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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색경고(赤色警告) 009

미리별 |2005.03.29 23:09
조회 265 |추천 1

 

 

 

적색경고(赤色警告) 부제:잔혹하게사랑하라

 

 

 


“젠장!”

 

 

눈에 띠게 키가 커서 그런지 남색의 교복이 제법 잘 어울리는 남자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겨올렸다.


햇빛이 쩅쨍하여 날씨가 더운 것도 아니었지만 남자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뭐야, 또 왜 그래.”


“짜증나 죽겠는데 장난전화 질이잖아! 내가 만만해보이나!”


“역시 김한진, 성격 드러운건 알아줘야지.”


“시끄러. 닥치고 니 할일이나 해.”

 

 

한진은 옆에서 느긋하게 말을 걸어오는 친구때문에 아까전보다 표정을 더 찡그렸다.

누구는 열받아 죽겠는데, 옆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음까지 지으며

느긋하게 말을 해오는 꼴이란, 정말 한진이 그냥 넘길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름 친구라서 때릴수는 없고, 한진은 여전 벙긋 웃는 친구를 노려봐주었다.

 

 

“근데 요즘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은거야.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됐어, 신경 꺼.”


“훗, 뭐 니가 기분 나빠할일이라면 고귀하신 네 누님일 밖에 더 있나?”


“………”


“녀석, 역시 단순하다니까.”


“권인우, 신경끄라고 했다!”

 

 

한진은 자신이 기분 나쁜것에 대해 거리낌없이 그럴줄 알았다면서

정곡을 찔려오니, 괜히 혼자 찔려 얼굴을 푹 숙였다.


한진의 모습에 인우는 귀엽다는 듯 덥수룩하게 자란 한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꼭 그 모습이 앙칼진 고양이를 쓰다듬는 돈 많은 주인의 모습이랄까.

즉, 앙칼진 고양이는 한진을 뜻하고, 돈 많은 주인은 인우를 뜻한다.


한진은 인우의 손길을 매섭게 탁 쳐내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내가 개새끼냐, 뭘 그렇게 쓰다듬어 대는건데!”


“귀엽잖아.”


“별 시덥잖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니가 널 너무 몰라서 그런데 정말 귀여워. 깨물어 주고 싶을만큼.”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능글맞은 말을 내뱉어내는 인우를

질렸다는 듯이 바라보는 한진은 짧은 한숨과 함께 교실을 빠져나가려는 듯

뒷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벌써 몇년 째 친구란 이름아래 그들이었다.

학교에서 알아주는 우등생, 그리고 문제아.

어울리지 않지만 또 어떻게 보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그런 친구.

인우와 한진은 그런 사이였다. 꼭 비슷한 사람끼리 친구를 해야된다는 개념을 깨어트린 그런 친구.

 

 

“어디가는거야. 좀 있음 종 치는데”


“우리 범생군은 공부 빡시게 하십쇼. 나는 담배 한대라도 펴야 온 몸에 엔돌핀이 솟을 것 같으니까.”


“담배 아직도 안 끊었어? 누님이 담배냄새 싫어한다고 끊는다면서.”


“쿡, 끊어야 할 이유가 담배연기처럼 없어져 버렸거든.”

 

 

인우의 말에 잠시 멈칫한 한진은 이내 씁쓸한 미소를 끝으로

손을 번쩍 치켜올려 두어번 인우에게 흔들어주곤 교실을 빠져나갔다.


곧이어 종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고,

한진이 나간 문을 바라보고 있던 인우는 짧은 한숨과 고개를 돌렸다.

 

 

“………”

 

 

그 짧은 한숨과 함꼐 고개를 돌린 인우는 방금 전의 친구를 걱정하던 인우가 아니었다.


무테안경을 검지손으로 살짝 치켜올리며 웃음 짓는

그는 방금 전의 인우가 아니었다. 분명.


잔인한 미소가 걸쳐져 있는 입가가 낯설었다.

맑고 투명한 미소가 앉아있던 눈가가 낯설었다.

…권인우, 그가 순식간에 낯설어졌다. 한 겹의 두꺼운 가면을 벗어버린 것 마냥.

 

 

**

 

“…후우.”

 

 

한진은 입 안에서 뿌연 담배연개를 허공에 토해내었다.


어느새 벌써 필터까지 타오른 담배를 바닥에 지져끈 한진은

체육창고 안에 널부러져 있는 매트들 중 그래도 비교적 깨끗한 매트위로 몸을 눕혔다.


담배 연기가 채 빠져나가지 못해 역한 냄새와

체육창고 특유의 그 쾌쾌한 냄새가 한진의 코끝을 간질였다.

하지만 이미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것들이라서 별 감흥이 없었다.


매트에 깊이 자는 듯 누워있는 한진의 얼굴이

체육창고 벽 맨 위쪽 구석에 있는 자그마한 창문사이로 비춰드러오는

빛에 의해 적나라하게 비춰졌다.

 

 

“………”

 

 

슬픔, 아픔 그리고 그리움이 잔뜩 베어 있는 얼굴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것 같았지만 한진의 얼굴에는

이미 예전의 그 표정을 찾아볼 순 있어도 그것은 한진이 만들어 낸 거짓이었다.


조용히 숨만 고르게 쉬며 잠을 자는 듯 싶던 한진의 볼 위로

잠시후 빛에 반사되어 투명하게 반짝이는 눈물 한방울이 빙그르 떨어졌다.


그리움의 눈물.

기억하지 않으려 해도, 기억해내지 않으려 해도 생각나는 그 사람의 모습.


몇일 전, 억한 심정에 나가라고 소리친 한진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은 건지

한진의 말 이후로 더이상 볼수 없는 누나가 그리웠다.

싫다, 싫다 말하지만 그 누구보다 소중한 그 사람의 흔적이 그리웠다.


벌써 경찰에는 신고는 해놨지만 그것으로 누나를 찾기엔 거의 불가능했다.

평소 누나의 알바장소나 전화번호 하나도 알지 못하는 자신이 새삼 부끄러웠다.

그래도 세상에 하나 남은 핏줄인데, 세상에 하나 남은 누나인데…


한진의 눈가에선 방울 맺혔던 눈물이 기어코 쉴새없이 떨어졌다.

 

 

“…으…흑……”

 

 

보고싶다. 보고싶다. 보고싶다.

몇 천번, 몇 만번을 되뇌어보지만…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몇 천번, 몇 만번을 되뇌어보이지만 닿지 않는 말.

 

 

 

미리별 (d_dmino_o@hanmail.net)

비오는날의고양이 (cafe.daum.net/rainNcat)

 

 

 

 

 

추천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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