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두의 집으로 온 동준이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멍들고 찢긴 통증보다 진서를 볼 것이 더 걱정돼 몸이 한결 더 무거웠다. 종두가 먹다 남은 양주를 꺼내놓고 냉장고에서 얼음을 가져 왔다.
“몇 잔 마시고 푹 자라.”
동준이 한잔 가득 양주를 채워 단숨에 비웠다. 싸하게 위를 훑고 지나간 뜨거운 알코올이 금방 심장을 돌아 온몸의 긴장이 풀어지고 있었다. 정재가 얼음주머니를 만들어와 부어오른 동준의 눈썹과 턱 위에 올려주었다.
“형!”
“왜.”
“나.....요즘에 욕심이 생긴다.”
“뭐가?”
“지금을 버리면......다르게 살아질까?”
"널 보면 늘 위태위태하다..동준아! 너한텐 늘 미안하다.”
“왜 쓸 대 없는 소리 해.”
막연하게 동준의 가슴에 다른 바람이 일고 있음을 종두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더 큰 풍파를 가져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왠지 알 수 없이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었다. 굵어지는 빗방울과 함께 간간히 바람이 일고 있었다. 얼음주머니를 내린 동준이 다시 한잔을 비우고 한결 풀어진 감정으로 잠속에 빠져들었다
한필중이 다시 동준을 찾는다는 연락이 종두에게 왔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려는 두 사람 앞을 어깨들이 막아섰다. 종두가 거친 눈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뭐야!”
“형님, 죄송합니다. 사장님께서 동준이 형만 다시 데려오시랍니다.”
부축하고 있는 종두의 팔에서 몸을 때낸 동준이 함께 가겠다는 종두를 만류했다.
“형. 들어오지 마라.”
“사장님께서 종두형님 부산 사무실에 내려가시랍니다.”
순간 종두의 얼굴이 굳어지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동준을 보는 한필중에게서 날카로운 시선을 읽어내 자신을 부산으로 내려 보내는 그것이 더 없이 불안해지고 있었다.
“부산 일은 오늘 당장 가지 않아도...”
“지금 바로 내려가시랍니다.”
“동준아! 그냥......이번 일....”
동준이 종두가 하려는 말을 알아 애써 태연한 척 웃어보였다. 자신의 일로 종두에게까지 불똥이 튈 것이 그 마음에 다른 무게로 내려앉고 있었다.
“걱정 마. 형!”
동준이 다시 건물로 들어서려 할 때 현관문으로 한필중이 나오고 있었다. 그 곁에서 우산을 받쳐 든 태수의 얼굴에 잔인한 조소가 번지고 있었다. 대기해 있던 차에 올라타던 한필중이 동준을 보며 굳은 입을 열었다.
“타라.”
조수석에 올라 탄 동준이 잠시 앞 유리에 뿌려지는 빗줄기를 응시하다 의자 깊숙이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이미 9시가 넘어가고 있었고 진서가 와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동준이 목적지도 모르는 채 그렇게 한참을 가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았다. 휴대폰이 없었다. 아마도 한필중의 사무실에 떨어트린 모양이었다. 오피스텔에 왔다면 전화를 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한필중이 새로 마련한 인천의 외곽 별장으로 동준을 데려갔다. 이미 연락을 받은 어깨들이 비속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별장 안으로 들어선 한필중이 모두를 물리고 동준과 특실로 꾸며진 방으로 들어섰다. 중앙 석을 두고 양쪽으로 스무 명 이상이 앉을 수 있을 만큼 좌석들이 준비돼 있었다.
이미 테이블에 술을 비롯한 모든 것이 세팅이 돼 있는 상태였었다. 잠시 후 어깨의 중간 관리를 맞고 있는 이종식이 들어와 안쪽 주머니에서 천으로 싸여진 물건을 꺼내 조심스럽게 그것을 풀었다. 밝지 않은 조명아래서도 그 번뜩임이 서늘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한 자루의 칼이 붉은 천위에서 그 형체의 중압감으로 방의 기운을 채우고 있었다.
