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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여자, 어을우동 _ 34편 (역사 로맨스)

국화 |2005.03.30 00:17
조회 797 |추천 0

또다시 날이 밝았습니다. 지금은 새로운 오늘의 15분입니다.

그니까 12시 15분이란 말이겠지요?

휴우~  이제 제법 홈페이지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다시보는 글이 지겨움에도,

살펴주시는 여러 님들 덕분에 아직 숨쉬고 있는 국화입니다. 몇편 차이나지 않습니다.

오늘도 활기찬 하루 맞이들 하시고, 홧팅입니다~ 국화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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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대비는 밤늦게 찾아온 귀인정씨를 위로하고 있었다. 배가 제법 부른 귀인정씨는 뱃속의 용종을 어루만지며 인수대비에게 억울함을 상기시켜주었다. 그렇다고 귀인정씨의 죄가 씻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귀인정씨는 모든 것을 소상히 아뢰면서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뱃속에 용종을 잉태하고 있음이었다. 아무리 완벽한 인격체가 아니라고는 하나, 자신도 지은 죄가 있음이었다. 중전윤씨를 어떻게 하여서든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았던가. 원자를 해하기 위해 갖은 방도를 쓰지 않았던가. 허나, 귀인정씨는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며 용종을 다독였다.

“대비마마! 신첩, 너무나 황망하여 이리 걸음을 하였사옵니다. 신첩의 짧은 소견으로는 중전마마께서는 그리하실 분이 아니옵니다. 대비마마! 부디,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는 필시, 중전마마를 음해하는 자의 소행일 것이옵니다. 대비마마!”

인수대비는 중전윤씨를 두둔하는 귀인정씨에게 엄포를 놓았다. 그것이 귀인정씨가 바라는 바였다.

“귀인은 어찌해서 중전을 두둔하는 것이더냐. 내, 뭐라 하였더냐. 국모의 자리엔 아무나 앉는 것이 아니라고 하질 않았느냐. 이 일은 주상께서 잘 처리하실 게야. 암! 주상께서 어련히 알아 처리하시려고. 귀인은 용종을 살피어라. 왕자를 생산하여야 할 것이야. 쯧쯧! 어리석은 것 같으니라고. 어찌하여, 그리 당하고도 중전을 위할 수가 있다더냐. 네, 그동안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하였더냐? 잘 견디었느니라. 발칙한 것 같으니라고. 그러고선 감히, 그 자리를 꿰차고 있을 줄 알았던 고? 쯧쯧쯧!”

귀인정씨는 꺾어진 날개를 다시 찾은 기분이었다. 중전윤씨가 이 일로 폐위되고 나면, 그 자리는 당연 자신의 자리임에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귀인정씨는 그다지 부르지도 않는 배를 내밀며 인수대비에게 기교를 부렸다.

“대비마마! 어찌나 용종께서 힘이 좋으신지, 신첩 가끔 깜짝깜짝 놀라곤 하옵니다.”

“그래? 필시, 왕자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리 심하게 노신다하더냐. 몸을 따뜻하게 하고, 걸음걸이 하나하나에도 조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니라. 알아들었느냐?”

“예, 대비마마!”

인수대비는 귀인정씨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초조해하였다. 왜 이리도 더딘지, 인수대비의 역정이 꿈틀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때였다. 상궁의 목소리와 함께 영사(領事) 한 명회가 인수대비의 처소로 들었다. 한 명회가 누구인가. 성종의 첫 번째 비(妃)였던 공혜왕후의 생부가 아니었던가. 귀인정씨는 한 명회를 보자, 회심의 미소를 감추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명회는 귀인정씨를 봄과 동시 잠시 주춤거리더니, 이내 예를 표하고 자리에 앉았다. 한 명회가 귀인정씨의 힐끔 쳐다보자, 인수대비가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내가 아끼는 아이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왜 이리 늦었습니까. 주상께서는 지금,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실 겝니다. 이때를 놓쳐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벌써, 영사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혹여나, 주상께서 결단을 쉽게 내리지 못하신다면 영사께서 주청을 드리세요. 아셨습니까? 그리 아니 된다면 상소문을 올리라고 이르세요. 유생들을 부추기세요.”

