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침묵이 흘렀다...
말없이 나... 그리고 가혜와 미연이...
우리들은 말없이 서로의 눈을 마주보고 술잔을 들었다.
[ 그런 놈들... 꼭 있지... ]
가혜...
[ 나도 그래서 바로 칼 같이 끝냈던 기억이 있어... ]
미연...
[ 고마워 해야지. 별 탈없이 이런 이야기를 제공해줬으니 말이지. 자~ 마셔! ]
그리고 나...
우리들은 잔은 꺾기가 무섭게 한명은 참치김치찌개로 ...
한 명은 또 다시 술로 잔을 채웠고... 또 한 명은 담배로 손을 가져갔다.
[ 창문 좀 열고 피우자. 질식하겠다. ]
[ 내가 열께. ]
미연이의 말에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풀벌레 소리가 가득 방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 난 ... 여름밤에 이렇게 술 마시는게 제일 좋더라. ]
내 말에 가혜가 입을 이죽거렸다.
[ 벌레밖에 더 물리냐~ ]
[ 야아~ 가혜 넌 대체 왜 그렇게 분위기를 못 맞추냐~ ]
미연이가 가혜에게 잔뜩 투덜거렸다.
[ 나? 나 원래 그렇게 생겼잖아. 킥킥... ]
가혜는 내가 앉을 때까지 뭐가 그렇게 재미가 있는지 연신 킥킥거렸다.
[ 해미야, 그러고 보니... 니 얘기 들으니까 나도 생각나는 놈이 하나 있다.]
[ 오호~ 오늘 가혜의 스토리를 듣게 되는거야? ]
미연이가 환호성을 질렀다.
[ 그래, 이번엔 가혜, 니가 이야기 풀어봐라. ]
[ 그럴까? 그러니까... 그게... ]
가혜의 본가는 천안에 있었다.
그리고... 가혜는 고등학교 시절 3년간 예쁘게 사랑을 가꿔왔던 박진성이란 똑똑한 머스마가 있었다.
그 예쁜 커플은 대학교 입시를 치르고 가혜는 서울로...
그리고 진성이는 부산으로.... 그들은 대한민국의 끝과 끝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 우리... 계속 사귈 수 있을까...? ]
가혜의 질문에 진성이는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둘 다 원하던 대학, 원하는 학과에 진학을 했지만... 우려했던 문제가 이제 눈 앞에 남아있었다.
[ 가혜, 너는...? ]
진성이의 반문에 가혜 역시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먼... 거리였다. 3년간 매일매일 그렇게 만나고... 함께 공부하고... 그랬는데...
그랬는데...
가혜의 눈에서 먼저 눈물이 흘렀다.
[ 어떻게해... 나... 너 따라서 부산으로 지원할 걸 그랬나봐... ]
[ 나 때문에 니 꿈이 흐트러지면 안되잖아... 난 꼭 니가 꿈을 이루기를 바래... 가혜야...
꼭... 니가 니 이름으로 된 패션 브랜드를 가질 수 있도록... 말이야...]
[ 진성아... ]
가혜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 너무... 애쓰지는 말자... 서로 지칠테니까... 지금이 끝은 아니라고 생각하자...]
진성의 목소리까지 울먹이고 있었다.
[ 억지로 사랑을 지키겠다고 애를 써봤자... 아마... 서로 더 힘들고 지쳐갈꺼야...
서로... 학교 생활에 적응잘하고... 그리고 열심히 꿈을 키워서...
그래서 .... 그래서... ]
[ 흑... 흑.... 진성아.... ]
그 진성이란 머스마가 가혜의 모든 것의 첫번째 남자였다.
[ 멋지네... ]
내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정말 그림같은 사랑얘기였다.
나이 답지 않은 성숙한 결단까지... 어느 놈인지 사뭇 얼굴이 궁금했다.
[ 그런데... 누가 먼저 현지처가 생겼던거야? ]
미연이가 짖궂게 물었다.
[ 나. ]
가혜가 어쩐지 씁쓸하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진성이와 무언의 이별을 전제로 그렇게 서로의 꿈을 향해 등을 돌렸다.
물론 도착하자마자 전화를 하고... 학교 생활을 보고하고...
그리워 하고... 눈물을 흘리고.... 울부짖고...
그랬었다...
가혜는 정말 몰랐다.
3년동안 같이 있던 존재가 사라졌다는 허전함이 그렇게 크다는 것을...
