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개의
달콤 쌉싸름한 초콜렛
(10) 안개처럼 가슴으로 스며들다.
한 강과 신애는 새벽안개가 자욱한 강가에 차를 대 놓고 본네뜨에 올라가 앉아있었다. 아무리 따스한 날씨라 해도 새벽은 차갑기만 했다. 한 강은 미리 준비해 놓은 듯한 무릎담요를 신애에게 살짝 걸쳐 주었다. 둘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그 곳에서 둘은 하늘에 수놓인 별들을 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만 같은 별들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아름다워요!”
“그치? 예전에 기사에 났던 곳인데 아는 사람이 몇 명 없어. 조금 더 일찍 왔음 반딧불을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아직 반딧불도 있어요?”
“응. 여기에는 있다고 하더라고. 나도 보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둘은 여전히 사라져 가는 별빛들을 보고 있었다. 아스라이 다가오는 새벽 속에 강가는 온통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붉은 빛이 감도는 보랏빛 속에 신애가 한 강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제 아침이 오려나 봐요.”
“그래……. 아침이 오겠지. 밤이 오면 곧 새벽이 오고, 새벽이 오면 아침이 오는 것처럼 말이야.”
장황하게 설명하는 한 강을 신애가 쳐다보았다. 한 강의 시선은 하늘을 향해 있었다. 신애는 한 강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알 수 없었다. 이 남자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에게 이다지도 친절한지 묻고 싶었다. 그 물음은 판도라의 상자처럼 신애의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신애는 묻지 않았다. 열어버리면 안될 것 같은 그 물음에 혹시라도 한 강을 잃게 될까봐 그녀는 겁이 났다. 그 만큼 그녀의 삶에 한 강이 스며들고 있었다.
“안개처럼, 당신의 가슴에 스며들고 싶어.”
“네?”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는군. 전에도 말했지? 반복 재생에는 소질이 없다고 말이야.”
“.............”
“오늘 날씨가 좋을 것 같아. 그치? 고백하기에는 좋은 날 같지 않아? 사랑을 시작하기 좋은 날 말이야.”
“무슨........”
“이런 답답한 여자야. 지금 난 당신에게 고백하려 하고 있다고.”
한 강은 신애의 태도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들기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더니 이내 단념의 표정으로 차에서 훌쩍 내려 트렁크로 향했다. 신애는 뒤를 돌아 한 강의 움직임을 따라 그녀의 눈동자도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한 강이 그런 신애를 쳐다보더니 다시 신애에게 다가와 그녀의 눈을 한손으로 감기며 말했다.
“눈 뜨지 말라고요! 공주님!”
신애는 두근거렸다. 왠지 황홀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신애의 코끝으로 향긋한 꽃향기가 퍼졌다. 신애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눈을 뜨자, 하얀색 안개꽃이 그녀의 시선을 한 가득 잡고 있었다.
“뭐야? 눈뜨라는 소리도 안했는데 뜨면 어떻게 해!”
핀잔을 주면서도 한 강은 그리 나쁘지 않아보였다. 그는 한 가득 들고 있던 안개꽃을 신애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안개꽃 꽃말이 뭔 줄 알아? 간절한 기쁨이래. 당신이 내 간절한 기쁨이 되어줬으면 좋겠어. 오늘 말이야.”
“........”
“안개처럼 당신의 마음에 들어가고 싶어. 정식으로 말할게. 나 이제 당신 친구하기 싫어졌어. 이젠 내 마음에 안개처럼 스며 들어와 줘!”
한 강은 차 앞쪽에 서서 차 본네뜨에 앉아 있는 신애와 얼굴을 마주 했다. 진지한 얼굴이었다. 신애와 한 강 둘 밖에 없는 곳에서 한 강은 가장 로맨틱한 분위기 속에서 그렇게 그녀에게 고백하고 있었다. 신애는 한 강을 바라보았다. 믿음직한 사람. 이런 사람이라면 자신이 기댈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은 가끔 해 왔었다. 하지만 신애는 두려웠다. 한 강에게 점점 빠져 들어가는 자신을 느낄수록 그가 떠날까봐 겁이 났었다. 신애는 주저하고 있었다. 그때 한 강이 조심스레 신애의 한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두려워 마. 난 그 사람이랑 틀리니깐. 두려움에 날 밀어내지 마.”
