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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동안 사랑하기(4) -우리 젊은 날의 아테네-

레몬파이 |2005.06.17 03:46
조회 663 |추천 0

우리 젊은 날의 아테네

 

 

아늑한 느낌은 없지만, 무엇보다 기대 이상의 훌륭한 연어 요리를 먹을 수 있고, 여기 저기서 가족 단위로 저녁을 먹으러 온 듯한 많은 사람들의 즐거운 대화에서 풍겨오는 다소 시끌벅적한 소음들이 마음에 들었다. 

" 여기 주변에 어디 좋은 레스토랑 없나요?"
프론트 데스크에 전화를 걸어 직접 물어봤을 때, 나이가 지긋한 중년의 호텔 직원은 원한다
면 추천해 줄 수는 있지만, 우선 서랍 속에 들어있는 전화 번호부를 훑어보라고 했었다.
그런게 있는 줄도 몰랐던 우리는 처음으로 함께 할 수 있는 뭔가 일거리라도 생긴 것처럼, 아
주 열심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레스토랑 찾기에 돌입했다.


" 도현씨가 해"
" 니가 해"
" 난 전화로 말하는 영어는 잘 못알아 듣잖아.."
" 아직도 있니, 영어로 전화거는 공포?"
" 그 버릇이 어딜 갔겠어? 그리고 아테네에서 돌아온 이후론 거의 영어 쓸 일이 없었어."
" 그랬겠다.......  ........ 넌 늘 영어를 썼었지. 그리스에서도 영어는 대부분 잘 통했으니까..."
문득 그의 얼굴에 다소 회상하는 듯한 아련한 눈빛이 스쳤다.

 

 

 


" Pardon?"
아테네 에서 나는 늘 이 말을 달고 살았다. 가끔 어떤 특정 단어를 발음할 때, 혀가 말리
는 나의 발음도 문제였지만, 젊은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그리스 사람들이 구사하는 다소 특
이한 영어는 자주 나를 힘들게 하였다.


" 돌아가고 싶어."


그리스 생활이 거의 일년 쯤 지나고 있던 어느 날 밤, 나는 그렇게 말했다. 꼭 그래야지 하
고 작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치 때가되면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여자들의 생리처럼, 나는
나도 모르는 어떤 느낌에 이끌려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 음??  뭐라고 했어?"


저만치서 거의 완성되어가는 추상화 위에 실리콘을 공들여 쏘던 그가 내 쪽을 바라보며 묻
는다.
" 뭐 하고 싶다고??"


" ...... 됐어. 별말 않했어."
실망스런.. 그리고 조금은 지친 얼굴로 그렇게 말했을 때, 사실 나는 그가 다시 한 번 물어
봐 주기를 원했었다. 그리하여, 흔들리는 나의 모든 것들을 그가 따뜻하고 너그럽게 꼭 잡아
주기를 원했었던 것 같다.
등을 돌리고 여전히 실리콘 쏘기에 열중하고 있는 그의 물감 묻은 초콜렜 색 남방을 바라보
며 눈물을 흘리던 그 밤의 짙은 외로움과 깊은 절망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 시절의 우리는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풍요롭지도 않았다. 작업실을 따로 만들
여력은 당연히 없었기에, 우리들이 지내는 스튜디오형 아파트 한 켠에 화구들과 그림들을
쌓아놓고 지냈다. 그래서 우린 늘 지독한(?) 물감 냄새를 맡으며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커피
를 마시고, 또 가끔 싸우기도 했으며, 뜨겁게 사랑을 나누기도 하였다.

 

 

 


" 여기 어때? " " 여기는 어떨까?" " 여기 한 번 전화해 볼까?"
벌써 30분 째, 전화통을 붙들고 있던 우리는 결국 로비로 내려가 호텔 직원에게 불어보는
것이 좋겠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처음 체크인을 할  때부터, 커다란 미소가 인상적이던 그는 내가 처음 체크인 때 입었던 두
꺼운 점퍼를 벗고, 크림색 터들넥 스웨터에 체크무늬가 들어간 버버리 스커트로 갈아입고  나타
나자, ' 유 룩 고져스' 라며 두 번씩이나 나를,그리고 그를 기쁘게 해 주었다. ( 어쩌면 그는
기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건 그저 나의 생각이자 바램이었을 뿐..)


" 무엇을 먹으러 갈 거죠?"
그는 우리가 어느 나라 음식을 원하는지 물었다.


" 우린 연어를 먹으러 갈 거예요."


" 아, 그렇군요.   훌륭한 선택이에요. 그렇다면.. 제가 가끔 가는 The boat house라는 레스
토랑을 추천합니다.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The boat house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가는 도중에 우리는 몇 번이나 길을 잃었다.
우리가 두 번 째 길을 잃었을 때는, 미리 예약한 시간에 늦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직접
전화를 걸어 어떻게 가야 하는 지를 묻기로 하였다.


" 우리 지금 거기로 가는 중인데, 길을 잃었습니다. 어떻게 가야하는지 좀 말해주시겠어요?"
" 아, 그러세요?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정확히?


수화기 너머의 여자는 다행히 비교적 느린 속도의 영어로 차근차근 찾아오는 길을 설명해
주고 있었지만, 나는 또 다시 그리스 시절의 버릇 처럼 ' pardon?' 하고 물어볼 뻔 했다.
다 알아들었는데도 자연스레 터져나오는 그 버릇은 내가 지금 그 시절의 그와 함께 어딘가
에서 길을 잃었다는 사실때문 이었을 지 모른다.

 

 

 


그리스에서 우린 차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이런 식으로 조금은 풍요롭고 편안하게 길
을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처음 아테네에서 그가 그림을 그리던 시절 부터, 나는 늘 버스를
타고 일을 하러 다녔다. 영어를 잘 한다는 이유와 그림에 조예가 깊다는 이유로 전혀 경험
이 없는 나에게 여행 가이드 일을 가르쳐주시고 맡겨주셨던 지중해 여행사의 윤 사장님은
내가 버스를 타고 가끔 길을 잃을 때마다,

"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정확히?" 라고 물었었다.

 

 

 


" 암튼 이 먼 나라까지... 내 그림을 가지고..... 내 전시회를 보러 와 주어서 고마워."
느릿느릿 조금 떨리는 듯하게 느껴지는 말투에서 그의 진심이 느껴진다.
그림을 그릴 때 말고는 언제나 대부분 다정하고 성실했던 사람!!!!!!!
문득, 그 다정했던 시절들의 그 사람이 떠올라 잠시 울컥해 진다.

 


-나는 왜 그를 떠났을까!-  그리고, -그는 왜 떠난다는 나를 보냈을까!-
-그 때 우리는 정말 서로를 사랑했을까!-

 


자기 집 고양이 이야기며, 눈밭에서 미그러진 자기 시아버지 이야기며.. 이런저런 시시콜콜
한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는 한 동안 아무 말없이 아직 절 반도 마시지 않은
레드 와인을 바라보며 잠깐씩 아련하게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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