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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 러브송 < 35 >

나비 |2005.03.12 14:52
조회 3,163 |추천 0

35


“대체 무슨 일이에요, 아저씨?”


옆에 앉은 여자가 웅성거림을 뚫고 소리쳤다.


“헤드라이트가 갑자기 나갔어요. 죄송합니다. 당황해서 차가 흔들렸습니다.”


목소리로 보아 젊은 사람 같았다. 그제야 고개를 쑥 내밀어 보니 나이가 서른도 안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일단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운전사는 문을 열고 황급히 내렸다.


“참나, 이런 일도 다 있네.”

“그러게. 계속 서 있을 건가? 헤드라이트 없으면 차가 못가?”


뒷좌석에 있던 아줌마들의 목소리였다.


“밤길에다가 좁은 도로니 위험하지.”

“그럼 무작정 서 있게 되는 거야?”

“뭐 다음 차 오면 그걸로 갈아타라고 하겠지.”

“애 정신 좀 봐! 우리 막차 탄 거잖아. 다음 차가 어디 있어?”

“어머. 막차였네. 그럼 새벽까지 여기 서 있는 거야?”

“그야 모르지. 운전수가 뭐라 말을 하겠지.”


그 때 밖에 나갔던 운전수가 들어왔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헤드라이트가 완전히 나가버렸어요. 회사에 연락했더니 한 시간 내로 수리를 해준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운전수의 말에 여러 사람들의 항의가 한차례 이어졌지만 시간이 지나자 잠잠해졌다. 움직이지 않는 차 안에서 여러 명이 사람들이 할 일없이 앉아있는 풍경은 신기한 것이었다. 달리는 차에서는 어딘가로 행하는 공동의 목적이라도 있지만 한 시간 동안 그 목적이 없어진 사람들은 허전한 듯 바삐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미처 몰랐던 사실이지만 차 시동 소리와 달리는 소리는 꽤 컸던 모양이었다. 그 소리가 사라지자 부스럭거리는 비닐 소리와 신문을 접는 소리도 꽤 크게 들려왔고 버스 안은 순식간에 각종 소음으로 가득 찼다.


‘집에 전화를 해줘야 겠네.’


아빠가 터미널에 차를 갖고 나오시겠다고 한 것이 생각난 것이었다. 하지만 내 핸드폰은 발신 정지 상태. 할 수 없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저, 핸드폰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예? 핸드폰이요?”


아까 핸드폰 보았는데 핸드폰은 왜 빌리려는 갈까하는 의아함이 드러났다. 


“제 핸드폰이 발신 정지상태거든요. 집에 늦겠다고 전화를 드리려고 그래요.”

“예.”


돈이 없다는 것은 늘 사람이 구차하게 만든다. 그래서 돈은 벌어야 하는 것이고, 돈을 벌다보면 또 구차한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 반복되는 고리 안으로 들어가야 하다니 끔찍한 노릇이다. 여자는 흔쾌히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별로 싫은 내색 없이 핸드폰을 내주었고, 나는 소음을 피할 겸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어두움이 큰 산마저 삼키고 있었다. 밖으로 나와 보니 꽤 높은 지형이었다. 시리지만 깊게 느껴지는 공기가 폐로 스며들었다.


“예. 늦을 것 같아요. 별 일은 없을 거예요. 그냥 택시타고 들어가도 되고. ······아니요. 걱정 마세요. 별 일 있으면 또 전화를 할게요.”


전화 통화는 끝났지만 소음 덩어리 차 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담배나 한 대 피우고 들어갈 생각으로 외진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어린 여자들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고는 경기 일으킬 사람도 있어 보였기에. 자리를 잡은 것은 한 발만 내딛어도 산 아래로 추락할 것 같은 아슬아슬한 곳이었다. 조금 무섭긴 했지만 발아래 펼쳐진 경치가 마음에 들어 쭈그려 앉아서는 담배에 불을 붙었다.


‘네가 싫어하던 담배다. 왜 네가 없으니 맛이 없는 거니? 네가 말릴 때는 지독히 맛있던 담배인데.’


