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칙사랑 - 25. 잠옷 위의 새
드디어 경주에 도착했다. 경주는 다른 공기를 갖고 있는 듯 도시가 푸른빛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낯설었고 어색했다. 아니, 혼자라는 느낌에서 오는 낯설음이었는지 모르겠다. 그와의 연결고리가 끊긴 느낌. 떨어져 있어도 늘 함께 있다는 정신적 포만감이 사라지고 그와 헤어져 앞으로 내내 혼자여야 한다는 위기감이 들어 세상 모든 게 이전과는 다르게 낯설게만 보였을 지도 모른다. 문득 스치는 사람들의 익숙하지 않은 억양이 그 느낌을 부추겨 얼른 창문을 닫고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경주의 교동 법주는 사계절 내내 수량과 수온이 일정한 우물물을 쓰는 것이 원칙이라 아버지가 일러준 우물이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차가 갈 수 없는 곳에 이르러 간단한 가방만 들고 인적이 드문 길을 걸었다. 저녁에 이른 풀들 가득한 겔엔 작은 벌레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귀여운 몸짓을 보이는 몇몇 벌레들이 어둠에 묻혀가기 시작했다.
‘서둘러야지.’
걸음을 재촉하다보니 멀리 3년 전 아버지와 한 번 묵은 적이 있는 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를 잊기에 적당한 집처럼 보였다.
다음 날 아침 우물물을 끓이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 술빚기가 시작되었다. 교동법주는 기능 보유자가 따로 있어 비법이 300년간 경주 최씨 집안 맏며느리에 의해 대물림되는 술이라 열심히 만든다하여도 전통 교동법주를 따를 방도는 없었기에 이번 작업은 그저 술을 빚는 것에 의미를 둔 것이었다. 물을 끓인 후에는 찹쌀을 씻어 죽을 쑤어야 했다. 찹쌀을 씻는 것은 보통의 우물물을 사용해도 무방했지만 식힌 우물물을 이용해 볼 생각을 하니 물이 식는 동안은 그다지 할 일이 없었다.
편한 차림 그대로 산책을 할 생각으로 문 밖을 나섰다. 천천히 걷고 있는데 문득 갑자기 뛰고 싶어졌다. 한걸음, 한걸음 빨라진 걸음은 어느새 뜀박질이 되었고 곧 난 슬리퍼를 신은 채 산길을 뛰고 있었다. 발이 슬리퍼 앞쪽으로 쏠려 발이 반쯤 신발 밖으로 나가기도 했고, 작은 돌이 밟혀 발이 아프기도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최대한 꼿꼿한 자세로 남자들의 시선을 받으며 러닝머신을 뛸 때처럼 긴장을 늦추지 않고 뛰었다. 하나 둘, 하나 둘, 호흡을 조절했지만 금방 숨이 가빠왔다. 나중엔 자세를 잃은 채 무조건 빠르게 달렸다. 내가 갈 수 있는 만큼 멀어지기. 내 힘이 닿는 만큼 그와 멀어지기.
‘젠장, 더 뛰고 싶다고!’
하지만 무릎에 손을 얹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나.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고 숨은 턱까지 차올랐다.
“헉·····, 헉!”
쇳소리 나는 내 숨소리를 들으며 그를 내 힘으로는 떨 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데에 예감이 미치자 분했고,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랬다. 그를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날 속일 그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으로 꽉 찬 나 자신과 더욱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늦은 오후. 아직 해가 지기엔 한 두 시간 남았을 때. 방안에 앉아 멍하니 핸드폰 문자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경주에 있다면서? 내가 갈게. 만나서 얘기하자]
난 바라볼 뿐 답변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홍주야, 연락 좀 해. 2시간이면 우리 볼 수 있어. 만나자, 우리 당장 만나야해.]
이어오는 문자를 무시하고 술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크래커와 치즈, 와인 1병이 차려진 조촐한 술상이었다. 와인 잔에 술을 따르고는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작은 MP3에서 나온 재즈는 얇은 선을 통해 귀로 흘러들어왔다.
‘당신이 그리워. 그리운 만큼 미워. 당신에게서 도망치고 싶다구!’
수없이 반복된 노래가 거의 끝날 쯤 연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경주? 팔자 좋네. 놀면서도 월급이 나오는 거야?]
“아니야. 이제 회사 안다녀.”
[그럼 정말 유배랑 다를 게 없네.]
“유배? 맞지. 그런 기분인 걸.”
[간 김에 푹 쉬다와. 요즘은 나도 서울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 피자 가게 이제 없어졌잖아. 다시 먹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이 서울이 갑자기 쓸쓸하게 느껴져서 나도 어디로 가고 싶다니까.]
“연미야! 나 물어볼 거 있는데. 왜 남자들을 수컷이라고 불러? 이전에 만났던 남자들 말이야. 너 수컷이라고 하잖아. 그 말이 예전부처 궁금했어. 늘 진지하게 말을 꺼내서 물어볼 엄두가 안 났었지.”
[이 기집애, 술 마셨나 보네.]
