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딸아이가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죽었소. 죽음의 문턱까진 셋이 함께였는데
나만 세상으로 다시 떨어진거요. 딸아이의 손을 잡고 아내와 함께 있었던 그 순간이
지옥이었다해도 그것이 지옥인지 몰랐소. 나 혼자, 세상에 다시 떨어졌을 때가 더
지옥이었지. 아내는 그렇다치더라도, 이제 겨우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였소.
세상에 나가서 살아 보라고, 그 아일 세상 안으로 던져 놓았으면, 살 수 있을만큼,
그 만큼은 살게 했어야 했소. 제대로 꽃도 피우지 못하고, 뿌리 내린 채로 싹이 다
자라기도 전에 거두어 간 셈이요.
언젠가 태민의 말을 떠올렸다. 사연 없는 사람들이 있을까. 그 사연을 얘기하자고
한다면 그 나라의 역사보다도 더 깊을 것이다. 어차피 역사도 모든 사람들의 사연이
묶여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을 빼고 나면 역사가 무슨 소용인가. 그 나라의 역사란
결국 개개인의 역사인 것이다.
-시간이 오래 걸렸소. 아내와 딸아이를 대신해서 얻은 목숨 때문에 죄책감은
더할 수 없었지요. 그 날 아내가 운전대를 잡겠다고 하는 것을 우겨서 내가 잡았소.
내 고집에 아내와 딸이 그렇게 죽었던 거요. 견딜 수가 없었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살아지더란 말이지요. 죽을 용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소. 아니, 오히려 죽는다는
것이 무서웠소. 내가 죽어 아내와 딸아이 앞에 설 생각을 하니 끔찍했던 거요.
나는 나를 방치했소. 아무렇게나 굴러 다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 목숨이 다
하면 그땐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타의의 의한 것이 아닌, 자의의 의한 삶의 유기가 더 무거울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의 삶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 해가 지나도록
그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말이라곤 그저 일상에 관한 것들 뿐이었건만 느닷없이
어느 날 밤, 술 잔을 기울이며 고해성사라도 하듯 자신의 삶을 꺼내던 그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아마도 그때 그는 그녀의 딸인 은우로 인해서 마음의 짐이
더 컸으리라. 그때 눈치를 챘더라면 이런 상황은 막을 수 있었을까. 마지막
겨울 끝자락에, 그래서 오랫동안 볕이 세상에 들지 못해 눅눅하기만 했던
그 긴 시간을 넘어 세상에도 볕이 뜨기 시작할 그 시점에, 너무나도 고요한
일상의 한가로운 중간에서, 우리는 셋이 동시에 만났다. 딸아이의 앞에서
자신의 아내라고, 그녀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그 많은 여자들 중에, 그리고 그 나이의 여자들 속에,
왜 하필 딸아이였는지, 일만분의 일쯤의 일이 마치 로또 복권처럼 그녀 앞에
떡하니 벌어지고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딸 자식 같은 아이가, 오래 전에 죽었지만 살아 있다면 내 딸아이와 같을
그런 애가 잠깐 정신을 잃었소. 진작에 말을 했어야 했는데, 일이 이렇게 크게
벌어질 줄은 몰랐소. 이 나이에 이런 일로, 당신에게 도움을 청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던 일이오. 변명 같겠지만, 난 그 아일 내 딸처럼 생각했소.
그런 관심이 처음부터 잘못된 것 같소.
그 순간까지도 그 아이가, 그에게 그렇게 큰 고민이 되어 버린 그 여자가,
그를 사랑한다던 한 젊은 여자가, 은우일 거란 생각을 누가 감히 할 수 있었겠는가.
바들바들 몸을 떨던, 눈빛이 덜컹거리며 흔들리던, 사시나무처럼 파르르 속눈썹을
떨던 은우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 순간에 왜 하필 오래 전의 남편이
떠올랐을까. 등을 보이고 달아나던 은우의 뒷모습에서 오랫동안 남편의 잔재를
지울 수가 없었다.
-딸아이에요. 내......딸아이에요.
