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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 러브송 < 26 >

나비 |2005.02.22 04:59
조회 2,628 |추천 0

26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건들기만 해봐. 나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니까!’


검은 차는 어느새 회사가 위치한 종로를 서서히 벗어나고 있었다.


“이름이 뭔가?”

“문희입니다.”


아까도 날 얘, 쟤라고 불렀던 건달이사가 물었다. 하지만 분한 생각과는 달리 대답은 곱게 나왔다. 저편이 음흉한 눈빛이라도 보내면서 손을 대려고 하면 날카로운 손톱을 세워 자신을 방어할 각오는 되어 있었지만 이름만을 물어오는 저편은 아직 손톱을 세울 구실은 주지 않았다.


"······."


상대편의 남자는 이름을 듣고는 대답도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 내가 밑에 사람이니 말을 먼저 꺼내 분위기를 맞춰야 하는 건가? 아랫사람으로서 드는 비굴한 생각이 고개를 드는 것이었다.


‘일단은 잠시 조용히 있자. 부장님도 가만히 계시는데.’


하지만 경계는 늦추진 않을 것이다. 건달이사는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이 있으니까. 살피지 않는 척하며 간간히 건달이사의 동태를 살폈다. 나름대로 회사의 유명인인 그를 가까이에서 보는 일도 처음이었다. 사무실에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주변의 여성에게 어김없이 손을 뻗친다는 그는 무척이나 평범했다. 그저 다른 40대 고급간부들처럼 배가 적당히 나온, 고급 기름이 적당히 낀 그런 남자였다. 마치 고등학교 때 잠도 못 이루며 좋아했던 가수를 실제 보았을 때, 내 이상형의 갖춰야 할 모든 것을 덕목을 갖고 있어야 할 그가 여드름이 가득한 나보다 키가 작은 남자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들었던 실망감마저 들었다.

좀 더 능글맞은 눈빛이나 느끼한 말투가 어울릴 것 같은 이사는 말없이 편하게 몸을 기대고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는 그를 살펴보는 것이 불 꺼진 내 방 형광등을 바라보는 것만큼 지루한 일이 되었을 때 나도 경계를 늦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는 동호대교를 넘고 있었다. 내심 긴장도 되기도 하고 처음 탄 남의 차가 편하지만은 않았지만 만원버스에서 남들과 몸을 부대끼며 바라보는 풍경보다는 여유로운 것이었다. 이 차는 분명 건달이사의 차일 것이다. 남자의 성공을 말하는 것 중의 하나가 차다. 이 건달 이사는 평판은 나빠도 이만큼 성공했다는 거겠지. 이런 여유로운 풍경을 날마다 감상하다보면 아래 직원을 깔볼 수 있는 여유는 자연히 생길 것도 같았다.


“박부장!”

“예?”


건달 이사가 앞에 앉은 부장님을 불렀다.


“자네 아직 재혼 안했지?”

“예.”

“이 아가씨 어때? 내가 중매 서 줘?”

“저야 고맙지만 재혼인데 아가씨에게 실례죠.”


무료했던지 날 두고 농을 건네는 두 사람. 이 사람들은 그런 농담을 해도 내가 입도 벙긋 못하리라는 것을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난 그저 웃거나 아니면 무표정한 표정으로 듣고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적어도 싫은 내색만 안하면 그 뿐이다.


차가 도착한 것은 강남 어느 술집이었다. 간판도 딱히 없는 그저 가게구나하는 느낌만 드는 지하 술집이었다. 따라 들어가 보니 고급 노래방 같은 구조. 여기가 룸싸롱인가? 생전 처음 와본 곳에 어리둥절해 하면서 내가 왜 이곳에 끌려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건달이사가 먼저 룸에 들어가고 난 부장님의 옷을 잡아끌었다. 돌아본 부장은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이더니 이내 내 뜻을 알았는지 건달이사만 룸에 들여보냈다.


“왜? 문희씨?”

“저, 부장님. 제가 왜 여기 온 거죠?”


날 술집에 팔아먹을 일은 없겠지만 말도 없이 술집에 데리고 오다니 이건 너무 찜찜한 일이었다.


“인사 드려야지. 회사 모델인데 중역 분들에게 인사드리는 건 예의잖아.”

“그런데 왜 술집에서 인사를 드려야 하는 건데요?”

“원래 남자들 만남은 다 술자리에서 이루어져. 그럼 문희씨 때문에 바쁜 근무 시간에 모여 회의라도 해야 한다는 건가? 원래 일의 80%는 다 술자리야.”

“그래도 이건 좀.”

“문희씨가 남자라고 생각해봐. 남자 모델이었어도 여기서 인사는 드렸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죠. 전 엄연히 여잔데.”

“에이. 그래서 여자들은 안 된다니까. 어떻게 집에 갈 건가? 간다면 말 해 주지.”


간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고. 부하직원을 감싸줘야 할 것은 부장님인데 날 몰아세우고 있었다.