귀인정씨는 귀를 막은 것처럼 쥐죽은 듯 앉아 있었으나, 두 사람의 대화내용으로 보아, 중전윤씨의 폐위를 도모하는 것 같았다. 뱃속의 용종이 분명 복덩어리인 모양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중전윤씨가 폐위되면 원자도 당연히 골방신세가 될 터였다. 훗날, 역모의 씨앗이 될지도 모르는 화근덩어리를 가만 놔두진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자신의 뱃속에 용종이 세자가 될 것이 뻔하였다. 곧, 중전의 자리에 오를 것이니 당연한 이치였다. 귀인정씨는 차오르는 감회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한 명회가 입을 열었다. 찹찹함이 묻어났다.

“하오나, 마마! 신이 그럴만한 힘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인수대비는 한 명회의 말에 발끈하며 말을 받았다.

“힘이라니요? 영사께서 누구십니까? 이 나라를 세우신 분이 아니십니까. 승하하신 세조께서 누구 덕에 그 자리에 올랐답니까. 그리고 영사께서는 왕실의 사돈이십니다. 어린 중전께서 어찌 돌아가셨습니까? 그걸 잊어서는 아니 되십니다. 지금의 중전으로 인하여, 그 어린 중전께서 화병으로 돌아가신 게 아니고 뭐랍디까? 누구보다 주상께서 아끼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영사의 말씀이라면 주상께서 따를 것입니다. 딱히, 돌아가신 중전께서 걸리신다면, 다른 이를 사주하세요. 그리하시면 될 것이 아닙니까? 영사께서는 뒤로 물러나 계시고, 다른 이를 통해 주청을 드리세요.”

두 사람의 대화에 귀 기울이던 귀인정씨는, 배가 당긴다는 이유로 인수대비의 처소를 빠져나왔다. 발걸음이 더없이 가벼웠다. 날개가 돋았으니, 오죽하랴. 제아무리 정희왕후가 뒤를 봐주고는 있다하나, 늙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신세가 아니던가. 중전윤씨는 폐비를 모면하지 못할 것이었다. 귀인정씨는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꾸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귀인정씨는 늦은 밤, 교태전을 향하여 한껏 비웃어 주었다.
사건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모두들 사정전에 들어 중전윤씨의 폐위 문제를 논의하였다. 쉽게 매듭지어질 것 같지가 않았다. 원자의 생모가 아니었던가. 폐비를 주청하는 이와 반대하는 이가 상반을 이루고 있었다. 의견들이 분분하였다. 성종이 거듭 되풀이하며 자신의 결의를 꺾지 않았다.

“중전을 폐위해야 할 것입니다. 한 나라의 지엄한 국모가, 한낱 후궁을 투기하여 그런 사특한 계략을 꾸몄으니, 계속하여 그 자리에 둘 순 없습니다. 이것들을 좀 보세요. 비상입니다. 이건 또 무엇입니까. 남을 음해하는 비방이 적힌 서적이 아닙니까? 엄연히 들어난 사실입니다. 중전은 폐위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종은 화를 못 이겨, 기어코 서적을 내던지고 말았다. 이에, 대사간(大司諫)이 아뢰었다.

“전하, 중전마마께서 그것들을 가지고 계셨다고는 하나,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옵나이다. 신중하셔야 하옵니다. 원자아기씨의 생모가 아니옵나이까? 당대 유사한 예(例)를 찾아보아도, 이 나라의 국모를 그리 쉽게 폐위한 사례는 없사옵니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어, 좌승지(左承旨)가 아뢰었다.