목소리도 듣고도 많은 걸 아는 친구.
[그게 술주정이냐? 술주정 치고는 곱긴 하다.]
“궁금해. 말 안 해줄 거야?”
[왜냐고? 음·····. 별다른 이유가 있냐? 남자니까 수컷이라고 하지. 난 여자고 그 사람들은 남자니까.]
뭔가 서운한 답변이었지만 연미의 마음을 알 수는 있다. 남자, 여자 만나서 연애하는 게 사랑이라는 명쾌한 답을 갖고 있는 연미에게 어울리는 답변이기도 했다.
‘연애하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는데.’
그는 나랑 연애를 하고 있지만 아직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연애 = 사랑’ 이란 등호는 맞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연애는 하지만 사랑을 하지 않는 커플들도 종종 보아왔었다.
순간 그가 지금 내가 아닌 사진 속 그녀를 그리워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의심은 술을 불렀다. 술을 얼마나 마신 걸까? 와인 병을 비운 지는 오래였고 이미 내가 아니라 술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중심을 잃은 몸을 일으켜 핸드폰을 잡았다. 아직도 1번인 그에게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었다.
“야!”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응?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고. 내가 부족해? 내가 부족했어? 그 여자보다 못 미치는 거지? 아무것도 말해주기 싫었던 거잖아.”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혀는 꼬인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홍주, 너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많이 취했잖아!”
“내가 허수아비니? 내가 앞에 있어도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았잖아! 어떻게 감쪽같이 날 속여? 이 나쁜 자식아!”
“미안하다, 미안하다, 홍주야. 한 번만 용서해줘. 너 나 떠날 생각하는 거 아니지?”
“떠날 거야, 다 떠날 거야. 난 이전과는 다른 사람. 그래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내가 달라졌으니 이젠 나 당신 몰라. 모르는 사람이지!”
“미안해. 우리 만나자, 응?”
그는 뒤로도 많은 말을 했지만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전화기를 붙들고 있다가 쓰러진 나는 그날 꿈을 꾼 것 같다. 우린 파란 침대에 나란히 누워있었다. 분명히 실내였는데 거센 바람이 불었고 너무 추워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지만 여전히 추웠다. 은은한 광택이 흐르는 멋스런 황색 잠옷을 입은 그는 내게 키스했고 난 감사하다고 말했다. 잠시 잠이 들었을까,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없었고 내 옆자리엔 잠옷만 덩그러니 곱게 접힌 채 놓여 있었다. 잠옷 위에는 새가 한 마리 앉아 있었다.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그 새는 다가와 내 입술을 부리로 쪼고는 하늘이 아니라 밑도 보이지 않는 바닥으로, 아래로 날아가 버렸다.
벌써 경주에 온지 일주일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에게 대답을 주겠다던 시일도 지난 셈이었다. 잡생각이 없도록 최대한 몸을 바쁘게 움직였다. 할 일이 없을 때는 밤 10시건 오후 7시건 나가서 뛰었다. 차를 몰고 나가 다보탑 앞에 앉아서 신문을 읽을 때도 있었고 관광객을 구경하기도 했다. 바닷가가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가지 않았다. 혼자 처량하게, 마치 비참하게 남자와 결별을 하고 온 여자처럼 보이는 것도 싫었지만 사실은 무한히 넓어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다가는 그에 대한 그리움이 바다만큼 크게 몰려올 곳 같아서였다.
특별히 머리가 더 복잡해 스포츠 신문을 사서 읽고 있을 때였다. 다른 날에 비해 햇볕이 더 따가웠던 오후 2시께였다. 핸드폰엔 익숙하지 않은 번호가 떴고 그에게 전화가 오지 않은지 며칠이 지났을 때라 그라는 추측 없이 전화를 받았다.
[이 전화는 수신자 부담 전화입니다. 삐 소리가 나면 상대방을 확인하세요.]
‘누구야?’
[홍주야! 나 동욱이! 끊으면 안돼. 받·····]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 간만에 웃었음을 알려주듯 얼굴이 당기는 느낌.
“너 군바리 티내? 수신자 부담이 뭐야?”
[그래야 더 군인스럽잖아. 잘 지냈어?]
의례적으로 안부를 묻는 군바리와 사회인의 대화가 이어졌다.
“나 지금 경주에 있어.”
[경주? 우리 부대랑 무지 가깝잖아. 이번 주 토요일에 뭐해? 면회와라, 응? 서울이랑 멀어서 면회 오는 사람이 없어.]
“나 바빠.”
[누가 너랑 논대? 면회 와. 나 외박 좀 나가게. 응? 와라, 와. 넌 나 빼주고 너 할 일 하면 되잖아. 응?]
어떤 기대로 들떠 있는 목소리를 듣자니 마음이 동하기 시작했다.
‘가도 될까? 저 인간 만나서 내가 좋은 일이 생긴 적이 없는데.’
하지만 입에선 벌써 가겠노라는 약속의 말이 나와 버렸고, 기뻐하는 동욱의 목소리에 나도 조금은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