“인사만 드리는 거라면 들어가겠어요. 그런데 이상한 요구를 할 시에는 바로 나오겠습니다.”

“이상한 요구? 추태부리는 걸 말하는 건가? 여기 술집 아가씨들 널렸는데 왜 문희씨한테 우리가 추태를 부리겠어? 안 그래?”


부장님의 말에도 다소 불쾌하고 염려스러운 기분을 지울 수는 없었는데 곧 내 염려가 지나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한명의 이사님과 실장님이 오시고 나서 여자들이 들어왔다. 나보다 늘씬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화려하고 예쁜 그녀들이었다. 처음 술집 여자를 옆에서 보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지만 더욱 놀라웠던 것은 5명의 여자들이었던 것이다. 네 명의 여자들은 제자리를 찾아 앉았고 나머지 한명은 내 옆자리에 앉아 술시중을 들었다. 텔레비전에서 항상 좋지 않은 광경만 봐온 나로서는 의외의 광경이었다. 술시중은 고기 집에서 점원이 고기를 잘라주는 것과 같은, 술을 마시기에 편하게 도와주는 일이었다. 잔에 얼음을 넣고 술을 따라주는 서비스. 술집에 들어오면서 술을 따르게 시키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했었는데 내 술마저 다른 이가 따라주니 이건 조용히 술 마시는 일 외에 할 일이 없었다.


“이번에 우리 회사 모델이 되었다고?”


건달 이사가 아닌 다른 이사가 물었다.


“예. 심사하신 분들이 좋게 봐주셨습니다.”

“우리 회사를 대표하는 모델이라니 아무튼 영광이네. 반가워.”

“대표라니요? 아닙니다.”

“음. 그런데 하는 일은 뭐지?”

“저는 MD팀에 있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모델로서 하는 일 말이야.”

“예. 간간히 사보제작을 할 때 참가하는 정도라 들었습니다.”


권이사님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감돌았다. 영광이라는 찬사까지 보냈는데 기껏 사람들도 잘 보지 않는 사보 모델 격이라니 나도 체면이 서지 않는 기분이었다. 뭐랄까. 이사님의 표정은 누군가가 권이사님에게 ‘문희 김희선 닮았지요?’ 하고 물었는데 속으로 ‘아닌데.’ 하는 표정이랄까. 내 기분도 그것을 닮아 있었다. 내 편에서 스스로 모델이 되었다고 자랑했던 것도 아닌데 상대의 실망한 표정을 보니 괜히 쑥스러워졌다.  


“그럼 안 되지. 우리 회사 모델이 되었는데. 아마 처음으로 시도한 걸 거야. 그런가?”

“예. 맞습니다. 아직 체계가 잡혀있지 않아서 그런 것이지요.”


김부장님이 대답했다.


“이건 어때? 우리 회사 광고 찍을 때 참가시켜 달라는 건. 왜 엑스트라 같은 것도 있을 수 있지 않나? 이번 광고 기획 안 보니 엄마들 여럿이서 아이를 안고 나오는 것 같던데.”

“예. 광고기획사에 말해보겠습니다.”


‘내가 광고에 나가게 되는 거야?’


이제야 회사 모델의 자긍심도 생기게 되는 것 같았다.


“그 뭐야? 이번에 광고 제작을 맡았다는 PD. 걔 잘 나간다면서?”


이번엔 건달이사가 부장님에게 물었다.


“예. 요즘 잘 만들어진 광고는 다 그 손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는 정도입니다.”

“그 회사 우리 때문에 컸잖아. 요즘은 다른 일도 많이 하더군. 옛날 생각 못하고 시건방떨거나 하진 않아?”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죠. 하하.”

“그런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확 다 조져버릴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하하하.”


왜 건달 이사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사실 더 입이 거친 사람들도 많겠지만 이 곳에 모인 사람들에 비하면 말이 확실히 거칠었다. 점잔을 떠는 사람들 가운데에 더욱 두드러지는 것이어서 원래 나쁜 사람이 아니라 두드러진 것뿐이었군, 하고 조심스레 편을 들게 되었다.


“김부장. 그 PD라는 놈 지금 부르지.”

“지금이요?”

“원래 웨딩사진을 찍어도 뽀찌 좀 얹어주면 잘 나오잖아. 뒤로 주는 거 없으면 왜 신랑신부 다리만 나온다는 말도 있지 않나? 오늘 불러서 적당히 술 사주고 2차 내보내면 되지.”

“허허. 노이사 말이 틀린 것 같지는 않군요. 김부장! 지금 연락 한 번 해보지 그래?”


권이사님도 건달이사의 편을 들었다.


“예. 연락은 해보겠습니다만 저번에도 바쁘다고 거절을 당한 참이라······.”

“연예인들 다리 주물럭 대느라 바빴던 모양이지.”

“김부장! 그 PD가 그렇게 잘 나가나?”


권이사님이 물었다.


“예. 사실 그 PD로 내정받느라 우리측에서 손을 썼을 정도니까요.”

