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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율(礎律) 38화

피바다 |2005.01.02 16:45
조회 421 |추천 0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만화루는 등을 밝히기 시작했다. 홍등에 불이 켜 지면서 만화루는 신비하면서도 따스한 꿈결같은 빛갈로 물들기 시작했다. 기녀들과 일꾼들은 여흥을 찾아 몰려드는 이른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한편, 곧 다가올 화려한 밤의 시간을 준비하느라 몸눌림이 바빠지고 있었다.

   아화는 오늘 몇몇의 중요한 손님이 아니라면 만나지 않겠다 일러두고는 낮부터 집무실의 문을 굳게 닫은 채 머무르고 있었다. 밤이 한참 깊어갈 즈음에도 그녀의 꿈은 신통한 결과를 내놓지 못했고 아화는 자기가 꿈을 잘못 해석한 게 아닌가 내심 자신감이 없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읽던 책에서 눈을 떼고 잠깐 열린 창을 올려다보았다. 만화루를 상징하는 홍등의 불빛이 새어들면서 방안은 붉게 어른거리고 있었다. 창기(唱妓)들의 구성진 노랫소리가  기묘하게 어울어져 새어들어왔다. 문득 아화는 그 소리가 처량하게 들렸다.

   다시 읽던 책으로 시선을 옮기는데 가볍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면서 유목(柳穆)이 들어왔다. 유목은 아화의 실무를 가장 곁에서 돕는 나이가 찬 기녀였다. 그녀가 다가와 아화의 귀에 대고 몇 마디를 소곤거리자 아화는 마침내 표정이 밝아졌다. 유목은 아화에게 또 하나의 명을 받고 서둘러 집무실을 떠났고 아화는 일어서 창가로 다가갔다.

   아화의 집무실은 본관 3층의 중앙에 있어 창을 통해 만화루의 정경이 다 보였다. 그녀의 눈에 막 내원으로 들어서는 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여러 손님들과 함께 들어서고 있었지만, 그의 독특한 차림새를 둘째치고서라도 그가 풍기는 강한 기운으로 금새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마침내 아화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경단을 당겨 머리 매무새를 정리하고 귀한 손님을 직접 모시기 위해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초율은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수월하게 외원의 정문을 통과했다. 지난 번 묘영의 소식을 접하고 흥분하여 달려왔을 때는 그가 풍기는 강한 분노와 묘한 외관때문에 만화루의 첫 정문인 외원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들이 그를 강하게 저지했었다. 그 때는 닥치는대로 밀고 부수며 외원과 내원을 통과하여 동관까지 밀고 올라갔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다른 방문이었다.

  하지만 초율의 예상과 달리 이번에는 문지기들조차 반발심없이 겸손하게 초율의 출입을 허락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외원을 들어서자 수발기녀 한 명이 나와 손수 초율을 안내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본관의 입구까지 그를 안내한 뒤 고개 숙여 절을 하고 물러섰다. 그리고 초율의 앞에는 또 다른 여자가 한 명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틀어올린 머리에 꽂힌 비녀에서 흘러내린 금강석의 구슬은 그녀가 움직일때마다 맑고 영롱한 소리를 내고 있었고 꽃을 수놓은 흉배 위로 드러난 그녀의 희고 부드러운 목선에 걸린 비취옥의 목걸이가 절묘하게 어울렸다. 푸른 비단옷에 감긴 그녀의 몸의 곡선은 아름다웠으며 우아하고 고상한 눈매와 색이 흐르는 입매는 그녀를 도발적이면서도 단아한 이중적 이미지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아화는 초율 앞에서 절을 올렸다.

  " 만화루의 아화가 제 4황자 전하께 예를 올리나이다. 소녀가 감히 전하를  모시고자 하온데 허락해 주시겠나이까?"

  초율은 자기 앞에서 고개 숙여 절을 올리는 이 여자가 만화루에서 가진 입지를 눈치챘다. 그리고 그는 묘영을 만나기 전 이 여인을 반드시 거쳐야한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그게 순서인 듯 했다. 초율은 순순히 아화를 따랐다.

  아화는 크고 화려한 객실로 초율을 모셨다. 지난 번 제공이 머무르던 객실도 그 화려함이 보통이 넘었지만 그가 막 들어선 객실은 그 수준이 달랐다. 마치 어느 성의 공주나 왕자의 거처만큼 고급스런 가구와 장식품으로 넘쳐났다. 초율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방을 살폈다. 기루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그에게 이러한 사치는 생소했다. 무엇때문에 사내들이 기루를 찾고, 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그는 관심도 없었다. 단지 그에게는 묘영을 데리고 가겠다는 목적이 전부였다. 술과 여자와 온갖 난잡함이 판치는 곳-초율이 알고 있는 기루란 그런 곳일 뿐이었다.

  초율과 아화가 자리를 잡자, 준비된 주안상이 들어왔고 기녀들은 할 일만 마친 뒤 말없이 물러났다. 밖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흥에 겨운 목청말고는 조용했다. 초율을 모시는 건 아화 혼자였다.

  초율은 만화루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아무 말이 없었다. 아화가 본 초율은 이런 상황을 의아해하지도 않고, 앞에 있는 낯선 여자에 대해서 일말의 호기심도 없어 보였다.  처음보는 여자, 그리고 내노라하는 미색을 가진 여자가 앞에 있는데도 결코 흔들림이 없었다. 게다 지난 번처럼 앞뒤없이 미친 듯 달려올 만큼 묘영에 대한 마음이 지극하면서도 일체 묘영에 대한 걱정이나 질문도 꺼내지 않고 오직 침묵인 초율이었다. 아화는 그의 태연함이 흥미로웠다.

  " 소녀가 한 잔 올리겠나이다."

