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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남자 유키*** <#6. 욕구불만>

길스진 |2005.01.18 18:46
조회 3,677 |추천 0

#6

<<욕구불만>>

 

 

 

전날 밤 사토 유키에게 받은 죄의 댓가는 너무나도 혹독해 지나의 머릿속에 낙인찍히고 말았다.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욕실에 들어가 몇 번이고 양치질과 샤워로 그의 흔적을 말끔히 지우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런 행동자체가 그에게 빠졌다는 빠졌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었고, 애써 부정한다고 해도 심장 한 가운데 박혀있는 그를 향한 욕망은 어찌 한단 말인가.

 

지나는 전날 마신 술때문에 머리가 욱신거렸지만 가방을 챙겨들고 나오는 레이를 배웅해야 했다.

 

그녀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빠진 것 없이 잘 챙겼느냐고 물었다.

 

"네.  저기... 선생님."

 

"음?"

 

"아...아뇨.  아무것도... 다녀오겠습니다."

 

레이는 대문을 향해 나갔다.  대문 앞에는 레이를 태우기 위해 광택이 나는 검정색 외제차가 서있었다.

 

아이의 등하교를 시켜주는 유키의 기사는 오늘도 변함없이 아이를 뒷자리에 태우고 떠났다.

 

지나는 부모님의 차를 타고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그리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늦어서 지각도 해보고 수업을 끝내고 귀가할 때도 또래들과 어울려 떼를 지어 다니는 것이 오히려 보기 좋았다.

 

레이는 저런 식으로 학교와 친구들에게 담을 쌓고 다니다가는 성인이 되어서도 정작 친구 한명 없는 외톨이가 되고 말것이다.

 

지금은 그나마 조금 아이에게 변화가 생겨 그녀와 얘기도 하고 놀기도 한다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아이에게 부족한 것들을 그녀가 모두 채워줄 수 없었다.  레이에게는 친구들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엄마의 손길이 있어야 했다.

 

"오늘 안색이 안 좋아보이네요?  좀 푸석해보여요."

 

가정부가 거실로 찻잔을 들고가는 그녀를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봤다.  지나는 찻잔을 들지 않은 손으로 뺨을 매만졌다.

 

'전날 잠을 설쳐서 그럴 거야.'

 

그녀는 침대에 드러누운 채로 천장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그의 손길에 놀라 벌떡벌떡 일어나기를 몇 번이나 반복해야만 했다.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불합리한 반응이 계속 일어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점심식사를 끝내고 서재로 돌아온 유키는 마당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검정색 커튼을 살짝 옆으로 밀었다.

 

작은 틈으로 햇빛이 스며들어왔다.  그리고 여자의 웃음소리까지 들어왔다.

 

지나는 무릎아래로 내려오는 푸른 색 스커트자락을 들고 욕조만한 커다란 대야에 보리인지 콩인지 하는 커다란 개와 같이 들어가 있었다.

 

그 바람에 그는 지나의 날씬한 종아리와 허벅지를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이 더운 땡볕에 무슨 짓들이란 말인가!  유키는 두 여자가 이 더운 땡볕에서 무슨 짓을 하고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가정부가 긴 호수 끝을 대야에 넣어 물을 틀었다.  커다란 대야에 이불을 넣고 그녀가 발로 밟아서 빠는 중이었다.

 

어느새 그녀의 스커트는 흠뻑 젖어있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가정부와 같이 이불을 빨았다.

 

'기가 막히군!  가정교사로 온 여자가 저런 일을 하다니!'

 

이불 빨래가 끝난 지나는 혼자서 마른 잔디 위를 고양이 몸놀림처럼 맨발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호스로 물을 뿌려댔다.

 

커다란 짐승녀석도 그녀를 쫓아다니며 이리저리 날뛰고 있었다.

