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가?
하람이 가방을 챙기는 이현에게 물었다. 이현은 무심하게 말했다.
-국어 보충 받으러.
-국어?
하람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현이 국어를 못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갑자기 보충이라니.. 이상하다.
-누구한테?
-한여운 선생님.
-그 선생님은 우리 가르치지도 않잖아..
하람의 말에 이현은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갔다.
404호. 4층 강의실 중에서 가장 작은 강의실이었다. 이현은 불을 켜고 중간 쯤에 앉아 국어 책을 폈다. 잠시 뒤, 종이 치고 여운이 들어왔다. 여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현은 웃음이 나왔다. 피곤함과 당혹감, 불편함등이 얼룩진 얼굴에 그래도 선생님이라는 의무감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디 해줘?
-아무데나요.
이현의 말에 여운이 눈살을 찌뿌렸다.
-야, 넌 보강을 한다고 했으면, 어디어디를 해주세요. 하고 말을 해야하는 거 아냐? 기본이 안돼 있어, 이 자식이.
여운의 말투에 이현은 또 웃음이 나왔다. 역시, 기는 안 죽으시는 군.
-뭘 웃어, 책이나 펴.
여운은 여운 대로 이현이 웃어주니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솔직히 녀석이 인상이라도 쓰고 있으면 어떡하나, 조금 걱정을 하긴 했었다. 그런데 먼저 웃어주다니. 여운은 조금 마음이 놓였다.
-책이나 봐. 어디서부터 해줄까?
여운은 아무렇지도 앉게 이현의 책을 뒤적였다. 그렇지만, 사실은 가슴이 떨렸다. 여운은 분필로 칠판에 무언가를 쓰려다 갑자기 생각이 안나 고개를 갸웃했다. 뒤에서 이현이 웃는 것 같아 긴장된 여운은 분필을 칠판에 댔고, 순간 뚝, 하는 소리와 함께 분필이 부러져 산산조각이 났다.
-Good! 힘은 넘치신다니까.
이현의 말에 여운은 뒤를 돌아봤다. 그는 싱긋 웃으며 볼펜을 돌리고 있었다. 여운은 갑자기 이현의 머리를 매로 한 대 때렸다.
-어디서 볼펜이나 돌리고 그래?
별로 아프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여운을 올려다보던 이현은 갑자기 진지한 자세로 책을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뭐냐?
-공부해야죠.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갈거에요.
-니 성적으로 가당키나 해?
여운은 빈정거리며 이현의 국어책을 뒤적였다. 역시 정리는 하나도 안되어 있었고 영어 필기체로 뭔가 낙서만 되어있었다.
-그런데 넌 한국에서 3년이나 살았다면서, 국어를 그렇게 못해?
그러자 이현이 책을 덮으며 얼굴을 찌뿌렸다.
-말하는 거하고 국어하고는 달라요. 문법이랑.. 어쨌든, 그런거 너무 어려워요.
-너 학교 국어 시간에는 뭐하냐?
-그냥 자요. 영어 시간에는, 그래도 읽는 것도 시켜주고 그러는 데..
-그럼 수학은?
여운은 아예 이현 앞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았다. 계속 되는 수업에 다리도 많이 아팠다.
-수학은 국어가 없잖아요. 문제만 풀면 되잖아.
-아이고.. 큰일이다.
여운은 정말 큰일이라는 표정으로 이현의 책을 다시 보려고 했다. 그러자 이현이 책을 책상 밑으로 감추었다.
-너 뭐야?
-보지마요! 왜 볼려구 그래.
이현은 정말 보여주기 싫다는 표정으로 책을 끝까지 감추려고 했고 여운은 꼭 봐야겠다는 표정으로 책을 뺐기 위해 노력했다. 한참동안 실랑이를 하는 데, 갑자기 강의실 문이 열렸다.
-너 뭐하는 거야, 선생님께!‘
뒤를 돌아본 여운은 순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석주였다. 이현은 석주를 보고 얼굴이 굳어져 그 자리에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뭐하는 거냐구!
석주는 강의실 안으로 성큼 들어와 이현의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았다. 퍽, 하는 소리가 울렸다. 여운은 눈살을 찌뿌렸다.
-왜 때려요?
이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석주를 노려봤다. 이번에는 석주도, 여운도 모두 당황했다. 석주가 이현에게 한 발짝 다가가는 순간, 여운이 둘 사이에 섰다.
-선생님, 이현이 잘못이 아니에요. 이현아, 너 선생님한테 태도가 그게 뭐니!