“전하! 대사관의 말도 일리는 있사오나, 폐위하심이 마땅하다고 보나옵니다. 새로이 중전마마를 간택하신다 하더라도, 어린 원자아기씨의 성품엔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옵니다. 새 중전마마께서 잘 보필하신다면, 생모로 따르실 것이옵나이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에, 도승지(都承旨)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전하! 중전마마의 잘못이 크다고는 하오나, 폐위까지는 당치 않으시나이다. 이는, 중전마마를 모시는 나인과 대궐을 드나드는 이의 잘못이 크다고 볼 수 있사옵니다. 하오니, 정 그러하시다면, 나인을 문초하시고, 부부인의 직첩을 회수하여, 민가에서 들여올 수 있는 것들을 사전에 막으심이 어떠하신지요. 또한, 중전마마의 직첩을 거두시고, 귀인이나, 숙의로 감등하시는 것으로 해결하시 옴이 옳다고 보옵나이다. 원자아기씨의 생모가 아니시옵니까? 전하! 훗날, 원자아기씨가 장성하여, 생모인 중전마마의 폐위하심을 아신다면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사옵나이까. 전하,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영사(領事) 한 명회는 뒷전에 앉아 인상만을 쓰며 못마땅해 하였다. 날이 밝아옴에까지 사정전의 불이 꺼지지 않았다. 한 나라의 국모를 폐위하는 크나큰 문제였으니, 쉽사리 결정이 내려지진 못할 것이었다. 대신들을 물리며 성종이 강녕전으로 들었다. 머리가 아파왔다. 진한 술 한 잔이 생각나는 새벽이었다. 마음을 차분히 해야 할 것이었다. 신중해야 할 것이었다. 위로받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었다. 허나, 속이 비어버린 만큼 쉬 차진 않을 것이었다. 성종이 자리를 일어나며 길을 나섰다. 김 내시가 밝아오는 새벽임에도 등(燈)을 들고 따라나섰다.

“숙용(淑容)에게 들 것이니라. 거리 들 것이니라.”

“예, 전하!”

성종이 숙용권씨의 처소로 걸음을 옮겼다. 잠에서 막 깬 듯한 숙용권씨가 긴 머리를 땋아 내리고, 속적삼만을 입은 채, 성종을 맞이하였다. 깊은 잠을 청하였던지, 눈이 부어있었다. 성종은 숙용권씨에게서 잠시 시선을 거두더니 이내, 방으로 들었다. 숙용권씨가 성종 앞에 앉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이목구비를 감춘 숙용권씨의 이마가 눈으로 들어왔다. 그리 넓지도, 좁지도 않았다. 땋아 내린 까만 머리가 하얀 속적삼 위로 돋보였다. 난처하였다. 어딜 가나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무얼 해도, 무얼 보아도, 따라다니질 않던가. 성종이 이마를 짚으며 숙용권씨에게 말을 건넸다.

“잠을 깨워 미안하구려. 피곤 하외다. 그만 잠자리에 듭시다. 숙용......! 한 가지 청을 하여야겠소. 잠시만 곁에 머물다, 내 잠이 들거든 자리를 물러주시오. 미안하구려. 새벽까지 사정전에 들어 있어, 피곤하여 그런 것이니 섭섭히 생각지 마시오. 숙용도 내게 처소를 빼앗겼으니, 날이 밝아 움직이자면 불편할 것이 아니겠소? 숙용에게 부탁하리다.”

“그것이 청이었사옵니까? 마음 쓰지 마시옵소서. 신첩, 그리하도록 하겠사옵나이다. 곤하실 터이니, 어서 침수에 드시옵소서.”

