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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인연의 농간질

은하철도 |2005.07.20 12:44
조회 425 |추천 0
 

인연의 농간질



깊은 연유는 모르지만 자식을 친척에게 맡기고 돈 벌러 떠돈다는 김양이 따가운 햇살을 손등으로 가리며 다방 계단을 내려서서 시장모퉁이를 돌아 커피배달을 가면, 역시 돈 벌러 고개 넘고 산자락 돌아서 정선까지 몰려와 술집여편네 얻어 살림 차렸다가, 소문에 의하면 다른 누구의 자식일지도 모른다는 딸내미 하나 달랑 낳고 도망간 아내에 대한 울분을 꾹꾹 누르면 사는, 홀아비 박씨도 파고드는 햇살을 굵은 이마의 주름으로 가리며 김양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사람마다 지나온 삶이 아파서 입을 다물고 그 날의 햇살만 이야기하며 산다. 그러나 박씨는 그 날 조차도 침묵하는 것 같았다. 고랭지 채소밭을 돌아다니는 조그만 화물트럭에 매달려 사는 박씨를 남들은 그냥 과묵하고 얌전한 사람이라고만 했다. 새벽에 쌕쌕 잠자는 다섯 살 난 딸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한번 씩 웃고 집을 나선 박씨가 김장배추를 잔뜩 싣고 서울까지 달렸다가 졸음이 가득한 눈을 비비며 밤늦게 돌아오면, 안채의 할머니에게 맡겼던 딸도 열린 문 앞에 서는 자동차소리에 얼른 깨어 졸린 눈을 비비며 뒤뚱뒤뚱 마루 끝까지 걸어 나와 어리광몸짓으로 두 팔을 벌렸다. 이때 비로소 박씨의 몸에서 생기가 돌고 말문이 열린다. 번쩍 들어 안은 딸이 여릿한 팔을 동그랗게 하여 박씨의 목을 감는다. “아빠, 담배냄새가 많이 나.” 뽀얀 강물 같은 이마에 대고 뽀뽀를 하자 딸은 입술을 삐쭉 내밀며 말했다.

박씨는 부엌으로 통하는 쪽문 옆에 달린 온수보일러 스위치를 누르고 옷을 벗었다. 팬티 하나만 입고 부엌바닥으로 내려서자 딸도 쪼르르 따라 내려서더니 넓은 부엌 저쪽의 귀퉁이에 놓여진 비누가 담긴 통을 엉거주춤 들고 왔다. 언제부터인가 딸은 박씨가 목욕하는 일에 참견하기 시작했는데 사뭇 진지하여 맵시가 귀여웠다. 부쩍 추워지기 시작한 날씨지만 우선 찬물을 머리부터 한 바가지 퍼붓는 아빠를 눈까풀까지 파르르 떨며 저쯤 떨어져서 눈부신 듯 쳐다보다가, 자기 손보다 더 큰 비누를 두 손으로 집어서 등에 대고 얼기설기 문질렀다. 처음에는 비누가 자꾸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지만 어디서 봤는지, 며칠 전부터는 꺼끌꺼끌한 때밀이타올로 비누를 감싸 쥐고 비누칠하는 것이었다. 비누를 머금은 딸의 조막손이 등에서 간질간질 돌아다니면 박씨는 꼭 눈앞에 아내의 하얀 손이 거품을 물고 흔들리는 것 같았다. 눈이 펑펑 내리던 날, 아내는 평창에 사는 노름꾼과 눈이 맞아서 서울로 도망갔다. 백일을 갓 지난 딸을 포대기에 꽁꽁 싸안고 하얀 천지로 뒤덮인 길에 서서, 망연한 시선을 고개 너머로 펼쳐진 강철 같은 하늘에 두었던 박씨였다. 포대기 속에서 꼬물꼬물 대는 아기도 그 건달과 붙어서 임신한 남의 자식이라는 소문이었지만, 유난히 잘 울어대는 아기를 물리치지 못하여서, 기저귀를 갈아 채우고 분유를 사러 슈퍼마켓에 뛰어다니느냐고, 낮과 밤이 뒤바뀌어 밤에는 유독 잠을 안자고 칭얼대는 아기여서, 그러다가 병이라도 나면 홀딱 이삼일 밤을 새우고 벌건 눈으로 병원에 다녀오다가 눈물을 참느냐고, 누구의 자식인지 따질 겨를도 없었다. 죽을까봐 겁나서 키운 딸이었지만, 방긋방긋 웃는 해맑은 표정에 넋을 빼앗기기도 한 박씨였다.