이종식이 나가고 스물이 갓 넘어 보이는 여자아이 둘이 방으로 들어왔다. 밖에서 꽤나 교육을 받았는지 테이블 위에 놓여진 칼에 애써 눈길을 주지 않고 한필중과 동준의 옆에 앉아 술을 따랐다. 한필중이 가볍게 한잔을 입속으로 털어 넣으며 입을 열었다.
“니가 죽고 살길은 니가 택할 수 있다.”
동준이 술잔을 비우며 한필중을 보지 않고 내려놓은 잔에 시선을 준채 말을 받았다.
“말씀하십시오. 이번일.....다른 고리를 매듭짓기 위해 절 시켰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내 앞에서 오만한 니 태도.....지윤이 때문이냐?”
동준이 자신이 내놓을 말이 한필중에게 더 깊은 모멸감이 될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더는 그냥 참아내지 못할 일이었다.
그 새벽 클럽에서 자신의 이마 선을 따라 손끝을 내리던 진서의 떨림이 동준의 영혼에 내려앉았었다. 다른 삶을 그립게 했고 처음으로 자신을 바꾸고 싶다는 염원을 생기게 했다. 자신을 쉬게 하기 위한 그 웃음 뒤에 수없이 꿈틀거리는 불안함을 보았다. 긴 삶을 허락받지 못한다 해도 영혼까지 모두 쉬어지는 그 시간 속에 있고 싶었다. 그 속에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웃는 그 얼굴을 보고 싶었다.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건방진 놈....누가 너한테 그런 걸 가리라고 했어.”
한필중이 지윤에게 들어 진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지윤의 히스테리가 심해지는 때쯤이면 항상 동준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고 이번에도 별일 아닐 거라 여겼다. 하지만 지윤이 그날 동준의 오피스텔에 다녀와 여느 때와 다르게 이성을 되찾지 못했고 자신 앞에 썰어져 숨이 끊어질 듯 오열을 했다.
자신의 여자가 다른 놈에게 영혼까지 팔려 몸을 죽이는 눈물을 보이는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낸 한필중이 동준에게 뜨거운 화기를 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더 이상은 보지 않을 겁니다. 절 어떻게 한다 해도 바뀌지 않을 겁니다.”
“그 여자아이 때문이냐?”
“처음부터 마음 없이 제 계산으로 받아들인 제안이었습니다.”
“내가 말하지 않았니. 지윤이가 가지고 놀다 버릴 때 까지 니 뜻은 없다. 더 이상 지윤이 그대로 버려둔다면 내가 널 어떻게 할지 나도 모른다.”
“왜. 자신을 속이십니까. 누구보다 힘든 건 사장님 자신입니다. 왜.....”
한필중이 연거푸 몇 잔을 비우다 낮게 내려깔린 감정으로 동준의 말을 잘라 냈다.
“널 죽이고 싶었던 적이 많다. 알고 있나?”
“사장님이나 그 사람...제게도 그런 존재라면 모르지는 않겠죠.”
“오늘.......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할 수도 있다.”
“지금 저한테는.....한 가지 생각밖에 없습니다.”
한필중이 술시중을 들고 있던 여자들을 물리고 동준을 빤히 쳐다보았다. 여러 가지 감정들이 한대 뒤섞여 자신조차 동준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지윤이 데리고 외국으로 떠나라. 니가 그렇게 하겠다면 완전하게 다른 삶을 내가 보장할 수 있다.”
정재의 눈빛에서 무거운 그림자를 읽어낸 진서의 가슴이 이유를 알 수 없이 답답하게 저리고 있었다. 아무런 의미 없이 밀어내기엔 그 가슴 또한 이상하리만치 가깝게 느껴져 외면하고 밀어내기엔 너무도 익숙한 그것 또한 진서를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올라오면서 전혀 입을 열지 않는 진서에게 마음이 쓰였던 정재가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음료수를 사왔다. 빙그레 웃으며 음료수를 건네던 정재가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꾸려 농담을 했다.
