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눈동자가 동준을 붙잡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서러움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그 눈이 동준의 심장을 서늘하게 했다.
“얼굴 안 좋아 보인다. 들어가서 자라.”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동준이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 얼굴을 보고 있었다. 이미 자신을 다 알고 있는 듯한 그 눈이 자꾸 동준을 흔들고 있었다. 여전히 우뚝 선 채 움직이려 하지 않는 진서에게 동준이 다시 말을 건넸다.
“들어가지 않으려면 앉아.”
동준의 말에도 아무런 미동도 없이 서 있던 진서가 동준이 앉은 소파 가까이로 다가섰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모자속의 그 얼굴을 동준에게 가까이 가져갔다.
“키스해도 돼요?”
“야...너 무슨.....장난......”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서의 입술이 동준의 아랫입술에 살짝 닿았다.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린 동준이 얼어버린 듯 팔조차 움직이지 못하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작은 입술이 주저 없이 다가와 그 한번의 스침으로 온몸을 떨리게 하고 있었다. 가져다댄 입술을 때지 않은 채 동준의 떨림을 그대로 느끼고 있던 진서가 그 아랫입술을 조금 더 힘주어 깨물 듯 흡입하다 몸을 때냈다. 동준이 멍하게 있다 말없이 돌아서 나가는 진서를 불러세웠다.
“너.....이거 뭐하는 거야?”
“보이는 그대로....”
“나한테 제멋대로 구는 거......재미있니? 그래서 이러는 거니?”
“잠도.....같이 잘래요.”
여전히 좀 전의 당혹스러움을 풀지 못하고 있던 동준이 진서의 말에 화기가 돌고 있었다. 묘한 떨림을 주면서도 주저 없이 다가서는 그 속에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내뱉고 있으면서도 그 눈 속에 분명 두려움이 있었다. 그런데도 쉽지 않은 그 말들을 그렇게 내뱉고 있어 동준이 이해할 수 없어 화가 났다.
“너 도대체 뭐야....왜 이르는 거니. 내가 여자들 함부로 만나고 다니니까...그거 확인해보고 싶어 이래?”
문을 향하던 진서가 모자를 벗고 머리를 털어내며 동준을 돌아보았다. 그 눈이 축축한 서러움이 묻어 있었다.
“이 건물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죠. 여기 와서 한번도 편하게 자본적 없어요. 그래서 아침마다 일어나는 거 곤욕이었어요. 한번씩은 그냥 가지 말고 같이 있어달라고 하고 싶을 만큼 .....여기 새벽 내가 사는 과는 너무 많이 달라서....”
“.......미안하다.....그런 뜻인지 몰랐다.”
“..........”
“말하지 그랬어?”
“........”
“그래. 그랬겠다. 이 넓은 곳에....새벽이면 아무도 없는 텅빈 건물인데.....내가 생각 못했다.”
문을 열고 나서던 진서가 잠시 망설이다 남을 말을 했다.
“관장님 사무실에서 잤을 때....그날 처음으로 깊이 잤어요. 나 혼자가 아니어서...”
동준이 천둥을 맞은 듯 가슴속이 진동하며 울려댔다. 그 말을 듣고 있는 심장이 저절로 떨려와 호흡조차 흔들리고 있었다. 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두려웠던 그 새벽을 혼자 보냈을 진서의 두려움이 그 순간 거짓말처럼 동준에게 생겨나고 있었다. 자신의 것처럼 쓰라리고 아파 그 눈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동준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아무런 갈등도 망설임도 없이 그 품안으로 진서의 작은 어깨를 감쌌다.
“여기 있을게. 이제부터 여기서 잘게. 미안하다. 미안하다.”
동준이 진서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제멋대로 치솟아 헝클어진 머리가 동준의 코끝에 와 닿았다. 그 머릿결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던 손길이 어느 듯 목덜미로 내려와 턱과 귓볼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진서야!”
“........”
“지금 나한테 생기고 있는 이거.....나도 혼란스럽다. 한번도 가져보지 않은 것들이 욕심나고.....그래서 두렵다. 나는 일부러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려 애쓰며 살았다. 가진 것은 언젠가는 잃게 되니까......”
진서가 고개를 들어 동준의 눈을 보았다. 큰 어깨를 가진 두려운 새 한 마리가 보이는 그것조차 믿지 못하고 자신 속에 자꾸 숨으려 하고 있었다.
