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이 시간까지 어디서 뭘하고 있는거야?"
무심한 표정으로 tv 채널을 바꾸고 있는 남자 뒤로 긴 생머리에 큰 키의 여자가 서성대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린이 너는 아진이가 걱정되지도 않아? 너한테도 연락 없었어?"
"올 때 되면 오겠지. 아진이가 애도 아닌데 뭘 그렇게 걱정이야?"
"이런 적이 한번도 없으니까 그렇지. 짐작가는데 없어?"
여자는 결국 남자 옆의 쇼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아마도 그곳에 갔겠지. 오늘 그날이잖아. 이준영 기일."
"..............................돌아오긴 하겠지?"
".......................아마도."
그 말을 끝으로 꽤 긴 침묵이 흐른 후에 키버튼이 눌리는 소리와 함께 아직 앳된 모습의 한 여자가 집안으로 들어섰다.
"윤아진!!!! 너 진짜!!!!"
안절부절 하지 못하던 여자는 용수철이 튀듯 일어나 뛰어나갔고, 무심한 듯 화면을 보던 남자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약하게 떨리던 손에 들고 있던 리모콘을 내려놓았다.
"헤헤.. 희수언니 미안해. 걱정했죠?"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거야? 밥은 먹었어? 괜찮아?"
아진은 손등과 얼굴에 나뭇가지에 긁힌 붉은 생채기가 나있었다. 게다가 까만 동자가 유달리 큰 눈이 온통 새빨갛게 충혈되어 보기 안스러울 정도였다.
"괜찮아, 언니. 나 들어가 씻을게."
아진이가 욕실에 들어가고 희수는 린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벌써 3년이란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한 무수한 그녀의 상처들.
"어 안잤어? 언니는?"
"슈퍼에."
냉장고에서 캔맥주을 꺼내 제법 익숙하게 따며 아진은 린의 곁에 앉았다. 물기 촉촉한 머리를 하고 얇은 원피스 잠옷 차림인 그녀를 보며 린은 한마디 툭 내뱉었다.
"머리 말리고 와. 감기 걸리겠다."
무뚝뚝한 린의 말에 아진은 살짝 웃음을 지었다.
"나 오늘 어디 다녀온 줄 알어?"
".........................................."
린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 아진은 맥주캔을 살짝 물며 말을 이었다.
"준영오빠가 산 꼭대기에 꼭꼭 숨어있더라. 내가 추운 거 싫어하고, 길도 잘 못찾는 거 알면서.. 산에 올라가는 거 정말 싫어하는 거 알면서 꽁꽁 숨어있는 거 있지."
"............................................"
린의 눈빛이 아진에게로 향했다.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그녀는 3년 전과 마찬가지로 너무도 작고 부서질 듯 약해보여서 손을 내밀 수 조차 없었다.
"그래도 오빠가 있는 곳에서 바다가 보여서 안심이었어. 오빠 외롭지 않겠지? 그렇겠지, 린아?"
3년 전 아진이 사랑했던 남자가 죽었다. 아버지가 여러번 성형을 강요해서 이젠 희미하지만, 아진이 모질게도 그었던 손목의 흉터는 아직 남아있다.
"아진아..... 괴로우면 울어. 울고 풀어버리면 되잖아."
언제 들어왔는지 희수가 아진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아진은 그런 희수에게 웃으며 말했다.
"언니 나 이제 안슬퍼. 린이랑 대학도 가게됬고, 이렇게 언니랑도 같이 사는데 뭐가 슬퍼. 씩씩하게 살꺼야."
"그래, 윤아진. 장하다!!! 오늘은 언니랑 한번 마셔볼까?"
2시간 후, 린은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달래며 170의 장신인 희수를 부축했다. 소주 반병이면 뻗어버리는 아진과 그녀를 기다리는 내내 홀짝대던 희수와 함께 양주 2병을 마셨으니 비틀댈 만했다.
"윤아진, 일어나봐. 들어가서 자자."
힘겹게 희수를 방에 데려다준 린은 돌아와 쇼파에 누워있는 아진을 일으켜세웠다.
"더 마실꺼야. 더 먹을꺼라구."
"무슨 말도 안되는 주정을 부리고 그래."
린은 아진을 안아올리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희수를 부축하고 난 다음이라 그런지 아진은 너무 작고 가벼워서 더 화가 났다. 밝고 아름다웠던 그녀였는데....
아진의 방문을 열자 어지럽게 흩어진 옷가지들이 보였다. 보지도 못할 그를 위해 밤잠을 설치며 무슨 옷을 입을까 고민했겠지.
"린아.... 가지마... 조금만 조금만 더 옆에 있어줘."
침대에 눕히자 아진은 눈도 뜨지 못한 채 린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 린은 주춤하며 아진의 옆에 앉았다.
"...........흑..... 오빠........"
아진은 어느새 흐느끼고 있었다. 3년 전 사고의 현장에 린도 있었다. 아진이 무엇을 떠올리고 있을지, 그 장면을 린도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린..........왜 그랬어........왜.......왜......."
아진의 원망어린 목소리에 린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갈라진 목소리로 화를 내고 있었다. 아진의 어꺠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왜 그게 내 탓이야! 왜... 아진이 네가, 누나가 도망간거 잖아."
".........네가 오지 않았다면.....그렇게 나를 데려가려 하지 않았다면...."
큰 눈에 원망과 눈물을 담은 아진이 린을 노려보았다. 린은 자신에게 원망의 말을 퍼붓는 아진을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진의 놀란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외면하며 린의 입술이 아진의 입술을 살짝 훔쳤다. 그녀의 입술의 촉촉함과 열기가 매말랐던 자신의 입술을 적셨다. 린은 미친 짓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조금 더 맛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린의 이성을 강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아진의 아랫입술과 윗입술에 차례로 입을 맞춘 린은, 살짝 입술을 깨물며 혀를 밀어넣자 그녀의 약한 비명이 혀끝에 닿았지만 린의 입술에 부딪혀 터져나오지는 못했다.
점점 깊어지는 키스에 아진은 팔을 뻗어 버둥댔지만 린의 강한 팔 사이에 갇혀 꼼짝할 수 없이 힘만 더 빠졌다. 혀와 혀가 뒤엉키며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아찔한 키스가 이어졌다.
"그만해. 그만!! 제발..."
잠시 떨어진 린에게 아진은 소리쳤지만 린의 입술에 이내 갇혀서 크게 터져나가지는 못했다. 어느새 린의 손은 아진의 몸을 더듬고 있었고 그녀를 이대로 가지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휩싸여있었다.
"제발..... 안돼. 우린 형제잖아. 너는 내 동생이잖아, 제발."
세게 머리를 얻어맞은 듯 주춤하던 린을 밀어내고 아진은 구석으로 물러나 앉았다.
"너 미쳤어?"
아진은 이불로 몸을 가리며 소리쳤다. 망연자실 앉아있던 린은 크게 한숨을 쉬며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나는 너에게 언제나 동생일 뿐이겠지. 네가 사랑했던 남자를 죽여버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 없는거겠지."
"린아..."
"그깟 종이 한장으로 묶여진 가족, 그게 뭔데? 피가 섞이지도 않았으면서!! 아버지한테 그렇게 평생 당하고 살았으면서!!!! 그게 가족이야?"
"............................"
"............난...........난.................널 누나로 생각하지 않아. 최소한 3년 전부터는...........너를 더이상 누나로 생각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구. 그게 내 잘못이야?"
린은 방문을 거칠게 열고 나가버렸다. 아진은 어두운 방안 구석에서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3년 전... C도시.... 준영오빠... 아버지... 그리고 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