 아화가 먼저 다가가 술 주전자를 들어올렸다. 하지만 초율은 흘깃 그녀를 쳐다보며,

 "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아예 술잔조차 들어주지 않았다.

  아화는 여태 수많은 부류의 남자들을 상대해 왔지만 초율처럼 독특한 상대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초율의 이질적인 성격을 알아차렸다. 만만치 않으리란 건 이미 제공에게서 전해 들은 바지만 초율의 어려움은 그 이상인 듯 했다.

  아화는 상냥하게 웃으며 한 번더 간청해보았다.

  " 소녀의 손이 무안하여 갈 곳을 잃었나이다. 한 잔만 거두어 주시어요."

  초율은 가차없이 이번에도 그녀의 청을 거절했다.

  " 말이 많은 계집이로구나. 같은 말을 두 번 하게 하지 말아라."

  아화는 고개를 조용히 숙여 무례를 사과하고 술을 내려놓을 수 밖에 없었다.

  아화는 초율과 친해지려는 노력을 그만두기로 했다. 결코 통하지 않을 수법이라면 진작 포기하는 게 나았다. 초율은 군더더기 없이 대해야 할 인물이었다.

  그녀는 소매 속에서 반듯하게 접은 종이를 꺼내면서,

  " 지난 번 오시었을 때는 소녀를 외면하시고 가 버리셔서 서운했나이다. 그래서 전하께서 다시 오실 날을 간절히 기다렸읍지요. 이걸 드리기 위해서요."

  그녀는 양손으로 공손하게 종이를 건네었고 초율은 낚아채듯 거칠게 집어들어 펼쳤다. 그는 내용을 살핀 후 상 위에 종이 조각을 던져버렸다.

  " 오시는 길에 수리 중인 동관 건물을 보셨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보상하실 부분이옵니다."

 아화가 초율에게 전한 것은 지난 번 초율이 제공과 겨루는 도중 부숴진 동관 건물의 피해 내역과 보상 규모였다. 그 때 일로 인해 동관은 대부분이 폐쇄되었고, 많은 객실이 동관에 있는 탓에 만화루의 영업은 사실상 큰 손해를 입고 있었다.

  " 계집이 하늘 모르고 설쳐대는 때는 딱 하나의 경우지. 네가 등에 업고 무서운 것 없이 춤을 쳐 댈 수 있게 만드는 사내가 어떤 놈인지 모르나, 너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하찮은 귀족 조무래기들처럼 나를 두고 장난을 치려하느냐?"

  초율은 상대할 가치고 없다는 듯 화를 내지도 않고 담담히 말했다. 그리고 아화는 이제 초율을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여전히 온순하게 웃었다.

  " 제가 감히 전하를 두고 그럴리가 있사옵니까? 설혹 제가 대단한 권세가를 등에 업었다한들 황자 전하의 권세에 비하겠나이까?"

  " 이 정도의 기루를 꾸려나가는 계집이라 다를까했더니 신통치 않구나. 네 정보는 고작 그것이더냐? 내가 하나 일러주지. 귀족들과 왕족들이 두려워하는 건 내가 가진 황자의 신분과 권위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나" 를 두려워 하는 것 뿐이야. 네 앞에 있는 바로 나를 말이다. 하룻강아지라 무서운게 없는 모양이지. 하긴..그것도 다 네 복이다."

  초율은 안하무인에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 같았고, 언제 이성을 버리고 달려들지 모를 굶주린 야수와도 같았다. 아화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긴장의 끈을 조금 더 당겨보기로 했다.

  " 부서진 동관의 복구에 필요한 자금과 손님을 받지 못해 생기는 손해액은 보셨다시피 큰 액수입니다. 전하께는 하찮겠지만 만화루의 가솔들에게는 생사가 걸린 문제이어요. 그들의 먹고 사는 일이 걸린 문제입니다. 전하께서 넓으신 아량을 베푸시어 가여운 제 식구들을 내몰지 마시어요."

  아화는 진심으로 간청하며 고개를 숙였지만 그녀의 머리 위로 초율의 차가운 말들이 쏟아져 내렸다.

  " 쓰레기같은 천민들따위 수백이 죽든 수천이 죽든 내 알바가 아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버러지들인데 그리 죽든 이리 죽든 무슨 상관이냐 말이다."

  아화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초율의 그 말은 아화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가슴 저린 말이었다. 그녀는 몸이 바르르 떨려왔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초율의 가면 뒤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초율은 그런 아화의 눈빛에 피식 웃어버렸다.

  " 놀랍군. 네 눈빛은 비수와도 같이 날카롭다. 날이 선 검과 같은 그런 분노와 한을 가슴에 숨기고 어떻게 살아올 수 있었지?"

  " 전하...."

  아화는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천민들, 자기를 버린 혈육보다 더 따스하고 정이 많던 그들을 한갓 쓰레기 취급하는 초율을 참을 수가 없었다.

  " 묘영도 전하께 그런 버러지같은 천민이옵니까?"

  " 와장창!"

  초율이 상을 내리치면서 상이 두 쪽이 났다. 상 위에 가득 차려진 음식들이 쏟아져내리면서 접시가 깨졌다. 그 난리에도 아화는 태연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음식물이 튀어 아화의 옷을 더렵혔지만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밖에서도 아화가 이미 당부한 대로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다.

 

==새해를 잘 맞이 하셨는지요? 저는 31일에 고등학교 동창들과 거제도에 팬션을 빌려 해돋이를 보러갔습니다. 바다 위로 쏙~나온 해를 보며 가족과 친구들의 건강과 한 해 무사하기를 빌었답니다.

  망년회가 끝났다했더니 이젠 송년회 시작인가봐요. 약속이 있어 급히 올리고 한 번 읽어보지 못하고 나갑니다. 아마 오타가 많지 싶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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