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땡아!뚱땡아! - 9
..저놈, 뭐야..
나는 봉다리를 두 손에 꼬옥 쥔채, 저 멀리 사라지는 두 놈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뭐, 해장은 시켜서 보냈으니 마음은 편했다.
얄미우면서도 왜케 귀엽냐아~ 나 미쳤나봐!
집에 들어가서 봉다리 안의 내용물을 확인.
한쪽 봉다리엔 콩나물 듬뿍이었고, 다른 한쪽 봉다리엔 초코렛 함유가 된 비스켓 과자들과 계란이 들어 있었다.
..이게 무슨 의미야..
사실 나...과자 무지 좋아했다.
그것도 초콜릿 함유된 비스킷 말이다.
그 자리에서 뚝딱! 해치웠고, 내 뱃살에 일키로의 초콜릿이 붙어버린 것을 느꼈다.
이를 닦고 베이비가 누웠던 자리에 쭈욱 뻗어 그대로 잠들었다.
가비는 뭘하고 있을까..아직까지 놀이터 벤치에 앉아 있을까..내일 정말 그 자리에 나와 있을까..
잠결에 베이비의 희미한..........향기가 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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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빡하고 커텐을 치지 않고 자는 바람에 희미한 햇살이 좁은 틈 사이로 슬그머니 내 얼굴 위로 내려앉았고,
그 바람에 눈이 부스스 떠졌다.
더듬더듬 손목시계를 보니, 8시였다.
세상에 하루 종일 잠만 잤다니!
벌떡 일어났다.
..가비한테 9시에 보자고 했는데!
후다닥 일어나 씻은 후, 부랴부랴 보육원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자전거 페달을 밟는 내 발길이 급해졌다.
“어머니, 저 왔어요!”
아이들을 씻기고 있었는지, 두 손에 거품을 가득 묻힌 어머니가 후다닥 나오셨다.
어머니의 치마폭 뒤로 자그마한 얼굴이 빼꼼히 나왔다.
연석이었다.
촉촉이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이구, 화봉아! 이 시간에 왠일이야? 쉬는 날도 아니면서...”
“아..잠깐 볼 일이 있어서요. 곧 갈거에요!”
놀이터로 뛰어갔다.
가비는 어제 놀이터 벤치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놀이터의 벤치는 비어있었다.
그 빈자리가 너무도 쓸쓸하게 보였다.
일어나서 어떻게 씻었는지도 모른다.
아침 밥도 안 먹고 부랴부랴 왔다.
그런데..그런데 가비는 없었다.
어제 정말 나올 듯이 나를 보며 웃었는데..설마설마했지만 가비는 나오지 않았다.
다리에서 힘이 쭈욱 빠졌다.
힘없이 터덜터덜 놀이터를 벗어나려는데...왠지 모르게 아쉬움이 강하게 자리잡았다.
어차피 편의점 알바도 10시부터이니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보육원을 나와 나의 애마에 올라탔다.
오랜만에 보육원 주위를 돌아보고 싶었다.
보육원의 주변은 온통 나무와 풀 투성이었지만..어찌보면 초라해보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모습이 더 정겨워서 좋았다.
자전거 페달을 굴리자 살짝이 차가운 공기가 나를 스치고 지나갔고, 이내 허전했던 마음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한바퀴를 돌고 두 번째 돌 때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들 사이에 껴서 휘리릭 지나가는 놀이터,
그리고 벤치에 앉아있는 그 누군가가....
누군가? 혹시...혹시 가비?
자전거에서 내려 놀이터로 뛰어갔다.
정말...정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짙은 청바지에 하얀 브이넥 니트를 입은 가비가...가비가 주변 풍경과 어울려 한폭의 그림같이 앉아 있었다.
가비는..약속을 어기지지 않은 것이었다!
“가비!!”
반가운 마음에 가비가 들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있는 힘껏 가비의 이름을 불렀다.
발걸음을 빨리 할수록 가까워지는 가비.
덩달아 내 심장까지 더욱더 세차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런데....에쁜 가비의 모습이 나에게 클로즈업될수록 가비의 귀에 꽂혀져 있는 무언가.
가비는 지그시 눈을 감고 귀에 mp3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말도 안돼.. 가비는 듣지 못하는데..말도 못하는데..
나 혼자 착각했던 거야! 바보같이 나 혼자 쇼하는 것을 재밌다는 듯이 지켜본거야!
반가웠던 마음이...서서히 차갑게 식어갔고, 가비에게로 향하는 내 발걸음도 더디어졌다.
무릎위에 올려진 손가락을 까딱까딱거리는 가비.
가비의 가느다란 손가락이...얄미웠다.
희미하게 까딱까딱거리는 고개까지도.
유난히도 짙은 속눈썹이 가비의 얼굴 한부분을 먹물처럼 물들이고 있었다.
가비의 앞에 섰다.