집으로 돌아와 한동안 입을 닫고 있던 숙희는 무겁게 말을 꺼냈다. 딸아이라고,
그녀의 엄마가 자신이라고 말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무서웠다.
말하는 순간에 모든 것들이 기정사실화 되는 문제였으니까. 분명히 한 겨울이
아니었음에도, 실내가 훈훈했음에도 이빨이 부딪히며 딱딱 소리를 내고 있었다.
온 몸에 한기가 느닷없이 찾아 온 기분이었다. 뼈 마디마디를 송곳으로 찔러대는
고통에 몸을 움츠렸다. 태민은 그 순간 미동도 하지 않고 어둠 속에 한참동안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그저 고개를 무릎위로 떨구고
있었다. 그가 무슨 말을 꺼낼지 두려워 귀를 틀어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또 아내와 딸아이를 잃어버린 셈이군.
태민이 목소리가 동공을 울렸다. 그것은 마치 어느 절에 있는 단종의 소리처럼
무겁고, 깊고, 경건해서 자신의 죄가 들추어진 기분에 휩싸였다. 이런 일들이
내게도 일어나는 구나 싶은 생각에, 이 무서운 일이 어째서 자신에게 벌어지는
지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전생에 내 죄가 큰가 보다. 내 죄가 어찌 그토록
크단 말인가. 도대체 알지도 못하는 내 전생의 죄가 무엇이었단 말인가.
태어나 한 남자를 만나서, 그 사랑도 받아 보지 못하고, 평생을 홀로 남겨져
세상의 모든 사람들 등만 쳐다 보다가, 이렇게 늙어 하나 밖에 없는
혈육 앞에서 고개조차 들지 못하게 된 그녀의 인생이 어찌하여 이렇듯
억울하게만 느껴지던가. 초년, 장년은 그렇다치더라도, 어찌하여 말년에까지
타고난 복이 이것이던가 말인가. 정녕 운명이, 팔자가 날 때부터 정해져
있었던가. 거짓말을 한 적도 없거니와, 다른 이를 해치는 일 없었던 것은
물론이었다. 죄가 있다면, 어미의 노릇을 제대로 못했고, 사랑을 구걸한
죄 밖에 없었다. 그 죄가 이렇듯 무겁고 깊은 것이었을까. 숙희는 두 달전의
일을 떠올리며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이미 취한 상태였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그 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은우의 동거인이었던
현서의 전화였다.
현관 문을 열었을 때 숙희는 균형을 잡지 못하고 현서 앞으로 풀석 쓰러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은우가 잠이 들던 하던 그 방에, 그 침대위에 그녀의 어머니가
누워 있다. 오랜 시간 동안 방황을 하던 그 길을 지나, 자신의 안식처로 다시
돌아 온 탕아처럼 그녀의 어머니는 잠이 들었다. 이마 위로 흘러 내린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올려 주다 문득 은우를 떠올렸다. 어쩐지 잠든 그녀의 모습이
은우와 많이 닮아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를 닮았다는 말보다 더 끔찍할 말이
어디 있겠냐는 듯 평생을 어머니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던 그녀. 무엇이
그토록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못하고, 자식을 품안에 제대로 품지 못하게
했을까. 현서는 무언가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잠들어 있다. 잠 든 그녀의 모습이 지치고, 피로해 보였다. 그녀에게
지금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현서는 그녀를 내려다 보다 일어났다.
조용히 문을 닫고 그가 사라지자 숙희는 그제야 감고 있던 눈을 가만히 뜬다.
지독하게도 어두운 방이다. 눈꼬리에 달린 눈물 방울이 타고 흘러 베개를
적셨다. 이 밤이, 이 시간이 무척이나 길 것 같았다.
