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서로 같은 꿈을 꾼다.
마음이 정해지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날 이후 서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 강과 신애는 늘 함께였다. 같이 돌아다니며, 둘이 부딪힐 머그잔을 사는 재미에 신애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를 정도였다.
“결혼식 준비가 이렇게 행복한 줄 진작 알았다면, 아마 결혼 12번도 더 하려 들었을 거야.”
윤정과 신애가 나란히 생과일 전문점에 앉아 키위주스를 마시며 말했다. 신애의 말에 윤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좋아?”
“응. 너무 좋아.”
“계집애. 자고 나니깐 더 애틋해 지는 게 아니고?”
신애의 첫날밤 이야기를 들은 윤정이 개 구진 표정으로 신애를 놀려댔다. 윤정의 말에 신애는 미소만 지을 뿐 반박하지 않았다.
“이 계집애. 반박도 안하네?”
“사실인걸. 정말 그런 것 같아. 참 오묘하지? 하고 나니깐 조그마한 잔재들마저 날아간 기분이야.”
“뭐야?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그나저나 그 여자 일은 어떻게 된 거야?”
“잘 해결 됐어.”
잘 해결 되었다는 그녀의 말에 윤정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결혼식 준비는 잘 되어가는 거야?”
윤정의 물음에 신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준비할 만 한 것도 없어. 가전제품은 다 강이 씨가 쓰던 게 있으니깐. 그냥 집만 구해서 들어가고, 그릇이나 침대 이런 것만 새로 사고 있어.”
“행복하니?”
윤정의 물음에 신애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신애의 행동에 윤정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됐다! 행복하면 된 거지!”
윤정은 신애에게 진심어린 축하를 보냈다.
드디어 예식 당일 하얀색 꽃과 핑크색 꽃들로 꾸며진 야외 예식 홀에서 식은 치러졌다. 하늘에 계신 부모님들도 보시게 야외결혼식을 하자는 한 강의 제의에 신애가 흔쾌히 동의했다. 예식 당일 야외 결혼식장은 사람들로 붐볐다. 신애는 떨리는 마음으로 신부 대기실로 마련해 놓은 천막 안에 있었다. 떨려왔다. 한 강과 첫날밤을 가졌던 그 날처럼 발끝부터 저릿하게 떨려왔다. 잔뜩 굳은 신애의 표정을 본 윤정이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떨지 마! 오늘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네가 주인공인 날이잖아?”
윤정의 웃음에 신애도 따라 웃었다. 조금만 있으면 식이 시작될 테고 그러면 자신은 한 남자의 여자가 되고, 한 가정의 부인이 되고, 또 다른 가족이 생기게 된다고 생각하니 온 몸이 떨려 죽을 것만 같았다. 그때, 천막 안으로 연두색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들어올린 소연이 들어왔다.
“언니, 축하해요!”
소연의 말에 신애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참, 너희도 곧 결혼 한다고 했지?”
신애의 말에 소연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끄덕였다. 그러면서 배 언저리로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이 녀석 때문에 그렇게 됐어요......”
수줍어하며 말하는 소연의 모습 어디에서도 예전 그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신애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성격 좋은 윤정이 소연의 근처로 가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정말 축하해요! 겹경사네, 겹경사!”
“언니! 결혼 축하해요!”
진아가 방긋 웃으며 신부대기실로 들어왔다.
“고마워! 혼자 온건 아니지?”
며칠 전 또 남자친구와 싸운 일로 신애에게 고민을 털어 놓은 진아였다. 신애의 말에 진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남자친구랑 같이 왔어요. 저 왠수같은 녀석은 아마 평생 제 뒤를 쫓아다닐 것 같다니깐 요!”
진아가 밖에 남자친구가 서 있는지 잔뜩 숨죽인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신부대기실은 일순간 웃음바다가 되어버렸다. 이윽고 신부 대기하라는 말이 방송을 타고 흐르자, 또다시 긴장감이 밀려왔다. 신애가 일어서자 옆에 있던 윤정이 부축하며 그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구름 한점 없는 청명한 가을 하늘 날씨였다. 늦가을이라서 그런지 공기에도 가을 낙엽의 향기가 묻어나왔다. 신애는 가슴이 파진 칵테일 드레스에 하얀색 장갑을 끼고 면사포 대신 작은 화관을 끼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한 강은 그 자리에서 그녀를 껴 앉아보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았다. 한 강이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자, 사회를 보던 채민석이 한 마디 했다.
“신랑이 벌써부터 신부에게 빠져 입을 못 다물고 있습니다!”
채민석의 말에 조용하던 장내가 일순 웃음으로 변했다. 한 강이 그런 채민석을 향해 주먹을 살짝 들어보였다.
“신부 입장.”
이라는 말과 함께 신애가 한 강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한 강은 평생 잊지 못할 이 광경을 가슴에 새기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신애를 바라보았다. 한 강이 몇 발자국 앞서 민철의 손에서 신애를 건네받았다. 민철이 신애의 손을 건네주며 작은 목소리로 한 강에게 속삭였다.
“너 이 자식. 우리 신애 눈에 눈물 빼면 내가 가만히 안 있을 테니 그런 줄 알아!”
민철의 반 협박성 멘트에 한 강이 민철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며 ‘걱정하지 마십시오. 장인어른.’이라고 말했다. 한 강이 조심스레 떨리는 신애의 손을 잡았다. 신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떨려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런 그녀의 손을 한 강이 힘주어 잡아주었다. 그의 손만 잡고 있으면 세상 두려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강과 신애는 그렇게 서로에게 또 다른 인연으로 엮기고 있었다. 식이 끝나고 신애의 부케를 받기 위해 소연이 신애의 뒤편에 서 있었다.