“잃을 것이 두려워 가지지 않으면....이 세상 어떤 것도 당신 기억하지 못해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너.....어떤 사람하고 많이 닮았다.”
“누군데요?”
동준이 진서를 풀어놓으며 작게 웃었다.
“그게.....나도 모른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건 확실한데....누군지 나도 몰라.”
“무슨 말이 그래요?”
“듣고 웃지 않겠다면 얘기해 줄게.”
“약속해요.”
“잠깐 있어.”
동준이 진서의 방으로 가 홑이불을 들고 왔다. 간간히 끊이지 않던 장마의 끝자락이 습한 기운을 몰고 와 새벽이 조금은 서늘해지고 있었다. 진서를 소파에 앉힌 동준이 그 위로 이불을 덮어주고 그 곁에 앉았다.
“이렇게 있다 잠 오면 자라. 이 소파 너 하나 자기엔 그렇게 작진 않을 거다.”
“얘기해 봐요.”
“너 여기 오기 두주 전부터 계속 같은 꿈을 꾸고 있는데....근데 말야....니가 전번에 했던 말..”
진서가 큰 눈을 반짝이며 동준의 말을 담고 있었다. 하나라도 흘려듣지 않으려는 듯 그 고개를 동준에게 바짝 다가가 내 뱉는 호흡이 느껴질 정도였다. 동준이 말을 하다 진서의 그 모습에 빙긋이 웃으며 코끝을 툭 쳤다.
“아까 그것도 그렇고 지금 이것도.....유혹으로 간주한다.”
“내가 했던 말....어떤거요?”
“불편하고 싫은 거 참지 않는다고.....참지 말고 다 보이라 한 사람 있다고.”
한순간 진서의 눈빛이 흔들렸다. 호기심으로 가득하던 그 눈이 알 수 없는 연민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
“그 말.....꿈속의 그 사람이 했던 말이다. 그래서 좀 놀랐다. 그냥 우연인줄은 아는데 가끔 너한테 이상한 기분도 느껴져서 놀랄 때도 있어. 니가 휘두르던 그 목검도 우연치고는 .......”
조금씩 가물거리던 시선이 아득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편안해진 영혼 속으로 찾아든 고요가 진서를 이끌어 동준의 낮은 목소리에 잠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목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진서를 소파에 뉘인 동준이 한동안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를 그렇게 잃고 처음으로 사람에게 욕심이 생기고 있었다. 희뿌연 안개 속에 가려진 듯 알 수 없는 무게가 느껴지고 있었지만 그 존재 하나로 동준의 가슴이 채워지고 있었다.
서규식의 저녁 모임에 함께 나간 정재가 문을 들어서는 한필중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그 얼굴에 굳은 빛이 스치다 표나지 않게 사라졌다. 가볍게 몇 번 본 탓인지 한필중이 정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서규식이 사업 파트너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그라는 사실에 정재의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그런 인간과 같은 배에 올라타야 할 만큼 서규식이 풍파를 겪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버지의 일도 걸리고 있었지만 정작 정재는 한필중에서 동준의 존재를 더 깊이 느끼고 있었다. 동준과 한필중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복잡한 고리가 깊게 얽혀 있다는 것은 예전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동준이 하고 있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그를 탓할 수 없었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에게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무게가 자꾸 정재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제 자식 놈 입니다.”
“아...저번에 그 의사공부 한다던...”
“예. 세상구경도 하고 땀도 흘려보고 싶다고 잠시 고생을 좀 하고 왔습니다.”
“젊어 고생은 배워 얻어지는 것과는 다른 가치가 있으니 좋은 경험이 됐을 겁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런 생각 못하고 사나 했는데 자랑스러운 아들을 두셨습니다.”
“아닙니다. 아직 모자람이 많은 아이라 늘 위태우태 합니다.”