왜... 남자친구가 군대에 갈 때 우는 여자들이 기다리지 못하고 바람을 피운다는 것인지...
가혜는 남보다 조금 일찍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분명... 그들은 그 허전함을 견디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을 꺼라고...
지금의 자신처럼...
입학한지 조금 지나자 과에서 CC들이 생겨났다.
캠퍼스 곳곳에서는 사랑행각이 벌어졌다.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날씨는 미치도록 화창했지만... 가혜는 미치도록 외로웠다.
미팅을 나가봐도....
소개팅을 해봐도... 애프터가 들어와도... 그냥 그랬다.
외롭기는 외로운데... 왜 이렇게 끌리는 사람은 없는건지... 아이러니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이었다.
[ 저... 저기여~!! ]
교양영어 과목을 듣고 나오는 길에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뒤에서 울려퍼졌다.
그 목소리가 워낙 컸기에 모든 학생들이 일제히 강의실을 나가다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 거기, 초록색 치마요... ]
그 말에 사람들이 일제히 주위를 두리번 거렸고,
가혜는 자신의 치마 색깔을 보고는 당황해서 눈이 동그래졌다.
[ 저.. 저여? ]
그 큰 목소리의 주인공인 남자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학생들은 상황을 짐작하고는 가혜를 흘끔 바라보고는 나가면서 키득거렸다.
[ 갑자기 불러서 놀랐죠? 신입생인가요? ]
까무잡잡한 피부... 의 샤프하게 빠진 얼굴 라인이 꽤나 멋드러진 남자였다.
뿐만 아니라 과감한 그의 패션은 가혜의 눈을 사로집았다.
[ 네... 그런데요... ]
[ 의류학과겠지? 난 3학년 신정훈라고 해. ]
[ 1학년, 한가혜입니다. ]
가혜는 선배라는 소리에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했다.
[ 다름이 아니라, 너 키 165cm 맞지? 허리 26이니? ]
[ 네? ]
갑작스럽게 신체 사이즈라니...
당황하는 가혜의 표정을 읽은 정훈이가 강의실이 쩌렁쩌렁하도록 웃었다.
[ 왜 그렇게 놀라고 그래. 곧 축제라서 의상 발표회를 해야하는데,
내가 만든 옷이 55 정사이즈라... 그것 좀 입어달라고 부탁하려고 그러는거야. ]
[ 네? 저... 그런건... ]
[ 별거 없어. 진짜 프로모델 같기를 기대하는거 아니니까 그냥 입어만 주면돼. ]
[ 저기... 저... 그래도.... 무대에 서야되는거잖아요... ]
[ 교내 발표회인데 뭐 얼마나 오겠어. 과행사인데... 답례로 내가 술한잔 살께.
오늘 오후에 수업 언제 끝나? ]
[ .. 4시 30분쯤 끝나는데요...]
[ 그래? 그럼 수업 끝나고 과실로 와라. ]
[ 저... 근데 선배... ]
[ 오늘 저녁에 나랑 술한잔하면서 다시 얘기해보자. 응? ]
정훈이가 가볍게 윙크를 하면서 가혜의 어깨를 툭 쳤다.
[ 그럼, 나 수업이 시작시간이 여유가 없어서 먼저 간다. 이따 보자! ]
하...
발표회?
옷을 미치도록 좋아하는 가혜에게는 정말 신나는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차분하고 다정했던 진성이와는 달리 시원시원하고 활발해 보이는 성격의 정훈이가
더더욱 가혜의 감정을 자극했다.
[ 술먹고 일낸거냐? ]
내가 궁금증을 못 참고 질문을 던졌다.
[ 야, 좀 끝까지 들어봐... ]
가혜가 나를 확 쏘아보았다.
기집애.... 성깔하고는...
[ 알았어... 전개 좀 빨리 해봐... 궁금해 죽겠다. ]
[ 술 먹은 날엔 그냥 술만 먹었어. ]
[ 진짜? 그럼 대체 언제야? 그 선배랑 사귄거야? ]
이번엔 내가 아닌 미연이었다.
[ 아띠... 그냥 얘기 안 들을래? 나 얘기 안해버린다!! ]
[ 미연아... 그냥 조용히 듣자... 저 뇬 성질 우리가 알아줘야지 어쩌겠냐... ]
기집애... 자기만 성깔있나...
자기도 나 얘기할 때 끼어들었었으면서...
왕 치사빤스!! 피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