“자, 신부님 하나, 둘, 셋 하면 던지세요! 자 하나, 둘, 셋!”
사진 기자의 요구에 따라 셋에 신애가 소연을 향해 부케를 던졌다. 근데 부케가 소연이 아닌 진아 쪽으로 갔다.
“어?”
“어?”
“어?”
신애와 소연, 그리고 진아 세 사람의 짧은 외침이 허공을 맴돌아 신애의 작은 부케를 진아가 받아들었다. 그때, 한 강 바로 뒤편에 서있던 채민석이 나타나 진아가 잡고 있던 부케를 빼앗아 소연에게 건네주었다.
“어? 이러는 법이 어디 있어요?”
부케를 빼앗긴 진아가 투덜대자, 채민석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께요! 저희가 먼저 결혼하잖아요!”
사랑에 빠지면 사람이 변한다더니, 신애는 채민석이 딱 그 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이 끝나자, 우현이 하객들과 인사를 나누는 한 강과 신애의 곁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보는 것이어서 그런지 우현이 낯설어 보였다.
“오늘 참 예쁘더라. 결혼 축하해. 한 강씨 결혼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한 강은 우현이 내민 손을 기분 좋게 맞잡으며 응수했다.
“잘 지내지?”
“그럼. 나 취직했어. 마음도 잡았다.”
“잘됐다. 잘됐어.”
“행복하게 잘 살아. 알았지?”
우현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신애에게 말했다. 그의 말에 신애가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던 한 강이 웃으며 신애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어? 이것은 뭐하는 시추에이션? 다음부터 이런 분위기가 발생하면 용서하지 않겠어!”
한 강이 신애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장난 가득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셋은 웃고 있었지만, 한 강은 우현의 마음을, 우현은 신애의 마음을, 신애는 한 강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서로 꼬인 사랑으로 맺은 인연이었지만, 서로에게는 무언가 보이지 않는 끈끈한 끈으로 매어진 기분이었다. 지친 결혼식이 끝나고 한 강과 신애는 환상의 섬 몰디브로 향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몰디브는 신애의 오랜 희망이었다. 몰디브를 위해 신애는 남몰래 부어놓은 적금이 있을 정도였다. 다행히 기획 취재를 맞은 한 강으로 인해 신혼여행도 공짜로 가게 되었다.
“경제 기사 담당이라더니, 여행 취재도 해요?”
비행기 안에서 신애가 묻자, 한 강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이제 입도 하나 더 늘었는데 수입을 늘리려면 이것저것 써야 하지 않겠어?”
한 강의 대답에 신애가 살며시 미소 지으며 그의 넓은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힘이 되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세삼 신기했다. 둘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호텔로 향했다. 호텔방에 도착하자 한 강이 신애를 향해 잘 포장된 상자를 건넸다.
“뭐예요?”
“풀러봐.”
한 강의 말에 신애가 조심스레 선물 상자를 무릎에 올려놓고 풀렀다. 선물 상자 안에는 제각각 모양의 블랙 초콜렛 30개가 들어있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신애가 한 강을 쳐다보다 한 강이 신애의 곁에 앉아 말했다.
“블랙 초콜렛 30개야! 왜 블랙 초콜렛 30개를 주는 줄 알아? 들어봐. 초콜렛에 단맛도 있고, 쓴 맛도 있지? 당신이 살아왔던 30년이란 시간동안 겪은 단맛과 쓴맛을 내게 주는 거야. 이제부터 당신이 살아온 시간들에 있었던 온갖 세상의 풍파들이 여기 이 블랙 초콜렛 안에 들어있어! 이제부터 내가 이걸 먹을 거야.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라고! 당신 것도 여기 있어. 이거 보이지?”
한 강이 또 다른 상자 포장 앞에 포스트잇으로 ‘한 강’ 이라고 큼지막하게 써 붙여 놓은 것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건 내꺼야. 자 이제부터 당신의 세월은 내가 먹고, 내 세월은 당신이 먹는 거야.”
“무슨 의식 같아요!”
“그럼 중요한 의식이야. 이걸 끝으로 당신은 다시 태어나는 거야. 이제, 당신의 남은 세월의 초콜렛에는 이 한 강으로 인한 단맛과 쓴맛이 남은 것을 내가 선물할 테니깐”
한 강이 초콜렛 하나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이제 내가 이걸 다 먹으면 당신은 다시 태어나는 거야. 그동안 사랑 때문에, 세상 때문에 힘든 일 하나도 모르는 씩씩한 박신애로 말이야.”
“내가 이걸 다 먹으면 당신도 다시 태어나나요?”
신애가 한 강이라서 써 있던 포장을 풀러 초콜렛 하나를 입에 집어넣으며 물었다.
“그럼. 앞으로 10년 주기로 내가 당신에게 초콜렛을 선물할 거야. 그러면서 당신에게 점점 더 잘해 나갈 거야. 다정했던 우리 부모님처럼, 우리도 다정하게 지내자. 잘 부탁한다. 박신애!”
한 강이 손을 내밀어 신애를 향해 악수를 청했다. 그의 손을 맞잡으며 신애는 활짝 웃었다. 30개의 달콤 쌉싸름한 초콜렛을 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