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wi - 28
“읍, 으. 하지,”
힘을 모아 거세게 밀어냈다. 팔에는 나약함에 대한 슬픔과, 당했다는 수치심, 광포한 행동에 대한 분노가 실려 있었고, 서루 오빠도 힘 보다는 그 느낌에 떠밀린 듯 했다.
“하지 말란 말이야.”
내게서 떨어진 서루 오빠는 휜한 목을 드러내며 한 손으론 이마를 가리고 드러누워 버렸다.
“오빠!”
서루 오빠가 나를 바라보자마자 뺨을 두 대 연속으로 갈겨주었다.
“기분이 어때? 지금 내 기분이 딱 그래.”
“좋지는 않지만 네가 결혼을 안한다고 말했을 때보다는 덜 절망적이야.”
“이러지 마. 이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어. 나 결혼 안해! 아까는 아버님 걱정에 말 못한 거지만 이젠 나도 모르겠어. 될대로 되라지. 어디로 도망을 가든 할 거니까 결혼하려면 혼자 해!”
주저 없이 차 문을 열고 나와 행여 서루 오빠에게 잡힐까 엘리베이터 있는 곳으로 가지 못하고 차가 들어온 역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지하까지 들어오는 차량이 없었기에 생각보다 수월하게 빠져 나갈 수 있었다. 깜깜한 터널을 빠져 나가면서 내 인생에 드리워진 어둠도 걷히길 바라고 있었다.
서루 오빠는 나를 뒤쫓지 않았다. 어린 애한테 두 대나 맞았으니 자존심 완전히 뭉개졌겠지.
지하 2층이 되자 숨이 차오르고 차량도 많아져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괜스레 옆에 있는 남자를 피해 구석에 기대어 있다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재빨리 내렸는데 눈앞에 서루 오빠가 서 있었다. 오빠는 거칠게 내 팔을 잡아 자신을 몸 쪽으로 끌어 당겼고, 예상치 못한 힘에 품에 안긴 꼴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네가 도망가도 난 어디든 잡아올 거야.”
집착의 강도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오빠는 사람이 드문 건물 뒤편으로 나를 끌고 갔다.
“오빠, 나도 결혼을 하고 싶었어. 그런데 사랑 없는 결혼은 아닌 것 같아. 진짜 이러지마. 이쯤에서 깨끗이 포기해. 이런 말까지는 안하려고 했는데 오빠 다른 여자 있잖아. 내가 봤어. 찜질방에서 손잡고 둘이 자는 모습. 다정해 보이던데. 오빠 그 여자 좋아했던 것 아니야?”
“맞아. 나 여자 있었어. 그런데 당장 결혼은 못하겠대. 넌 한다고 했잖아.”
“이렇게 집요하게 굴 거면 그 여자한테 말해봐. 들어줄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나보다 그 여자 더 좋아하잖아.”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아? 좋아했었지. 이젠 아니야. 네가 나와 결혼해준다고 했을 때부터 네가 좋아지기 시작했어. 날 구해줄 것처럼 보여서 정말 천사처럼 예뻐 보이더라. 나 이제 널 좋아해. 결혼이 아니더라도 네가 여자로 보인단 말야. 다른 놈한테 가는 것 용서를 할 수가 없어. 가만있지 않을 거야.”
“그만 좀 달라붙고 떨어져. 내가 싫다고 하잖아. 오빠 별루라고. 제발 좀 떨어져. 오빠는 자존심도 없어?”
“너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 네 아버님 죽기 전 소원이라는데 자존심이 문제겠어?”
방금 뵈었던 아버님이 생각났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이건 아니잖아. 나 때문에 편찮으신 것도 아닌데.
하지만 그 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팔 좀 놔줘.”
어조가 가라앉아 오빠도 순순히 팔을 풀어주었다.
“우리 감정만 계속 상하는 것 같아. 나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볼게. 이젠 보내줘. 지금은 오빠 얼굴 보면 싸움만 더 하게 될 거야.”
내겐 정말 시간이 필요했다. 서루오빠의 집착을 떨쳐 버릴 시간이. 내 사랑을 가로막는 모든 방해자들이 제 정신으로 돌아오게 할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짜낼 시간이. 하지만 세상을 모르는 조그마한 머리는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놓인 오렌지 껍데기처럼 볼품없이 말라가고 있는 모양인지 묘안은커녕 버쩍버쩍 갈라지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갈 곳이 없어 그냥 길가에 주저앉아 있는데 약속 시간을 한 시간 남은 것을 상기시켜 주려는지 민성 오빠에게 전화가 왔다. 핸드폰은 시끄럽게 울고 있었지만 끝내 전화는 받지 않았다. 더러워진 입술로 민성오빠에게 말을 건네기는 싫었기 때문이었다.