 

이미 그녀의 옷은 스커트 뿐만 아니라 위에 입은 얇은 흰색 셔츠까지 젖어있어 그녀의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의 모습에 매료되지 않는다면 시각장애인일 것이다.  그녀의 유연한 몸놀림에 유키는 묘한 흥분을 느껴야만 했다.

 

유키는 자신의 숨소리가 가쁘게 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심장이 바깥으로 튀어나온다고 해도 몰래 귀여운 고양이의 재주를 더 구경하고 싶었다.

 

그런데 호스를 잡고 물을 뿌리던 지나의 몸이 멈추더니 갑자기 뒤를 돌아 2층 창문을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유키는 소스라치게 놀라 황급히 도망치듯 창문에서 물러났다.

 

몰래 여자가 목욕하는 것을 훔쳐보다가 들킨 것 같아 온몸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갑자기 그녀가 뒤돌아볼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고 멍청하게 그녀를 구경하고 있었다니... 사춘기를 겪는 남자애처럼 심장은 정신없이 뜀박질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와닿는 순간 숨이 턱하고 막혔던 것이다.  그는 머리를 거칠게 뒤로 넘기며 욕실로 향하다가 자신의 아랫도리가 부풀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당에서 뛰어다니는 고양이 한마리를 염탐한 것만으로도 이렇게 몸이 뜨거워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전날 밤, 가정교사가 뒤쫓아오지만 않았어도 그는 그녀를 껴안는 일도, 그녀의 입술을 거칠고도 개걸스럽게 탐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것은 알지만 그는 뻔뻔하게도 그녀의 입술을 다시 맛보고 싶다는 강열한 욕구를 느꼈다.

 

더한 후회를 느낀다해도 그 자리에서 그녀를 가졌어야 했다는 악마의 속삭임이 밤새도록 그를 괴롭히기까지 했다.

 

그녀는 너무나도 부드럽고 육감적인 육체를 소유했다.  그 육체가 품 안에서 흥분되어 울부짖을 때는 그는 미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밖에서 맨발로 젖은 옷차림으로 춤추듯 돌아다니는 모습은 몇 년 동안이나 가까스로 참고 살아왔던 그의 욕구불만을 건드리는 것과 같았다.

 

유키는 환한 바깥과는 판이하게 다른 어두운 욕실에서 옷을 벗어버리고 샤워기 아래에 섰다.

 

곧 차가운 물이 그의 뜨거운 몸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면 그의 달아오른 몸은 식어버릴 것이다.

 

 

 

 

지나는 막 현관에서 들어온 레이를 반갑게 맞았다.

 

아이는 물에 빠진 생쥐 처럼 흠뻑 젖어있는 가정교사와 보리를 신기한 눈으로 번갈아 쳐다봤다.

 

"마당에 물 좀 뿌리다고 하는게 더워서 아예 샤워를 해버렸어."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손과 발을 씻고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그리고 같이 젖은 보리의 털을 커다란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녀석은 발을 닦아주기도 전에 거실을 오통 얼룩으로 만들 작정이었다.

 

"보리!  가만히 있어!  그러고 어딜 돌아다니는 거야?  가만히 있어!"

 

주인에게 꼬리를 붙잡힌 보리는 얌전히 몸을 다 닦아줄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방에서 나온 레이를 보고 또다시 펄쩍 뛰기 시작했다.

 

"네가 어지간히도 반가운 모양이야."

 

"나도 반가워, 보리."

 

"그거 아니?  보리가 나보다 널 더 반가워하는 거."

 

"그래요?  하긴... 똑똑한 보리라면 누굴 더 좋아해야하는지 알죠."

 

"뭐-어?"

 

지나는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보리의 젖은 몸을 쓰다듬는 레이의 얼굴에는 연한 미소가 그려져있음을 보았다.

 

아주 환한 미소도 커다란 웃음소리도 아니었지만 처음 아이를 만났을 때보다 훨씬 밝고 명랑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너무 만족스러웠다.  오늘 저녁에 약속만 없다면 토요일 저녁을 같이 보내고 싶었다.