“이제 다 되었습니다. 나머지는 아빠가 비누칠하고 씻을 거예요.”

“아니에요, 제가 엉덩이까지 다 씻어드릴게요. 엉덩이를 들어보세요.”

“아이구, 숙녀께서 남자 엉덩이를 만지면 부끄럽잖아요.”

“헤헤,”

어디를 가면 딸은 남자화장실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의 행동보다도 남자의 행동에 더 친숙했다. 언젠가 길을 같이 가다가 소변이 마려운 박씨가 남자화장실에 들어서서 소변기 앞에 섰다. 그러자 딸도 쫓아 들어서더니 “나도 오줌 마려워”하고는 박씨처럼 소변기 앞에 벌떡 서서 바지를 내리는 것이었다. 아차, 하며 박씨가 소변을 보다 말고 옆을 보자 딸은 배 아래를 내려보다가 왜 자기에게는 남자처럼 고추가 안 달렸냐고 묻듯이 당황한 표정을 짓고는 아빠를 올려다보았다. 정작 오줌을 찔끔 흘리며 바지가랑이에 묻힌 사람은 박씨였다. 얼른 딸을 안아다가 대변기가 놓인 화장실에 들어섰다. 이럴 때는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박씨는 다방에 들어섰다.

배달을 다녀온 김양은 주방에 쭈그려 앉아서 밥을 먹다가 일어서며 엽차를 가져왔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창가에 자리한 박씨를 보며 슬쩍 한 마디 던졌다.

“오늘은 왜 일 안나가세요?”

박씨는 평소처럼 씩 웃고는 입을 다물었다. 두 달 전에 이 다방으로 일하러 온 김양이 처음 박씨를 보았을 때, 참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가을 향기를 풍기는 과묵한 사람이었다. 어느 고장이든지 일하러 가면 동네남자들이 찝쩍대며 이런저런 말을 붙이기 일쑤였다. 서른 네 살이지만 얼굴이 제법 반반하고 몸매도 그럭저럭 쭉 빠진 김양이기에 더 했다. 편하게 찝쩍댈 수 있는 여자에게 굶주린 시골동네의 남자들이 바로 김양처럼 떠도는 여자들의 밥그릇이었다. 남자란 누구든지 새로운 여자에게 약한 법이고 여자란 자기 가치를 자기가 결정하게 마련이다. 비록 다방 아가씨지만 정장을 잘 차려입고 세련된 말투로 좁은 동네를 활보하다보면 굵직한 손님들이 걸리게 마련이다. 기름기 빠진 아내의 얼굴과 시골생활에 지루함을 느끼는 동네유지들이 서로 다투어 저녁식사나 하자고 달려들었다. 여러 명의 남자를 놓고 저울질하며 밀고 당기다가 돈 잘 쓰고 뒤탈 없는 남자를 고르면, 적당히 몸을 달구어 놓고 살랑살랑 대다가 못 이기는 척 모텔로 끌려가 옷을 벗는다. 물론 돈이 굴러들어오게 마련이다. 여자란 확실히 남자보다 먹고 살기 편하다. 일단 벌린 다리 사이로 순진한 남자들이 걸려들면 인정사정없는 공격이 시작되고 자신의 체면 때문에, 마누라가 무섭기 때문에, 또는 동네에서 소문날까 봐, 쥐꼬리만한 위세를 내세우던 남자들은 당하게 마련이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오직 당신뿐이 없다는 입 발린 소리로 상대를 혼란에 빠뜨리며 끊임없이 돈을 요구하여, 상대방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뼈골을 빼 먹어야 자기도 살고 언니에게 맡기고 울며 떠나온 아이들도 부양하는 길이었다. “돈에 무릎을 꿇지, 남자에게 무릎 꿇는 것은 아니다.”라는 생존법칙이 살살 웃음 치는 김양의 눈길 뒤에 비수로 도사리고 있었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작은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자 한층 어깨가 무거워졌다. 아이들에게 직접 들어가는 돈도 돈이지만 어렵게 사는 언니의 생활도 무시할 수 없었다. 양육비조로 매달 돈을 보낼 때면 온라인 입금용지에 자기를 스친 남자들의 체액이 묻어나는 느낌이었다. 그러면 등골을 거슬러 오르는 소름이 머리끝까지 뻗혀 올라 정신이 아찔해졌다. “몸 판 돈”이 아이들을 오염시키지 않을까 염려도 되었지만 개 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고 자위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커피 가져 와.”

