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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C버클리대학 천재교수 살인마 -_-;;

내가교수할게 |2006.07.06 16:25
조회 2,617 |추천 0
소포폭탄범
                       테오도어  J  카친스키    Theodore John Kaczynski
  1942년생
사상자 26명.
전 캘리포니아 대학교수(수학)

별명 <유나보머> <Unabomber>
1978-1996년까지18년에 걸쳐서, 경찰이나 FBI의 수사를 교묘하게 피하면서, 정교한 폭탄을16회에 걸쳐서 보냈다. 대인관계에 약해 숲에서 25년간 고독하게 살고 있었다.

16세에 하버드 대학에 입학. 박사 논문이 절찬을 받아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 종신 신분보장의 교수로 강의하고 있었다.

4개의 종신형과 가석방 없는 징역30년이 확정. 현재도 수감중.
자살미수 1회.  
"산업혁명과 그 뒤에 나타난 결과들은 인류에게 재난이었다. .... 계속되는 기술의 발전은 분명히 인간을 더욱 초라한 상태에 예속시키고 자연세계에 더욱 심대한 해악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 결과 더 심한 사회적 혼란과 고통이 따르게 될 것이다...."

1995년 9월 19일자 워싱턴 포스트지에 강제로(?) 게재된 '산업사회와 그 미래'라는 논문요약의 시작부분이다. 현대문명을 냉소하는 이 글의 저자는 테오도어 카친스키, 그는 불특정 다수를 향해 열여섯번이나 우편폭탄을 보내는 범죄를 저지르다가 잡혀 현재 구속 수감되어 있는 테러분자이다. 1962년 나이 20세에 하버드대학을 졸업할 정도로 그는 뛰어난 두뇌의 소지자였고, 수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후 약관 25세의 나이에는 캘리포니아의 버클리대학에 교수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모두가 부러워하는 대학교수의 생활을 2년만에 미련없이 던져버린 그는 공장 노동자 등으로 전전하다가 어느 순간 종적을 감추었다.

 그리고 1978년 어느 날, 노스웨스턴 대학에 배달된 소포에서 폭발물이 터졌고, 그 이후 17년 동안 미국의 곳곳에서 16차례나 소포물 폭발이 계속되어 3명이 죽고 23명이 신체를 절단 당해야 하는 사고가 이어졌다. 주로 대학(University)과  공항(Airport)으로 배달된 우편물에서 폭발사고 생겼기 때문에 이 얼굴 없는 범죄자에게는 유나보머(Unabomber) 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를 잡기 위해 미국 수사당국은 5천만불(6백억원)이라는 엄청난 수사비용을 써야 했다. 그리던 중 이 테러리스트는 1995년 6월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지에 장장 56페이지에 달하는 자신의 논문을 게재할 것을 요구하며 만약 불응할 경우 폭탄테러를 실행할 것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카친스키는, 아직 생후 6개월이었을 무렵, 두드러기성 구진(丘疹)이 전신에 퍼져 모친조차 면회할 수 없는 상태로, 침대에 얽매여서 몸 구석구석을 조사받고, 사진도 수없이 찍혔다.
(모친이 입원중의 유아에게 면회할 수 있게 된 것은 다음해에야 가능했다. 이것이 그의 성격형성에 크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 후로도 몸은 약하고, 어릴 적에만 몇번이나 입원했다. 현재도 건재하고 있는 카친스키의 모친은 미디어와의 인터뷰에서, 유아기 병원의 소홀한 취급에 대해 반복해서 상세하게 말하고 있다. 카친스키는.체포된 후, FBI에 제출된 모친의 일기중 1943/3/12일의 글에는, 「몸은 좋아졌지만, 병원에서의 괴로운 경험을 한 뒤부텨, 무표정하고 무반응이 되었다」라고 쓰여져 있다.