 

"올라가보세요.  그러고 있지 말고."

 

가정부는 드라이기를 가지고 거실로 와서 아직까지 옷을 갈아입지 않은 지나를 보고 말했다.

 

"내가 할 테니까."

 

"네, 감사해요."

 

지나는 레이에게 조금 있다가 보자며 위층으로 뛰어올라갔다.

 

계단 위에 다 오른 그녀는 바로 방으로 향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복도 끝에 있는 문이 눈에 들어왔다.

 

사토 유키의 방.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에게 매료된 것은 인정하겠지만 지금처럼 시도때도 없이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은 사랑에 빠진 여자같아 싫었다.

 

자신에게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  지금은 서로가 떨어져있긴 했지만 그녀는 그 남자와의 감정을 믿었다.  서로가 영원한 사랑임을 믿고싶었다.

 

그런데 애인이 없을 때 다른 남자에게 빠지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양심도 없는 욕정에만 휩싸여 앞뒤 분간도 못하는 여자이고 싶지 않았다.

 

아무 남자에게 꼬리치는 여자가 되기 싫었다.  단순히 애인이 없는 자리에 그가 하필 눈앞에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하고 싶었다.

 

꼭 사토 유키가 아니더라도... 다른 남자라도 한 집에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그 남자에게도 매료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나는 방문을 닫으며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대충 틀어올린 머리는 이내 풀어져 어깨 위에 흘러내렸다.

 

다른 남자에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결국 스스로를 창녀로 만드는 것이다.

 

 

 

 

"레이.  밥 안 먹어?"

 

나이든 가정부는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식탁 위에 있는 그릇들을 돌아가며 젓가락으로 쳤다.

 

식사시간이 10분 정도 흘렀지만 아이는 한 숟가락도 밥을 뜨지 않았다.

 

아이 발아래는 보리가 앉아서 혹시나 줄지도 모른다는 부푼 기대로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사토 레이!  저녀 안 먹을 거야?  왜 그러고 있어?"

 

"입맛이 없어요.  별로 먹고싶지 않아요."

 

"그래도 안 돼.  키가 크려면 많이 먹어야지."

 

레이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밥을 안 먹고있을 때마다 듣는 가정부의 매번 똑같은 잔소리가 지겨웠다.

 

"선생님은요?"

 

"조금 있으면 내려오실게다.  외출준비하느라..."

 

가정부의 중얼거리는 듯한 말은 계단을 밟는 소리에 멈췄다.

 

레이는 발소리를 듣고 뛰쳐나갔다.  깜짝 놀란 보리도 덩달아 주방을 나갔다.

 

"어, 레이 밥 안 먹고 뭐하니?"

 

"..."

 

아이의 검은 눈동자는 지나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내려갔다.  그녀는 아이의 시선임에도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어때?  선생님 예쁘게 보여?"

 

레이는 뭐라고 대답할까 망설이다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자신을 상대해주지 않고 데이트하러 가는 선생님에게 칭찬은 하기 싫었던 것이다.

 

"어디로 가실 건데요?"

 

"음?  그... 글세... 저녁도 먹고 영화도 보고... 뭐 그러겠지."

 

지나는 아이의 안색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속으로 웃었다.  같이 놀아주지 않고 그녀가 나가서 심통난 것이 틀림없었다.

 

"보리야.  레이 재밌게 해줘야 해.  알았지?  그럼, 레이 갔다올게.  혹시나 내가 늦더라도 양치하고 자야된다.  알았지?"

 

아이는 고개만 끄덕이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아이의 시무룩한 표정이 괜히 신경이 쓰였지만 지나는 핸드폰이 울려 곧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아주머니 다녀올게요!"

 

대문 밖으로 나온 지나는 나가기 전에 잠깐 멈추고 돌아섰다.