신애는 한 강의 손을 힘주어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강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신애의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왜 울고 그래. 앞으로는 울지 마. 여자 울리는 놈이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으니깐!”
한 강이 조심스레 신애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한 강의 말에 신애가 몸을 숙여 한 강에게 살며시 안겼다. 두근두근 누구의 심장 박동수인지 모르는 소리가 신애의 귓가에 들렸다. 한 강은 미친 듯 뛰는 자신의 심장을 어떻게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선수라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자신은 여자에게 휘둘리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앞에서 자신의 가슴에 기대고 있는 이 여자에게 만큼은 사춘기 소년이 되어버린 것 같이 행동하고 있는 것이었다. 두근거리는 한 강의 심장소리를 듣던 신애가 조심히 자신의 손을 들어 그의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당신의 심장이 뛰어요.”
“..........”
“내 심장도 뛰고 있어요. 사랑이라는 것 때문에 이렇게 내 심장이 숨 막히게 고동친 게 언제인지…….고마워요. 나 같은 여자 사랑해 주어서…….”
“나야말로. 구제 불능 나 같은 남자에게 사랑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 줘서 고마워!”
한 강은 신애의 탐스러운 입술을 맛보고 싶어졌다. 빨갛게 상기된 그녀의 볼을 한 손 가득 감싸 안고 싶어졌다. 한 강은 최대한 조심스레 신애의 얼굴을 향해 다가갔다. 금방이라도 깨질 듯한 유리 같이 한 강은 신애에게 조심스러웠다. 한 강이 다가오자 신애가 눈을 살포시 감아주었다. 한 강의 입술과 신애의 입술이 조심스레 맞닿았다. 입술이 불에 덴 듯 가슴속에서 무언가 올라오는 느낌에 한 강은 자신이 이렇게 감성적이었는가? 싶었다. 천하의 한 강이 여자와의 키스에서 이런 황홀한 느낌을 갖다니……. 한 강은 자신이 다른 이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한 강은 신기했다. 이 작은 여자가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황홀하게 하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한 강은 신애를 꼭 안았다. 가슴 가득 만족감이 차 올라오고 있었다. 가슴에 안긴 작은 여자를 소유했다는 사실이 그를 세상 그 무엇도 부럽지 않은 남자로 만들고 있었다. 한 강과 신애는 한 동안 그렇게 서로의 향기에 휩싸인 채 서로를 느끼고 있었다. 해가 뜨고, 안개가 사라져 갈 때 즈음 신애가 한 강에게 물었다.
“해가 뜨면 사라지는 안개처럼, 당신의 가슴속에 사랑이 사라지면 어쩌나요?”
“아니, 안개가 사라지면 해가 뜨는 것처럼 내 가슴엔 더 큰사랑이 남을꺼야.”
사라져 가는 안개를 바라보며 불안 한 듯 묻는 신애의 손을 꼭 잡으며 한 강이 말했다. 신애는 그의 넓은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았다. 신애는 떠오르는 해를 보며 소망했다. 더 이상 사랑에 아프지 않기를, 더 이상 사랑을 의심하지 않기를 소망하고 또 소망 했다.
내려갈 때와는 다른 관계로 올라온다는 게 서로에게 묘한 흥분을 안겨 주고 있었다. 분명 서로 불편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신애는 어쩐지 그가 의식되어 자꾸만 시선을 밖으로 주었다. 사춘기 아이들처럼 서로 눈도 못 마주친 채,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뛰고 있었다.
“신기하지? 내려갈 때의 관계와 올라올 때의 관계가 틀리다는 게 말이야.”
“조금요.”