한 사람만을 가슴에 품고 산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다 허물기를 여러 번 한다는 사실을 안다.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처럼 낭만적이거나, 환상적일 수 없다. 사랑은 어느 드라마의 대사처럼 근사하지도,
어느 역사의 한 페이지처럼 대단한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그 순간순간에만 그저
충실할 뿐이고, 사랑만큼 현실적인 것은 없다. 당장에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이 사랑이 아니면 안될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살 뿐이다. 사랑은 그렇게
생각만큼이나, 꿈꾸는 환상만큼이나 낭만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더욱
사랑에 집착했다. 어차피 십 년간의 사랑도 어느 한 순간이 오면, 끝없이 추락하고
종국에는 사멸되고, 증발해버린다. 깡그리 잊을 쯤에, 말하기 좋게 그저 아름다운
추억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사실 그 사랑이 없어도, 그 사랑이 사라져도 사는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엄살만 피운 꼴이 되었다. 그러나, 그 현실적인
사랑 안에서 자신이 바라던, 그토록 원하던 사랑의 모습으로 키워 나가길
바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이 과연 사랑 때문일까. 정말 사랑이란 것 말고는 또 다른
이유는 없을까. 사랑이기 전에 그들은 안주하고 싶은 것이고, 그래서 그 사랑이란
것이 그들에게 안전하고도, 평화로운 안식처가 되어 주길 먼저 바랄 뿐이었다.
고귀한 사랑은 지금, 현실 속에서 사라진 아주 신화같은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도 무슨 미련에, 무슨 착각에, 이토록 절절하게 매달리는가. 사랑이 아니라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집착은 아니었을까. 가지지 못해서, 오기가 생긴 것은
아닐까. 진정 사랑이라면, 내 사랑이 아니라 상대의 사랑을 신뢰하고 존중했어야
옳지 않았을까. 출고품 창고에서 재고 조사를 하다 말고 현서는 손을 놓고 앉아
있었다. 아침 상을 차려 놓고 잠을 깨우던 그녀를 보며 잠깐 은우를 떠올렸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손수 차려 준 밥상 앞에서 현서는 조건 없는 사랑이란 이런 것
이구나 싶었다. 혈육의 사랑. 내리 사랑이란 것은 바로 이것일 것이다.
그가, 그리고 은우가, 수많은 사람들이 하는 사랑은 결코 조건 없는 사랑이
아니었다. 분명 조건이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만큼 당신이 사랑해주길 원하는,
그래서 손해가 아닌, 상부상조의 사랑. 내가 준만큼 너도 그만큼만, 아니 그
이상이라면 더 좋았을만큼의 사랑을 달라는 식의. 과연 그는 은우에게 바라는 게
없었을까.
-은우, 있는 곳을 알아요. 알려 드릴까요?
아침 상 앞에서 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숙희는 아무런 말 없이 그저 쓸쓸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제 앞에선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드러 내놓는다고 경계하진 않아요 어머니.
현서의 말에 숙희의 손이 멈췄다. 그러다 짧게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 말했다.
-볼, 자신이 없다 지금은. 언제나 볼 면목은 없었지만, 지금은 더더욱 그래.
-부모 자식간에 면목이란 말이 어딨어요?
-그저 평범한 부모 자식간이 아니잖니. 누가 봐도, 웃기는 삼류 영화 속의
모호하고도, 유치한,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그런. 현서야......
그제야 고개를 들고 현서의 시선을 마주하는 숙희의 얼굴엔 거둘 수 없는,
너무나 오래 되어 퇴색한 듯한 그늘이 보였다.
-말씀하세요.
현서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냐, 지금은 아니다.
그리곤 기가 막히다는 듯 어이없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어느 누구에게 향한 것도
아닌, 허공에다 대고 마른 기침처럼 뱉어낸 웃음. 그 실소.
-너무나 기막힌 스토리라서, 영화 만들어도 되겠다 정말. 어디 아는 영화사 없니?
그리곤 내내 입을 닫고 있던 그녀. 더 이상 실소도, 찡그리지도 않는 표정 없는
얼굴로 출근 길을 배웅하던 그녀가 어쩐지 낯설지가 않았다. 전에도 늘 익숙했던,
그래서 이상하리만치 어색하지가 않던 상황. 남편의 출근 길을 배웅하는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동. 아니라면 다 큰 아들의 출근 길을 배웅하며 걱정하는
늙은 어머니의 행동.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은우가 가끔 그렇게 했었다.