 

아까 낮에 잘못 본 것이 아니길 바랐다.  분명히 2층 그의 방... 창문 커튼이 살짝 열려 그의 얼굴을 봤던 것이다.

 

착시 현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선명하게 기억났다.  그와 눈이 부딪히면서 심장이 멎었다.

 

그러나 아주 짧은 순간이었음에 안타까워할 수 밖에 없었다.  커튼은 언제 열렸냐는 듯이 원래대로 닫혀버렸다.

 

마치 몇 초동안 착각이었던 것처럼...

 

 

 

 

"날 위해서 그렇게 신경쓴 거야?"

 

서 동인이 식사를 하며 기분 좋은 목소리로 물었다.

 

"좋게 생각해.  하지만 혹시나 네가 착각이라는 병에 걸릴까봐 그러는데...

 

이 옷 내년이면 허리가 작아 못 입을 거 같아서 미리 입어두는 거야.

 

돈 아껴서 큰 맘 먹고 샀는데... 아까워서 아껴뒀더니 그새 작아진 거 있지.

 

사실 지금 많이 먹기도 무지 힘들다.  단추가 곧 터질 것만 같아!"

 

지나는 많이 먹어 부른 배를 두드리며 킥킥거렸다.

 

예전부터 주위에서 살이 좀 쪘으면 좋겠다는 말만 믿고 먹어대다 뱃살과 허릿살만 늘려놓은 것이다.

 

"딱 보기 좋아. 비쩍 마른 것보다 볼륨감있는 몸매가 좋은 거야.  그래야 옷을 입어도 맵시가 난다잖아."

 

동인은 와인을 마시기 전에 그녀의 가슴을 살짝 쳐다본 후, 몸을 그녀 쪽으로 내밀고는 나즈막히 속삭였다.

 

"특히 넌 오리지널 가슴이잖냐.  딱 좋아."

 

"야, 서 동인!"

 

지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짖궂은 말을 한 그를 잡아먹을 듯 째려봤다.

 

"정말이야.  절대 크다고 생각하지 마.  절벽인 여자들은 수술이다 뽕이다 애를 쓰잖냐.

 

그런 여자들 눈엔 네가 얼마나 부럽겠냐?  남자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니까."

 

"그만 해.  창피하게 왜 그러니?"

 

지나는 얼른 동인이 따라준 와인을 한꺼번에 삼켜버렸다.

 

전날 밤, 사토 유키와 마셨던 와인과 비슷했지만 그게 더 맛이 진한 것 같았다.

 

"더 줘?"

 

"음?  아...아니.  물 마신다는게 그만..."

 

왜 또 갑자기 사토 유키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리는지 모르겠다.

 

그와 나누었던 대화들이 머릿속에 꽉 들어차 동인의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예의상 끄덕이던 그녀의 고개조차 점차 그녀의 망상 속으로 지워져갔다.

 

식당을 나와 영화를 보러갔지만 무슨 영화인지, 언제 의자에 앉아서 팝콘을 입에 넣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동인의 차가 커다란 대문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녀는 그에게 너무 미안했다.

 

"많이 피곤했나보구나?"

 

"어?  아, 음... 그런가 봐."

 

"괜히 내가 미안한데?  피곤한 널 데리고 다닌 것 같아서..."

 

그의 말에 지나는 더욱 미안해져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오늘 그와의 데이트는 엉망이었던 것 같았다.

 

머릿속에 다른 남자를 집어넣고 다니면서 친한 친구와의 데이트를 망쳐버린 것이다.

 

"저기, 동인아..."

 

"됐어.  들어가 봐."

 

"하지만..."

 

"미안하다고?"

 

"..."

 

서 동인은 지나의 뺨에 손바닥을 갖다댔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느끼듯 비볐다.

 

"너한테 항상 받기만 하는데 정작 난 너한테 해주는 게 없어.  오늘같은 날도 내가 망쳐버렸으니..."

 

"괜찮아.  오늘만 날도 아닌데..."

