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싸움은 이제 그만
-이게 뭐에욧!
레오의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효은이 소리를 질렀다.
-미안.
레오는 배시시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효은의 굳은 얼굴은 풀어질 줄 몰랐다.
-어쩔 수 없었어. 당황스럽겠지만 받아줘.
효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물론, 레오가 성급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경솔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
고 있었다. 그러나 레오의 방법은 분명 틀린 것 같기도 했다.
-당신은 항상 이런 식이야. 뭐든지 당신 뜻대로 하지. 처음부터 나한테 말이라도 하고 양해라도 구해야
했던 것 아닌가?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
레오는 그저 아무말 없이 고개만 숙였다.
-하지만 싸우지는 말자. 부탁이야.
그때, 요한센이 홍차를 가지고 나타났다.
-티 타임입니다.
요한센은 웃으며 말하다 둘의 분위기를 보고 눈치를 보다 엉거주춤 서있었다.
-뭔가 문제가 있으신가요?
-글쎄요, 요한센. 저 남자한테 물어보시죠.,
-미안하다니까..
레오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장님께서 성급한 건 사실이지만, 아가씨 역시 잃을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뭐라구요?
요한센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주제 넘게 한말씀 올리죠. 우선, 사장님께서 너무 성급하게 약혼 발표를 하신 건 사실입니다. 그건 아가씨께 정말 사과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 약혼 발표로 아가씨께선 누구나 인정하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이번일로 윈즈버그 양도 느낀 점이 많을 테니 일석이조 아닙니까?
-하지만.. 약혼은 레오 혼자만 하는 건 아니죠. 저도 이 일에 당사자 인걸요?
-그러니까 사장님이 사과 하셔야죠. 저 같으면 손이 발이 되도록 빌겠습니다만.
요한센은 슬쩍 효은에게 윙크를 해보였다. 레오는 얼굴을 책상에 묻고는 우는 소리를 했다.
-왜 나한테만 그러는거야!
-어쨌든 전 가보겠습니다. 기자들은 좋겠군요.
집에서 초조하게 시계만 바라보고 있던 미란다는 전화벨이 울리자 기도하는 마음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나야, 미나.
-미나! 그래, 발표 내용은 뭐였어?
-음.. 너한테 좋은 일일지 나쁜 일일지...
미란다는 심장이 얼어 붙는 것 같았다.
-뭔데?
-그 기자회견.. 그로스베너 약혼 발표 기자회견이었다.
-뭐라고?
미란다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괜찮니? 그 강효은인가 하는 여자하고 결혼한데.. 곧 자세한 일정을 발표 한다더라.. 여보세요? 애!
미란다는 갑자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효은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 봤다. 기하학적인 무늬가 눈으로 쏟아져 내린다. 갑자기 눈이 아픈 것을 느낀 효은은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베스가 방 안으로 들어와 효은의 눈치를 살폈다.
-야!
-왜?
효은이 갑자기 베스를 부르자 베스가 움찔 놀라며 효은을 바라봤다.
-너 때문에 내 인생 꼬였다.
-야. 그건 아니다.
갑자기 베스가 정색을 하고 말을 꺼냈다.
-머가 아니야?
효은이 베스를 째려보자 베스는 주눅이 들어 말을 이었다.
-인제 사람들이 다 너를 그로스베너 약혼녀로 볼텐데.. 좋은 거지, 머.
-아이고, 퍽이나 좋습니다요!
효은은 베스를 흘겨보며 말했다.
-아뭏든 축하해, 그로스베너 자작부인. 큭.
베스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킥대다 밖으로 나갔다.
-저걸 어따써!
효은은 큰 소리로 외치고는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어쨌든, 별 문제가 없다면, 내일 방송국으로 새벽 5시까지 와 주십시오.
-아, 네. 알겠습니다.
-의상이나 화장 등은 우리가 다 알아서 해드립니다. 뭐, 협찬이긴 하지만.
