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희연은 오랜만의 여유를 즐기고 객잔의 후원에 마련된 특별한 손님을 위한 별채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지만, 정민은 눈곱만큼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관속에서 죽음의 공포와 처절한(?)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잘 이어지지 않는 선과 점들을 따라 가상의 걸음을 힘들게 옮겨가면서 조금이라도 공포를 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마음이 안정되며 효과를 봤지만 시간이 흘러도 아무런 변화 없이 칠흑 같은 어둠만 계속되자 이미 땅속에 묻힌 것이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욕이 절로 나왔다.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가장 악독한 욕으로 김 사장과 그의 손발노릇을 한 비서실의 박희연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그렇게 직접 입으로 내뱉지는 못했지만 한참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자신이 비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허, 참으로 간사한 게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는데, 모든 사람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가 하는 일을 맘 놓고 할 수 있게 해주었지. 게다가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회사지분의 사분의 일을 내게 주겠다고 했던 건 사실이잖아. 희연 씨만 하더라도 쌀쌀맞긴 했지만 내가 하는 일에 대한 나쁜 소문을 사장님 귀에 들어가는 것을 막아주던 고마운 여자였는데…. 이래서 백번을 잘해 주어도 한 번의 실수로 원수가 되는 건 한순간이라는 말이 딱 맞는군. 이렇게 놓고 보니 그들과 내가 다른 게 뭔지 헷갈리는군. 그들은 지금 잘살고 있을까? …후후후, 지들이 맘 편치 못하니까 이렇게 날 죽이려고 새로이 사람을 보냈겠지! 그러고 보니 때린 놈은 잠을 못자도 맞은 놈은 다리 펴고 잔다고 했던가!’
정민은 여기까지 생각이 이어지자 맥이 탁 풀렸다. 다리를 펴고 누운 곳이 관속이라 생각되자 결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니야, 너희들은 지금 이 시간 맛난 음식을 먹으며 웃고 있지만 난 이렇게 눈동자만 겨우 굴리면서 쫄쫄 굶으며 죽어…! 으응, 그러고 보니 배가 되게 고프네! 어, 그렇다면 한 가지 감각이 더 돌아 왔다는 건가! 에고, 그럼 뭐하나 곧 죽을 텐데. 그냥 죽어도 억울한데 오히려 배고픔을 느끼면서 죽음을 기다려야 하다니… 정민아 너 참으로 비참하게 죽는구나!’
정민은 갑자기 가족들의 모습이 생각났다. 의식이 깨어난 후로 지금까지 가족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망각의 굴속을 헤매다 나온 것처럼 갑자기 떠오른 기억들이 혼란스러웠다. 가족들만 아니라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기억들이 아주 생생하게 의식으로 분수처럼 솟아나왔다. 아주 오래된, 그래서 생각해내기 힘든 기억까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너무나 생생하게 떠오르는 기억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정민은 죽을 때가 되어서 그런 건가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이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평온해졌다. 어차피 이런 상태에서 발악을 한다 해도 달라 질건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정민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눈밖에 없었다. 거기에다 굳이 더한다면 배고픔을 느낄 수 있다는 것 빼고는 완전히 녹이 슬어 움직이지 못하는 고철이 되어버린 것이 자신이었다. 이런 상태로 살아간다는 건 별의미가 없었다. 죽은 거와 다를 게 없는 식물인간의 삶을 계속 살 필요가 있을 가를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차라리 잘된 건지 모르겠다. 이렇게 깨끗하게 사라지는 것이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더 좋을 거야. 김 사장이 조그만 양심이 있다면 나의 실종을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섭섭하지 않게 대해주겠지. 뭐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아. 가족들에게 짐이 되지 않게 하여주었으니 감사하다고 해야겠지, 후후!’
정민은 공포와 분노에 싸여 흥분했던 마음이 진정되며 머리가 맑아졌다. 이렇게 되자 정민은 잠시 멈추었던 바위에 새겨진 문양을 따라 가상의 걸음을 다시 시작했다. 왠지 그렇게 하면 마음과 머리가 맑아진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죽음을 기다리며 할 수 있는 가장 값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멋있지 않은가, 수정처럼 맑은 마음으로 죽을 수 있다는 것…, 하하하!’
- 꽝, 우지직!
“적이다!”
‘어어 뭐야!’
정민이 멋있는(?) 죽음을 떠올리며 잔뜩 폼 잡고 있을 때, 갑자기 희미한 빛이 보였고 세상이 빙글 빙글 돌기 시작했다. 아니 정민의 입장에선 그렇게 보였지만 실재로는 정민이 들어있던 관이 깨지면서 밖으로 튕겨 나와 바닥을 굴렀기 때문이었다.
“습격이다!”
“막아라!”
흑의대주 감숙은 막 침대에 몸을 뉘고 잠을 청하려고 하다 들려온 소란한 소리에 놀라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하고 별채정원으로 달려 나왔다. 아직 별채에서는 싸움이 일어나지 않고 있었지만 담장너머에서는 고함과, 비명소리, 그리고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있었고,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자가 감숙 앞으로 급하게 뛰어들어 와 부복하였다.
