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좋은 선생님, 지나>>
샤워를 끝내고 나온 유키는 곧바로 서재로 가서 여권과 항공권을 꺼내어 곤히 자고있는 지나의 머리맡에 놓았다.
얇은 이불이 살짝 벗겨져 그녀의 어깨가 드러나보였다. 유키는 순간 만지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는 얼른 그자리에서 나와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후, 바깥으로 나갔다. 그녀와 한 방에 있는 것 자체가 고문이었다.
그의 머릿속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엉켜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알수 없는 감정에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왜 처녀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는지 화가 났다.
다른 여자들처럼 그녀도 자신의 재산을 노리고 계획적으로 접근했는지 계속 의심이 갔다.
순결을 잃었다는 이유로 그의 발목에 족쇄를 채울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들 레이와 같이 있던 천사같은 미소의 지나 얼굴이 그의 마음을 헤집어 놓았다.
그런 순수하고 착한 그녀만은 아닐 것이란 기대심에 화가 났다. 바보같이 그녀의 얼굴에 속고 어리석게도 그녀를 원했다.
그녀가 양의 탈을 쓴 불여우라는 생각에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결국 그녀는 그의 뒷통수를 내려쳤던 것이다.
하지만 유키는 그녀가 자신을 유혹했다는 사실에 놀라울 정도로 흥분했고 굶주린 욕망을 그녀에게 드러내보였다.
허겁지겁 그녀의 몸을 가졌던 전날밤이 다시금 되살아났다. 겁탈하듯이 거칠게 그녀를 다루었던 그는 욕정에 눈이 먼 악마나 다름없었다.
그녀를 조심스럽게 부드럽게 다루지 못한 것이 왠지 모르게 후회가 되었다. 그녀는... 많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어쩌면 화가 난 이유가 자신을 속인 김 지나때문이 아니라 그녀를 너무나도 간절히 원했다는 사실에 화가 난 것이리라.
그녀의 유혹에 넘어가고 그녀의 처녀성을 한순간에 빼앗아버린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이리라.
분명히 끔찍하게 화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를 또다시 원했다.
그녀를 또 끌어안고 전날처럼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실크처럼 부드럽고 유연한 그녀의 몸을 보는 순간, 그는 참을 수가 없었다. 수줍음에 붉어진 그녀의 피부는 그의 손길에 반응했다.
"제기랄! 어쩔 셈이야? 어쩔 셈이냐고, 사토 유키?!"
그녀를 가까이하는 것은 위험했다. 어느 여자보다 더 위험했다. 그녀를 가정교사로만 곁에 두어야 했다. 자신의 섹스상대가 아니라!
지나는 유키의 방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릴까 망설였다. 그에게 신경쓰지 말라고 얘기를 해야 했다.
그깟 순결이 뭐가 대단하냐고... 사랑하는 남자에게 주려고 했던 순결을 지키느라 우진이 떠나버리지 않았던가.
한순간에 실수라고... 그러니까 신경쓰지 말라고 얘기해야 했지만 막상 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
전날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한다면 뻔뻔하게 그의 앞에 서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용기를 모아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사장님..."
"..."
"저... 잠깐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침묵 뿐이었다. 혹시나 방에 없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는 분명히 안에 있을 것이다.
그녀와 얘기하기 싫다는 뜻으로 침묵했다. 다시 노크하려다 그녀는 팔을 내리고는 힘없이 돌아섰다.
아래층으로 다시 내려오자, 레이가 부시시한 얼굴로 방에서 걸어나왔다. 아이는 지나를 보더니 인상을 쓰며 투덜거렸다.
"치... 선생님 왜 어제 안 오셨어요?"
목소리에는 상당히 기분 상했다는 감정이 담겨있었다.
"어... 미안해, 레이."
그녀는 미처 아이 생각을 못 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새벽에 잠깐 깨서는 선생님 방에 올라갔었는데..."
"뭐...?"
지나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아이는 그녀가 방에 없었다는 것을 알고있다는 것이다.
"아... 저기... 그게..."
"아버지 방에서... 주무셨던 거에요?"
"레, 레이..."
"밥 주세요."
지나가 밥을 차리는 동안에 레이는 욕실로 들어가서 세수를 했다.
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음식을 차리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손이 바들바들 떨려와 국을 엎지를 것만 같았다.
레이는 그 뒤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밥을 먹었다. 보리가 곁에 앉아도 눈 하나 마주치지도 않았다.
그녀는 마주편에 앉아서 아이의 밥 위에 생선 살을 골라서 얹어주었다.
묵묵히 밥만 먹고있는 아이때문에 그녀의 심장은 두려움과 죄책감에 떨리기만 했다.
"저, 레이..."
"아버지 식사 안 갖다드리세요?"