그러자 이현과 석주, 둘이 동시에 말을 했다.
-제가 뭘 잘못했는데요?
-그만 두십시오, 이런 놈은 좀 혼이 나야해요!
-그만하시라구요!
여운이 목소리를 높이자, 석주가 움찔 놀라 여운을 바라봤다. 이현은 아직도 도전적인 눈빛으로 석주를 쏴보고 있었다.
-있다 말씀드릴테니 나가주세요. 지금은 수업시간이고.. 또..
여운이 길게 말을 끌자 석주는 어두운 표정을 짓더니 그대로 반에서 나가버렸다. 그때까지 이현은 서 있었다.
-넌 도대체 왜 그러니? 선생님 말씀에 그냥 고분고분하면 안돼?
여운은 이현에게 다가가 앉으라고 손짓하며 말했다. 이현은 자리에 앉아 천장을 올려다 보며 말했다.
-저런 사람, 제일 싫어. 무슨 사람이 저래요? 무슨 일이냐고 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화부터 내고.. 처음 날 봤을 때부터 그랬어. 왜 그러는 지 모르겠어요.
여운은 까닭없이 미움 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여운은 방금 전까지 얄밉게만 느껴졌던 이현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저으며 의자에 앉았다. 솔직히, 석주의 이현에 대한 감정은 조금은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이현은 쓸쓸하게 웃으며 여운을 바라봤다. 여운은 의자에서 일어나 교탁으로 갔다. 공부할 시간도, 기분도 아니었다.
퇴근을 서두른 여운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숨부터 크게 쉬었다.
-왠 한숨?
학원 옆 조그만 골목길에서 이현이 나타났다. 녀석은 천진스러운 미소를 띄고는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여운은 재빨리 미용실 쪽을 바라봤다.
-어? 우리 엄마 눈치봐요?
여운은 눈을 흘기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이현이 졸졸 따라오며 말을 계속 걸었다.
-선생님, 나 안보고 싶었어요?
이현은 장난스러운 말투로 자꾸 여운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말을 걸었다. 여운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는 꽥, 소리를 질렀다.
-아, 찌르지 말라구. 하나도 안보고 싶었으니까!
-에이, 거짓말. 내가 끓여준 김치찌개는 다 먹었죠?
-다 버렸어.
사실은 김치찌개가 아까워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끓여먹었었다. 여운은 얼굴이 빨개졌다. 거짓말을 하면 나타나는 증상 중 하나였다.
-진짜? 그럼 또 끓여 줘야겠네.
-웃기지마. 너 왜 날 따라와? 너, 혹시..
여운은 뭔가 말을 하려다 말았다.
-헤헤, 쌤, 나 오늘 하루만 더 재워주면 안돼요?
-미쳤네. 미쳤어.
여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이현의 등을 떠밀었다.
-가라, 응?
-아, 진짜. 오늘 하루만 더.. 내가 찌개 진짜 맛나게 끓여줄게.. 빨래도, 그래, 저번엔 빨래랑 청소 안했었잖아.. 오늘 하루만 더..
-안돼. 진짜 안돼. 너 계속 이러면 너네 어머니 만난다.
-우리 엄마가 어딨는데? 나 엄마 없어!
이현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순간, 여운은 멍해져서 이현을 바라봤다. 소리를 버럭 지른 이현은 여운의 표정으로 보더니 고개를 돌리고는 우울하게 말했다.
-나 엄마 없어.. 그러니까 재워줘요. 당신이 안 재워주면 나 오늘 잘 데 없다구요. 돈도 없고..
여운은 뭔가 사연이 있구나. 하고는 조용히 앞서 걷기 시작했다. 집으로 데리고 가서 물어봐야겠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걷던 이현은 뒤를 돌아보고는 소리쳤다.
-빨리 와, 짜샤!
여운의 말에 이현은 고개를 들더니 신이난 표정으로 달려 왔다.
-내가 가방 들어줄게요!
이현은 여운의 가방을 뺐듯이 들고는 앞서 뛰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 온 여운은 예전보다 편하게 이현을 대하는 자기 모습에 조금 놀랐다. 옷을 갈아입을 때도 문을 잠그지 않아서 놀랐고, 헐렁한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으로도 아무렇지 않게 이현과 마주 앉아 라면을 끓여 먹을 수 있는 자기 모습에 놀랐다. 이현은 여운이 끓여준 라면을 정말 맛있게 먹었다.
-한국 와서 제일 맛있었던 게 라면이에요. 헤헤. 근데 샘이 끓여준 라면은 더 맛있네.
