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소설은 아름답다.
아무리 작은 로맨스 라도 그 로맨스가 있기에 세상은 풍요롭고 살아갈만 한 곳이다.
사람들이 잊어버리고 무시하는 로맨스가 없었더라면 우린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사람도.... 동물도.....
-----------------------------------------------------------------------------------
한가지 궁금하게 있답니다. 로맨스와 제 소설과 전혀 상관 없는 내용이기는 한데.....
왜 반지의 제왕에는 백인들만 나오는 거죠. 잘은 모르지만 그 코끼리 타고 다니는 악마족도 백인이고 인간도 다 백인 난쟁이족도 백인 주인공 종족들도 백인 혹시 오크하고 낫같이 생긴 무기 들고 다니는 좀 특이한 애들만 다른 피부를 가지고 있을 까요?^^
쓸데 없는 소리였지만, 정말 궁금했거든요. ㅎㅎㅎ
====================================================================================
"왜,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아, 아니요."
태림은 자신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서류만 보고 있다고 생각한 세준이 갑자가 고개를 들고 자신이 했던 것처럼 뚫어지게 바라보자 당황을 해서 들고 있던 책을 놓쳐 그것을 줍는다는 핑계로 붉어진 얼굴을 감출 수가 있었다.
뜸 만 나면 세준의 얼굴을 몰래 몰래 들여다 보는 것이 태림의 일상이 되어 버렸다.
다행이 얼마 가지 않아 학교에 도착했다.
"다녀오겠습니다."
"혹시 그 정신병자가 보이면 눈감지 말고 도망을 가던가 아니면 내가 가르쳐 준대로 거기를 걷어차 버려."
세준은 그 날 들어오자 마자 태림을 세워 놓고 발차기의 자세와 정확한 목표물을 확인하고 그 목표물을 향해 사정없이 발을 차는 기술을 가르친다며 소동을 부렸었다.
"네."
세준이 처음으로 그녀의 인사에 화답을 했다. 그것도 그냥 화답이 아닌 우스개 소리를 하면서 미소를 지은 얼굴로 말이다. 태림의 얼굴에는 그의 미소보다 더 환한 미소가 걸렸고, 그 미소에 세준의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그 사실을 아는 건 세준 뿐이었다.
-3학년 4반 김태림 전화와 있다. 교무실로 어서 내려오도록.-
"누굴까?"
옆에서 오랜만에 공부를 하던 이현도 태림이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고, 사색이 되어 있는 태림의 얼굴을 보고 어깨에 손을 올렸다.
"걱정하지마. 좋지 않은 소식이라면 선생님이 직접 부르지 않겠어."
"그렇겠지."
단 한번도 학교로 전화가 온 적이 없었다. 중학교 시절 어느 날을 빼면.
그녀의 기억에 그 날은 그녀에게 날아든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과는 다르게 너무 화창해서 눈을 뜨고 다니기 힘들 지경이었다.
울음이 가득해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엄마의 목소리와 옆에서 그럴 줄 알았다며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아서 생긴 일이라면 호통을 치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해석하기는 힘들었지만 태림은 얼마 듣지 않고서도 전화의 내용은 언니의 부고를 알리는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알아듣는 즉시 태림은 기절해버렸다.
이번엔 제발 누군가의 부고를 알리는 소식이 아니길 엄마에게 일이 생긴 것이 아니길 바라며 떨리는 발걸음을 재촉해 교무실로 향했다.
"여,여보세요?"
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전화 바꿨습니다. 말씀하세요."
-나야.
길게 듣지 않아도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혜란의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이토록 조리게 했다는 것이 화가나 목소리가 퉁명스러워졌지만 굳이 바꾸려는 수고는 하지 않기로 했다.
"무슨 일이세요?"
-아버지가 조퇴하고 회사로 좀 오라고 하시네,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면 알 거라고 하시던걸.
태림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내세웠던 조건은 세준의 회사의 기밀서류를 빼오라는 거였고, 그 시기는 따로 알려주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그걸 왜 그쪽에 전하는 거죠?"
-호호호, 어머 애도 참. 그쪽이라니 어쩌면 네 새엄마가 될지도 모르는데."