“나 싫다고 그렇게 얼굴에 써 붙이고 있는 거 너무한 거 아닌가.”
“그런 거....아니에요.”
“그러지 말아요. 나한테 어떻게 해 달라 바라지 않아요. 그냥 내 마음...막지 않으려는 것 뿐이니까...그것 때문에 마음 쓰지 말아요.”
“어떻게 그래요. 나는.......”
진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해 주위의 사람들이 황급히 자리를 찾아 뛰기 시작했다.
“어....또 비 온다.”
갑자기 굵어진 빗줄기가 주위를 삼키고 있었다. 차까지 거리를 두고 있던 두 사람이 동시에 뛰기 시작했다. 몇 발짝 때어놓던 정재가 진서의 손을 붙잡고 그 머리위로 자신의 자켓 자락을 덮었다. 급하게 차문을 열고 올라탄 두 사람이 금방 축축해진 젖은 옷을 매만지며 휴지로 물기를 닦아 냈다.
뒤 자석에서 마른 수건을 찾아낸 정재가 진서의 젖은 머리를 털어주며 얼굴의 물기를 닦아주었다. 정재의 손등이 그 얼굴을 스쳐 닿자 진서가 놀라 몸을 움추렸다. 그 모습에 정재 또한 난처한 빛이 머물다 사라졌다.
“내가...그렇게 불편해요.”
“........”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정재가 차를 빼 도로에 올렸다.
“왜....스님께 다 보여 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모르겠어요. 두려웠나 봐요.”
8시쯤 오피스텔에 도착한 진서가 연락이 되지 않는 동준을 걱정하며 베란다를 서성이고 있었다. 거세진 비바람이 차창에 부딪혀 밤을 삼킬 듯 어둠을 뒤흔들고 있었다. 웃고 있는 얼굴을 보고 있어도 아픔이 느껴지는 그것이 계속 진서를 불안하게 했다.
- 이러지 말아요.
당신이 내 눈앞에 있어야 내가 쉴 수 있어요.
웃음 속에도 서러움이 묻어 있는 당신 때문에 내가 얼마나 불안하지 알아요.
당신 앞에서 웃고 있는 내가....
수없는 흔들림을 견뎌낸 내 떨림인 걸 당신 모르죠.
당신 이러면...
내 온몸의 피가 심장을 역류해 숨을 쉴 수가 없어요.
내 눈앞에 없는 당신은.....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이에요.
그래서 내가 견디지 못해요.
서울에 도착한 정재가 윤박사를 찾았다. 일요일인데도 연구실에 나와 자료정리를 하고 있다 정재를 보고 기다렸다는 듯 반갑게 웃었다.
“언제 오나 했는데...궂은 날 찾아왔구나.”
“한 번 더 해보겠습니다.”
정재의 얼굴빛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읽어 휴일 빗속을 뚫고 온 조급함을 읽어내고 있었다.
“그 사람을 찾은 모양이구나.”
“예. 찾았는데.....분명 그 사람인데......이상합니다. 가슴이 더 아프고 불안합니다.”
“니가 짐작하고 느끼는 그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으니 너무 단정 짓지 마라. 저번처럼 너무 집착하고 한번에 모든 걸 찾으려 하면 또 실패할 수 있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라. ”
“한번에.....제가 찾던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그 사람도 저처럼 저를 느낄 거라 생각했는데.....다른 곳을 보고 있습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안 된다. 벌써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차 또 다시 니가 보고 싶은 것만 찾으려 할텐데...”
“한 가지를 꼭 알아야 겠습니다. 박사님께서 다 말씀하시지 않고 있다는 거 압니다. 오늘 그 하나를 꼭 찾아야 겠습니다.”
이미 마음의 평정을 모두 잃고 있는 정재를 더 이상 만류하지 못하고 연구실로 들어가 의자에 앉혔다. 은은한 조명등 아래서 편안하게 몸을 뉘이고 눈을 감은 그에게 윤박사의 낮게 깔린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당신은 먼 곳을 여행하려 합니다. 아주 오래전으로 당신을 데려가 그때의 당신을 느껴보려 합니다. 흐르는 데로 몸을 맡겨 그대로......”