입술이 깨끗해질 때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 거라고 마음이 말했고, 나도 그에 따르기로 했다. 벨소리가 잠잠해질 때를 기다렸다가 오늘은 보기 힘들 것 같다는 문자를 보냈다.
거리의 사람들을 보면서 마치 세상에서 내가 제일 비참할 것만 같았다. 사실 걸음을 걸을만한 힘도 내게 남아있지 않았다. 씩씩하게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혼자 우는 것은 너무 청승맞은 것 같아 흐르는 눈물을 간신히 참고 있다가 병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병진이는 엄마가 허락을 해준다면 기꺼이 나오겠다고 했고, 나는 찜질방 앞 커피숍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너 왜 짜구 있냐?”
“으흐흑.”
병진이를 기다리다가 끝내는 눈물이 흘러내렸고, 한참 울고 있을 때 병진이가 도착을 했다.
“왜 그러는 것인데?”
“어흑흑. 흑흑”
“나간다. 혼자 잘 울어라.”
일어선 병진이를 잡아 앉혔다. 성질 급한 기집애.
“서루 오빠가..”
“왜 서루 오빠가 결혼 못 해주겠대?”
“그게 아니라 서루 오빠가 강제로 뽀뽀했어.”
“우하하하. 열녀 났네. 너 서루 오빠랑 뽀뽀했으니 시집가야겠다.”
병진이의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너무나 좋아했다.
“싫어. 진짜 싫단 말야. 나 민성 오빠 사랑해. 헤어진다는 것 상상도 못하겠어.”
“너 서루 오빠랑 뽀뽀했다며?”
“응.”
“그럼 서루 오빠랑 결혼해야지. 그거 민성오빠가 알아봐라. 가만 냅두겠냐? 당장 헤어지자고 할 걸,”
“그럴까?”
“당근이지. 남자들은 그런 거 용납을 못하지.”
“억지로 한 건데두?”
“민성 오빠가 다른 여자랑 뽀뽀해두 만나줄 거냐?”
“강제로 한 거면 어쩔 수 없잖아.”
“그래두 너도 다시 민성오빠랑 뽀뽀하기 찝찝하잖아.”
“그건 그래. 몰라. 나 어떻게 해. 흑흑흑.”
병진이는 내가 눈물을 쏟고 있는데도 자신이 시킨 파르페를 바닥을 보이며 열심히 먹고 있었다.
“병진아, 너라도 도와줘. 내편이 아무도 없다. 사랑하는 남자랑 만나고 싶다는 것이 큰 잘못이냐? 그게 죽을 죄라도 되니?”
“싫어.”
“왜 둘이 만나는 걸 그렇게 싫어하는데?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네가 죽을 죄를 지은 건 아니지. 네가 죄지을 까봐 막는 거다.”
“죄를 짓다니 내가? 내가 누구한테?”
“서루 오빠에게도 그렇지만 민성 오빠한테.”
“너 민성 오빠가 아깝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오빠를 만나는 게 오빠한테 죄 될 정도로 내가 한심스러워?”
“아니. 너 민성 오빠한테 상처만 주고 헤어지자고 할 게 뻔해.”
“······?”
“민성 오빠네 무지하게 가난해. 너 같은 애는 상상도 못할만큼. 너처럼 남자들 조건보고 만났던 애가 감당할 것 같지가 않아. 나보다 우리 오빠가 말리더라. 너 민성 오빠 자존심만 뭉개고 떠날 거라고.”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나 그런 사람 아니야. 민성 오빠가 가난하다는 것은 꽤 의외기는 하지만 가난해서 내가 못 만날 거라니. 그건 억지 추측이야.”
“혜림아.”
병진이는 자못 진지한 표정이 되더니 놓을 줄 모르던 숟가락까지 놓으며 말했다.
“사실 나도 그거 아무 문제 안될 거라고 생각했어.
아직 젊으니까 그까짓 돈 벌면 되지 뭐 했었어. 그런데 그런 게 아니더라.
영규 오빠 정말 사랑하고 좋아하지만 서루 오빠 같은 사람 나타난다면 내 마음도 흔들릴지도 몰라.
화장실도 없는 단칸방에 사는 게 어떤 건지 알아?
처음엔 정말 사랑 뜯어먹고 살았다. 근데 몇 달 지나고 보니 정말 배고파.