가비는 내가 옆에 있는지도 모른 채, 여전히 눈을 감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가비 옆에 풀썩 앉았다.
음악 소리가 내 귓속까지 깊숙이 파고들었다.
무슨 노래길래 그렇게 크게 듣는지..
가비 옆에 앉아 생각했다.
이 괘씸한 놈한테 첫마디를 뭐라고 날려야할지.
그래..우선 태연히, 무슨 노래를 그렇게 열심히 듣냐!라고 한마디 던지는 거야..
아니, 야 이 재수없는 새끼야! 그럴까?
사실 후자쪽을 선택하기엔 자신이 없었다.
아니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나쁜 가비같으니라고. 완전히 바보 만들었잖아..
가비의 한쪽 귀에 꽂혀진 이어폰을 빼서 내 귀에 꽂았다.
제대로 꽂기도 전에 나는 깜짝 놀랐다.
가비는 그제서야 천천히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한번 놀란 내 심장은 아직가지도 콩닥거리고 있었다.
귀에 꽂고 듣기에 볼륨이 너무 높았다!
이렇게 들으면 분명 고막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정말 가비는 못 듣나보다.
듣지 못하지 않고서는 이렇게 크게 음악을 들을 수가 없었다.
괜시리 또 혼자 의심한 것이 너무 미안했다.
머쓱함에 어깨를 살짝이 으쓱하며 씨익 웃어줬다.
“안녕.”
가비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어폰을 뺏어서 다시 귀에 꽂더니 고개를 까딱인다.
들리지도 않는데 음악은 왜 듣는 것일까?
한쪽 주머니에서 준비해두었던 수첩에 글씨를 썼다.
-노래 좋아?-
라고 말이다.
수첩을 가비 눈 앞에 불쑥 들이밀었다.
가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들리지도 않을텐데 태연히 고개를 끄덕이는 가비의 모습이 더욱더 나를 마음 아프게 했다.
앞으로 절대..무슨 일이 있어도 가비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옆에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다시 눈을 감고 들을 수 없는 음악 감상을 하는 가비.
하지만 기분 나쁘지도, 섭섭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나와준 것만으로 나는 기뻤다.
눈을 감고 음악을 듣는 가비의 예쁜 옆모습에 취해 계속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지만..할 수 없었지만 가비는 귀가 아닌 마음으로 음악을 듣고 있었고,
나는 가비의 나지막하면서도 고른 숨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이 편안하고 자유로운 느낌..
나는 마냥 좋았다.
이십 분은 금방 흘러갔다.
나는 수첩에다가 또 글을 적어 가비 눈앞에 들이밀며 슬쩍이 어깨를 쳤다.
잠시 인상을 찌푸리나 싶더니 수첩에 눈길을 주는 가비.
-나 앞으로 날마다 9시에 여기 올거야. 가비 너도 날마다 왔으면 좋겠다.
나 아르바이트 때문에 그만 가봐야 돼. 혼자 있어도 안심심하지? 나 갈게..-
가비의 반응은 보지도 않고 벌떡 일어나 손을 휘이휘이 흔들고 놀이터에서 걸어나왔다.
사실 가비의 대답은 기대 안하는 게 낳으니까.
가비를 따악 두 번 보았지만, 벌써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가비는 대답하기를 싫어한다는 것..귀찮아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편의점에 도착하자 새침스러운 서희가 나를 마땅치않게 반겨주었다.
“지각할 줄 알았더니 정확히 10시에 왔네.”
“그럼요! 전 지각은 절대 안해요~”
“그래?”
도대체 내 어디가 탐탁치 못하길래 저렇게 마땅찮은 눈빛으로 나를 반길까..
여자들은 자기보다 더 우월한 여자들을 보면 저렇게 마땅찮아 한다고 하던데 난 그런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저러냐고..
편의점을 나가기 전 잠시 나를 힐끗 쳐다보던 서희가 다시 나에게 다가오더니..
“혹시...혹시 어제....왔니?”
“네?뭐가요?”
“아니..아니야.”
라고 휘리릭 나가버리는 서희.
이상한 여자야..
옷을 입자마자 나는 청소부터 시작했다.
“청소도 안했나봐. 쟤 진짜 계산만 하는 거 아냐?”
밀걸레를 깨끗이 빨아 바닥을 열심히 밀고 있는데..
-똑똑-
“......?”
-똑똑-
..무슨 소리지?
뒤를 돌아보니 편의점의 유리문을 밖에서 똑똑 두드리고 있는 베이비가 보였다.
내가 쳐다보자마자 문을 벌컥 열더니,
“뚱땡아!”
라고 외치며 씨익 웃었다.
앙큼스러운 보조개가 쑤욱 들어갔다.
베이비 뒤에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친구놈이 보였다.
베이비는 이제 승현이를 부르는 나의 애칭이니 저 놈은 절대 베이비로 안 부를 것이다.