"꿈도 야무지군요."
더 한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선생님들이 가득 차 있는 교무실에서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들 모녀가 아버지의 손길에서 벗어나는 것이 꿈이기는 했지만 자신과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그녀가 엄마를 몰아내고 자신에게 새엄마 행세를 하겠다는 말들과 행동은 그냥 참아 줄 수가 없었다.
-꿈이 될지 현실이 될지는 끝까지 가봐야 아는 것 아니야. 그럼 조금 있다봐.
아버지가 회사로 부른 적은 단 한번도 없었지만 그런 좋지 못한 일을 도모하기에는 그만한 장소도 찾기 힘들 것이었다.
점심시간이어서 그런지 회사는 한산하다 못해 아버지 같이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을 정도로 썰렁했다. 아버지의 비서도 식사를 하러 갔는지 자리는 비어 있었고, 아버지의 사무실 문은 조금 열려 아버지가 의자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이자 태림은 자신을 발견하고 아버지가 나오는 거라 생각하며 다가갔지만, 아버지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이상하게 만큼 번뜩이고 있었다.
설마 혜란이라는 여자도 같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인간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보다 더 한 짓을 하려고 하고 있었다.
"우리 현이 이번에 영화 찍는 다면서."
"네."
태림은 이현의 이름과 그녀의 날카로워진 목소리를 듣자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현은 매니저에게 연락이 왔다면서 태림 보다 몇 시간 전에 학교에서 나갔었다. 그런데 하필 그녀가 온 장소가 아버지 회사라니.
"이번에 우리 회사 광고에 나오면 우리 이현이의 인기는 대한 민국 최고가 될 꺼야. 그럼, 감히 그 시건방진 미유와 비교할 수가 없지."
미유는 이현과 같은 하이틴 스타이었는데 요 근래에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어 수많은 소문이 나돌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말을 들어보니 분명 미유는 아버지의 러브 콜을 거부한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최고의 주가를 달리던 스타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일은 힘든 일이니까.
구역질이 치밀러 올랐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의 친구이며 더 깊이 따지자면 자신의 딸과 동갑인 여자에게까지 그 검은 손길을 내미는 아버지가 있다는 게 구더기를 먹는 것 보다 더 싫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아,아니 너 여기는 무슨 일로...."
이현의 블라우스 단추는 속옷이 비추어 질만큼 열러 있었고, 고운 얼굴에는 눈물이 얼룩져 있었다.
"당신이 사람이야?"
"당신이라니 난 네 아비다.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냐."
이현의 놀란 얼굴이 태림에게 고정되었지만 부끄러워 차마 그녀의 슬프고 부끄러움이 가득한 눈길을 마주하지 못했다.
이현은 태림과 자신을 추행하려는 사람과의 관계를 알게 되자 마자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갔지만 태림은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홀로 아버지와 맞섰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죠. 혜란이라는 그 추악한 여자도 부족해서 딸하고 같은 나이의 여자 애를 건들다니 정말 창피해서 살수가 없어요."
거기서 멈추어야 했을 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손길에서 벗어 날 작은 희망이 있었을 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더 이상 아버지란 사람이 무섭지 않았다. 남자라는 이유로 여자 위에 군림하면서 잔인한 짓을 서슴지 않았던 그가 혐오스러웠다.
세준은 이현의 매니저가 전화하자마자 회의까지 취소하고 자신의 원수 같은 장인의 회사로 왔다. 이현은 그의 죽마고우의 동생이었고, 친구는 죽기 직전에 자신의 가족과 특히 어린 이현을 잘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었기 때문에 세준은 이현의 가족의 일이라면 거의 일순위로 생각할 정도로 정확하고 신속하게 처리해왔다.
이현이가 무사하지 않는 다면 어수룩한 매니저를... 아니 이미 그 매니저는 해고였다. 우선은 색마인 김진만 사장에게서 이현을 구해와야만 했다. 그렇게 주위를 시켰건만 이현을 그의 손에 맡기고 나왔다는 매니저를 도저히 용서 할 수 없었다.