낮게 날아온 박씨의 마른 음성이 꼭 가을들판 같다고 느껴졌다. 김양은 가늘게 눈웃음을 쳤다.

“나도 한 잔 마실래요.”

무표정하게 고개만 끄떡하는 박씨였다. 김양은 갸웃했다. 약간 마른 듯한 몸매와 검게 그을린 얼굴의 박씨에게는 지금 밖에 펼쳐진 가을풍경이 새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허랑하게 큰소리치는 시골 사람들과 달리 박씨는 말이 없었고, 가끔 혼자서 다방에 들어오면 그저 먼 하늘만 쳐다보다가 일어서곤 했는데, 약간 쳐진 어깨에는 꼭 삭풍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는 듯 했다. 깊게 그늘진 눈은 더 했다. 심오한 가을 풍경이 눈동자 깊은 저 속으로 쭉 깔려 있고, 그 속으로 한없이 걸어 들어가는 그림자가 보일 것만 같았다. 김양은 어렴풋이 자기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동네유지들에 비하면 행색도 초라하고 돈도 없는 홀아비지만 말없이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박씨에게는 있었다. 김양은 커피를 가져와 탁자에 놓고 마주 앉았다. 이전처럼 그냥 커피만 홀짝이고 한 마디의 말도 건네지 않는 박씨였다. 날카로운 김양의 눈매는 박씨가 무언가 심란한 지경을 헤매고 있음을 간파했다.

“뭐, 근심이라도 있으세요? 표정이 무척 어두워 보여요.”

다섯 살 난 딸이라도 아픈가 해서 물었다. 그러나 박씨는 멍한 시선을 창밖에 내놓은 채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호호, 왜 그렇게 넋이 나가있어요? 제 말이 안 들리세요?”

문득 고개를 돌려서 김양을 쳐다보는 박씨였다.

“응? 무슨 말인데?”

섬뜩했다. 순간적으로 스친 박씨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고, 평소에 비치던 가을 그림자가 안 보였다. 박씨는 수줍은 듯 눈을 깜빡이고는 이내 불타던 눈빛을 거두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어제의 일이었다.

박씨가 강릉으로 김장배추를 실어 나르고 돌아오는 길에 핸드폰이 울렸다. 고한에 사는 친구로부터의 전화인데 방금 강원랜드 카지노에서 미나엄마를 봤다는 말이었다. 순간 박씨의 머리끝이 쭈뼛 섰다. 노름에 미쳐서 노름꾼하고 달아난 년이 아직도 노름에서 손을 못 떼었다는 생각과 아울러, 아무리 금수만도 못하지만 고한에서 정선이라면 자동차로 사오십 분의 거리밖에 안 되는데, 거기까지 와서도 자기가 난 딸을 모른 척 한다는 분노가 밀어닥쳤다. 박씨는 가속페달을 꾹 눌러 밟았다. 윙하는 소리와 함께 차는 질주했다. 정선읍 외곽도로를 빠져 동면을 지나 사북으로 달린 자동차는 멀리 산 위에 우뚝 솟은 카지노 건물을 바라보며 고한에 진입했다. 가파른 도로를 올라 고급승용차가 늘비한 카지노 앞에 차를 멈춘 박씨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의문에 사로잡혔다. 자식까지 버리고 떠난 여자며, 오년 동안 전화 한 통도 없던 냉정한 사람인데, 더구나 자기 마음에서는 이미 지워버린 여자가 아닌가, 왜 여기까지 미친 듯이 와야 했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별안간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박씨는 넓은 주차장에 앉아서 멀리 산등선을 타고 깔리는 어둠을 바라보았다. 인연이란 반은 하늘의 농간질이다.