정재의 몸이 한순간 잠속으로 빠지는 듯 축 쳐지고 있었다. 불편하게 감고 있던 눈 속으로 알 수 없는 빛깔들이 몰려오고 있었고 조금씩 현재의 자신을 망각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환영들이 뒤섞여 이리저리 눈앞을 스쳐가고 있었고 간간히 낯설지 않은 몇 사람이 마주보며 웃고 있는 장면이 느껴지고 있었다.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뒤섞여 누군지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괜찮으니 편하게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당신을 한번 보십시오. 어떤 옷을 입고 있습니까?”
“한복.....도포를 입었습니다. 허리에 검을 차고 있고.....”
“자.....조금 더 전으로 가 보겠습니다. 어린시절로 당신을 데려가 보십시오.”
경직돼 있던 정재의 얼굴이 조금씩 풀려 작고 편안한 웃음이 생겨나고 있었다. 아마도 그 시절의 편안함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 무엇이 보입니까?”
“사람들이 많습니다...불당같은 것이.....절입니다. 절에 있습니다. 제 곁에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저를 보고 웃고 있습니다.”
그 말을 하는 정재의 얼굴에 너무도 편하고 따스한 기운이 멈춰 있었다.
“그 사람이 누굽니까? 당신이 그 사람을 무어라 부릅니까?”
“........모르겠습니다.....갑자기 굵은 폭포수가 그 사람을 삼킵니다...무섭고 두렵습니다.”
또 다시 정재의 얼굴에 경련이 일고 있었고 첫 번째 그 때처럼 호흡이 가빠지고 있었다. 평화로운 시절을 떠올리면서도 그것조차 멈춰있게 하지 못할 두려움의 원흉을 그 가슴에 품고 있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앞에 있는 그 사람만 느껴보십시오. 아직 오지 않은 다른 것을 미리 두려워하면 더 가 볼 수 없습니다. 견디기 힘들면 멈추겠습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윤박사가 잠시 숨을 고르고 위험한 시도를 결심했다. 수 없이 반복한다 해도 그 두려움의 원인에 다가서지 못하면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그가 알고 싶은 그 어떤 것이 분명 그속에 있을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제.....당신을 괴롭히고 있는 그 두려움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당신에게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늘 그렇게 웃고 있습니다. 함께 술을 하면서도.....글을 하면서도....검을 휘두르면서도 늘 나에게 웃어 주는 사람입니다.”
“누굽니까?”
“제가 모시는 사람입니다. 제가......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마음을 열어 보인 사람입니다. 평생토록 함께 하고 싶었던 사람이었고........믿고 따른 사람입니다.”
“그 사람......사랑했습니까?”
정재의 감은 눈 아래로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입가에 얇은 미소가 걸려 있는데도 그 사람을 떠올려 아픔과 서러움이 그 미소속에 고이고 있었다.
“....은혜 했습니다. 그 사람........제 심장이었습니다.”
“더 지나 흘려봅니다. 그런 사람이 왜 당신의 영혼을 힘들게 합니까. 왜 그렇게 아프고 힘이 듭니까. 이제 당신이 가장 힘들었던 그 순간을 떠올려 봅니다.”
눈물이 쉼없이 흐르고 있는 정재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몇 마디 말을 잊고 있는 그 목소리가 두려움으로 떨려오고 있었다.
“마당 가운데 그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주위에 서 있고.....그 사람이 앉은 상위에......하얀 약사발이 놓여 있습니다."
힘겹게 그 말을 내놓은 정재가 가슴을 들썩이며 서러운 오열을 토해냈다. 더 이상 진행해야 할지를 두고 잠시 윤박사가 갈등하는 사이 정재가 오열 속에서 말을 이었다.