-쳇. 웃기네.
여운은 라면 면발을 그릇에 담으며 비웃었지만, 사실은 기분이 좋아졌다.
-설거지는 니가 해.
라면을 다 먹고 일어난 여운은 냉장고 안에서 맥주 캔 하나를 꺼내 거실로 걸어갔다. 이현은 밥통에 남아있던 찬 밥을 꺼내 국물에 다 말아먹고 설거지까지 끝내느라 조금 늦게 거실로 나왔다. 녀석은 오늘은 짐도 없이 가출을 한 것 같았다. 담배를 입에 문 여운은 인상을 쓰며 이현에게 물었다.
-오늘은 또 왜 가출모드야?
-아까 말했잖아요. 우리 엄마가 우리 엄마가 아니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이현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여운은 그 담배를 빼앗아 구겨버리고 물었다.
-무슨 소리냐구!
-액면가 그대로에요. 우리 엄마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아니라네.
-너 지금 소설쓰냐?
여운은 이현을 노려봤다. 그러자 이현은 쇼파에 벌렁 눕더니 눈을 감고는 대답했다.
-진짜야. 믿기 싫으면 안 믿어두 돼.
여운은 믿어야 해, 말아야 해, 하는 표정으로 이현을 바라봤지만, 이현은 벌떡 일어나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여운은 고개를 흔들고는 일어났다.
-어디가요?
-잘려구.
그러자 이현이 일어나 여운의 앞을 가로 막았다.
-나랑 조금만 더 있어주면 안돼요?
그때, 여운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운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본 이현은 여운의 가방 안에서 핸드폰을 찾아냈다. 그리고는 발신자번호를 확인했다. 최석주, 세 글자를 확인한 이현은 여운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핸드폰을 열었다.
-여보세요.
-아, 죄송합니다.. 한여운씨 핸드폰 아닌가요?
-맞는데요.
여운은 당황해서 이현의 손에서 핸드폰을 뺐으려 했다. 그러나 이현은 여운의 손목을 모아 잡고서는
석주와 계속 통화를 했다.
-어, 전화 받으신 분은..
-그러시는 그쪽은 누구신지.. 여운이 지금 옆에서 자는데요.
이현은 일부러 '옆에서'를 강조해서 말했다.
여운은 미칠 지경이었다. 여운은 온 힘을 다해서 손목을 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여운은 화가 나서 눈물까지 글썽거리고 있었다.
-아, 그래요. 죄송합니다. 다음에 전화하겠습니다.
전화가 끊기자, 이현은 여운의 손을 놓아주었다. 자유로워진 여운의 손이 이현의 뺨을 걷어붙였다. 찰싹, 소리가 거실에 울렸다.
-미친놈!
-나 미쳤다고 했잖아요.
-됐어. 너랑 이야기도 하기 싫어. 또 그냥 나가던지, 방에서 쳐 자든지, 니 맘대로 해.
여운은 소리치듯 말하고는 방문을 열었다. 뒤에서 이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 밝힐 자신도 없는 남자, 만나지 마요.
-거짓말 하는 남자는 더더욱 그렇지.
여운은 뒤로 돌아서서 가시 돋힌 말투로 쏘아 붙였다. 그러자 이현이 여운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나는 요, 갖고 싶은 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갖어야 직성이 풀리거든요.
-뭐라고?
여운은 기가 막히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이현을 노려봤다. 그러나 이현은 아랑곳하지 않는 표정으로 여운에게 한발자국 더 다가섰다. 여운은 이현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가까이에서 눈이 마주친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잘 생겼다. 여운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게다가 한 쪽만 푸른 눈동자는 신비롭기까지 했다.
-내 한 쪽 눈은 마음을 본대요.
이현의 말에 여운은 마음이 뜨끔했다.
-그, 그래서?
여운은 말까지 더듬는 자신이 못마땅해서 얼굴을 찌뿌렸다.
-그냥요. 잘 자요, 선생님.
이현은 여운의 이마에 살짝 키스했다. 여운은 이현의 얼굴이 다가오자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차갑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서늘한 입술이 닿자 여운은 눈을 떴다.
-그런 표정 하지 말라니까. 너무 귀엽다구요.
이현은 쿡, 웃더니 쇼파로 걸어갔다.
-나 오늘 여기서 자요. 바이바이.
오늘은 길게 올렸어요..
ㅋ 아유, 피곤해라..
건강하시고.,.댓글하고 추천.. 꼭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