맛있는 거 먹고 싶으면 돈을 벌어야해.
찜질방 청소 뼈 빠지게 두시간해도 흔한 닭 한 마리 사먹을 돈이 안나오는 거야.
삼십분 일해야 닭다리 하나 먹을 수 있지.
사람이 먹으려고 사니? 옷도 사고, 화장품도 사야지.
요즘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어. 네가 정말 부럽다. 너도 사서 고생할 생각 말고 서루오빠한테 얌전히 시집이나 가라.”
“배고파서 영규 오빠랑 헤어질 거야? 아니잖아. 배고프고 힘들어도 둘이 계속 잘 살거잖아. 난 네가 부러워. 힘들어도 단둘이 있을 수 있다는 거. 처음엔 솔직히 네가 이해가 안가더라. 근데 지금은 나도 같이 살았으면 좋겠어.”
“나도 막았지만 영규 오빠도 막았다구 말했잖아. 지친 내 모습을 보면서 내 마음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다는 거 나보다 영규오빠가 먼저 알았어.
며칠 전에 그러더라. 힘들면 집에 들어가라고. 막지 않는다구.
다 못난 자기 때문이라고 끝내는 울었어.
울길래 아니라고 그런 일 없다고 달랬지. 하지만 말뿐이었어. 마음속에서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
우리 둘 다 이 생활 오래 못갈 거라는 거 알고 있다. 먼저 얘기를 안 할 뿐이지.
끝이 뻔히 보이는데 친구한테 권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니?
누구보다 영규오빠가 말리고 있어. 아마 민성 오빠한테도 그렇게 얘기할 걸.
너보다 민성 오빠가 먼저 포기할지도 모르지. 부잣집에 시집가는 거 빌어주는 게 남자답다는 걸 알겠지.”
처음엔 돈이나 밝히는 나쁜 여자로 매도당한 것이 기분 나빴지만 정말 힘들다는 얘기를 듣고 보니 나를 위해 말려준 병진이의 속 깊음에 놀라고 있었다. 철없던, 그래서 용감했던 그녀가 정말 힘든 시간을 보내며 나이를 먹고 있었다. 순간 병진이는 새롭게 생긴 넷째 언니 같았다.
사랑이 남녀관계의 다가 아니라는 언니들의 조언을 흉내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이든 여자들은 왜 이리 순수하지 못한 걸까? 사랑보다는 조건이 인생의 진리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절대 나이를 먹고 싶지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사랑을 용감히 지켜내는 능력을 갖춘 여자고 싶다.
“그런 눈으로 보지마. 나도 그런 말을 조언이랍시고 해주는 사람들이랑 인연 다 끊고 살았다. 근데 이제는 그 사람들 고맙더라. 정말 내 생각을 해준 사람들이구나 고마워서 인사다니고, 평생 친하게 지내려고 한다니까.”
“나쁘게는 생각 안 해. 그저 다르게 생각할 뿐이야.”
“어차피 내가 묶어놓고 말해도 넌 몰라. 그러니 다른 얘기나 하자. 맞다. 내일 찜찔방에 드라마 촬영나온다더라. 니네집은 아주 경사가 넘치는 구나.”
“드라마? 누구 나온다는데?”
“모르지. 엄마한테 물어봐라. 사모님한테 말하고 가는 것 같던데. 덕분에 탤런트 구경이나 실컷해야지.”
“너보다 이쁜 여자가 있니? 그러지말고 내일은 꽃단장하고 와. 혹시 알아? 너 캐스팅이라도 될지?”
“어머 어머. 내가 그 생각을 왜 못했지? 내가 이러고 산다니까. 그런데 옷이 없는데. 화장품도 바닥 긁어 쓰는데.”
“내가 사줄게. 우리 쇼핑이나 가자.”
“진짜 진짜? 좋았어. 내가 뜨면 이 은혜 잊지 않으마.”
병진이와 쇼핑을 하는 동안 마음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이쁜 옷이 없네. 우리 이대에 가볼까?”
“너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쇼핑하면 스트레스 풀리지?”
“그럼. 난 기분 우울하면 무조건 쇼핑하지. 스트레스 팍팍 풀린다.”
“그래서 네가 민성 오빠랑 안 어울리는 거야.”
“저 옷 이쁘다. 저기 들어가 보자.”
병진이의 말에 딴전을 피우며 애써 부인하려 했지만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쳤을 때처럼 입안에서는 쓴 물이 도는 것 같았다.
나는 정말 허영 덩어리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