“요즘 같은 경기에 광고가 얼마나 줄었는데 원래는 저편에서 우리 접대를 해주어야 하는 거잖아?”

“권이사님도 순진하시긴. 접대는 김부장이 받았겠지요. 김부장! 한 번 연락해봐. 오늘도 안 오면 광고도 뭐고 다 날라 간다고 해!”

“알겠습니다.”


김부장님은 휴대폰을 들고 나가버리셨고 그 사이 밴드가 들어왔다. 조용히 술 따르던 여자들은 하나씩 일어나 흥이 나는 노래를 한 곡조씩 부르고 들어갔다. 모두들 취기가 돌았는지 저마다 노래를 불렀다. 여전히 퇴폐적인 분위기는 나지 않았다. 이젠 안도해도 되나 할 때쯤 전화를 하고 돌아온 김부장님이 노래를 부르고는 슬쩍 내 옆자리에 앉았다.


“높은 사람들과 있으니 얻어지는 게 있지? 그래서 다들 술 한번 못 마셔서 난리들이라고. 문희씨. 이상한 요구를 할 사람들은 아니니까 오늘 분위기나 잘 맞춰주고 가. 일단 노래하나 하지 그래?”


그렇다. 어차피 직장 생활하면서 성공을 하려면 윗사람 비위도 맞춰야 하는 거겠지. 광고모델 자리가 탐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에 대해 확실한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은 좋을 듯싶었다.


“저 문희 노래 하나 부르겠습니다.”

“어, 그래? 다 박수.”


건달이사는 유쾌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에는 능숙한 듯 보였다. 그 장점으로 본인의 위치를 지키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내 노래가 끝난 후에도 사람들은 박수를 치는 매너를 잊지 않았다.


“문대리 노래 잘 하는데. 내가 술 한 잔 줘도 되겠나?”

“권이사님! 요즘 여직원들에게 술 권하다가는 성희롱이니 뭐에 시달려요.”


건달이사가 오히려 술을 주려는 권이사님을 막았다.


“그래서 먼저 물어보지 않았나? 이게 영 조심스러워서 말이야.”

“주시면 감사하죠.”

“그래. 내 한 잔만 줄게. 술은 알아서 마셔야 좋은 거라고.”

“예.”


‘어쩜 매너가 이리 깨끗해. 이런 사람들을 내가 오해하다니.’


한잔 두잔 술을 마시고 보니 서서히 취기가 올랐다.


‘나쁜 놈들. 날 차버려? 회사 모델로도 당당히 뽑힌 문희를 보기 좋게 차버렸다 이거지?’


술기운과 더불어 괘씸한 남자들에 대한 생각도 서서히 떠오르는 것이었다. 행여 그런 생각이 들까 술은 조심하고 있었는데 예상대로 두 남자에 대한 악감정이 날 사로잡았다.


‘성공하겠어. 텔레비전 광고에도 나가고 윗사람에게 잘 보여 승진도 하고 말이야. 니들 보란 듯이 잘 살아주지.’


술은 나조차도 명확히 깨닫지 못했던 두 남자에 대한 복수의 감정과 잘 살아봐야겠다는 오기를 끌어내고 있었다.


“분위기 잠시 가라앉았군요. 문희 또 노래 한 곡조 올려도 될까요?”

“그러겠어? 아까 목소리 듣기 좋던데 해보라고.”


김부장님은 아래 직원이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던지 웃으며 답했다.


“예. 그럼 신나는 것으로 모시겠습니다. 요즘 최고 인기곡이죠. 이효리의 10 minutes입니다. 오늘 상사님들과 함께 하는 시간 너무 즐겁습니다. 이 곡을 바칩니다.”


마이크를 잡고 멘트까지 멋있게 말하고서는 노래를 시작했다. 간단한 안무도 곁들였다.


‘대학 때 놀던 가락이 있는데 이정도 쯤이야.’


사람들은 아래 직원의 재롱쯤으로 생각하고 흥겹게 봐주는 듯 보였다. 그에 보답하기 위해 난 더 열심히 춤을 추었다.


"Just One 10 MINUTES 내 것이 되는 시간

순진한 내숭에 속아 우는 남자들

Baby 다른 매력에 흔들리고 있잖아

용기 내봐 다가와 날 가질 수도 있잖아.” ♬ ♪


고개를 돌렸다가 휙 머리를 날리며 도전적인 시선으로 앞을 바라본다. 내가 제일 자신 있는 안무였다.


‘아싸! 정말 춤 하나는 타고 났단 말이야! 필 좋구, 아싸!’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삐걱-.

문이 열렸다.

나의 흥이 절정에 다다른 것과 문 앞에 서 있는 윤섭씨와 눈이 마주친 것은 거의 동시였다. 놀라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윤섭씨. 나도 순간 놀라 하마터면 마이크를 떨어트릴 뻔했다.


‘잘 나간다는 광고 PD가 윤섭씨였던 거야? 망했군. 망했어.’


하늘은 왜 착하게 살고 있는 내게 이런 시련을 주는 것일까? 정말 무심하다, 무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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