레이는 유키를 닮은 구석이 많았다. 건조하게 말하는 아이의 눈빛또한 건조하고 차가웠다.
'나에게 실망한 거야. 아버지와 잤다는 것을 알고 날 미워할 거야.'
눈 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녀는 얼른 일어나 큰 쟁반에 유키의 아침식사를 차려서 2층으로 올라갔다.
"아침 식사드세요, 사장님."
문 옆에 있는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고 조용히 내려갔다. 하지만 그녀는 계단 중간쯤에서야 터져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난간을 부여잡고있던 그녀의 손이 떨렸고 걸을 때마다 아랫 쪽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레이가 날 싫어하게 되면 난 이곳에 있을 수가 없어.'
유키와의 첫날 밤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격렬하게 움직이던 그의 모습이 자꾸 생각났다.
그에게 매달려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비명과 신음을 쏟아냈던 자신이 창녀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는 계단에 주저앉아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댔다. 가슴이 아파 미칠 것만 같았다.
사토 유키를 좋아하는 것은 인정해야 했다. 그와 얘기할 때면 항상 심장이 두근거렸고 한참이 지나도 그 두근거림은 사그라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서 우진과 연애하는 동안에 느꼈던 설레임과는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에게는 설레임이라는 것은 있지만 명치끝에서 통증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돌아서면 그를 향한 기분은 이내 사라지곤 했다.
그런데 그녀는 우진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어리석게도 말이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자주 만나지 못 해 생기는 그리움일 뿐이었다.
한참을 울던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기분에 고개를 들었다. 레이였다.
"전... 선생님이 좋아요."
"???"
"다른 가정교사들하고는 너무 달라요. 선생님은 좋은 사람이에요. 절 진심으로 좋아해주시니까요."
"레이... 레이..."
그녀는 훌쩍거리며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손을 내밀자, 레이는 그녀에게 안겼다.
"저에게는 변함없이 좋은 선생님이세요."
"레, 레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오히려 제가 죄송해요. 선생님한테 화 내고..."
지나는 아이의 말에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눈에서는 끈임없이 눈물이 흘렀지만 그녀는 상관없었다.
사토 유키에 대한 감정에 당황스럽고 화가 났지만 그녀는 막 어두운 터널에서 나온 기분이었다.
그날 오후, 지나는 레이에게 내일 일본으로 떠날준비를 하라고 했다.
가정부가 아직 돌아오지 않아 아이의 여행가방을 그녀가 챙겨줘야 했다.
"옷은 내가 챙길테니까 읽을 책하고 방학숙제할 거 그리고 일기장은 꼭 챙겨야 돼. 그리고 학습지하고..."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레이는 공부방으로 가서 가져갈 책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근데, 선생님!"
"음..."
"보리도 데려가도 되나요?"
"음? 보, 보리?"
그 생각을 못 했다. 다른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있었더니 혼자 있을 보리걱정을 못 했다. 그녀는 아버지한테 여쭤보자고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하고 할머니께서 싫어하실 수도 있잖아."
"그래도 두 분이 절 좋아해주시니까 될 거에요. 아버지한테만 허락받으면 되요."
"그, 그래?"
모든 짐 정리를 끝내고 레이가 거실에 텔레비전을 보러가는 것을 놔두고 그녀도 짐 챙기려고 2층 방으로 올라갔다.
그곳 날씨가 어찌 될 지 모르기 때문에 자켓 두 벌과 소매 긴 옷 몇 벌 더 챙겨 넣었다. 그러자 그녀의 짐도 제법 늘어났다.
그녀는 저녁을 먹은 후에 유키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다. 일본에 보리를 데려갈 수 있는지.
레이가 그토록 보리와 떨어지기를 싫어했다. 물론 그녀도 보리를 혼자 놔두고 가는 것은 싫었다. 녀석도 싫어하겠지...
저녁을 먹은 지나는 설거지를 끝내고 위로 올라갔다.
유키는 조금 전 문에서 무슨 소리가 들었다. 방문으로 가보니 발밑에 뭔가가 밟혔다. 종이였다. 무슨 메모지 같았다.
드릴 얘기가 있어요. 뒷뜰에서 뵈요, 사장님.
오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 김 지나
유키는 메모지를 몇 번이나 쳐다봤다. 그녀가 할 얘기가 있단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갑자기 목이 답답해져 왔다. 혹시...
'혹시... 나보고 책임져달라는 건 아닐까? 그 말하려고...?'
그는 한참을 고민했다. 메모지를 받은지 한 시간이 다 되어갔다. 그는 바깥이 완전히 어두컴컴해진 것을 보고 방문을 열었다.
뒷뜰 조명아래에 정말 지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두운 곳에 뭐가 보이다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그의 발소리를 듣고 그녀가 획 돌아섰다. 놀란 눈. 그녀의 그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그의 심장이 철렁했다.
