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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관계-(18) 이성과 감성 사이.

瓚禧 |2005.07.12 10:50
조회 1,605 |추천 0

 

이상한 관계




 

(18) 이성과 감성 사이.



 눈뜨면 주르륵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고, 눈만 감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깊은 잠의 수렁 속으로 빠지기를 며칠 째. 영효는 손가락 하나 들 힘조차 남아있지 않은 몸을 일으켰다. 왜 이다지도 힘든 것일까? 상현을 보내는 것이 처음은 아닌데, 왜 이렇게 힘든 것인지 여자는 알 수 없었다. 첫 번째 보다 더 지독하게 다가오는 고통들이 영효를 힘들게 했다. 살아 있는지 조차 모를 만큼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 여자는 서서히 죽어 감을 느꼈다.


‘왜 이렇게 힘든 거지? 박영효. 너 상현이가 느닷없이 헤어지자고 했을 때도 이렇지는 않았잖아......’


상현이가 느닷없이 헤어짐을 고했을 때도 이렇게 까지 힘들지는 않았다. 온 몸에서 삶이 빠져나가듯 허무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이렇게 까지 심각하게 가슴이 아리지 않았었다. 이렇게 힘들지 않았었다. 상현이 처음 이별을 고했을 때와 무엇이 다른 것일까? 그와 이별이 처음도 아니고, 두 번째이면 면역이 생길만도 한데, 왜 이렇게 힘든 것일까? 여자는 또다시 눈을 감았다. 스르륵 잠의 저편 속으로 빠져 드는 그녀의 머릿속에 언뜻 주혁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딩동-딩동- 벨이 연신 그녀를 잠의 나락에서부터 끌어 당겼다. 그녀의 몸은 더 깊은 잠을 원했지만, 방해꾼은 연신 벨을 눌러 그녀를 이 세상으로 불러내었다. 영효는 들기조차 힘들어진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렸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려 몸부림 칠 때 까지도 벨소리는 끊임없이 그녀를 재촉하고 있었다.


‘간다고! 가!’


생각 같아선 소리를 버럭 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그녀의 몸은 피폐해져 있었다. 여자는 몸에 남아있는 온 힘을 쥐어 짜 내어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문 밖에는 주혁이 서 있었다.


“너 도대체 뭐하는 여자야!”


주혁이 신발장에 지탱해 간신히 서 있는 영효를 향해 무섭게 다가서며 소리쳤다. 남자의 말에 여자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뭐 하는 여자냐고! 아니면 아니다, 맞으면 맞다! 변명이라도 하나 해야 하는 것 아니야? 내가 오해한 것이 있으면 먼저 전화해서 풀어야 하는 게 정상 아니냐고! 그렇게 입 꾹 다물고 있고, 핸드폰 꺼놓고 잠수해서 버리는 건 뭐야? 뭐하자는 플레이야? 네가 그렇게 잘났어? 아쉬운 사람이 오겠지, 뭐 그런 거야?”


남자가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내며 그녀를 몰아붙였다. 주혁은 여자의 말라버린 몸을 쳐다보았다. ‘설마 나 때문에 힘들었던 거니?’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간질 거렸지만, 주혁은 애써 다른 말을 끄집어냈다. 혹시나 자신 때문이 아닌, 매형인 상현 때문에 이토록 힘들다는 말을 듣는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지난 일주일이 주혁에게 있어선 악몽 같은 시간이었다. 왜 힘이든 것인지 이유조차 상세하지 않는 분노와 증오들로 그는 보이지 않는 그녀를 미치도록 미워했다. 누나인 주리와 말로 오해를 풀지 않았다면 남자는 여전히 여자를 오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주혁은 상현과 영효의 사이를 알고 나서부터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왜 그렇게 분노를 했던 것일까? 이제껏 주혁은 영효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같이 있으면 편하고 즐거운 사람. 그것이 영효의 모습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같이 있으면 편하고 즐거우니깐 가볍게 만나는 사람쯤으로 그녀를 생각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가 모르는 사이에 그녀는 좀 더 깊숙이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고, 주혁에게는 그런 감정이 낯설기만 했다. 그녀가 자리 잡았던 마음속의 깊이만큼이나 그녀가 미웠고, 증오스러웠던 것이었다. 그녀가 가벼웠다면 그런 감정은..........없었을 것이다. 사랑을 깨닫는 순간은 한 순간이라더니. 남자는 여자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지난 일주일동안 지독히 미웠던 사람. 지난 일주일 동안 죽음의 고통을 안겨준 사람. 지난 일주일 동안 미치도록...........보고 싶었던 사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여자는 남자가 왜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 연락을 하지 않아서 화를 내는 것인가? 아니면, 그녀가 변명을 하지 않아 화를 내는 것인가? 먼저 오해하고 돌아선 것은 남자가 아니던가?