“.....제가 그곳에 있습니다. 그 사람.....떠나려 하는 그곳에 제가 있습니다. 심장이 다 뜯겨나고 피가 역류할 것 같은 그곳에 제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굽니까?”
격하게 밀려오는 아픔 때문인지 윤박사의 말을 듣지 못한 정재가 남은 서러움을 뱉어내고 있었다.
“떠나는 그 순간에도.......그 사람 가슴에 다른 염원이 있어 제가 울 수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보내는 저를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함께 떠나지 못하는 저를 수백 번 수천 번 더 죽이고 싶은데.....그 사람 피 꿇는 마지막을 제가 지켜드려야 해서...그래서...”
정재의 오열이 숨을 넘어갈 듯 이어져 더 이상 계속 할 수가 없다 판단한 윤박서가 그를 그곳에서 끌어냈다. 이미 긴 여행을 빠져나와서도 북받쳐 오르는 통분을 멈추지 못하고 정재가 어깨를 들썩이며 그것을 흘려냈다.
- 떠나는 마지막까지 그 사람 가슴에 남았던 사람...
제가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 심장에 피로 새겨간 염원이 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저를 알아보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집에 도착한 정재의 가슴이 심연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그 심장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헤어지고 있었다. 밤을 통째로 삼킬 것 같은 태풍의 기세가 점점 거세져 집에 도착했을 진서가 걱정되고 있었다. 아마도 체육관이 있지 않을 것이다. 알면서도 무심히 전화기를 바라보던 그 눈이 또 다시 맥없이 부딪쳐 깨지는 창밖의 빗줄기를 응시하고 있었다.
결국 그 가슴이 더 버티지 못하고 동준의 집 전화번호를 눌렀다. 알면서도 확인하지 않을 수 없는 그 처절함이 스멀스멀 가슴을 짓이기고 있었지만 확인하지 않고는 도저히 잠을 잘 수도 앉을 수도 없었다. 한번의 수신호에 급하고 불안하게 들려오는 진서의 목소리에 정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디에요. 도대체 어디에요..........”
공포와 불안함이 그대로 전해지는 진서의 울먹임에 수회기를 든 정재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가슴이 조여 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호흡조차 재대로 내쉬진 못하고 있었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수화기가 더 불안했던지 진서의 목소리가 더 깊은 두려움으로 수화기를 타고 정재의 심장에 꽂혔다.
“말해요....왜 아무 말을 안 해요. 무슨 일이에요.”
“진서씨!”
“누구...누구세요.”
“나에요. 정재.”
그 시간에 그곳으로 전화를 한 정재가 믿기지 않았는지 잠시 멍해진 진서가 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갈게요. 기다려요.”
“어떻게....정재씨가....이 전화는 어떻게 알았어요. 여긴 어떻게 알아요.”
“가서...얘기해요. 지금 갈게요.”
전화를 끊고 채 일분도 되기 전에 휘몰아친 강풍으로 베란다 창문이 산산조각으로 깨져 나갔다. 바람막이가 없이 그대로 강풍을 맞고 있던 거실창이 금방이라도 집안으로 쏟아져 내릴 듯 어러렁 대며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음산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동준에 대한 걱정과 어둠속에서 자신을 집어 삼킬 듯 어러렁 대고 있는 공포에 진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눈물과 비명이 절로 세어 나왔다.
정원수가 뽑혀져 나뒹굴고 있는 그 새벽에 비바람 속으로 나서는 정재를 서규식이 만류하고 나섰다.
“무슨 일이냐? 길가에 서있던 터럭들도 종이 장처럼 날아가는 이 난리 통에...이 시간에 어딜 가려는 거냐?”
“가볼 때가 있습니다.”
“날 밝으면 가거라. 위험하다.”
다급해진 정재의 심장이 서규식의 긴 말들을 다 듣고 있지 못할 만큼 조급해지고 있었다. 수화기로 들려오던 그 두려움이 여전히 정재의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지금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서규식이 채 한마디를 하기도 전에 정재가 현관문을 열고 바람 속으로 뛰어들었다. 너무 굵은 빗줄기에 라이터를 켜도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희미하게 보이는 도로의 선에 본능적으로 핸들을 돌리고 있었다.