서규식이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그 눈 속에 아들에 대한 깊은 믿음이 담겨있었다. 속을 숨진 정재가 불편한 저녁식사를 끝나고 그 자리를 나왔다. 대학병원에 남아있는 동기들과 술 약속이 있었지만 불편한 마음이 딴 곳에 가 있어 내키지 않고 있었다. 결국 약속을 깨고 집으로 돌아온 정재의 머릿속이 온통 뒤엉키고 있었다. 그러다 다시 진서를 떠오려 그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주말에 시골집에서 만난다는 약속 외에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분명 자신에게 경계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꼈었다. 그런데도 일하는 곳을 말하지 않았고 또 휴대전화가 없어 연락할 길이 없었다. 여전히 그 얼굴을 떠올리면 이유 없이 웃음이 났다. 낯설지 않은 편안함과 가슴이 진동하는 떨림을 함께 주는 그 느낌이 정재의 정신을 맑게 중화시키고 있었다. 하루 종일 기분이 가라앉아 있던 정재가 결국 이틀 동안의 갈등을 접고 클럽으로 향했다. 이미 한달이 훌쩍 넘어버린 시간들을 그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지 짐작해 정재의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면서도 그에 대한 알 수 없는 믿음이 있어 다른 생각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정재가 엘리베이터 두고 계단으로 3층까지 올라갔다. 클럽을 들어서다 사무실 안의 동준과 진서를 본 정재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가고 있었다. 삽시간에 변해버린 그 기분이 끝도 없이 두려움 속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그 존재의 불안함이 없지는 않았지만 너무도 놀라운 진서의 등장이 그 가슴을 퍼렇게 떨리게 했다. 서둘러 돌아나와 계단을 밟아 내려서는 발걸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 나보다 내 가슴이 먼저 느끼는 이 두려움은 뭘까?
어째서 이곳이 니가 있는 거니.
어째서 그런 얼굴로 그 사람을 보고 있는 거니.
그 사람은...... 움직이는 폭풍우인데......
너 왜 그 속에 서 있는 거니.
클럽을 나온 정재가 넋을 잃은 표정으로 차에 올라탔다. 갑작스러운 혼란에 모든 것들이 뒤엉켜 생각이 멈춰 있었다. 한참동안을 그렇게 앉아있다 감은 눈을 열고 차가운 이성을 되찾으려 그 생각을 하나에 집중시켰다. 그 눈 속에 싸늘하고 날카로운 바람 한 점이 스쳤다.
- 나를 비켜가는 것은 모두 그 이유가 있다.
이유가 있다.
비켜가지 않는 것은.....
온전한 내 의지로 잡을 것이다.
수화기 저편으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한 달이 지났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할 만큼 익숙하게 정재에게 다가왔다.
“여보세요.”
“형!”
“너....”
“미안해.”
“어디야?”
“저녁에 술 한 잔 하자.”
“알았다. 8시 술딴지로 갈게.”
“응.”
이틀 전 그렇게 진서를 지켜보며 새벽을 보낸 동준이 한필중이 지시한 일로 정신없이 일을 보면서도 시간과 전쟁을 치루며 열두시가 되기 전에 클럽으로 돌아왔다. 소파에서 편치 않은 잠을 자면서도 하루 종일 웃고 있는 진서를 보는 것으로 그 피로가 잊어지고 있었다.
다음 날 한필중이 느닷없이 클럽에 나타나 동준이 잠시 동안 가졌던 그 평화를 뒤흔들어 놓았다. 뒤따르던 검은 양복들이 눈치도 없이 클럽안까지 들어와 기웃거리는 바람에 운동을 하던 회원들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찬서리를 맞은 듯 했다. 한번도 그렇게 찾아온 일이 없었던 한필중의 행동에 동준이 보이지 않게 깔린 다른 빛깔을 조금씩 보아내고 있었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동준의 표정이 좀 전보다 가볍게 변해 있었다. 애써 웃음을 만들고 있었지만 하루 종일 그 기분이 가라앉아 있던 것을 안 진서가 잠시 머문 그 기운에 마음을 내려놓았다. 내보이지 않고 있었지만 하루 종일 자신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 진서를 알고 있어 동준이 그 얼굴을 깊게 응시했다.
“나 때문에 신경 쓰이니?”
“내.”
“왜.”
“그 얼굴에 다 보이니까.”
“뭐가?”
“뭐든.”
동준이 빙긋이 웃었다. 굳이 많은 말을 건네지 않고 밖으로 들어내 보이지 않으면서도 동준의 가슴을 움직이는 그 어떤 힘이 얼굴에 담겨 있었다. 짧은 한순간 스치기만 하는 그 빛이 번져와 동준을 동화시키고 있었다.
“여기 일하던 놈인데....한 달 잠수 타다 오늘 연락 왔다.”
그렇게 말을 하고 있으면서도 밉거나 서운한 기운이 묻어있지 않았다. 그 전화를 받던 목소리에서 이미 알 수 있었다.
“그럼....나 짤리는 건가?”
“짤리면...어쩔건데.”
동준이 피식 웃으며 농담을 하는 진서를 빤히 응시했다.