 

"그래도 미안... 머릿속이 좀 복잡해.  그래서..."

 

"그렇게 미안하냐?"

 

"음?  어, 음..."

 

지나는 이마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치워주는 동인의 손길을 잠깐 느꼈다.  약간 설레는 듯한 심장의 고동을 느꼈지만 편안했다.

 

"그럼 내 다른 부탁 들어줘."

 

"다른 부탁?  뭔데?"

 

그녀의 순수한 눈동자가 동인의 눈을 들여다봤다.  동인은 참고있었던 욕망을 끝까지 누르지 못하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지나는 너무 놀라 뒤로 몸을 뺐지만 의자때문에 아무 소용없었다.

 

그리고 그가 말한 부탁이란 것이 바로 키스라는 것을 알기에 그를 뿌리칠 순 없었다.

 

동인의 키스는 아이스크림같았다.  아니 바닐라맛이라고 해야했다.  너무나도 가볍고 부드럽게 입술이 와닿았다.

 

그리고 너무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술 위를 움직였다.  유키처럼 다급하게 키스를 요구하지도 입술을 벌리라고 힘으로 누르지도 않았다.

 

유키... 사토 유키... 동인의 뜨거운 혀가 입술 사이를 벌리려던 찰나, 그 이름이 그녀의 뇌를 강하게 치고 들어왔다.

 

그녀는 충격과 당황스러움에 동인의 가슴을 밀어냈다.

 

"왜 그래?"

 

동인의 표정은 매우 놀라워했다.

 

"미...미안."

 

"우진 선배때문에?"

 

"???"

 

그녀가 놀란 것은 '서 우진'이라는 이름이 그녀의 마음 속이고 머릿속이고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막상 애인의 이름을 듣자, 최근에 벌어진 일 때문에 죄책감이 몰려왔다.

 

무엇보다 동인과의 키스에서도 당연히 떠올렸어야할 서 우진의 존재는 그림자도 비치지 못했다.

 

오히려 사토 유키... 그 남자의 이름때문에, 그 남자의 어두운 얼굴이 떠올라 키스를 멈췄던 것이다.

 

"너... 우진선배 얼마만큼 사랑하니?"

 

"...??"

 

안전벨트를 풀던 지나는 놀란 얼굴로 동인을 쳐다봤다.

 

"선배가 결혼한다고 해?"

 

"갑자기 그건 왜 물어?  우진씨는 할 일이 많은 사람이야.  처음부터 그건 내가 이해하는 거고..."

 

"한 여자보다 더 그 일이 중요하다는 거야?  너보다?"

 

동인이 그녀의 말을 거칠게 잘라내며 쏘아댔다.  지나는 그의 화난 얼굴을 처음 봤다.  무엇인가에 잔뜩 골이 난 것 같았다.

 

"떠나고 나서 전화는 왔어?"

 

"아... 아니.  많이 바쁠 거야."

 

"흥!  많이 바빠?  기가 막히는군.  떠나고나서 한번도 연락을 못 받았다는게 말이나 되느냐고!  벌써 한국에 와 있는데도!"

 

"???"

 

지나는 얼른 입을 닫고 고개를 획 돌려버리는 서 동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마지막에 그가 빠르게 우르르 쏟아낸 말을 제대로 듣지 못 했다.

 

"너, 금방 뭐라고 했어?  누가 어디에 와 있다고?"

 

"..."

 

"서 동인."

 

"..."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서둘러 대답하지 않았다.  괜히 말을 꺼낸 것 같아 스스로도 화가 치밀었다.

 

"야!  서 동인!  어서 말해!  누가 어디에 와 있느냐고?"

 

고함을 지르는 그녀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눈에는 벌써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그 고였던 눈물이 흐르는 것은 단 1초도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지나의 뺨에 눈물이 흘렀다.

 

"미안하다, 지나야."

 

"어... 언제?  언제 왔었는데?"