동준의 오피스텔 건물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그 시간조차도 숨이 막힐 듯 길고 초조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뛰어내려 오피스텔 문을 열고 들어선 정재가 휘몰아치는 거실소파에 그대로 앉아 있는 진서를 보자 놀란 속에서도 알 수 없는 화기가 돌고 있었다.
“미쳤어요. 왜 이르고 있어요.”
바람에 밀려 안으로 쏟아져 깨진 샤시가 거실을 온통 유리조각과 파편들로 뒤업어 아수라장이되 있었다. 그런 속에도 꼼짝도 않고 앉아 있는 진서를 본 그 가슴이 끝도 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전화....받아야 되요. 그 사람이 전화할건데....”
반쯤은 넋이 나간 듯 휭한 진서의 눈빛이 정재를 가슴을 날카롭게 긁고 지나갔다.
“일어나요.”
“전화 올게예요.”
“사람이 왜 이렇게....대책이 없어요.”
폭포수같이 퍼부어 대던 빗줄기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거실로 그대로 들이치는 바람에 커튼이 살아 움직이듯 춤을 추며 말이 멈추어 버린 그 공간을 묘하게 자극하고 있었다. 말을 잃은 진서와 엇갈린 감정에 심장을 베인 정재의 날카롭고 무거운 무게가 밤의 빛깔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으려는 진서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세운 정재가 바닥에 깔린 유리조각들을 보고 그대로 진서를 앉아 올렸다. 침실로 가 침대 맡에 진서를 내려놓고 말없이 거실로 다시나온 그가 거칠게 전화선을 뽑아 침대머리맡에 꽂았다.
“이제...됐어요? 전화 안 오면....영원히 그렇게 앉아서 기다릴래요.”
“어떻게 된 거에요. 어째서 정재씨가......”
“.....그게 궁금하긴 한거에요.”
“왜.....그런 말을 해요. 그 사람 영원히 오지 않는다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어디 있어서....도대체 뭘 하고 있길래...이렇게 미련한 사람을 혼자 버려 둔건데요.”
또 다시 진서의 눈에 축축한 눈물이 고였다. 이미 새벽 3시가 넘어가고 있었고 그 시간이 쌓이는 만큼 진서의 피가 말라 들어가고 있었다. 정재가 주방으로 나와 호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태풍 때문에 깊은 잠을 자고 있지 않았던지 금방 전화를 받았다.
“형. 정재에요.”
“야, 임마. 너 살아있냐. 근데 뭐야. 이 시간에 전화는...?”
“혹시, 동준이 형.”
정재가 채 말을 다 꺼내놓기도 전에 호경이 놀라 말을 받아갔다.
“응. 연락 안돼? 오늘 중요한 일 마무리 한다고 했는데 한사장 만나면 안 좋을 것 같다는 얘기 얼핏 했었는데....”
“무슨.....일인지 몰라요?”
“그런 것 까지 말하는 놈이냐. 넌....지금 어딘데?”
“형 오피스텔요.”
다음 말을 꺼내놓는 호경의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 이 새끼...어떻게 된거야? 그럼. 참 너 종두라는 사람 전화번호 모르냐?”
“형. 일단 알았어요. 내가 찾아서 한번 해볼게요.”
“연락되면 나한테 전화해라.” “네.”
다시 침실로 들어온 정재가 두 팔로 무릎을 감싸 앉은 채 전화기만 바라보고 앉은 진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한동안 그렇게 앉아 있던 진서가 정재를 보며 그것을 물었다.
“정재씨, 누구에요.”
“클럽에서 일하던 사람 갑자기 잠수 탔다고 했죠?”
진서가 그제야 정재의 눈을 맞추며 두려움에 떨었던 이성을 다시 찾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나도 그래요. 어떻게 진서씨가 거기 있었는지....어떻게 동준이 형과.....”