성종이 자리에 눕자, 숙용권씨가 옆으로 붙어 누웠다. 성종이 팔을 뻗어 베개를 삼아주었다. 누가 그러했던가. 상중(喪中)에 더욱 성욕이 분출한다고 말이었다. 세조 3년에 최 말철이란 자가 있었다. 우습게도 국상(國喪)일 때는 기생과의 성관계가 금지 되었었다. 그러나 최 말철이란 자는 국상 중에 기생 천금월과 중아를 간통하였고, 또 부친의 상중에는 의녀(醫女) 월비를 간통한 사건으로 귀양을 갔다가 벼슬이 떨어졌었다. 불충, 불효의 죄목이었다. 성종은 다른 여인을 품음에 있어, 합당한 구실을 찾는 자신이 우스웠다. 너무나 우스웠다. 허나, 너무나 허하였다. 너무나 허하여, 뼛속까지 시리도록 아팠다. 추웠다. 추워 얼 것만 같았다. 누군가의 음기를 받지 않는다면 추워 죽을 것만 같았다. 성종이 숙용권씨의 어깨를 낚아채었다. 그로 인해 숙용권씨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성종은 숙용권씨의 속적삼을 거칠게 뜯어내며 젖가슴을 움켜잡았다. 가슴이 터져나갈 듯 한참을 움켜잡고 있던 성종이 힘을 풀며, 얼굴을 묻었다. 성종의 손바닥이 숙용권씨의 얼굴을 덮었다. 성종은 구석구석을 그제야 핥기 시작하였다. 그도 잠시, 한쪽 손으로 속곳들을 풀어내며, 어느새 단단해진 그것을 허벅지 사이로 밀어 넣었다. 그것은 미친 듯 돌진하였다. 성종의 그것이 너무나 단단하여, 폭발할 것만 같았다. 숙용권씨의 입에선, 신음소리가 그치질 아니했다. 갑작스런 돌진으로 인해, 채 촉촉해지지 못한 샘이 허물어지는 느낌이었다. 성종은 야생마처럼 질주했고, 또 내달렸다. 성종의 입에선 뜨거운 입김이 연신 뿜어져 나왔다. 성종의 신음소리는 야생마의 울부짖음이었다. 짝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야생마가 목을 놓아 부르짖으며 광란을 벌이고 있었다. 여전히 한쪽 손이 숙용권씨의 얼굴을 향해 있었다. 성종이 질주를 멈추었다. 고꾸라지듯 옆으로 쓰러진 성종이 눈을 감았다. 숙용권씨는 재빨리 찢어진 옷들을 추스르며 방을 빠져나왔다. 제정신이 아닌 듯 하였다. 성종이 아니었다. 숙용권씨는 아침바람으로 전해지는 허벅지의 통증을 그제야 느낄 수가 있었다. 질색을 하며 처소를 나선 숙용권씨를 나인이 감싸며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잠을 청하던 성종의 볼 위로, 비가 한 방울 스미고 있었다. 성종이 몸을 뒤척이며 돌려 누웠다. 어느새 두 방울의 비가 콧등과 귀를 지나쳐, 같은 방향으로 또르르 굴러 내렸다.

**

갑상이 들렀다. 갑상의 손에는 샛노란 개나리들이 들려 있었다. 연이가 부엌에서 나서다 개나리를 뺏어들고는 호들갑을 떨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연이의 함박웃음이었다.

“아유! 어여쁘기도 해라. 저 주시려고 꺾으신 거예요? 벌써, 개나리도 피었는데, 우리 아씨는 시들어만 가니....... 어서 물을 떠서 사발에 올려야겠습니다. 아니면, 요, 올망졸망 한 것들이 추해질지도 모르니 말입니다요.”

연이의 말투는 자연스레 올려져있었다. 보면 볼수록 믿음직하고 총명하며, 선량하였다. 게다가, 인물까지 잘났으니, 연이는 사발에 물을 뜨면서도 갑상을 몰래 훔쳐보았다. 심상한 막사발에 노란 개나리들을 띄웠다. 연이는 그것을 들고 어우동을 불러재꼈다. 밝은 대낮이라 그런지, 쉽사리 문을 열지 못하던 어우동이, 결국 연이를 들게 하였다. 뒤이어, 갑상이 당연한 듯 따라들었다. 연이는 막사발을 어우동의 코앞에 가져다대며 방정을 떨었다.