베란다 앞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 보고 손을 흔들던 은우의 모습이 무성영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이, 장대리.
현서의 어깨를 툭 치자 그제야 상념에 빠진 현서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 사람이, 뭘 그렇게 넋 놓고 앉아 있어?
혼이 나간 사람처럼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중국 건, 말야. 지금 막 생산부에서 출고 됐다고. 포장 들어가야 할 거 아냐.
-아, 네.
-지금 여기서 뭐하냐? 재고 파악하게 생겼냐 지금? 선적일이 내일인데, 여기서
뭐하시냐고. 지금 부장은 미친 소처럼 길길이 뛰고 난린데. 그 양반 뒤로 넘어
가는 꼴 보고 싶냐? 열 번 잘하고, 한 번 못하면 그 길로 미운 털 박히는 거
알아 몰라? 요즘 왜 그래 도대체?
-지금 갑니다.
기운 없이 앞서 나가는데 현서의 팔을 낚아 챘다.
-어이, 장대리님. 연애사업이 제대로 안되시나본데, 중국 건만 해결하자구.
그거 해결되고 나서 상담 받아 줄테니, 조금만 참아주라. 어?
어깨를 툭 치며 그가 다시 앞서 나가자 현서는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혹시
은우의 새로운 남자가 그녀의 어머니와 상관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멈칫 들었다. 너무나 기막힌 스토리라서, 영화 만들어도 되겠다. 그녀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마지막 세 사람이 함께 마주쳤을 때, 그들은 더 이상 대면하지 못했다.
어느 누군가 한 사람이 먼저 나서길 바랬든지, 아니라면 이대로 그냥 묻혀
버리든지 둘 중의 하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들은 침묵했다.
은우가 그렇게 가버리던 날로부터 태민과 숙희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고, 그 침묵이 조심스러웠다. 손그늘을 만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투명하게도 맑은 날이었다. 볕을 받아 초록빛이 더 선명한 녹차밭을
둘러 보았다. 이 곳뿐만이 아니라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도 온통 녹차밭이었다.
그러니 들이 온통 빛깔 좋은 초록을 띠고 있었다. 기분까지 맑게 해주는
선명하고도 파릇파릇한, 싱그러운 빛. 여기서 가까운 보성에서 유명한
녹차밭은 전남 일대에 흔하게 널려 있었다. 사람들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6월이 지나면 잎이 크고, 질겨져서 상품가치로도, 차로도 쓸 수가 없다고 한다.
4월에 따는 잎이 상품가치로는 제일 좋은 거라며 농사꾼이 된 지 얼마되지
않은 경식의 말을 들으며 태민은 어설픈 손짓으로 잎을 따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생계가 달린 녹차밭이라고 생각하니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어,
행동은 더디기만 했다. 그런 태민을 힐끔 보며 슬밋 웃음을 짓던 경식이
지나는 말처럼 내뱉었다.
-너도 농사꾼 되기는 글렀다. 차라리 배를 타는 게 낫겠는데?
태어나기를 농사꾼의 자식으로 났지만, 살아 생전 농사를 지어 본 적이
없으며, 손에 흙을 묻혀 본 적 또한 없으니, 하늘이 내린다는 천직의 농사꾼이
될 수는 없었을 터였다. 고작 도시의 생활에 염증이 날 때마다 불혹의 나이가
지나면 흙냄새 폴폴 나는, 산이 있고, 들이 있는 곳에 살면서, 말 그대로
영화 속 같은 낭만 생활을 환상하곤 했다. 앞뜰에 텃밭을 가꾸고, 나무를
키우며,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속세를 떠난 자의 몸으로 자유롭게
살리라. 그러나 그런 환상은 고작하고, 자신의 인생이 이렇듯 생각지도 못했던
길을 터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바다로 흘러가진 못하더라도, 강으로
흘러가는 길을 찾진 못했더라도, 이 길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제일 염려스러운 것은, 은우도 아닌 당신이요. 은우는 아직 젊어요.
그러나 당신은 아니었소. 당신을 보고 있으면 오래 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았소.