수수께끼 같은 묘한 미소가 그의 심장을 쑤시고 들어왔다. 강한 충격이었다.
그가 꿈쩍도 하지 않고 그자리에 서 있자, 지나는 그에게로 몇 걸음 걸어갔다.
그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무슨 일이냐고 차갑게 물었다.
"음... 내일 가는데... 저기 보리도 데려가도 되는지 여쭤보려구요."
"뭐요?"
그의 놀란 소리가 제법 날카로웠다. 지나는 약간 움찔하긴 했지만 계속해서 말했다.
"보리를 여기 놔두고 갈 순 없어요. 레이도 데려가기를 바라구요."
"..."
"가정부도 없는데..."
"가정부는 구할 거요. 안 그래도 아저씨 몸이 많이 안 좋아서 아주머니 그만두실 거요."
무덤덤한 그의 말에 지나는 서운함을 느꼈다. 그는 부탁을 들어줄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그, 그래요?"
"그러니 그 녀석은..."
"아뇨. 데려가면... 안 되나요? 보리는 착한데..."
지나는 두 손을 모으며 그에게 진심으로 부탁했다. 그녀의 애절한 눈빛에 유키는 자신의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좋소."
어두웠던 그녀의 얼굴이 이내 밝아졌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사장님!"
"할 얘기란 게 그거요?"
"예? 아, 그게... 예..."
유키는 몇 초 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돌아서 걸어갔다. 그때였다. 뒤에서 그녀가 다급하게 불렀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사장님!"
"???"
"잊으세요. 전날... 일부러 말 안 했던 건 아니었어요. 얘기할 수가... 없었으니까."
"왜?"
"그건... 남자들이 싫어하잖아요. 끔찍하게..."
그녀의 목소리는 점차 속삭임으로 바뀌었다. 그는 그녀의 목소리를 더 선명하게 들으려고 몸을 돌리고 그녀에게 다가섰다.
"애인하고 헤어진 이유도... 그거였어요. 그깟게 뭐가 중요하다고... 다른 여자들은 아무 남자하고 자는데... 넌 뭐냐 이거죠."
"..."
유키는 죽은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여자는 지나가 말한 그 다른 여자였다. 아무 남자하고 자는 다른 여자였다.
"그래서... 그래서 나와 잔 거요?"
"아뇨... 같이 있고 싶었어요. 사장님과... 그런 생각밖에 안 들었거든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별말을 다 쏟아냈다고 후회가 들어 얼른 덧붙여 말했다.
"그러니까 잊으세요. 다른 남자들처럼..."
다른 남자들처럼... 유키는 그녀의 무심결한 말에 화가 치밀었다. 그렇게 소중히 지켜왔을 순결을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주었는데 남 얘기하듯이 말했다.
고개를 숙이고는 얼른 달아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유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김 지나는 진정으로 순수한 여자였던 걸까. 그래서 그에게 매달리기보다는 오히려 그에게 잊으라고 했다.
주방에서 커피를 마시려고 앉아있던 그녀는 뒷문이 열리는 것을 듣고 놀라 고개를 들었다.
유키도 그녀를 보고 조금 놀랐는지 주춤하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커피 한 잔 하겠냐고 물었다.
"연하게 타주시오."
"네."
지나는 자신의 커피잔을 들고 방에 가서 마시려고 했지만 유키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여기서 같이 마십시다."
"..."
"당신 잡아먹지 않을 테니까."
그녀는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앉았지만 그들 사이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있었다.
얼마나 침묵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지나는 이런 침묵이 싫었다. 그는 아직까지 그녀와 잔 것에 화가 난 것 같았다.
"전 괜찮거든요. 그러니까 사장님께서도 괜찮으셨으면 해요. 그냥... 하룻밤 상대였다고 생각하세요."
"하룻밤 상대?"
"..."
"난 하룻밤 상대로 처녀를 건드리진 않소."
"???"
유키는 그녀의 놀란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커피를 천천히 한모금 마셨다. 그의 동작은 매우 자연스러웠고 우아했다.
"당신이 날 끌어들인 걸로 생각하면 되겠소?"
"예? 아, 예..."
"난 미처 몰랐소. 당신이 그렇게 날 원하고 있었다는 걸... 뭐, 하긴... 처음부터 내가 당신을 원했으니까."
"..."
그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이집에 있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의 사이는 심각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그는 또다시 그녀를 끌어안기라도 할까봐 두려워 그곳에서 나와야 했다.
"잘 자요."
그는 여전히 그녀를 원했다. 지금 이 순간도. 내일 그녀가 떠나면 나아지리라. 불안한 욕망은 사그라들 것이다.