카지노의 간판에 일제히 불이 켜졌다. 미나엄마는 카지노에서 돌아가는 우연이라는 패의 운명을 따르는 인연에 매달려 사는 현명한 여자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악을 쓰며 인연을 잡으려 해도 하늘의 농간질은 못 당한다. 슬럿머신에서 터지는 잭팟의 확률로 삶이 규정되지만 백만 분의 일이라는 그 확률을 잡으려 한 슬럿머신에 매달려 열심히 돈만 날리는 인생이 나라면, 미나엄마는 여유 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이 기계, 저 기계를 번갈아 가면서 슬슬 잭팟이 터지기를 기다리는 노련한 인생 같았다. 그래서 징검다리처럼 이 남자 저 남자를 밟아 건너뛰고 그에 대한 죄책감도 전혀 못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박씨는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면서 일어섰다. 분노도 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며 차에 오르는 순간, 환하게 불이 켜진 카지노에서 나오는 미나엄마의 눈길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머리 꼭대기까지 쳐 오른 상념을 기껏 무릎 아래까지 끌어내려 마음을 다독거린 수위가 점점 허벅지와 아랫배를 차오르더니 가슴팍에 턱 얹혔다. 미나엄마도 주차장으로 향하던 걸음을 딱 멈춘 채 얼어붙어 있었다. 약 삼십 미터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시선의 밧줄이 걸려 팽팽하게 당겨졌다. 미나엄마의 더욱 짙어진 화장은 오년의 세월을 가리려는 것일까, 더욱 패어져 가슴팍까지 흘러내린 분홍색 옷의 목선이 축 쳐져 보였다. 카지노 문이 열리면서 건장한 중년남자가 걸어 나오더니 미나엄마를 툭 치면서 빨리 가자고 재촉했다. 급히 바닥으로 꺾어 내린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 남자에게 돌린 미나엄마는 멀리 주차장에 세워진 고급승용차를 향하여 걸어갔다. 뒷모습이 약간 흔들려 보였고 발걸음도 휘청대는 것 같았다. 서울 자동차번호를 단 승용차는 박씨를 스쳐 지났고, 미나엄마의 눈빛도 축축한 빛을 띠며 박씨의 얼굴을 스쳤다. 이것이 오년 만에 만난 미나엄마와의 시간이었다.


김양과 박씨는 쇠락한 가을색으로 흐르는 조양강 내려다보며 거닐었다. 평소에는 김양이 저녁이라도 먹자고 해도 꼿꼿하게 거절하는 박씨였지만 그 날은 이상하게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객지로 떠돌던 삼년 만에 처음 즐기는 휴식과 같은 기분이랄까, 살짝 박씨의 팔짱을 끼고 걷는 김양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돈 때문에 만나는 남자들이야 수없이 많지만 하나 같이 뭔가 답답하고 불편했다. 떠도는 일터마다 쫓아다니며 가게라도 차려 줄 테니 관계를 지속하자는 사람의 성의 앞에서도 마음이 곤두 선 채 날을 세웠다. 남자는 여자의 들판이다. 시원하게 펼쳐진 들에 가을빛 내리면 한없이 그 속으로 걸어가도 좋을, 코스모스로 한껏 피어 몸을 흔들어도 좋을, 달빛을 깔아 마구 뒹굴러 좋아 할 존재면 충분하다. 말없이 걷던 둘 사이에 또 하나의 가을이 떨어지듯 박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 참, 이제 저녁 할 시간이네. 미나가 기다리고 있겠는데.”

김양은 빤히 박씨의 얼굴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내가 오늘 저녁에는 아저씨 밥을 해 줄까? 홀아비살림이 어떤지 보고 싶은데.”

거절하지 않는 박씨를 보며 김양은 박씨가 오늘따라 무척 외롭게 느껴졌다. 슬쩍 잡아끌어 동네로 향하자 박씨는 맥없이 딸려오듯 발걸음을 돌렸다.

대문을 들어서자 방문을 방싯 열고 내다보던 미나가 김양과 함께 들어서는 아빠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긴장한 표정을 보였다.

“아빠 친구인데, 인사해야지.”