신애는 창문을 열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대답했다. 신애의 긴 머리카락이 한 강을 향해 몇 가닥 나풀거리며 다가왔다.
“머리 기른지 오래됐어?”
“그럼요. 우현.......”
신애가 습관적으로 우현의 이름을 읊조리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런 신애의 태도에 한 강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괜찮아. 10년 동안같이 지낸 사람인데 하루아침에 없어질 수는 없는 법이니깐. 말해도 돼.”
“우현이 긴 머리를 좋아했어요.”
“그럼 이참에 잘라보는건 어때?”
신애의 말에 한 강이 지나가는 말투로 제안하자, 신애가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매만졌다. 아쉽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자신도 긴 머리카락이 조금씩 싫증나던 참이었다. 신애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 강이 시내로 들어가 근처 미용실 앞에 차를 세웠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잖아. 나도 머리가 조금 길어져서 말이야.”
한 강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장난스레 매만지며 말했다. 신애는 한 강의 뒤를 따라 미용실로 들어갔다. 어떻게 하겠냐는 미용사의 말에 신애는 주저 없이 ‘단발로 잘라주세요’ 라고 말을 했다. 미용사가 아깝다는 듯 신애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물었다.
“실연 당하셨어요?”
“실연이라니요! 옆에 버젓이 남. 자. 친. 구가 있는데…….”
미용사의 말에 한 강이 옆에서 말도 안 된다는 듯 펄쩍 뛰었다. 그러면서 남자친구라는 단어에 잔뜩 힘을 주며 말하는 한 강을 보며 신애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신애는 조금씩 잘리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쉽사리 잘리는 머리카락처럼 우현과의 인연도 이렇게 쉽사리 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한 강이 곁에 있지만 신애는 마음 한 구석 자꾸만 아픈 상처처럼 떠오르는 우현의 기억이 아팠다. 아프고 아프고 못내 아팠다. 하지만 소리 내 아프다는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다만 그렇게 아픔이 사그라들기를 바랄 뿐이었다. 한 강과 신애가 나란히 머리를 손질하고 나오는데 시원한 바람이 그들을 향해 불었다. 신애의 짧아진 머리칼이 바람에 기분 좋게 날렸다.
“이제 금방 여름이 될 것 같아요.”
“벌써부터 이렇게 더우니, 올해는 봄이 유난히 짧은 것 같아.”
한 강이 신애의 말에 대꾸하며 말했다.
“여기서 집까지 가까운데 걸어갈까?”
“차는 어쩌고요.”
“그냥 놔두고 가지 뭐. 오늘 같은 날 걷는 것도 좋을 것 같잖아?”
한 강의 말대로 날씨는 초여름을 연상케 할 정도로 좋았다. 하늘에 구름 한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한 강이 먼저 몇 발자국 앞서 걸었다. 신애가 그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따라 걸었다. 기다랗게 늘어선 가로수 길은 온통 녹색 천지였다. 파랗게 난 길에는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어서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신애는 한 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걸었다. 우현과 걸을 때도 항상 그의 뒷모습만을 보던 그녀였지만, 우현과 한 강은 너무 달랐다. 우현의 등이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한 느낌이었다면, 한 강의 등은 그녀가 다가오길 재촉하는 느낌이었다. 신애는 조금 빠르게 걸음을 걸었다. 그에게 다가가는 자신의 마음처럼, 조금은 빠르게 걸어 한강 바로 한걸음 뒤에 바짝 붙어 걸었다. 그때 한 강이 뒤를 돌아보더니 자신의 바로 뒤에 있는 신애를 보고 빙긋 웃었다. 한 강의 따스한 손이 신애의 손에 감겨왔다. 둘은 손을 잡고 천천히 산책하듯 거리를 걸었다. 조금 더 그렇게 걷던 한 강이 고개를 돌려 신애를 보고 싱긋 웃었다. 참으로 다감한 웃음이었다. 한 강의 웃음에 신애도 따라 미소를 지었다. 새로 시작하는 그들의 관계처럼 둘은 나란히 길을 걸었다. 그렇게 둘은 서로의 가슴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신애를 집까지 바래다 준 한 강이 현관문 입구에서 신애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들어가!”