담배 하나를 피우면서도 그의 빈자리는 크게 다가왔다. 담배를 비벼 끄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저기 발아래에서 무언가 날 부르는 것 같았다. 아니, 날 당기는 느낌. 어서 오라고. 흔적 없이 삼켜주겠다는 유혹. 난 최면에 걸린 것처럼 눈을 감고 서서히 양팔을 벌렸다. 정신은 맑아지는 것 같은데 갑자기 심하게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내가 비틀대고 있나? 조금 더 정신을 잃으면 저 아래로 떨어지게 될까?’


죽음이 바로 내 곁에 있었다. 멀리 있다고 생각했던 죽음이 바로 코앞에서 내게 손짓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감았던 눈을 서서히 떴다. 역시! 어려울 것 같지 않다. 발아래 어둠으로 한 발자국만 다가서면 된다. 호흡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처음 조우하게 될 죽음에 마음이 들뜨고 있었다. 하지만 침착해야 해. 멋지게 끝내주자. 멋진 죽음을 위해서! 서서히 두 팔도 내리고 발 하나를 들었다. 이제 날 지탱하는 건 한 다리뿐이었다. 남은 건 중심을 다른 발로 옮기는 것뿐. 어렵지 않아. 중심만 옮기면 끝나는 거라고.


‘영민아! 안녕! 마지막에 네 생각이 나네. 너에 대한 미련 많이 갖고 간다. 이런 미련 미안해 정말.’


멋진 죽음을 위해. 멋진.


“여보세요!”


앙칼진 여자의 음색이었다.


“핸드폰을 가지고 나가시면 어떻게 해요?”


옆자리 여자의 핸드폰. 잊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난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어머! 여기 완전 비탈이잖아. 떨어지면 죽겠다! 왜 이런데 서 있어요. 어머, 너무 무섭다.”


갑자기 풀어져버린 긴장감.


“저, 담배 하나 필 건데 망 좀 봐주실래요?”

“담배요?”

“예. 담배 하나 피고 싶, 싶어요. 옆에 좀 있어 주세요.”

“지금 울어요?”


나는 눈물을 훔치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


“얘, 얘. 남자는 세상에 많아! 그리고 주변에 없어서 그렇지 멋진 사람도 얼마나 많은데.”

“그래요?”


어느새 친해진 언니는 버스 안에서 조잘 조잘 잘도 떠들었다.


“그럼. 매너 있고, 귀엽고, 능력 있고, 여자를 보호 할 줄 아는 남자도 꽤 많다. 그러니까 남자랑 헤어졌다고 이상한 생각하는 건 바보짓이다.”

“언니 남자 친구가 그런가 봐요.”

“우리 자기? 하하. 맞아. 어떻게 알았니? 내 얼굴에 써있나?”

“행복해 보여요. 그 남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니? 요즘 부쩍 예뻐졌다는 말도 많이 하긴 하더라. 하하. 너 그 남자 많이 좋아했구나?”

“몰랐었는데 그런가 봐요.”

“에구에구. 그렇다고 그런 끔찍한 생각을 하니? 내가 남자한테 채인 얘기 해줄까? 그거 들으면 너 기분 풀릴 지도 모르겠다. ······.”


언니는 바람둥이 남자가 죽도록 따라다니다가 갑자기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찌나 말을 재미있게 하던지 중간 중간 웃음이 나왔다.


“넌 내가 채인 게 웃기니?”

“하하. 언니가 말을 재미있게 해서 그래요. 오징어 얘기도 너무 웃긴데요. 어, 잠깐만요. 전화가.”

“그래. 전화 받아라.”

“어, 언니! 영민이에요.”

“헤어졌다는 남자친구?”

“예.”

“빨리 받아봐.”


하지만 망설이는 동안 전화는 끊기고 말았다.


“뭐야? 벌써 끊겼어.”

“할 말이 없는데 그냥 했나보죠. 할 말이 있었다면 이렇게 빨리 끊지는 않았을 거예요.”