박씨의 말에 미나는 턱을 뒤로 파묻으며 움찔대다가 겨우 고개를 꾸벅했다. 김양은 미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뺨에 뽀뽀를 하고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찬장을 열어보니 아침에 해 놓은 것으로 보이는 밥이 반 그릇 정도 담겨있고, 옆에는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김치와 마른 반찬이 놓여있었다. 국거리를 찾아보니 마땅한 것이 없었다.

“아유, 정말 홀아비살림 못 봐 주겠네. 도대체 뭘 먹고 사는 거예요?”

반쯤 부엌으로 얼굴을 내민 박씨는 씩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김양은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고 잰걸음으로 시장을 향했다. 머릿속에는 무슨 국과 반찬을 마련할까 하는 생각이 맴돌았다. 시장입구에서 김양은 별안간 멈칫했다. 가족을 위하여 시장을 간다는 일, 맛있는 음식을 마련할 생각에 몰두한다는 일이 별안간 생소하게 느껴졌다. 눈물이 핑 돌았다. 누구나 평범하게 하는 일이 지구 저쪽 끝으로 멀어진 세월이 아니었는가, 빚만 잔뜩 져놓고 쓰러져 저 세상으로 떠난 남편이 언제 내 인생과 함께 했던가, 언니에게 맡긴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마치 평범한 가정주부처럼 시장 안으로 들어선 김양은 이것저것을 따지며 저녁거리를 장만하기 시작했다. 내일까지 먹으려면 동태 세 마리는 끓여야 하고, 미나리, 파, 마늘도 새로 준비하고 굵직한 무우도 한 개 골랐다. 걸음을 옮겨 이번에는 싱싱한 걷저리와 배추김치도 샀다. 손에 들은 검은 비닐봉투가 제법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다시 잰걸음으로 시장 위의 반찬가게로 달려간 김양은 콩자반과 깻잎무침, 짭짤한 젓갈을 샀다. 두 손에 반찬거리를 가득 들고 골목을 돌아서 대문으로 들어서자 툇마루에 앉아있던 박씨가 얼른 일어서더니 짐을 받아주었다.

박씨는 부엌에서 들리는 수선스런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앉아있었다. 탁탁탁 도마질하는 소리가 났다. 찬장 여닫는 소리, 그릇 부딪치는 소리, 냄비뚜껑 닫히는 소리, 여기저기 옮기는 발걸음소리가 한참 나더니 동태국 끓는 냄새가 풍겼다. 적막했던 부엌이 별안간 생기를 얻어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미나는 김양이 시장에서 사온 과자를 옆에 두고 어린이 그림책만 뒤적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벌떡 일어나서 부엌을 한번 힐끔 내다보고는 다시 구석자리로 돌아와 책을 뒤적였다.


“자, 식사가 다 준비되었어요. 모두 맛있게 먹읍시다.”

상을 들고 들어오는 김양의 얼굴이 환했다. 그 상을 박씨가 맞받아서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찬장 위에 두었던 사기그릇까지 다 꺼내어 밥을 소담하게 담았고, 얼큰한 동태국에서는 구수한 냄새가 풍겼다. 상이 반찬으로 가득 찼다. 김양은 수저를 드는 박씨의 손끝이 약간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김양도 마찬가지였다. 한 끼니의 저녁식탁이 엄청난 삶의 무게로 다가왔다. 김양은 미나에게 수저를 쥐어주며 맛있게 먹으라고 말했다. 미나는 힘없는 표정으로 한번 수저질을 하더니 동태국이 맵다고 얼굴을 찡그렸다. 콩자반과 다시마튀김을 밥에 얻어주었지만 미나는 이내 숟가락을 놓으며 먹기 싫다고 물러서고는 아빠의 무릎에 얼굴을 기대고 비스듬히 옆으로 누웠다.

“어디 아프니?” 김양이 물었지만 미나는 풀기 없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만 옆으로 저었다. 박씨는 김양에게 미안한지 미나에게 두 어 번 밥을 먹으라고 타이르다가, 어디가 아픈 것 같으니 나중에 먹으라며 빙긋 웃었다.