“안 들어 갈꺼예요?”
“응, 오늘은 안 들어갈래. 지금 이 기분을 조금 더 지속시키고 싶거든.”
한 강이 제법 개 구진 표정으로 자신의 심장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한 강의 말에 신애가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몇 개 올라갔을 때 한 강이 신애를 향해 소리쳤다.
“이봐, 박신애!”
“네?”
한 강의 부름에 신애가 올라가다 말고 한 강을 향해 뒤돌아 대답했다. 그러자 한 강은 ‘아니야.’ 라며 신애에게 얼른 가라고 손짓을 했다. 신애는 한 강의 싱거운 태도에 웃으며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2층 통로 계단 모퉁이를 돌때 즈음 한 강의 가는 뒷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신애가 창문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한 강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신애가 쳐다보는 것을 느낀 한 강이 위를 올려다보며 손을 흔들었다.
“왜 안가요?”
“그냥, 뭔지 모르게 아쉬워서.”
그의 말에 신애가 미소를 지었다. 오늘 하루만 그를 향해 미소 지은 게 몇 번인지 부쩍 웃음이 많이 늘어난 것을 느끼는 신애였다. 신애는 가만히 손을 들어 입 언저리에 머문 자신의 웃음을 매만졌다. 그리고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계단을 올라갔다. 누군가가 자신의 뒷모습을 끊임없이 바라보아 준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싶었다. 항상 바라보기만 했었다. 우현의 뒷모습을 끊임없이 바라만 본 자신이, 왜 우현은 부담스러웠을까?
[넌 그 지긋지긋하게 사랑이라고 외치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야! 집착이라고!]
악에 바쳐 신애를 향해 퍼부었던 우현의 고함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 했다. 신애는 그 목소리를 잊으려 고개를 저었다. 신애는 집으로 들어가 급하게 뒷 베란다 창문으로 향했다. 그제야 뒤를 보이고 가는 한 강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어쩜 당신도 나에게 사랑이 아님 집착이라고 외칠 날이 올까요? 제발 그런 날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신애는 한 강의 뒷모습을 보며 그렇게 기도했다. 우현은 멀리서 한 강과 신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소연과 헤어진 후 우현의 발걸음은 자꾸만 신애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제도, 그제도 우현은 신애 몰래 신애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우현은 신애와 한 강의 모습에 질투를 느꼈다. 자신밖에는 모르는 여자라고 생각했던 것이 오산이었을까? 우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마음 한 구석 믿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자신이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도록 신애가 기다릴 것을 말이다. 하지만, 신애 곁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우현을 미치도록 만들고 있었다. 헤어지자고 했던 것은 너라고, 이제 와서 이러는 것 우습지 않냐고 우현 스스로 자신을 채찍질 해봐도 신애를 향해 돌아가는 눈은 되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옛 비디오테이프처럼 우현의 머릿속에는 신애와의 기억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우현 자신에게 지극히 헌신적이었던, 신애의 모습이 떠올랐다. 우현은 담배연기를 머금으며 자조적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래, 신애 같은 애는 없을 거야. 신애처럼 날 사랑 할 여자는 없을 거야.”
우현은 신애를 다시 잡고 싶었다. 다시 잡고 싶다는 염원은 다시 잡을 수 있다는 확신어린 자신감으로 올라 차고 있었다. 우현은 담배의 끝이 다 탈 때야 비로소 결심했다. 어긋난 퍼즐을 다시 맞추면 된다. 우현은 자신과 어긋난 신애를 다시 끌어 맞추자 결심했다. 우현은 자신 있었다. 얼마 만나지 않은 저 남자와 자신은 게임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10년이라면 강산이 변하고도 남을 시간 아니던가? 우현 자신감 찬 표정으로 신애의 집을 올려다보며 걸음을 옮겼다.
-------------------------------------------------------------------
좋은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