예전에 당신이 어떻게 살아왔는 지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소. 다만, 내가
당신의 손을 잡았을 때는 그 손을 잡고 마지막까지 가겠다 다짐했었소.
당신을 위한다 했지만, 정작 당신이 내게 필요했던 거요. 두려웠던 거였소.
태민이 집을 나오기 전에 숙희에게 말했었다. 그때 숙희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었을까.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그녀가 그 손을 놓치 않겠다 했다면 그는 떠나지 않았을까?
그는 그때 그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나를 놓치 마시오. 나를,
이대로 보내지 마시오. 그가 그녀의 상처를, 외면 당했던 세월을, 허물어진
영혼을 안아주겠다 했지만, 정작 자신이 그녀에게서 그렇게 위로 받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은우는 죽은 딸아이의 대신이었고, 그녀는 그의 아내를
대신했었다. 사랑은 동정도, 연민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너무 믿었던 모양
이었다. 자만이 지나쳐, 자선이라도 할 작정처럼 마음을 한없이 내어준 것이
었는 지도 모른다. 모른 척 지나쳤어야 했다. 눈에 밟혀서 내내 마음이 쓰여도
그것을 그냥 외면해야 했던 것이었다. 숙희는 그의 빈 집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그가 떠나기 전 날, 그녀는 집을 나갔다. 갈 곳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였지만, 선뜻 그녀를 찾아 나설 용기가 없었다. 그가 사라지면
그 빈 집에 그녀가 다시 돌아 올 것인가. 태민은 그러길 바랬다. 그녀가
거기에 오랫동안 자신의 산처럼 우뚝 서 있길 바랬다. 숙희의 휴대폰 번호를
누르려다 그만두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여인들의
손이 빨라졌다. 태민은 상념에서 벗어나 다시 잎을 따기 시작했다.
포장을 하다 말고 서둘러 회사를 빠져 나와 집으로 달렸다. 숨이 목까지
차올라 심장이 터질 것처럼 불안했다. 현관문 앞에 서서 숨을 고르며 초인종을
누르려는 순간 문이 덜컥 열렸다.
-무슨, 일이야?
막 돌아가려던 참이었던 모양이었다. 이른 시간에 돌아온 현서를 보며 놀란 눈으로
묻자 숨을 거칠게 고르며 겨우 입을 열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늦을 뻔했네요.
-무슨 얘긴데 그래?
-은우 말입니다.
은우의 이름이 나오자 숙희는 금새 표정이 침울해졌다.
-지금 어디에 있는 지 알려 드릴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지금은 아니야. 다음에, 다음에 얘기하자 현서야.
현서를 비켜 나오는 그녀의 등을 돌아 보며 현서가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이 아니라면 소용없어요. 지금, 아니면 두 번 다시는 마주치지 못할지도
몰라요 어머니. 은우를 몰라요? 어머니가 먼저 찾아 가세요. 은우, 많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어머닐 기다렸어요 내내.
현서의 말에 숙희의 걸음이 멈췄다.
-무슨 일인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풀 사람은 어머니와 은우에요. 은우, 어머니 자식입니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혈육이에요. 놓치 마세요. 제발, 그 손 놓치 마세요 어머니.
멈칫하며 서 있던 숙희는 계단을 밟고 내려 섰다. 다리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버티며 그녀는 말없이 사라졌다. 현서는 사라진 쪽을
망연하게 보고 서 있었다. 현서는 그 순간에도 자신의 기대를 버리지 못했다.
어쩌면, 은우가 다시 돌아 올 지도 모른다는 기대. 현서는 그녀의 어머니를
앞세웠던 것이다. 그 실마리가 모두 풀린다면, 그렇다면 그녀는 반드시 현서
에게 다시 돌아 올 것이었다. 사랑은 그렇게 지독하게도, 잔인하게도 이기적인
것이라는 걸 현서는 이제야 알 게 된 것이다. 그 마음이 전부이진 않았을,
진정으로 그녀를 위하고, 그녀의 어머니를 위한 일이었던 마음도 있었다는
것은 자기 변명에 불과할 뿐이었다. 현서는 인정했다. 자신의 욕심도 거기에
있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