“아씨, 참말 예쁘지요? 이것들 좀 보셔요. 노오란 것이 아침저녁으로 찰 텐데, 고개를 내밀고 쳐다보는 것 좀 보셔요. 어쩜 이리도 색이 고운지, 꼭 고명 올려놓은 노른자 같네요. 향이 나지 않는 것이 아쉽지만, 그래도 도련님 때문에 봄을 느끼게 되었느니, 고맙지요?”

“그래, 곱구나....... 고맙습니다. 허나, 앞으로는 마음 쓰지 마십시오. 편치 않습니다.”

어우동의 존대에 연이가 놀라며 바라보았다. 연이는 어우동과 갑상을 번갈아 쳐다보며, 자리를 피해야할지, 말아야할지 난감해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연이는 안중에도 없는 듯하였다. 갑상이 어우동을 향해 말을 건네었다.

“그리하지 마십시오. 맞습니다. 아씨께서 그리 말씀하시질 않았습니까. 나를 모르니, 이도저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차라리 제게 호통을 치세요. 큰소리를 내시란 말씀입니다. 아직은 이도저도 아무것도 아닌 나입니다. 온전히 설 수 있을 때까지 하대를 하십시오. 이 몸, 아씨에게 어떤 대접을 받아도 괘념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예전처럼 당당한 모습을 보이세요. 이리 약한 모습을 원치 않았습니다. 이건 아씨의 모습이 아닙니다. 아직도 힘이 드십니까? 아직도 잊지 못하고 계신 것입니까? 잊으셔야 합니다. 잊으실 수 있습니다. 아씨는 단단한 분이셨습니다. 충분히 이겨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 못하신다 하더라도, 그리 하셔야 합니다.”

어우동의 시선이 개나리를 향하고 있었으나, 그것들은 어우동의 눈길을 잡지 못하였다. 어우동의 초점 없는 눈빛이 모두 흐트러져 있었다. 여전히 침울해하고 있는 듯하였다. 눈에서 발산하는 기운들이 방방 구석구석 흩어져 있었다. 운신하기조차 힘겨워 보였다. 갑상이 어우동을 깨웠다. 잃어버린 눈빛을 주워 담으려 애를 썼다. 표정엔 감정이 없었다. 아무런 생기도 없었다.

“아씨!”

어우동은 눈만을 껌뻑이며 말이 없었다. 그러다 살포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살이 빠진 볼따구니에 보조개만이 실룩거렸다.

“내가 아니라고 하질 않았습니까. 어찌하여 내게 억지 이름을 붙이려 하십니까. 내가 동희로 보이십니까. 아닙니다. 나는 동희가 아닙니다. 나는, 나는 어우동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도련님께 하대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사대부의 여식이 아닙니다. 아비가 없고, 어미도 없으니, 내가 어디서 왔는지 모를 일입니다. 도련님도 처음 뵙는 분입니다. 행색이 천하지 않으니, 함부로 해서는 아니 될 것이 아닙니까?...... 기억에서 나를 지우십시오. 기억에서 나를 버리십시오. 그리하면 편한 일이 아닙니까. 개나리가 곱습니다. 참 곱습니다.......”

“좋습니다. 그리하시어 편하다면 그리하십시오. 허나, 제 기억마저 버리라 하지는 마십시오. 봄볕이 따스하더이다. 새로 태어나시었으니, 연이와 함께 병아리마냥 볕도 쬐고 하십시오. 다가서지 않을 것입니다. 원하실 때까지 다가서지 않을 것입니다. 묵묵히 지키고만 있겠습니다. 저를 처음 뵙는다, 하시었습니다. 처음 뵈었으니, 이 몸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의미로 살아가는지, 천천히 다시 지켜보십시오. 지켜드릴 것입니다. 기약 없이 내뱉는 무모한 약조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켜드릴 것입니다. 이제, 제가 아씨를 지켜드릴 것입니다. 마음을 달라하지 않을 것입니다. 몸을 달라하지 않을 것입니다. 머물러 달라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저 또한 그냥 없는 사람인 듯, 그리 여기십시오.”