“진서야!”
“.........”
“너...참 묘하다.”
대답대신 그 눈을 동준의 시선에 맞추어 묻고 있었다.
“너 어쩔 때 보면 오전 내내 한마디도 안할 때 있는데..?”
“마찬가진 거 알아요?”
“그런가.....내가 그랬나?”
오전 내내 아무 말을 나누지 않았었다. 그런데도 그 마음이 보여 불편하거나 답답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움직이고 있는 그것이 다른 언어로 동준에게 읽히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것이 오히려 편할 수 있다는 것에 동준이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 사람 많이 좋아하나 봐요?”
“아닌데....오늘 만나면 한 대 갈겨줄 건데..”
“뭘 해도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 있죠.”
그 말을 하고 사무실을 나가는 진서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시간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이 조금씩 편해진다.
너와 있으면 그렇게 된다.
그저 흐르는 편안함속에 나를 둘 수 있어 내가 아닌 듯 평온해진다.
그 작은 어깨에 세상에 없는 안식처가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내 속에 꿈틀거리는 이 폭풍들을 모두 감싸 않아 줄 듯...
나를 쉬게 한다.
정재와의 약속시간이 조금 남아 몸을 풀고 있던 동준에게 한사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동준이 습관처럼 편치 않은 자리에 나갈 때는 진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클럽을 나섰다. 한사장의 사무실로 들어서든 동준이 돌아서 나오는 태수를 보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나 눈빛이 흔들린 것은 태수였다. 입을 열지 못하고 선 태수에게 동준이 먼저 말을 건넸다.
“팔은 좀 어떠냐.”
“씨팔....개쪽판거 확인 하냐.”
“알긴 아냐.”
“그 계집애 조심해라고 해라.”
어깨를 스치며 나가는 태수를 불러 세운 동준이 싸늘하고 굳은 말을 내뱉었다.
“니가 남자 새끼면 개쪽판거 한번으로 족해라. 나한테 갚을 건 나한테 해라. 언제라도 받아줄 용의가 있다. 너 두 번 실수해서 내손에 반 죽어 나가는 일 만들지 마라. 그 아이 건드리면.......너 그렇게 된다.”
“씨팔새끼...언제까지 그렇게 당당한지 두고 보자.”
동준이 사무실로 들어서자 한필중이 자리에서 일어나 접대용 소파로 나와 앉았다. 그 얼굴에 묘한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
“시일이 급하게 돼서 이번 일 좀 더 빨리 처리해야 할 것 같다.”
“......”
“그래서 내가 미리 준비해둔 걸로 뒷마무리 할까 하는데...”
한필중이 몸을 일으켜 책상위에 있던 파일을 들고 와 동준 앞에 내밀었다. 동준이 그것을 들어 대충 몇 장을 넘겨보다 그 눈이 얇게 흔들렸다.
“그냥...제가 생각한 방법으로...”
“급하다. 이게 가장 빠르고 뒤탈이 없을 꺼다. 이번 입찰 그쪽에서도 사활이 걸린 문제라 전력투구할거다. 가장 치명적인 아킬레스가 아니면 물러날 자가 아니다.”
“.............”
동준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있자 한필중이 짐작했다는 듯 표나지 않는 웃음을 흘리다 표정을 바꾸었다.
“니가 내켜하지 않을 건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너라면.....절대로 택할 방법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큰 건이 결부된 일이다. 다른 생각 말고 그냥 밀고 나가라.”
“이렇게 준비 해 두신 거면 굳이 제가 아니라도 됐을 일입니다.”
한필중이 동준의 말을 그냥 흘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참.....그 자 딸하고 같은 반 다니는 아이는 이미 스완에 넣어뒀다.”
“이 일........태수가 준비한 겁니까?”
“너와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다만....나름대로 꽤 쓸모가 있더구나. 동기라고 하더니...”
“예.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질긴 인연입니다.”
“그 놈도 묘한 말을 하더구나.....둘이 풀지 못한 앙금이 있는 모양인데....일에 지장없게 해라.”
“꼭 태수를 써야 했습니까?”
“니가 이 바닥 아이들과 달라서 남다르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지나친 하극상은 곤란하다. 더 이상 본분에서 벗어나지 마라.”
“나가보겠습니다.”
“지윤이가 좀 아프다. 저녁에 죽좀사서 갖다 줘라.”
“약속 있습니다.”