병약한 체질은 성장에 따라 개선되었으나, 성장함에 따라 자신의 껍질 속에서 틀어 박혀,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무표정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부모는 그런 그를 보이 스카우트나 다른 서클같은 곳에 들어가보게 했으나, 역시 주위 사람들과 잘 해 나가지 못했다.

학교 성적은 발군이었고, 예능에도 재능이 있어서 트럼본도 잘 다루고 애용했으며, 부친의 피아노에 맞춰서 연주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바하나 비발디를 좋아하고 작곡의 재능도 있었다.

친구와  어울리는 일은 거의 없었고, 책 읽는 것을 좋아한 나머지, 15세 때, 시카고 대학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여름동안 '그리스 비극' 의 강의에 출석했다
 
 청년기    ■  ■  ■

다음 해, 16세에 하버드 대학에 입학했지만, 다른 환경에는 적응을 할 수 없었던 그는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보통 대학생과 같이 친구와 활발하게 활동한다고 하는 것은 전혀 생각치 안했다. 당시의 룸메이트에 의하면, 방이 더럽기 짝이 없었고, 썩은 우유가 널려 있었다고 한다. 또, 그 뒤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섹스에의 격렬한 기아감 "acute sexual starvation. "」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교제 상대를 발견할 수 없었고, 번민하고 있었다고 한다.

후에 그는 증언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성을 설득하려고 해도, 비참한 결과로 끝났다.
   그것은 30세가 될 때까지 길게 계속되었다. 여성에게 말을
   건네는 것은 지극히 어려웠고 거의 불가능했다.
   19-20 살 무렵, 교제하게 된 여성이 있었으나 인생에서
   여성과 교제한 것은 그 한번 뿐이었다. 이런 것은 말하고 싶지    는 않지만…… , 그것이 사실이다. 』
 
 은둔    ■  ■  ■

 박사 논문이 절찬을 받고,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교에 종신재직의 신분 보장을 얻고 교수로 취임했다. 그러나,제자 학생들이 모두가 앞으로 엔지니어가 되려고 하는 것을 불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엔지니어라고 하는 직업이「근대 과학」의 부산물이고「환경파괴」의 첨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소심한 성격 때문에 동료 교수나 학생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었다. 체포된 뒤 그들의 증언에서, 동료들은 카친스키에 관한 것은 잘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대학을 스스로 그만두고 몬타나주의 깊은 산속에 오두막집을 짓고,전기,수도등의 문화시설은 완전히 멀리한 상태에서 25년에 걸쳐 고독한 은둔 생활을 보냈다.
                 ( 사진은 25년에 걸쳐 은 둔 생활을 한 오두막집)
1978년에서 체포된 95년까지 정교한 폭탄을 16회에 걸쳐 대학이나 항공회사에 발송했다. 몽타주가 전국 구석구석까지 뿌려지고, 수사기관이 필사의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 중에도 범행을 계속했다.

반(反) 과학,반 기술의 광신적 주장을 반복해서 표하고 신문지상들에 투고했다.1995년,35,000 단어에 이르는「성명문(manifesto:434kb)」을 뉴욕 타임즈나 워싱턴 포스트에 보내고,만약 게재되면,범행을 중지하겠다는 조건을 들이대고,게재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이 성명문을 읽었던 카친스키의 남동생 David가 형으로부터 오는 편지가 성명문과 아주 비슷하다 하여 경찰에게 신고,1996년 체포되었다.David는 정보 제공자에게 걸려있던 100만 달러(12억원)의 보상금을 수취하고「희생자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기 위해 쓰고 싶다」며 신탁 기금을 만들고,희생자에게의 지불을 현재도 계속하고 있다.

오두막집 안에서는 제조중의 폭탄, 화학약품의 용기,전지와 동선,성명문의 원고,우송한 폭탄의 폭발을 알리는 잡지등이 발견됐다.일기중에는,'그 녀석들' 의 손을 날려 버리고 말겠다고 하는 글과, 성전환 수술에 관하여 정신과의사에게 상담했다고 하는 것까지 상세히 쓰여져 있었다.살고 있던 오두막집은 재판의 증거로써 통째로 운반되어 왔다.