 

"5일 전..."

 

동인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괜히 내뱉은 말에 지나가 울고있어 질문에 대답하기 힘들었다.

 

"그럼 넌?  넌 어떻게 알았는데?"

 

"..."

 

"어?"

 

그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러나 지나의 거친 손짓에 거절당했다.

 

그녀는 그가 서 우진이 귀국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느냐가 중요했다.  다른 사람이 왜 먼저 알아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귀국했다는 것은 애인인 그녀가 제일 먼저 알아야했다.  그런데 왜... 우진과 별로 친하지도 않는 동인이 어떻게 알았냐는 것이다.

 

친척이라고 해서?  별로 친하지도 않아서 같은 자리에 술도 아직 마셔보지도 않은 두 사람인데...

 

"피곤할텐데... 가서 쉬어라."

 

"..."

 

지나는 복잡한 생각은 이따가 방에 들어가서 하기로 하고 친구에게 잘 가란 말을 해주었다.

 

동인은 떠났고 초인종에 문이 열렸지만 지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다.

 

서 우진... 2년 전 시골학교 선생이었던 그녀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여름, 우연히 그를 만났다.

 

비 오는 날 버스를 기다린다고 서있었던 그녀 앞으로 미끄러지듯이 다가온 고급스런 차.

 

그는 그녀의 집까지 태워다주었다.  두 사람은 가볍게 통성명했고 내리는 비가 얼마나 지긋지긋한지를 얘기했다.

 

그리고 딸을 집까지 태워다준 그를 위해 그녀의 부모님은 성심성의껏 다과를 준비해 감사를 전했다.

 

마치... 그가 장래의 사위라도 되는 것처럼...

 

몇 번의 연애로 시련을 겪었던 딸을 생각해서 부모님은 어떻게든 그와 맺어주고 싶어했다.

 

괜찮은 건설회사에 간부급으로 있는 그와 결혼까지 하기를 부모님은 진심으로 바랐던 것이고 지나의 간절한 소망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고 언제까지나 믿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만큼이나 그의 감정도 확고함을 느꼈다.

 

그래서 그가 자주 외국으로 나갈 만큼 바쁜 일에 쫓기며 살아가는 남자란 것에 전혀 서운해하지도 않았다.

 

그가 떠나기 전에 같이 가자는 말에 넘어갈 뻔도 했지만 그녀는 학교선생님이었다.

 

서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좀 힘겹고하지만 제자들을 쉽게 버릴 수는 없어 그를 떠나보냈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을 통해서 그가 한국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아야했는지 그녀는 너무 서운했다.

 

일부러 숨긴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마저 들기도 했다.  아니면... 그가 없는 틈을 타 다른 남자에게 마음이 흔들려서... 그래서 그가 벌을 주려는 것일까...

 

 

 

 

유키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이유없이 마음을 놓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면서도 벽에 걸린 시계로 시선이 향했다.  11시 15분.  그의 생각으로는 초인종이 울리고도 그녀는 들어오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집으로 들어왔고 이제서야 그녀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그녀가 여태 안 들어오고 대문 밖에서 뭐했는지 궁금했다.  커튼을 제끼고 대문 쪽을 바라봤지만 그녀의 형체는 보이지 않았었다.

 

다시 복도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발소리가 점차 커졌다.  그녀가 이쪽으로 오고있었다.

 

똑똑-  이미 그의 몸은 침실 문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뭐요?"

 

그는 냉정을 되찾으며 딱딱하게 물었다.

 

"저, 지나에요."

 

유키는 그녀의 잠긴 목소리에 약간 놀랐다.  마치 울었던 것처럼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밖에서 즐거운 데이트를 한 여자치고는... 우울함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오?"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김 지나가 그에게 부탁할 게 있다고 했다.  그는 좀더 가까이 문으로 다가갔다.  마음같아서는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문을 열고싶었다.

 

"뭐요?"