“싫습니다. 그리하지 마십시오. 나를 위한다면, 내 곁을 떠나세요. 그것이 도련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실 유일한 것입니다.”

“오라비라 생각하십시오. 그리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오라비라 여기세요. 힘들면 어깨를 내어드리겠습니다. 화가 나신다면, 분풀이를 하시게끔 제 몸이라도 내어놓겠습니다. 말벗이 필요하시다면 입도 열겠습니다. 심심타하시면 춤이라도 추겠습니다. 그러니 오라비라 여기세요.”

어우동이 그제야 갑상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한참을 그리 보고 있었다. 어우동이 시선을 떼며 입을 열었다. 그 소리엔 뼈가 스며있었다.

“사내들이란 참으로 역겹습니다. 오라비라 하였습니까? 오라비가 동무가 되고, 동무가 서방이 되겠지요. 차라리 속내를 내어놓고, 달라하세요. 이년, 몸뚱어리를 달라 하세요. 그리 돌아가면 위신이 서나 봅니다. 참으로 우습지가 않습니까? 돌아가세요.”

“믿음이 깨어져, 산산이 부셔진 걸 알고 있습니다. 믿으라 하지 않겠습니다. 맞습니다. 믿지 마십시오. 이젠, 그 누구도 믿지 마십시오. 오직, 오직 아씨만을 믿으세요. 제가, 아씨를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제가, 제가 그리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아씨를 사모하는 마음이 크니, 기다릴 것입니다. 영영 오지 않는다 하시더라도 기다릴 것입니다. 허나, 아씨께서 마음을 내어주지 않으신다면, 저 또한 내어놓지 않을 것입니다. 제 욕심을 내어놓지 않을 것입니다. 매일 밤, 살점을 도려내어서라도 참고 참을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멀리하려고 하시지 마십시오. 힘들면 기대세요. 그리 라도 하십시오.”

침묵이 흘렀다. 한쪽에선 연이가 속이 상했는지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자아냈다. 모두들 엇갈린 운명 속에 시름하고 있었다. 어우동은 갑상의 뜻을 무시하며, 다른 말을 꺼내었다.

“시화(詩畵)를 즐긴다 하였습니다. 내게 매화를 그려줄 수 있는지요. 그림을 그려주면, 내가 시를 넣겠습니다. 나로 인해, 귀한 걸음을 하였으니, 시화나 즐기고 가십시오. 그것밖에는 달리 해드릴 것이 없습니다. 지필묵을 가져오겠습니다.”

“아닙니다.”

갑상이 어우동을 말렸다. 갑상은 도포자락을 뒤로 젖히며 일어섰다. 단정함이 배인 풍채였다. 연이가 벌떡 일어서며 배웅할 준비를 하였다. 갑상이 앉아있는 어우동을 향해 인사를 고했다.

“당분간 시화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씨도 당분간은 그리하십시오. 또 들리겠습니다. 몸을 살피십시오. 연이는 되었다. 나오지 말거라.”

갑상이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섰다. 방문을 닫고, 마당에다 넋을 매달았다. 시화를 즐기며, 시간을 흘리며, 어우동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할 수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갑상은 싫었다. 어우동이 내뱉을 구구절절한 시(詩) 구절이 싫어서였다. 임과 같이 하지 못한 봄을 노래하며, 그 속에서 또 파묻혀 지낼 것이 분명하였다. 어우동의 마음엔 영영 봄이 들지 않을 듯하였다.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으로 바로 다가설 것이었다. 그것은 갑상도 마찬가지였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봄이 와도 봄이 아닌듯하였다. 봄을 느낄 수가 없으니, 만끽할 수가 없으니, 시리고 추울 수밖에 없었다. 매화향이 아니었던가. 그 옛날, 짙은 매화 향을 따라 어우동을 만나지 않았던가. 그런 매화가 피어있음에도 죽었다하니, 시들었다하니, 봄을 거부하니, 정녕 봄의 기운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어디에서 다시 찾는단 말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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