“......네가 아쉬울 게 뭔데? 네가 화내는 이유가 뭐니?.......”

“뭐?”

“도대체 나한테 화내는 이유가 뭐냐고! 내가 상현이 만나서 그런 거야? 그런 거라면 네가 나한테 이럴 이유 없어! 너 나한테 불륜이니 뭐니 나한테 화낼 이유 없다고! 네가 뭔데? 네 자식이 뭔데? 알기나 하고 그런 헛소리 지껄였던 거야? 이제 두 번 다시 네 얼굴 보고 싶지 않아!”


있는 힘을 다해, 얼굴이 빨개지도록 악다구니 치는 영효를 주혁이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잡아먹을 듯 여자를 몰아치던 사람이 아무 말 없이 영효를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좋아하니깐........”

“뭐?”

“좋아........한다고....... 좋아해서 그랬어. 널 좋아해서. 네가 다른 남자와 있는 게 보기 싫어서. 그 남자가 매형이여서가 아니라, 우리 누나의 남자여서가 아니라! 네가 다른 남자와 있는 것이 미치도록 보기 싫어서 그랬어! 그래서 그랬다고!”


눈물 가득 고인 눈으로 주혁을 쳐다보는 영효의 어깨를 주혁이 살며시 부여잡았다. 이런 것이 아니었다. 주혁을 다시 보면 모질게 대하기로 마음먹었었다. 하지만, 애절하게 쳐다보는 주혁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자니 영효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죽은 듯 뛰지 않았던 가슴이 미치도록 고동치고, 그녀를 숨차게 했다.


“사랑 하는 것 같다. 휴. 아니, 사랑이야. 너 꺼진 핸드폰으로 하루에도 수십 번 전화하면서, 이유모를 화가 머리끝까지 치미면서도 그 감정을 몰랐어. 그냥 무작정 화가 났어. 너한테 무작정 화가 나더라고. 네가 밉고, 짜증나고 화가 나서 아무 일도 못하겠더라고. 그래서 찾아왔어. 혹시나, 네 얼굴 보면 그 이유 알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근데 ........... 그런데.......... 네 얼굴 보니깐 알겠어. 내가 .......... 이 변주혁이........ 널 사랑해........”

“하.........”


한때는 주혁이 자신에게 고백해 주길 꿈꿨던 적도 있었다. 저런 멋있고, 제멋대로인 남자와 한번 사귀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 한두 번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주혁이가 주리의 동생이기 전 이 아니던가. 영효가 그들의 관계를 몰랐을 적 이야기가 아니던가? 영효는 혼란스러웠다. 힘들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애절하게 쳐다보는 주혁을 보며 미치도록 고동치는 감성을 믿어야 할지, 연신 ‘박영효, 정신 차려. 너 주혁이 마음 받아주면 미친년이야! 미친년이라고! 그렇게 당하고도 또, 또 그 실수를 반복할 셈이야? 그럴 셈이야? 이제 겨우 그 고통의 구렁텅이 속에서 빠져 나왔는데 또 그 진흙탕 속으로 빠져들어 갈 셈이야? 그럴 셈이냐고!’ 외치는 이성을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한꺼번에 여러 생각들이 겹쳐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머리가 깨질듯 아팠다. 주혁의 고백을 들으니 온 몸에 겨우 남아있던 기운들마저 빠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휘청 이며 바닥에 주저앉을 듯 거리는 영효의 허리를 주혁의 듬직한 팔이 그녀를 받쳐 주었다. 그제야 이상한 기운을 눈치 챈 주혁이 그녀의 이마를 향해 손을 가져다 대었다. 여자의 이마에 흥건한 식은땀과 뜨거운 열기를 느낀 주혁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뭐야? 아픈 거야? 이 병신아! 아프면, 아프면 병원이라도 가야 하는 거잖아! 이게 뭐하는 짓이야! 죽고 싶어? 아니 죽으려고 그러는 거야? 병원 가자!”