드디어 다음 날이 되었다. 오후 식사를 끝내고 공항으로 가야 했다. 레이는 보리를 데려갈 수 있다는 소식에 너무나도 기뻐했다.
보리녀석도 그들과 동행할 수 있다는 사실에 큰소리로 짖어대며 오전 내내 레이와 신나게 떠들어댔다.
"레이. 가서 옷 갈아입고 와. 조금 있으면 아저씨 올 거야."
냉장고에 유키의 메모가 붙어 있었다. 공항에 넉넉히 도착할 수 있도록 기사를 불렀으니 택시타고 갈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한 시간이 지나서 초인종이 울렸고 기사가 현관에 들어섰다. 그는 거실에 있는 두 사람의 여행가방을 가뿐히 들고 차에 실었다.
그리고 나머지 가져가야 할 짐이 담긴 가방을 들고 차로 돌아갔다.
"레이. 아버지한테 인사드려야지?"
"네..."
고급스런 옷으로 단정하게 입은 아이는 껑충껑충 뛰며 계단을 올라갔다. 뒤따라 보리도 올라갔다.
방문 앞에 선 레이는 문을 두드리며 유키를 불렀다. 이내 안에서 유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 갔다오너라. 말썽 피우지 말고. 할아버지, 할머니께 안부 전해드려라."
"네..."
레이는 혹시나하는 마음으로 이곳에 왔다. 아버지가 문을 열고 나와주기를... 배웅해주기를... 그러나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무뚝뚝한 아버지의 목소리만 문을 통해 들릴 뿐이었다. 레이는 그런 아버지가 미웠다. 밤에만 살짝 내려오기만 할 뿐, 이런 날 나와보지도 않는 아버지가 싫었다.
레이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쳐내며 돌아서서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레이! 레이!"
지나는 아이가 붉어진 얼굴로 밖을 나가는 것을 보고 놀라 소리쳤다.
"무슨...? 아, 이런... 어떡게 아들이 떠나는데 나와보지도 않는담?"
그녀는 핸드백을 든 채로 계단을 밟았다. 그녀는 또다시 그에게 잔소리를 해야할 것 같았다.
아무리 시커먼 어둠이 좋다지만 레이가 일본으로 가는데 나와서 말 한마디 해주지 않는단 말인가.
"계시면 잠깐 나와보세요."
"뭐요?"
"어서요!"
"말 해요."
"사장님!"
"..."
문은 열리지 않았다. 지나는 기분 좋게 여행을 가고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들에게 무관심인 유키에게 화가 났다.
"너무하시는 거 아니세요? 레이가 어디 남의 자식도 아니고... 멀리 떠나는 아들을 문 열고 나와서 쳐다봐주면 어디가 덧나냐고요! 남의 자식한테도 이러진 않겠어요! 어떻게 레이한테..."
문이 벌컥 열렸다. 실내는 시커멓게 어두워 그의 형채가 흐리게 보였다. 훤한 시간인데도 복도는 반대로 약간 어두웠고 그거보다 그의 방은 더 어두웠다.
"지금 뭐라고 했소?"
"너무하신다고요! 사장님은 아이가 상처받기를 원하세요? 그렇지 않고서야 레이한테 그러실 순 없어요! 분명히 레이는 크게 상심했을 거에요!"
"기사 왔소?"
그녀는 그가 말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 화가 났다. 진심으로 레이를 걱정해서 하는 말을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정말... 못말리겠군요?"
"가정교사가 너무 가정일까지 간섭하는 거 아니오?"
"네?"
"시간 됐을 테니 그만 가보시오."
유키는 방문을 닫았다. '탁'하는 소리가 들린 걸 보면 안에서 문을 잠근 것 같았다.
지나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고는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집안 곳곳에 빠트린 것이 없는지 확인한 후, 현관을 나섰다.
레이는 이미 차에 올라타 있었다. 보리는 조수석에 얌전히 앉아서 기사에게 혀를 낼름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막 대문을 나서려다가 잠깐 멈추고는 돌아섰다. 이층 방에 커튼이 약간 벌어져있는 것이 보였다.
'왜 나타나지 않는 거죠? 왜 내려와서 손을 흔들어주지 않는 거냐구요, 사토 유키! 난 이미 당신 얼굴을 봤는데... 레이에게도 보여줘요. 당신의 얼굴을...'
그녀는 뒷자석에 올라탔다. 레이는 울었는지 눈가가 빨갰다. 서운했겠지... 아버지가 나와서 작별 인사를 해주지 않아서 말이다.
그녀는 아이의 붉은 얼굴을 보자 가슴이 아팠다. 레이가 상처받는 것은 싫었다.
차는 그 두사람의 무거운 마음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부드럽고 가볍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키... 다시 이곳에 돌아왔을 때는... 당신이 달라져있길 바래요. 안녕...'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