“무슨 일이냐?”
“대주님, 누군가가 이곳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미 일차 저지선은 뚫렸습니다. 곧 이곳으로 적이 몰려올 겁니다. 적은 백여 명이 넘는 인원입니다.”
부하의 보고를 듣는 감숙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지금 희연을 호위하기 위해 여기에 있는 흑의대원은 삼십 명뿐이었다. 실력이 뛰어난 자들만 선발하여 왔지만, 객잔 외곽에서 잠복해있던 흑의대원이 이미 뚫렸다면 얘기가 달랐다. 적들의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포위라도 당하면 완전히 전멸할게 틀림없었다. 적들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우선 포위되기 전에 벗어나는 우선이었다.
“지금 즉시 남은 모든 흑의대원은 이곳으로 모여 소교주님을 보호하라고 해라. 우선 이곳을 벗어난다!”
“예!”
“감 아저씨, 무슨 일이에요?”
느긋하게 목욕을 하다 밖에서 나는 요란한 소리에 놀라 급하게 뛰어나온 희연이 머리에는 아직도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소교주님, 안심 하십시오. 우리에게 관심이 있는 자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우선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
감숙의 신호에 따라 별채 정원으로 모여든 흑의대원은 불과 십여 명에 불과했다. 물론 적과 대전 중이라서 몸을 빼기 힘든 대원을 제하더라도 너무 적은 숫자였다. 감숙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흑의대원을 제외하더라도 삼심여명이 더 있었는데 흑의 대원이 불과 십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는 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이건 생각보다 심각한데. 우리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다면 이렇게 짧은 시간에 많을 피해를 볼 수 없다. 우리의 실력을 충분히 파악하고 습격해 왔다는 것인데. 게다가 이곳에 머물 것까지 예상하고…!’
감숙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별채로 통하는 문 쪽에서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문이 부서지며 흑의대원 두 명이 피투성이가 되어 정원으로 떨어졌다. 상태로 보아 이미 숨은 끊어진 것으로 보였다. 이어서 부서진 문과 옆 담장을 넘어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났다. 모두 복면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싶어 하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아라!”
감숙이 다급한 소리로 명령을 내렸고, 흑의대원들이 각자자신들의 병기를 빼어들고 희연을 중심으로 둥글게 방어선을 구축하자 몰려온 복면인들이 이들을 에워쌌다. 그리고 시작된 공방은 금방 우열이 들어났다. 다시 흑의대원 다섯이 죽거나 큰 부상을 입고 쓰러졌고, 적들의 숫자는 더욱 늘어났다.
“아저씨 내 피리, 피리를 주세요, 어서요!”
“그, 그건…!”
“지금 이대로 가다간 모두 죽고 말아요. 그러니 어서주세요!”
감숙은 희연의 재촉에 못이기는 척 품에서 옥피리를 꺼내 희연의 손에 넘겼다. 피리를 넘겨받은 희연의 얼굴에 섬뜩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흥, 오는 너희들 다 죽었어!”
희연의 낮지만 섬뜩한 목소리를 듣고 복면인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자의 눈빛에 불안감이 스치는듯했다.
“서둘러라! 저들은 몇 명 남지 않았다. 빨리 저 계집을 데리고 떠나자!”
저들의 목표가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 희연은 꼭지가 돌기 시작했다.
“흥 누구 맘대로!”
“흑의대원들은 칼을 거두고 뒤로 물러나라!”
희연의 손에 들린 작은 옥피리가 입에 물리고 보통 사람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감숙은 큰소리로 부하들을 뒤로 물러나도록 했다. 복면인들은 감숙의 외침에 움찔했고, 그러는 사이 흑의대원은 희연을 보호하며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양측이 다 긴장한 가운데 잠시 서로 병장기를 겨눈 채로 대치하고 있었다.
“뭘 망설이냐, 쳐라!”
“으아악!”
복면인들의 수장이 명령을 하자 일제히 달려들려고 폼을 잡았으나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뒤에서 들려온 귀청을 찢을 것 같은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처절한 비명소리였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은 오금이 저려와 그 자리에 못 박혀 버렸다. 단 한 사람, 희연만 얼굴에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 휘익, 쿵!
“헉!”
“으윽!”
“저럴 수가!”
대치하고 있는 사이에 머리 없는 몸뚱이 하나가 허공에서 떨어졌다. 그런데 그것을 본 사람들은 참혹한 모습에 진저리를 치며 뒤로 물러섰고 일부는 구토까지 하며 고개를 돌렸다. 무인으로서 많은 죽음을 보았고 실제로 사람을 직접 죽여보기까지 한 사람들이 고개를 돌릴 정도로 참혹한 목 없는 시신이 허공에서 떨어지고 이어서 유령처럼 한 사내가 원래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처럼 소리 없이 몸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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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이 국경일이 되는 그 날까지… 아자 !
한글을 사랑 합시다.
내글이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