     
재판     ■  ■  ■

변호사는 망상성 정신분열병으로 정신감정을 요구하고, 사형을 피하려고 했지만, 본인은 결코 정신병이 아니라며 유죄를 인정했다.

『 나는 망상이나 그러한 종류의 것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청년기에 사회에 적응하는데 조금 장애가 있었을 뿐이다. 
   그것을 병이라고 하는 사람은 많지만, 분열병과 같은 기질성 질환과는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동생 David의 신고로 체포된 데에는 분노를 느끼고 있었고, 옥중에서 저술한 책,<진실과 허구(Truth Versus Lies:Context Books of New York)> 가운데에서,남동생 Devid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 자신이 한 일에 죄악감을 느끼고 있을 것은 틀림없겠지만,
    항상 자신보다 뛰어났던 형에게 복수한 만족감은, 
    그 죄악감을 상쇄하고 있을 것 같다』

또,만약 다른 형제가 유나보머라고 한다면 어떻게 생각 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나라면 말을 않고 있을 것이다 "I would have kept it to myself." 』라고도 말하고,남동생이 면회를 와도 등을 돌리고 특별히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최저의 사내 자식이다.하루라도 빨리 죽는 편이 좋다』고도 했다.

Burrell 판사는,
「피고인은 필설로 다하기 어려운 흉악한 범행을 저질렀으며, 더욱이나 반성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백한 범행은 16 건,4개의 종신형과 가석방 없는 징역 30년이 확정,콜로라도 주  Florence 교도소에 수감됐다.

   " 일생을 교도소에서 보내는 것보다 사형을 받고 싶다."

 고 해서, 자살할 것을 우려하여 엄격한 감시가 붙어 있다.


동기      ■  ■  ■

증언에 일견 모순되는 점이 있어서, 과연 동기가 무엇이었느냐에 관해서는,다양한 견해가 난비하고 있다.오두막집에서 쓰고 있었던 일기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동기는 단순한 개인적 복수이다.
   "My motive for doing what I am going to do is simply     personal  revenge."

   아무것도 믿고 있지 않다
   "I believe in nothing," 

한편으로,심하게 현대 사회를 공격하고 있다.워싱턴 포스트에 게재된 성명문에 의하면,산업혁명이야 말로 인류 사상 최대의 비극이고, 기술의 진화 탓으로 인간성이 빼앗기고 있다고 35,000 단어에 달하는 장문으로 주장하고 있다.

단지,만약 성명문에 쓰여졌던 것처럼 현대 사회나 근대 과학에 대하고 적개심을 갖고 있었다면, 왜 폭탄을 개인에게도 우송해서 피해가 작은 방법을 선택한 것도 의문으로 남는다.본래 대학교수 라는 지극히 지능이 높은 범인이라고 한다면, 현대문명 그 자체를 말살할 만한, 대규모 폭탄 테러나, 수원지에서의 세균 살포등의 강력한 파괴력이 있는 방법을 생각했을 것이다, (성명문 에서는 폭력혁명을 부정하고 있지만, 폭탄을 보내는 것은 폭력에 해당한다)

이러한 점에서, 개인적 견해를「반 기술」이라는 말로 보강,정당화했을 것이다. 아마는 망상형 인격장애를 가지고 있고, 이전에 없인여김을 당하고 있었던 것으로부터 사람들과 사회를 전부 적으로 생각하고 복수하는 것이 최대의 동기가 되었을 터이다.

과학기술을 부정하는 원시 공산 사회를 이상으로 하여,「자연이라고 하는 이념을 세상에 넓게 주입시켜서 혁명을 일으킨다」는 주장은 캄보디아의 폴 포트와 아주 흡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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