-아, 네.
효은은 메모지에 대일 오전 5시, BBC 라고 적었다. 전화를 끊고 나자 곧 이어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누구지?
의아한 생각에 전화기를 든 효은은 깜짝 놀랐다.
-나다, 딸.
-엄마?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효은은 소리쳤다.
-엄마, 어디야?
-어디긴, 이 녀석아! 너네 회사 앞이다!
-엄마, 지금 영국이야?
-그래, 인터넷으로 니 약혼 발표 보고 지금 막 도착했다. 어쨌든 빨리 나와라.
-알았어. 로비에서 기다려요!
재빨리 일어난 효은은 사무실을 빠져나와 로비로 향했다. 그녀의 엄마는 정말 급하게 영국으로 온 듯,
큰 트렁크 하나만 달랑 들고 있었다.
-엄마!
효은은 어머니를 얼싸안았다.
-으이구, 녀석아! 그런 일이 있으면 엄마한테 먼저 말을 했어야지! 우리 가게 알바 생이 말 안했으면 모
르고 넘어갈 뻔 했잖아.
-아냐. 안 그래도 연락할라 그랬어.. 엄마, 우선 짐부터 아파트에 갖다 놓자.
-그러자.
효은은 주차장으로 가 차를 끌고 왔고 곧 아파트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이게 누구야.
효은의 어머니는 깜짝 놀라 소파에서 일어섰다. 레오는 무척 상기된 표정이었다.
-엄마 때문에 오늘 조퇴했어.
효은은 레오에게 말하며 일어섰다. 레오는 먼저 어디서 봤는지, 한국식으로 넙죽 절부터 했다.
-뭐야.
효은이 피식 웃자, 레오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불안한 표정을 비었다.
-됐네. 앉게
어머니가 영어로 말하자 그때서야 레오는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빠르게 말하지 시작했다.
-제 맘대로 약혼 발표를 해 버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번 주말 즈음에 한국으로 찾아 뵐 예정이었
습니다. 비행기표도 예약 해 놨습니다.
-어휴.
효은의 어머니는 손을 내저었다.
-말이 너무 빨라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레오가 다시 천천히 늘려가며 말했다.
-제 맘대로.. 약혼 발표를 해 버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번.. 주말 즈음에 한국으로.. 찾아 뵐 예
정이었습니다.. 비행기표도.. 예약 해 놨습니다..
-친절한 청년이구나.
어머니가 웃자, 레오도 안심이 되는 지 웃어 보였다.
-자네 집에서는 우리 효은이 예뻐 하시나?
-아, 네. 아버지는 아직 뵙지 못했지만 어머니께서 참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아버지께도 좋은 인상입니
다.
-한국에서는 상견례라고 해서 부모님끼리 만나는 자리가 있는데. 알다시피 얘네 아버지는 한국에 일이 있어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내가 온 김에 자네 부모님도 만나고 갈까 하는데..
효은이 고개를 들었다.
-에? 엄마. 왜 다들 내 의사는 안 물어보는 거야?
-뭐?
효은의 어머니가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당연히 너도 좋으니까 둘이 약혼 발표 했던 것 아냐?
-음..
효은은 여기서 내가 아니라고 하면 안되겠다, 하는 생각에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된 거 아냐? 한국에서도 난리 났다. 알다시피 그로스베너 가문이 워낙 유명하잖니.
효은의 어머니가 웃자, 레오도 웃어보였다.
-저, 저녁 드시러 나가실까요? 제가 좋은 식당에 예약 해 놓았는데요.
레오는 장모될 효은의 어머니를 왕실 예법으로 에스코트하며 아파트를 나섰다.
-이렇게 날 에스코트 해주니 영국 여왕이라도 된 것 같구나!
그녀는 기분이 좋은지 내내 웃는 모습이었다.