“너 생각한번 부정적이다. 무슨 말 할지 네가 어떻게 안다고. 젊은 얘가 그런 식이니 이상한 생각이 들지. 만약 내 친구는 그런 전화 오면 이렇게 생각했을 거야.”

“무슨 생각이요?”

“하! 내가 너 전화할 줄 알았다. 네가 가봐야 내 손바닥이지.”

“하하하.”

“빨리 전화해 보자. 전화기 여기.”


언니는 핸드폰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너 또 나가서 전화하지 말고 여기서 해.”

“알았어요.”


나와 헤어지기 전부터 깔려있던 컬러링이었다. 내 사랑 변하지 않을 거라는 내용의 유행가. 좋은 징조로 볼 수 있는 건가? 하지만 모르는 번호여서 그랬을까 시간이 꽤 지나가는 데도 전화는 받지않았다.


- 여보세요.


끊으려고 하는 순간 영민이의 목소리가 핸드폰에서 흘러 나왔다.


“나 나영이.”

- 핸드폰 바꿨어?

“아니. 무슨 일이야?”

- 너 이번 달 방세 냈니?

“그것 때문에 전화한 거니? 네가 걱정할 문제 아니잖아!”

- 네 계좌로 오늘 돈 보냈어. 많지는 않아. 알바한 돈 조금이야.

“······?”

- 어디야?

“안동 집에 가는 중.”

- 그랬구나. 집에 도착하면 전화해줄래?

“왜?”

- 내가 미안했다. 네가 싫어지거나 했던 건 아니었는데 잠시 내 마음이 그랬어.

“네 마음이 뭐?”

- 그냥 떨어져있는 게 우리에게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했었거든. 그런데 잘못된 생각 같아. 우리 다시 만나자.

“······.”

- 듣고 있어?

“들어. 집에 가서 전화할게. 지금은 차안이라 통화하기 그래.”

- 그래. 알았어. 꼭 전화해줘. 기다리고 있을게.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인신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내 몸을 옳아맨 동아줄이 ‘탁’ 하고 끊어진 느낌이었다. 자유로운 느낌. 행복해진 느낌.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죽음이란 내게 투정이었다는 걸. 영민이를 죽도록 보고 싶어 했었을 뿐이라는 걸 말이다. 그것을 자존심을 위해 꽁꽁 싸매자 삶의 의미도 느낄 수 없는 바보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다시는 다가갈 수 없는 영민이에게 내 죽음으로 무거운 짐을 씌우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냥 보고 싶다고 먼저 말하면 되는 거였는데. 우리의 문제가 뭘까 고민하는 것이 순서였는데. 난 그것에서 멀리 도망치려만 했던 것이다.


“뭐라고 하는데 또 울어?”

“다시 만나재요.”

“근데 왜 울어?”

“언니 저 나갈래요. 밖에서 마음껏 울고 싶어요.”

“나도 나가자.”



언니는 나를 뒤따라 나왔다. 언니는 그런 날 가슴으로 안아주었고, 난 마음껏 소리 내어 울었다. 죽음에 가까이 갔었다는 것에 두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무서웠고, 한 편으로 행복했으며 언니에 대해 한없이 고마웠다.


“고, 고마워요. 언니 아니었으면 큰 일 났을 거예요.”

“울지 마. 이제 좋은 일만 있을 거야. 울지 마라.”


어두운 도로에서 마음껏 울면서 앞으로는 내 자신에게 좀 더 솔직해져야겠다고,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오빠! 나 도착했어. ······. 응. 차가 고장 나서 많이 늦었어. 뭐? 아니야. 여자애 앉아 있었다. 지금 질투하는 거야? 그 여자애 처음엔 이상하더니 좋은 애더라구. 친해져서 막 같이 수다 떨면서 왔어. 처음엔 눈싸움을 걸어오더라구. 어린 것이 빤히 쳐다보잖아. 나? 내가 졌겠어? 내가 한 눈싸움 하거든. 눈 부릅뜨고 쳐다봤지. 내가 이겼어. ······. 응. 어디로 가면 되는데? 알았어. 리버트 호텔? 도착해서 전화할게.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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