주혁이 말라버린, 영효를 가뿐하게 들어올렸다. 병원으로 가려고 몸을 돌리는 주혁에게 영효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영효의 부정의 몸짓을 보던 주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바보 같은 여자야! 도대체 왜 병원 안가겠다는 건데? 나 죽는 꼴 보고 싶어? 너 그러면……. 너 그러면.......... 나 정말 힘들다고!”

“........힘.......들어 하지 마!”


영효는 있는 힘을 다해, 주혁을 밀쳤다. 그렇게 밀쳐야만 했다. 그렇게 밀쳐야만 덜 힘들 것을 알고 있기에, 마음은, 가슴속 고동은 잊어버리기로 했다.


‘영효야......... 너 잘하잖아. 상현이 보낼 때도 잘 참았잖아. 이번 한 순간이야. 이번 한 순간만 힘들면…….그러면........ 이제 아픔은 없을 거야.’


“무슨 소리야?”


주혁이 자신을 밀친 영효를 똑 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아니길, 제발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그런 대답이 아니길 가슴으로 빌었다. 눈빛으로 빌었다.


‘영효야……. 제발, 제발, 내가 생각하는 말은, 그 말은 하지 말아줘.’


영효는 애원하는 주혁의 눈빛을 피해 버렸다. 저 애절한 눈빛을 보고 차마, 말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주혁의 눈빛을 피해 고개를 떨어뜨리고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만 나가 줬으면 좋겠어........... 이만............ 이만........... 우리 두 번 다시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무슨 뜻이야?”


조급하게 되묻는 주혁의 물음에 영효가 그제야 주혁을 똑 바로 쳐다보고선 ‘알잖아…….’라고 답했다. 영효가 말하는 ‘알잖아......’의 의미가 무엇인지 주혁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아니 알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주혁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렇게 고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닐 거야. 내가 심한 말해서 그런 것일 거야. 허. 허. 변주혁! 그런 여자의 마음 하나 이해 못할 만큼 너 순둥이 아니잖아? 왜 이래. 알면서 왜 .......... 이렇게 끝인 것처럼 마음이 아프냐고……. 제길!’


주혁은 몸을 돌려 영효에게 등을 보였다. 조금만 더 그녀의 집에 지체하고 있다가 그녀의 입을 타고 흘러나올 그 두려운 말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 편이 더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나, 나가는 게 좋겠다........ 몸 조리 잘하고.......... 다음에 좀 나아지면 그때 다시 이야기 하자!”

“이야기 듣고 가!”


소리치는 영효의 외침을 뒤로 하고 주혁은 쫓기듯 그녀의 집을 나섰다. 주혁이 쫓기듯 사라져 버린 텅 빈 공간을 향해 울부짖으며 영효는 주저앉았다.


“내 ........... 이야기 듣고........가라고! 듣고 가란 말이야! 사람 힘들게 하지 말고.........흡........ 그러지 말고 듣고 가란…….흑흑. 말이야! 이 나쁜 자식아!”


그녀의 슬픈 울부짖음이 텅 빈 공간을 휑하니 돌아, 다시 그녀에게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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