 

"혹시... 기사아저씨... 연락이 되나요?"

 

"그건 왜?"

 

"차가 좀 필요해서요..."

 

"..."

 

"죄송해요.  부탁드릴게요."

 

"무슨 일이오?"

 

그의 목소리는 조금 전과는 다르게 차분했다.  왜 그녀가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차가 필요한지 궁금했다.

 

"누굴 만나야 하거든요."

 

"누구?"

 

"그것까지 말씀드려야하나요?"

 

"내 차를 빌려가는 거니까."

 

"관두세요!  사적인 것까지 일일이 대답하면서 차 빌리고싶진 않네요!"

 

발소리가 들리자 유키는 무슨 생각으로 방문을 열었는지 모른다.

 

그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지나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방안에 불빛이라고는 없는데다 복도에도 불빛이 없어 그의 얼굴을 확실히 보기란 여전히 어려웠다.

 

"마음 바뀌었어요.  차 빌리지 않겠어요.  걸어가면 되니까."

 

그 말에 유키는 바보같은 소리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이곳은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곳이라 길이 어두웠고 위험했다.

 

그리고 버스는 끊겼을 테고, 택시를 잡아탄다고 해도 이곳까지 택시는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그녀가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애인 만나러 가는 거요?"

 

그가 대뜸 그녀의 아픈 곳을 찌르듯이 물었다.  지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대답이 없는 걸 보면 내 말이 맞는 모양이군?"

 

"사장님하곤 상관없잖아요."

 

"잠깐 기다리시오."

 

유키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기사에게 10분 내로 집으로 오라고 했다.

 

"10분만 기다리시오."

 

그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도로 넣으며 돌아섰다.

 

"저..."

 

그는 지나의 손에 잡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녀의 손이 그의 단단한 팔을 붙잡은 것이다.

 

그는 그녀의 손길에 심장이 미칠 듯이 뛰는 것을 느끼고 인상을 썼다.  그리고 차갑게 말했다.

 

"뭐요?"

 

"고...고맙습니다, 사장님."

 

그녀의 입에서 거리감을 주는 그 '사장님'이란 소리에 머리가 아팠다.  그녀는 가정교사이지 부하직원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녀가 그에게서 돈을 받는다 해도 그녀 입에서 사장 소리는 너무나도 듣기 싫었다.

 

"별 거 아니오.  그러니까 그런 소리는 집어치워요."

 

"..."

 

"그리고 어제... 어제와 같은 일은 두번다시 없을 거요.  별 거 아닌 일에 서로 불쾌한 건 없었으면 좋겠소."

 

지나는 어두운 복도가 너무 싫었다.  당장에 불을 켜서 이 잘나빠진 인간의 얼굴을 똑똑히 보고싶었다.

 

별 거 아닌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지금도 전날의 키스를 떠올리기만 해도 그가 닿았던 입술이 욱신거릴 정도였고, 거침없이 끌어안았던 허리와 그의 손이 닿았던 그녀의 젖가슴은 녹아내릴 것만 같은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별 거 아니라고 했다.

 

아는 사람한테 악수를 하는 것보다 더 하찮게 여기는 말투였다.

 

지나는 신경질이 섞인 웃음으로 대신 대답했다.

 

"흐흐흠... 그래요.  당연하죠.  난 또... 사장님께서 괜히, 마음쓰고 계실 줄 알았는데... 다행이네요.  그럼..."

 

지나는 발이 바닥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기라도 할까봐 얼른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다.

 

방에 들어온 그녀는 조금 있으면 차가 도착할 것 같아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다시 만지고난 후, 아래로 내려갔다.

 

혹시나 어디선가 사토 유키의 그림자가 보이기라도 할까봐 괜스리 조바심이 느껴졌다.

 

그녀는 현관을 나서 대문으로 향하면서 뒤돌아볼까, 멈춰서 그의 방을 올려다볼까하는 갈등을 몇 번이고 느껴야 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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