“기분이 이상해요. 꼭 누가 일부러 만들어놓은 것처럼 부자연스럽고 편하지 않아요.”
- 당신 처음 봤을 때 내게 온 거라 믿었어.
내 오랜 영혼의 방황이 끝날 거라 예감했는데.....
그 방황보다 더 두려운 일이 지금 내 앞에 일어나고 있어.
그 사람이 당신 심장에 박힌 염원이라도 해도....
당신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야.
다시는 그렇게 두지 않을 거야.
내가 아니라 해도 그렇게 두지 않을 거야.
“오랜 동안 그 사람과 함께 있었으면 그 사람한테 생기고 있는 일들 정재씨 알고 있죠?”
“정확히 아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진서씨처럼 나도 클럽에서 일하는 것 외엔 그냥 느낌으로 아는 그게 전부에요.”
불안함이 깊었던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숨 막히는 침묵이 답답했던 정재가 거실로 나와 깨진 창문을 정리하고 유리파편들을 썰어 담았다. 이미 날이 밝아오고 있었고 불길한 예감이 서늘하게 등을 스쳐 지났다.
하얗게 굳어버린 얼굴에 아무런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간밤의 두려움으로 이미 녹초가 돼 고개조차 들어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괘고 있던 무릎에 고개를 그대로 올려놓은 진서의 모습을 보고 선 정재의 눈 속에 아픔이 고이고 있었다.
- 도대체 당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거니.
난 또 어떻게 해야 하는 거니.
왜 하필 그 사람이니.
왜.....
당신 그 사람 곁에 그냥 두면.....
지금보다 더 한 일 수없이 견디고 봐야 할 텐데...
그런 당신을 볼 자신이 없다.
주방에 상을 봐둔 정재가 동준의 일을 알아보기 위해 현관을 나서다 다시 진서가 있는 침실로 들어갔다.
“지금 형 일 알아보러 나가요. 종일 이러고 있지 말고 뭐라도 좀 먹어요.”
“........”
클럽에 도착해 명함 첩과 메모 책을 뒤져 이곳저곳으로 전화를 돌려보던 정재가 몇 번의 시도 끝에 종두와 연락이 닿았다. 종두 또한 그렇게 부산으로 내려가 살얼음위로 걷고 있는 불안함 위에 있던 터라 정재의 전화가 더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 일을 알아보고 전화를 주겠다는 말로 마무리를 한 수화기를 내려놓는 정재의 얼굴이 더 깊게 굳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클럽 문에 임시 휴업이라는 문구를 써 붙여 놓고 나오는 길에 집에서 전화가 왔다. 새벽에 그렇게 나와 정신없이 시간을 보낸 탓에 걱정하고 있을 식구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집에 들러 새벽 내내 서성이며 불안해했던 가족들에게 미안한 얼굴을 잠시 보인 정재가 다시 오피스텔로 향하는 길에 백화점이 들러 이것저것 식료품들을 샀다.
오피스텔에 도착해 주방으로 가 사온 식료품들을 내려놓던 정재가 식탁위의 음식들이 그대로 있는 것을 확인하고 얼굴빛이 탁해져 침실로 들어갔다. 여전히 굳은 동상처럼 새벽을 지켰던 그 자세로 전화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정재의 심장에서 뜨거운 바람이 일었다. 진서에게로 다가가 거칠게 그 어깨를 흔들며 초점이 없는 눈을 맞추었다. 그 목소리에 원망과 아픔이 함께 뒤섞여 있었다.
“왜 이래요. 죽고 싶어요. 이러면 형 오기 전에 당신이 먼저 죽어요.”
마르지 않은 축축한 눈으로 정재를 바라보는 그 시선 속에 동준이 오지 않을지 모른다는 두려운 공포가 가득 차 있었다.
“어디 있어요. 언제 온데요. 일 때문에......그래서 못 온 거죠. 그렇죠?”
“.......그래요. 급한 일 생겨서 연락 못하고 있는 거예요. 끝나면....바로 올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