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wi - 43
꿈결에서 느끼는 따뜻한 햇살 같은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충동적으로 떠난 여행의 도착지는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이었던 셈이었다. 입 밖으로 내지 않았을 뿐 조금의 갈등은 있었다. 세상에 과감히 맞선다는 것은 내게 두려운 일이었다. 잘난 언니들마저 노처녀라는 굴레로 묶을 만큼 무서운 세상이라는 것, 키가 높아 앞이 보이지 않는 수풀을 헤쳐 나가야하는 형편에 스스로 처해버렸다는 것도 물론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주저 없이 소신껏 내 삶을 당당히 택한 것이었다. 여행의 끝은 그런 시련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달콤한 꿈의 자락을 놓고 이가 시릴 정도로 추운 새벽에 학교를 가야하는 기분이었다.
“잘 들어가.”
“데려다 줘서 고마워.”
“내일 일어나는 데로 전화해 줘야해.”
“알았어. 피곤할 테니 들어가 푹 쉬어.”
작별인사를 나누고도 쉽게 헤어지지 못했던 우리는 두 손을 맞잡고 아쉬운 입맞춤을 세 번이나 하고서야 헤어질 수 있었다.
‘병진이는?’
영규오빠의 손에 끌려 나간 병진이를 다시 보지 못했다. 방전되어 버린 핸드폰 때문에, 병진이의 전화번호를 따로 메모해 놓는 주도면밀함이 없었기에 그 모습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내일 찜질방으로 출근하겠지.’
어설픈 추측을 하며 집에 들어섰다.
“너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엄마한테 말도 없이 되먹지 않은 행동을 해?”
날 맞아준 것은 엄마였다. 거창한 환영식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은 상상이상으로 무서웠다.
“머리가 복잡해서 병진이랑 여행 좀 다녀 온 거야.”
“병진이는 아침에 출근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같이 간 애가 밤늦어서야 돌아와?”
“······.”
“어딜 다녀 온 거냐구!”
“바람 좀 쐬고 왔어. 머리가 복잡해서.”
“옷 단정히 입고 나오라고 했더니 에미 말 안 듣고 남자랑 놀러를 가? 일은 니가 벌리고 뒷수습은 식구더러 하라는 거야? 이번 남자도 싫어지면 식구들한테 떼 달라고 맡겨 버리 거냐구.”
“······.”
“늦둥이라고 오냐오냐 했더니 지 언니들 반도 못 쫓아가고. 언제까지 식구들 도움 받으며 살래? 응?”
엄마는 속이 많이 상하셨는지 한참을 꾸중하시다 방으로 들어가 버리셨다.
“너 이리로 와봐.”
예상했던 언니들의 호출이었다.
“너 말도 없이 가출을 해? 니가 십대 소녀야?”
“가출은 무슨.”
“그게 가출이 아니면 뭐야? 내 신용카드 훔쳐 달아난 주제에.”
“주면 될 것 아니야!”
나는 지갑에서 셋째 언니의 카드를 꺼내 바닥에 내팽겨 쳐버렸다.
“이게!”
씩씩대는 셋째 언니를 막아준 것은 둘째 언니였다.
“너 남자랑 여행간 거지?”
“아니야.”
“병진이랑 갔다면서 왜 혼자 오는데? 얼굴 잘 생겼다고 좋아하던 그 남자랑 같이 있었던 것 아니야?”
“아니래두.”
“너 걔랑 전화 연결해봐. 직접 들어야겠어. 만약 걔도 거짓말하면 니네 둘 다시 못 봐.”
“언니들이 왜 내일에 참견이야!”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 사생활까지 일일이 간섭하는 그녀들이 징그러워 보였다.
“소리 지르지 말고 대화로 풀자. 너도 어린 애가 아니니까. 흥분하지 말고 침착해.”
흥분은 쉽게 가라앉아 주지 않았다.
“너 인생에서 사랑이 다인 것 같지?”
“다는 아니지만 중요하다고 생각해.”
“사랑이 밥 먹여주는 것 아니야. 그런데 서루는 너 밥 먹여 줄 수 있어. 그래도 사랑 타령할래?”
“그럼 인생에서 밥 먹는 게 다야? 밥만 먹고 살 수 있냐고?”
“너 큰 언니 봐라. 큰 언니 사랑 때문에 5년을 허비했어. 큰 언니 말이지만 언니도 인생 아깝기도 하데.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 먼 길을 돌아가려는 네게 말해주는 거야. 굳이 인생 돌면서 살아갈 필요는 없다. 너 정리할 수 있을 때 정리해.”
항상 옳은 말을 한다고 생각했던 둘째 언니마저 내게 인생의 타협을 말하자 더는 듣고 싶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피할 수도 없었다.
“걔 잘생겨서 좋아하는 거 아니야?”
평소 남자 인물값에 엄청 신경을 쓰고 있는 셋째 언니였다.
“나에게 잘해줘. 헌신적으로 잘 해준다고.”
“웃기고 있네. 처음에 잘 안 해주는 남자도 있냐? 너도 번번이 당해놓고 그걸 믿어?”
“그럼 친절한 모든 남자를 다 불신하며 살란 말이야? 언니도 번지르한 연하남한테 정신팔려 놓고 내게 그런 훈계가 먹힐 것 같아?”
“묘향이는 조용히 해. 내가 말할게.”
“제가 말로 해서 듣겠어?”
둘째 언니가 말을 이었다.
“셋째 말 틀린 것 없어. 영화를 보던 현실에서 보던 남자들 의리, 의리, 하지만 의리를 잘 지키는 남자들도 여자에게까지 의리 지키는 사람 드물어. 셋째 말도 그런 말이야.”