싸가지로 부를까?
“야, 너 자꾸 뚱땡이라고 할래!”
내가 걸음을 띄기도 전에 베이비는 편의점 문을 다시 닫고 휘리릭 사라졌다.
얄미운 놈..같으니라고.
서희 때문에 울적해졌던 마음이 얄미운 베이비놈을 보자 피식 웃어버리면서 기분이 풀렸다.
얄밉기는 했지만 베이비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환해진다고 해야할까.
베이비는 자신의 주위까지도 해맑게 비추는 빛이었다.
얄미운 빛!
오늘 가비도 보고 베이비도 봤으니 오늘은 왠지 좋은 일만 생길 것 같았다.
편의점 알바 시간이 거의 끝날 무렵,
“화봉아아아아~!”
내 이름을 부르는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편의점 문이 벌컥 열렸다.
나와 가장 친한 친구 예인이었다.
“어?예인아?”
“아씨. 이제 예인이라고 부르지 말랬잖아.
내 이름은 이제 예인이가 아니고 태미라니까!”
예인이라는 이름이 훨씬 예쁜데..
끝까직 고집을 부려 이름을 바꾼 태미.
“왠일이야?”
“너 곧 알바 끝날 시간이잖아. 너 맛있는 거 사주고 가게 같이 가려고 왔지.”
“나 많이 먹는 거 알지?”
“당연하쥐이이이~~ 끝나자마자 나와.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께~”
생글생글 웃고 있는 태미의 귀여운 모습에 나도 덩달아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태미는 나와 키가 비슷했다.
작은 키에 작은 덩치.
항상 나에게 키가 작다고 불만을 토해내던 태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태미의 갸름한 얼굴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이다.
키까지 컸다면 섹시해 보였을 법한 얼굴이었지만, 작은 키 덕에 얍실하게 생긴 태미는 뭘 해도 굉장히 귀여웠다.
태미를 보니 가비가 떠올랐다.
예쁜 여자들에게는 필수인 커다랗고 서글서글한 눈망울이 아닌 크지도 작지도 않은 눈매가 여자답지 않게 굉장히 깊고 진했다.
태미를 멀리서 보면 큰 눈이 아닌데도 갸름한 얼굴에 짙은 눈매가 먼저 쑤욱 들어왔다.
성격은 좀..............독특하다고 해야할까.
자기 자신은 평범하다고 하지만.
태미 주위엔 남자들이 항상 많았다.
장기 체류가 아닌 단기 체류하는 남자들 말이다.
다음 알바생이 오자마자 부랴부랴 편의점 문을 열고 나갔다.
“태미야아아~!”
바로 저 앞에 태미와..?
한 놈이 서 있었다.
역시나 태미가 혼자 있을 리가 없지..
나에게 폴짝폴짝 뛰어와서 내 팔짱을 끼더니 잽싸게 내 귀에 속삭였다.
“괜찮지? 능력도 쫌 좋아~~”
꽤나 곱상하게 생긴 얼굴이었지만 우리 가비와 베이비의 화려한 외모에 벌써 눈이 차버린 나의 눈엔 별로였다.
“어.. 괜찮네..”
“뭐 먹고 싶어? 말만 해, 저 오빠가 다 사줄거야.”
우리는 횟집으로 향했다.
나는 회를 굉장히 좋아했고, 태미 덕에 비싼 회를 배 터지도록 먹었다.
진석이라는 그 남자는 태미와 나를 파라다이스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화봉아, 엄마한테 나 만났다고 하지 마. 나 독서실 갔다고 했으니까. 알았지?
또 먹고 싶은 거 있음 생각해 놔. 알았지? 나 간다, 친구!”
태미는 손을 휘이휘이 저으며 사라졌고, 그런 태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파라다이스로 들어갔다.
“어머~ 화봉아. 밥은 먹었니?”
나를 보자마자 대뜸 밥 먹었냐고 물어보시는 아줌마.
“네. 오늘은 굉장히 맛있는 거 먹고 왔어요~”
앞치마를 두르자마자 정신이 없어졌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지.
“화봉아, 7번 테이블 손님 왔으니 주문 받아라~”
아주머니의 말씀에 잽싸게 7번 테이블로 뛰어갔다.
“어서 오세요~ 메뉴판 여기 있습니다.”
총 6명이었다. 여자 셋, 남자 셋.
그런데..?
테이블 제일 안쪽에 하얀 면티에 소매 없는 청조끼를 껴입은 낯익은 놈..
어? 베이비?
베이비는 풍성한 베이비 파마가 이마 위로 흐트러진 채 무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역시나 한폭의 그림이었다.
그러다 베이비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베이비.
희미하게 미소짓더니 한쪽 눈을 찡긋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다른 테이블들은 자기네들끼리 술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설마...설마 베이비 너.. 나한테 윙크 날린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