“지윤이 일도 내가 시키는 다른 일과 같이 생각하나?”
동준이 한필중의 눈을 맞받아 내며 자신의 의지를 들어냈다. 예전보다 더 불편해지고 있는 그것을 한번은 잘라내야 한다 생각하고 있었다.
“저한테는 불편한 일일 뿐입니다.”
“독한 놈이구나. 그래서 지윤이가 그렇게 놓지 못하는 건가?”
“잠시라도 들려라.”
“............”
술딴지에 도착한 동준이 먼저 와 술을 시작한 정재에게로 다가갔다. 한달을 부재중이던 놈 답지 않게 깔끔하고 정리된 모습이 어쩌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을지 모른다는 예감을 주었다.
“너무 멀쩡하구나.”
“미안해.”
“새끼. 미안해하지도 않으면서 말은 왜 하냐.”
“.......일은.....누가 하고 있어?”
“너보다 더 기막힌 물건 하나 들어와 있다.”
그 말을 내놓는 동준의 표정 속에 얇은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그 짧은 찰나에 정재의 심장으로 날아든 불안감이 술잔에 내려앉고 있었다.
“그 표정 보니까 나쁘지 않은 모양이네.”
“집으로.....돌아간 거니?”
“찾던 사람이 있었는데....만났어.”
“뭐....옛날 애인...”
정재가 피식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동준이 한 그 말을 혼잣말처럼 되 뇌였다.
-옛날 애인.....
그래. 아주아주 옛날 애인......
너무 오래전 사람이라 기억하는게 죄가 되는 그런 애인.....
“만났으면 형한테 소개도 좀 시켜주고 그럴 것이지...”
“......다음에.....”
“집에 들어갔어?”
“응....공부 다시 시작하려고”
“잘 생각했다.......새끼 그렇다고 말하고 가면 어디 덧나냐?”
“형...요즘도 한사장 일 해?” “갑자기 그건 왜?"
“그냥......”
“신경 쓰지 마 임마.”
예전과 다른 동준의 분위기에 정재의 가슴이 알 수 없이 서늘했다. 늘 가라앉아 있던 그것이 사라져 다행스럽다 생각하면서도 그 이유가 다른데 있을 것이 두려워 묻지 못하고 있었다.
“형 좀 달라진 것 같다.”
“내가?.....뭐가 달라졌지...그럴게 없는데?”
“모르겠어. 그냥 분위기가 전과 좀 다르네.”
동준이 피식 웃으며 정재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자신조차도 전과 다른 느낌을 가지고 있어 정재가 보고있는 그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형....오랜만에 오피스텔 가서 밤새 마셔볼까?”
동준이 잠시 난처한 기색이 스치다 술잔을 비워 내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열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좀 곤란하다. 정재야. 클럽에 다시 들어가봐야 돼.”
“.......이 시간에 ....클럽엔 왜.”
“응.....좀 그럴 일이 있다.”
술자리에서 시계를 보는 동준의 모습이 생소했다. 날을 새우는 것이 다반사였던 그의 밤 생활이 어느 듯 동준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술잔을 비우는 정재의 마음이 한없이 불편하게 엉키고 있었다. 그 시간에 클럽으로 다시 간다는 동준의 말도 계속 마음에 걸리고 있었고 달라진 동준의 느낌도 그랬다.
서로의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져 있는 것을 느끼면서 두 사람의 대화가 열두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동준이 정재가 자신들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 사람인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다시 돌아가게 된다면 살아가는 방향이 완전하게 다른 사람들이 될 것도 알고 있었다. 이유 없이 끌리는 사람의 정이 좋아 일년에 몇 번씩 행사처럼 치루는 그 부재도 그대로 보아냈던 동준이었다.
“내일 클럽으로 와라. 남은 얘기는 와서 하자.”
“전화할게.”
동준이 12시가 조금 넘어 클럽에 들어섰다. 사무실에서 책을 보던 진서가 그 반가움을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듯 그대로 앉아 있었다.
“술 마셨네요.”
“응...조금....”
“진서야!”
“.......”
"집에가자."
- 내가 없는 곳에 너를 두고 싶지 않다.
사실은 니가 없는 곳에 내가 혼자 있고 싶지 않다.
니 움직임이 늘 내 눈 속에 있길 바란다.
너를 보고 있는 동안은 나는 다른 사람이 된다.
그래서.....
오랫동안 그렇게 있고 싶어 이제부터는 니가 있는 곳에.....
그곳에 내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