말을 하려는 내 입술을 자신을 입술로 눌러왔다. 저지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 쪽 팔로는 내 손을 잡고, 한 쪽 손으로는 내 턱을 잡고 있었다. 몸부림을 쳐도 가끔 오빠의 입술을 피할 수 있었을 뿐 완전히 피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잠시 후 여전히 오빠를 밀쳐내고 있었지만 오빠의 숨결을 느낄 수가 있었다. 민성 오빠가 달콤하고 가슴을 떨리게 만드는 그것이라면 서루 오빠는 거칠고 동물적인 느낌이었다.
서루 오빠는 다시는 민성 오빠에게 보내지 않겠다는 듯 내 입으로 강하게 들어왔고, 내 힘으로 밀쳐내기는 역부족이었다.
내 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힘이 약해 내 사랑을 지킬 수 없다는 생각에 눈에서 조용히 눈물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