박씨는 밥과 국을 한 그릇씩 더 해치우고는 천정을 한참 올려보다가 김양을 묵묵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따가운 시선이 뺨에 닿는 느낌에 힐끗 박씨를 바라본 김양은 정말 이 남자는 지금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가 벽 틈새로 스며드는 가을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박씨는 담배를 한 대 물더니 어느덧 잠든 미나의 뺨을 쓰다듬으며 낮게 입을 열었다.

“사실 어제 미나의 엄마를 보았어.”

김양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말 한마디 붙이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한 채 그냥 먼 거리에서 바라만 보았는데, 참 이상한 일이야. 수없이 잊겠다고 다짐하고 또 잊었다고 믿었는데, 그 여자를 보자마자 온 몸이 왜 얼어붙었는지 모르겠어. 너무도 그 사람에 대한 증오심이 강했나 봐. 증오심이 살아있는 한 나는 오년 전의 구렁텅이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 오늘의 햇살은 오늘만 비치지 어제를 비치는 것이 아니거든, 그것도 모르고 살았으니 나도 참 바보긴 바보야.”

김양은 박씨의 눈 속을 들여다보면서 더 이상의 말을 기다렸으나 박씨는 입을 다물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 답답함을 깨려는 듯 약간 톤을 높여서 김양이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오늘 말이에요. 저녁을 지으면서 별안간 고향에 돌아온 느낌을 가졌어요. 사소한 반찬거리를 장만한다는 것이 참 행복하다는 것을 알았죠. 무엇보다도 같이 함께 밥을 먹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어요. 돈 하나 때문에 사방팔방을 떠돌아다니지만 언젠가는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깨닫고 울 것 같아요. 못사나 잘사나 같이 살아야 하는데,”

아이들이 밟히는 김양의 눈에서 빛이 반짝했다. 얼른 일어서더니 설거지 한다고 부엌으로 몸을 돌렸다. 둘 사이에서는 더 이상의 대화가 없었다. 커피를 마시며 바람에 우수수 낙엽 떨어지는 소리와  가랑잎이 돌돌 굴러가는 소리에 넋을 놓고 앉아있었다.

김양은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며 찬장안의 어디에 무슨 반찬을 넣어두었으며, 아까 사온 김치는 내일 다 익으면 꼭 냉장고에 넣어두라고 이르며 일어섰다. 골목 어귀까지 바라다 주려고 박씨가 툇마루를 내려서며 신을 찾아 신는 순간, 잠들었던 미나가 벌떡 일어나더니 깜짝 놀란 표정으로 아빠를 불렀다. 박씨가 돌아서며 왜 그러냐고 묻자 미나는 꼭 울음이 터질 것 같은 표정으로 달려와 품에 뛰어들었다. 김양은 미나가 어디 아픈 모양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미나를 안고 골목을 나서서 큰길에서 김양을 보냈다. 손을 흔들며 돌아선 김양이 외로워 보인 박씨지만, 저 만치 가다가 돌아보며 골목을 들어서는 박씨의 뒷모습을 보며 역시 외롭다고 느낀 김양이었다. 미나는 한쪽 팔로 목을 감고 고개를 꺾어 아빠의 어깨에 얹고 있었다. 박씨의 귀에 미나의 숨결이 간들간들 흔들렸다.

“미나야, 어디 아파?” 박씨가 물었다.

“아니, 하나도 안 아파.”

“그런데 왜 밥을 안 먹었어?”

잠시 미나의 숨결이 높아지는 듯하더니 가냘픈 음성으로 말했다.

“나...... 그 아줌마가 해준 반찬 하나도 안 먹을 거야.”

순간 박씨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뭉클한 기운이 목에 컥 걸렸다. 미나는 아빠를 뺏길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듯 앞이 뿌옇게 변했다. 여기에는 하늘이 부리는 인연의 농간질이 끼어들 틈이 없을 것이다. 미나의 등을 토닥거리며 잠시 숨을 고른 박씨는 말했다.

“응, 나도 안 먹을게, 아줌마가 해 준 반찬이 맛 없더라.”

“정말?”

고개를 번쩍 쳐든 미나가 박씨의 목을 두 팔로 감고는 몸을 흔들며 물었다.

“응. 정말이야.”

“헤헤”



글 / 은하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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