“사랑해! 나 그 남자 사랑한다고. 더 이상 뭐가 필요한 건데. 언니들은 뭘 말해주고 싶은 건데! 돈, 건실한 남자? 아니면 평생 바람 안 필 것 같이 생긴 외모?”
“물론 돈도 중요해. 남자 능력도 중요하고.”
“그깟 돈 내가 벌면 되는 것 아니야!”
“니가 고생이 뭔지나 알아? 돈 버는 게 뭔지나 아냐고. 니가 솔직히 지금 일해서 돈 버는 거라고 말할 수 있어? 니가 늦둥이니까 부모님이 오냐오냐 용돈 주는 거지. 일주일에 두 번은 안나오고 다섯 번은 지각하는 네가 어떤 직장을 다닐 수나 있을 것 같냐고. 니가 성실하게 행동했다면 말도 안해. 넌 여태껏 부모덕 본 것처럼 남자 덕이나 보고 살아야 할 애야!”
둘째 언니가 생각하는 내 모습이 기껏 그것밖에 안된단 말인가? 아니면 정말 내가 그것 밖에는 안되는 거야?
“너 대학 떨어졌을 때 뭐라고 했어? 아무 걱정 말고 공부나 해라, 과외선생 붙여줄 테니 일년만 고생해보라고 했을 때 못하겠다며.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했지? 넌 힘들면 아무것도 안 해버리는 애야.”
“대학에 가고 싶지 않았어. 공부하고 싶지 않은데 공부를 왜 해야 하는데? 제발 다른 이야기 돌려서 하지마.”
“그냥 냅 둬. 사랑한다 저 난리쳐도 힘들면 포기해 버릴 애니까.”
내 얘기를 셋째 언니가 받아쳤다.
“언니들이 사랑이 뭔지나 알아? 다들 실패자 주제에!”
“실패자?”
“결혼에 실패해 노처녀로 늙고 있잖아. 그렇게들 잘났으면 시집이나 일찍 갈 것이지. 능력부족 아니야?”
셋째 언니의 손이 내 뺨에 닿았다. 말로 안 되니까 폭력을 행사하는 언니의 행동이 치사스럽게만 느껴질 뿐 아프거나 무섭지 않았다.
“남자랑 밤이나 세고 들어온 주제에.”
“그게 뭐 어때서? 우린 서로 책임질 수 있는 성인이라고.”
“그렇게 당당하면 허락이나 받고 갈 것이지 몰래 도망가듯 놀러가서 핸드폰도 꺼놓고 참도 당당하다. 그래서 니들이 얘라는 거야.”
“언니들이 뭘 알아!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이게 계속!”
다시 언니의 손이 올라오려는 것을 큰 언니가 막았다.
“니네들도 다 들어가 자. 내가 얘기할게.”
여태껏 잠자코 있던 큰 언니가 말했다.
“묘향이는 언니 담배도 갖다 주고, 키위는 베란다로 가자.”
큰 언니는 베란다에서 내 흥분이 가라앉길 기다리지는 한참을 조용히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내 마음은 온갖 것으로 가득 차 움직이기만 해도 서로 부딪치며 소리를 내는데 세상은 너무 조용했다. 그런 고요함이 오늘은 관용이 아니라 냉담함으로 다가왔다. 심장이 터져 죽어버린다 해도 세상은 침묵을 지킬 것이다.
“나도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알았던 때가 있었어.”
담배 두개피를 연달아 피운 언니가 말을 시작했다.
“아니, 니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은 아니야. 그런데 남자 없다고 무시당한 거 너도 봤지? 아마 너도 속으로는 그랬을 거야. 너 없는 동안 사람들이 날 뭐라고 불렸는지 알아? 회계사 사모님이라고 하더라. 구제불능 노처녀에서 회계사 사모님 엄청난 신분상승이지? 그런데 실상 난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 그 남자가 나타나기 전과 나는 똑같았다고. 그것 때문이야. 사람들의 시선을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네가 건물주 사모님 되는 거 보는 게 언니들 입장에서는 좋으니까. 그래도 네가 싫다면 할 수 없는 거야. 니 인생 니가 사는 거잖아.”
“······.”
이해할 수 있었다. 큰 언니가 회계사 사모님 자리를 내팽겨 치고 직업도 없는 남자를 만난다고 하면 나라도 한번쯤 만류하고 싶을 거다.
“너 자신 있어?”
“자신 있어.”
“보기 좋다. 만약 힘들고 지치면 언니들 있다는 거 잊지 마. 오늘 일 더 너 잘되게 하려고 언성이 높아진 것뿐이니까.”
“나도 알아.”
“많이 돕고 싶다. 얼마나 힘든 길인지 나는 잘 아니까.”
“······.”
하마터면 그렇게 힘들었어, 라고 물을 뻔했다.
“오늘은 늦었으니 자. 그리고 내일은 언니들에게 네가 먼저 사과해. 알았어?”
“응”
간단히 씻고, 자는 척하는 셋째 언니 곁에 누웠다. 이제 한 고비를 넘었다고 생각하니 뿌듯했다. 내 몸 속은 정의감으로 넘치고 있었다. 민성 오빠와 함께 넘어야 할 장애들은 세상에 넘쳐나는 불의들일 뿐이고 정의로운 여 전사는 불의에 맞서 싸운다. 폭신한 이불에 싸여 있는 몸은 어울리지 않게 전의로 불타고 있었다.
‘오빠, 나 잘게. 이제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너무 힘들었어. 하지만 잘 할 수 있어. 우리 이제 열심히 살기로 했잖아. 오빠와 함께라면 나 무서운 것 없어.’
사랑, 민성오빠, 어떤 어려움에도 힘이 나는 마법주문 같은 말이 될 것이다. 내게 마법주문이 있었으니 세상에 두려울 것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