세준이 은밀히 조사해 본 바에 따르면 그의 장인은 많은 연예인들을 섭렵했고, 그 보다 더 한 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이에게 여자를 넘긴다는 거였다. 얼마 전 사라진 미유는 그런 김진만의 손길을 피하기 위해 최고의 전성기를 과감히 버리고 이민을 갔었다.
"현아?"
세준은 울면서 뛰쳐나오는 이현을 품아 안고 이러 저리 살펴보았지만 자신의 우려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아 우선 안심이 되었다.
"어서 나가자, 김 사장은 나중에 내가 알아서 해결할게."
"저...저기."
이현이 뭔가 말하려는 데 이현이 나온 코너에서 누군가 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뭔가에 단단히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혜란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 있으면서도 자기 남자가 다른 여자 넘보는 것도 막지 못했나? 이제 당신도 늙었나보지."
이런 추악한 자리에 혜란이 까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세준의 얼굴은 무서우리 마치 굳게 굳어졌지만 다들 같은 생각으로 바쁜 여자들은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헉헉,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안에 태림이가....."
태림이...
태림이가 자신의 아버지의 나쁜 버릇을 보고 상처받았을 걸 생각하니 그의 가슴이 아려왔다. 하지만 혜란의 공포스러운 목소리는 그런 감정을 걱정한 것이 아니었다. 세준은 싸늘해져 가는 가슴을 느끼며 와본 적이 있는 김진만 사장의 사무실로 발길을 재빨리 옮기었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것 같으니라고. 뭐가 어쩌고 어째. 너 오늘이 네 제삿날인줄 알아."
와장창
세준은 뭔가 요란하게 부서지는 소리와 고함을 지르는 김 사장의 목소리가 들리자 발길을 더 재촉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세준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껏 태림이 자신의 손길만 닿아도 누군가 싸우기만 해도 움츠려 들고 주눅이 들어 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 수가 있었다. 태림은 책상위로 떨어졌는지 사무용품과 함께 바닥에 엎드려 아니 팽개쳐 있었고, 김 사장의 손에는 허리띠가 감겨 있었다.
몇 대나 맞았는지 모르지만 거의 실신해 있는 태림의 상태를 보면 이현이 뛰어나온 그 짧은 시간에 아주 효율적인 매질을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쓸데라고는 애 낳는 것 밖에는 없는 여자가 날 뛰는 걸 미리 잡지 않으면 나중에는 겉잡을 수가 없게되니 자네는 상관 할 것 없네."
세준은 다시 한번 허리띠를 쥐어 드는 김 사장을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거기서 조금이라도 더 움직인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걸 한꺼번에 후회하도록 해드리지요."
아직 허리띠를 쥔 손을 허공에 둔 채로 멈춘 김진만 사장의 눈빛에는 세준이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광기가 어려있었고, 그 눈빛에는 자제, 자비, 자식에 대한 조그마한 사랑도 없었다.
"제가 못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김 사장님도 예전의 그 혈기 왕성한 남자가 아니듯이 저 도 예전의 어수룩한 남자가 아닙니다. 확인하시고 싶으십니까?"
김사장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진심을 담고 있는 세준의 어조에 손을 내렸다.
"좋아. 내 자네의 얼굴을 봐서 참지. 이제 자네 사람이니까 자네가 어련히 알아서 교육시키겠지. 어서 데리고 가게."
세준은 축져져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태림을 안아 들었다.
"걱정하지 말게. 그 정도로 죽지는 않을 테니까. 한 숨자면 일어날걸세. 매 집이 아주 좋거든."
김진만 사장은 자신의 사위가 태림을 안고 있어 자신에게 어쩌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입을 함부로 놀렸다.
세준은 태림을 안고 있지만 않다면 김진만 사장을 이 자리에서 죽여버릴 수도 있을 만큼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태림을 이 자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참았다.
"다시 한번만 태림에게 손찌검을 하면 당신을 죽여버릴 겁니다. 명심하십시오."
"어디서 그런 협박을 해. 그 아이는 내 딸이야 그러니 나하고 싶은 데로 할 테니 그 꼴을 보기 싫으면 잘 지키게."
"....."
