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의 진지한 말투에 할 말을 잃은 나는 그저 이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자요. 더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엉겁결에 일어난 나를 본 이현은 살짝 웃었다.
-그런 맹한 표정 짓지마요. 무지 귀엽단 말이야.
그때였다. 이현의 서늘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내 입술에 닿은 것은. 어린아이 장난처럼 가볍고 산뜻한 입맞춤이었다. 나는 잠깐 동안 정신이 아득해졌다. 끝없이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그래, 이것은 추락이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지만,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그리 나쁘진 않았다. 아니, 좋았다. 그 가벼움이. 그 산뜻함이.
나는 고개를 흔들었고 이현은 나를 가볍에 안았다. 아주 잠깐 동안 이현의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빠르게 뛰고 있는 그의 심장소리는 내가 잊고 있었던 무언가를 다시 불러 일으키는 것 같았다. 추억, 혹은 그리움 같은 것을.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이현은 작은 방으로 사라지고 난 뒤였다.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삐비비빅.
문자 소리가 울렸다. 나는 황급히 내 방으로 뛰어갔다. 석주였다. 문 밖에 무언가 놓아두었다고 나와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주춤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 있는 것은 죽 전문점의 쇼핑백이었다. 내일 아침에 먹어야지. 나는 쇼핑백을 그대로 냉장고에 넣어두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잠이 쏟아졌다.
일어난 나는 상쾌한 기분으로 먼저 샤워를 했다.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갔는데, 웬걸, 이현이 이미 일어나 있었다.
-쌤, 안녕!
이현은 장난스러운 말투로, 활짝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집에서 옷까지 챙겨 왔는 지 어제와는 다른 옷차림이었다. 마치 제집처럼 편하게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폼이 재밌었다.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부엌으로 가서 서제 석주가 두고 간 죽을 냄비에 덜고 끓이기 시작했다. 이현의 시선이 뒤통수가 따갑게 느껴졌다.
-혼자 먹을라구?
이현이 장난스럽게 말하며 부엌으로 들어섰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릇에 죽을 조금 덜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반찬 몇 가지를 내어 간단하게 상을 차리고 먹기 시작했다.
-어제 내가 한 밥도 있고, 김치찌개도 있는데. 왜 그걸 먹어요?
이현의 목소리가 어두웠다.
-그거.. 그 남자가 갖다 준거죠?
-니가 상관할 바 아냐.
난 내 목소리가 너무 차갑다고 느꼈다. 하지만, 내가 차가워지지 않으면 이현과 나는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라는 내 판단이 옳다고 느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남자 좋아요?
이현은 침울하게 말하며 내 앞에 앉았다. 나는 이현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적어도 너보다는 나아.. 무슨 짓이야?
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이현이 내 밥그릇을 가져다 그대로 싱크대에 버려버린 것이다. 녀석은 가스렌지 위에 있는 죽 냄비도 싱크대로 가져다 부어버렸다.
-야!
-내가 해 준 거 먹어요! 맛있댔잖아!
-왜 그러니, 너! 진짜!
나는 이현에게 다가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이현도 지지않고 받아쳤다.
-내가 뭘 잘못했어요? 갑자기 왜 이래?
-니가 뭘 잘못했느냐구?
난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 그래. 이현이 딱히 잘못한 것도 없었다. 어제 키스와 포옹이 잘못된 것이었다면, 그때 화를 냈어야 하는 것이었고. 이현이 내 집을 마치 자신의 집인양 들락거리는 것도 이미 양해한 문제였다. 나는 할말이 없어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자 이현이 말했다.
-나한테 왜 이러는데?
이현이 나에게 한 발짝 다가섰고 나는 왠지 두려움에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이현의 얼굴이 구겨졌다.
-내가 무서워?
-그.. 그건..
나는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걸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인 나는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갔으면 하고 속으로 빌었다. 그러나 내 바램과는 다르게 이현이 내 손목을 잡고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나는 손을 빼기 위해 노력했지만, 헛수고였다.
-뭐야, 너! 이거 안놔?
그러나 이현은 거침없이 내 방문을 열고는 나를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 힘에 나는 방 바닥에 넘어져버렸다. 넘어져서 아픈 것보다 갑자기 변한 이현의 행동에 더 질린 나는 무기력하게 이현을 올려다봤다.
순간, 이현의 눈동자에 스친 슬픔과 괴로움, 분노,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이현의 눈동자는 단단하게 굳어져버렸다.
-왜 이래, 너. 진짜. 왜 이래?
나는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나 이현은 나를 그대로 안아 침대 위에 올려 놓았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 나는 몸서리치게 잘 알고 있었다.
-미쳤어!
나는 이현의 가슴을 힘껏 떠밀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이현의 입술이 내 목덜미에 닿았다. 뜨겁다. 그 순간에도 나는 그의 입술이 무척 뜨겁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 미쳤어요.
그리고 이현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산뜻하고, 가벼운 키스가 아니었다. 표현하기도 힘든, 열정적인 키스였다.
-그러니까 당신 좋아하지. 바보같이.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현의 얼굴을 손으로 밀어내며. 그렇지만, 내 노력이 그리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현의 손이 내 허리띠 버클에 닿는 순간, 나는 손을 더듬어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놓은 스탠드를 잡았다. 그리고 힘껏 이현의 머리위로 내리쳤다. 퍽, 하는 소리가 났고. 나는 이현이 다치면 어떡하나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러나 이현은 아픈 내색도 하지 않고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미안해요. 원래 이런 놈 아닌데.
갑자기 순해진 녀석은 내 옆에 누웠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숨만 내 쉬었다. 녀석만을 탓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나 역시도 이현에게 끌리고 있는 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이현은 담배를 피우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밖으로 나갔다. 곧 육중한 아파트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깜짝 놀라 밖으로 달려나갔다. 이현의 신발이 없었다. 이현의 가방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전부 피워버렸다. 그렇게, 녀석과 나의 짧은 동거는 끝이 났다.
할룽~ 오늘로 1편/ 갈팡질팡 그녀의 이야기는 끝이났네요~
2편/ 엉켜버린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많은 성원 바랄게요~
좋은 하루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