식당에 도착한 일행은 템즈 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 참 전망이 좋구나.
-그러게.
효은은 자리에 앉았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벌써 전체 요리가 준비되어 있다고 했다.
-둘이 잘 살았으면 좋겠어. 사실, 저번에 한국에 와서 자네를 보고 우리 효은이가 저런 남자랑 결혼을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었거든?
효은의 어머니는 냅킨을 펴며 말했다. 그 말에 기분이 좋아진 레오는 싱글벙글, 찢어지는 입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 부모님은 지금 어디 계시나?
-어머니는 런던 교외의 본가에 계시고 아버지는 사업 때문에 스페인에 머물고 계십니다.
-그래? 동생도 있지 않나?
-아, 아시는군요. 동생은 지금 영국 해군에서 복무 하느라 집에는 없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효은은 볼이 퉁퉁 부어 열심히 요리만 입안에 쑤셔 넣고 있었다. 어머니가 잠깐 자리를 뜬 사이에 효은
이 속삭포처럼 말했다.
-이게 지금 말이 되는 상황이야? 난 지금 사람들한테 떠밀려서 팔려가는 기분이야.
-팔려 가다니!
레오가 과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이게 뭐야? 난 아직 정식 프로포즈도 안 받았는데? 약혼이라니?
-그렇다고 환불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잖아.
-흥.
효은은 입을 삐쭉 내밀고 와인을 쭉 들이켰다.
-아유, 정말 사이도 좋아 보이고.. 정말 잘 어울린다.
어머니가 말하며 자리에 앉자 레오가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효은씨가 어머니를 닮아서요. 정말 미인이고 성격도 다정다감하고..
그러자 그녀는 무척 기분이 좋은 듯 소리내며 웃었다.
-그러게 말이야. 내 딸이지만, 능력도 있고 예쁘고..
레오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저 사람들 뭐하는 거야? 당자사만 바보 만들고.. 효은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스테이크를 쓱쓱 소리나게 썰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어? 맛있네!
아침 일찍 일어난 효은은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고 방송국으로 향했다. 공교롭게도 가는 날이 장날 이라고 그날 아침 톱뉴스 중 하나가 그로스베너 자작의 약혼 발표였다.
-그 동안 숱한 염문의 주인공으로 부상하며 영국 최고의 신랑감 중 하나로 꼽혀온 기업가이자 왕족 그로스베너 자작의 약혼이 기정 사실화 되면서 각 업계에서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정원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이 호텔의 경우, 그로스베너 자작의 결혼 유치에 벌써 힘쓰고 있다고 합니다. 유명 디자이너 는 약혼 예복을 무료로 선물하겠다는 의사를 그로스베너 측에 전달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기자 회견 화면을 보고 있던 효은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어서 한 주간 경제계 동향을 알아보는 순서입니다. 가디언의 강효은 기자 자리하셨습니다.
-네, 안녕하십니까?
효은은 앵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여자 앵커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자리와는 상관없지만, 약혼 축하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이번 주 유럽 경제에 대해 알려 주시죠.
-이번 주 유럽은 고 유가 행진에 어려웠던 한 주였습니다. 특히 달러화가 계속 약세를 면치 못하는 가
운데 무역 부분에 있어서 큰 타격이었는데요..
효은은 카메라를 응시하며 똑똑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네, 감사합니다. 참 유능한 경제 전문가를 초빙한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네, 좋은 하루 되십시오.
카메라의 불이 꺼지자 효은은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대단한데요?
카메라 감독이 엄지 손가락을 치켜 들며 말했다.
레오는 졸린 눈을 비비며 효은의 방송을 보고 있던 레오도 기지개를 키며 일어났다.
-어쨌든, 대단한 여자야.
레오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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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뎌!! 자유의 몸이 되었네요~ 그동안 많이 기다리셨죠? 성실연재 하겠습니다!!
댓글과 추천 부탁이요~ 오늘도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