"그리고 난 김사장이 아니라 자네의 장인이네. 하하하."
세준이 기절한 태림을 안고 복도로 나오자 어울리지 않게 발을 동동 구르던 혜란이 쏜살같이 달려와 그들 옆에 서서 태림의 모습을 하나하나 뜯어보듯이 살펴보았다.
"어머. 어떻게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난 그저 김 사장님이 이현에게 관심을 보이기에... 태림이 나타나면 뭔가 깨달을 거라고만 생각했어요. 소문은 들었지만.... 정말로 이런 사람인줄은...."
그제야 세준은 옆에서 태림의 이마를 쓸어 넘기며 호들갑을 떠는 혜란을 바라보았다.
"이현이는 먼저 갔어요. 도저히 여기 못 있겠다면서 집으로 간다고 전해 달래요."
혜란이 세준의 눈빛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예전에는 그녀가 그의 눈빛 만 보아도 모든 걸 다 안다고 생각했다니, 태림이 이 상태만 아니었다면 웃음이 나왔을 것이다.
"무슨 소문?"
"김 사장님 나한테는 한번도 그런 적이 없어서 믿은 적은 없었지만, 소문에 손버릇이 매우 좋지 않아서 부인을 거의 하루건너 때린다고 했거든요. 정말이에요. 믿어줘요. 전 일이 이렇게 까지 될 줄 몰랐어요."
세준은 안절부절못하면서 겁내하는 혜란을 남겨두고 승강기에 올라탔다.
그럼 이런 짓이 처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김 사장이 허리띠를 들고 있는 순간에 앞 뒤 가리지 않고 그를 때려 눕혔어야 하는 건데.
"집으로."
이런 모습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는 없었다. 분명 누군가 냄새를 맡는 다면 태림이 더 힘들어 질 거라는 생각에 세준은 집으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세준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기사에게 다시 한번 주위를 주고 집안으로 향했다.
"애가 왜 이런 다니?"
김 사장은 정말 요령 있게 태림을 때렸는지 보이는 곳에는 작은 생채기조차 나있지 않아 세준도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멀쩡해 보였다.
"피곤했다 봅니다. 학교에서 수업하다가 기절했다고 해서 데리고 왔어요."
어머니의 눈빛은 태림이 못 마땅한 것을 감추지 않았지만, 그곳에는 세준을 향한 사랑이 있었고, 그건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준은 지금껏 당연하다고 생각해온 부모님의 정을 태림이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살았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녀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갔다.
"정말 여러 가지로 널 귀찮게 하는 아이구나."
그는 도와 주겠다는 아주머니의 요청을 물리치고 조심스럽게 태림의 교복 단추를 풀러 내려갔다. 여학생들이 입는 얌전한 속옷만 남겨 놓았지만 팔과 다리에는 이미 검은 멍이 뱀이 휘감아 놓은 것처럼 그려져 있었다.
연고를 꺼내든 세준은 나머지 옷들도 조심스럽게 벗기다가 가슴을 둘러싸고 있는 천을 보고 손길을 멈추었다. 언제 다쳤는지도 모르는데 태림의 가슴은 하얀 천으로 동동 싸여 있자 세준은 상처를 확인하기 위에 그것 마저 풀러 내렸다.
그는 결혼하고 나서도 장인의 매질이 처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손가락이 뻣뻣이 굳어 감을 느꼈다.
하지만 다행이 그가 상상했던 상처는 없었다. 천을 풀자 보이는 것은 크림 같이 하얀 색에 부드러움을 가득 지닌 풍만한 가슴이었다. 세준은 그제야 태림의 가슴이 작아 보였던걸 이해할 수 있었다. 체격에 비해 풍만한 가슴을 감추기 위해 항상 가슴에 천을 둘러왔던 모양이었다.
혹시 등뒤에는 상처가 없는 지 확인한 그는 뱀처럼 휘감긴 멍 자국에 연고를 바르기 시작했다.
태림은 몸을 찌르는 화끈거리는 느낌에 잠을 편하게 잘 수가 없어 한참을 뒤척이다가 눈을 떴다.
눈을 뜨자 느껴지는 감각은 쑤지는 느낌과 코를 찌르는 듯한 파스 냄새였다.
파스?
그제야 혜란의 전화, 아버지의 사무실에서 울고 있던 이현과 그 뒤로 이어지는 아버지의 폭력이 기억이 났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기억은 전혀 없었고, 몸에 연고를 바른 기억도 없었다. 파스를 바르고 싶어도 냄새가 워낙에 독했기 때문에 학교에 바르고 갈 수가 없어 항상 아픈 채로 버티어야 했지만 지금은 평소처럼 많이 아프지는 않았다.
"일어나기 힘들면 일어나지 않아도 돼."
세준의 음울하고 어두운 목소리에 태림은 팔을 괴고 상체를 일으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았는데 그는 목소리만큼 어두워 감정을 알 수 없는 눈길로 태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태림은 그의 얼굴이 보기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이제 태림을 뭐로 보겠는가. 소리 한번 제대로 못 내고 젊은 여자들과 놀아나는 남편과 사는 엄마, 그것도 부족해 아내와 자식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를 가진 어린 아내.
"처음 있는 일 아니지?"
질문이었지만 질문이 아닌 확신하는 말투였다.
"아.. 아니요."
이 정도 맞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기절한 건 처음 있는 일이어서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세준의 낮아진 목소리는 그 말을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너 일어나는 것 봤으니 다시 회사에 나가봐야겠어. 얘기는 나중에 하자. 학교에서 기절해서 데리고 온 걸로 말해 놓았으니 쉬고 싶을 때까지 쉬어도 돼."
혼자 있기 죽기 보다 더 싫었지만 분명 그녀 때문에 회사에 나가지 못한 세준을 잡기에는 그녀는 용기가 없었다.
"학교에는 말해 놓을 테니까 웬만큼 나을 동안은 학교에 나가지마."
이현...
태림은 현의 이름이 떠오르자 뼈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다시금 떠올랐고, 이현의 얼굴을 다시 볼 것에 대한 공포에 의해 몸에 난 상처가 뱀이 되어 올라오는 듯한 오싹함이 끔찍하게 밀려 들어와 눈물이 흘러 이불로 입을 틀어막았다.
세준은 태림이 눈을 띄자 밖으로 나왔지만 한동안 문고리를 놓을 수 없어 그 자리에 잠시 머물다가 태림의 쥐어짜는 듯한 울음소리를 듣고 자신의 가슴이 아려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들어가 그녀의 얼굴을 그의 어깨에 기대게 하고 싶었지만 마음 속에 쌓여 있는 김진만 사장에 대한 증오심이 그의 다리를 붙들고 있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태림이 일어나면 김진만 사장이 지금까지 해온 야만적인 짓을 추궁할 생각이었지만 공포에 차있는 태림의 눈동자를 보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맞고 살았냐고, 왜 참고 있었냐고 따지고 호통치고 싶었지만 선이 고운 얼굴을 머리카락으로 감추고 세준의 눈길을 피하던 그녀의 안쓰러운 행동에 단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문고리를 잡고 있는 긴 손가락들이 누구를 위해, 누군가의 몸에 있는 상처를 위해 연고를 바른 것은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태림의 느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부드러워 손길을 거두고 싶지 않던 그녀의 피부에 나 있는 멍 자국과 등에 나 있는 가느다란 상처들이 눈에서 잊혀 지지가 않았다.
등에 있는 상처들은 이미 오래 전에 나서 아물어 있는 것들이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알 수 없는 것들이었지만 몸 구석구석에 연고를 바르는 친밀한 행동은 그 작은 상처들을 아무런 여과 없이 볼 수 있게 했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딸꾹질이 이어지자 세준은 그제야 문고리를 놓을 수가 있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이현에 대한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밀려옴과 동시에 어떻게 세준이 그 자리에 나타나 그녀를 데리고 나왔는지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그는 분명 아버지에 대한 경멸감을 아무런 여과 없이 태림에게 들어내는 사람이었기에 그가 아버지를 개인적으로 만나기 위해 왔다거나 사위 된 도리로 회사에 찾아 왔을 거라는 가능성은 생각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