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방은 위진호가 신경질을 내며 내뱉은 말에 결국 손발을 다 들었다. 갑자기 가슴이 갑갑해지며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철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까 하고 고개를 저었다. 사실상 무력시위를 하려 왔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고, 좀 더 무겁게 보여주어야 했지만 지금의 행동은 완전히 저자거리 왈패들의 시비와 다를 게 없었다.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하인들의 경멸에 가까운 시선에 왕망은 얼굴이 따가웠고, 한숨만 절로 나왔다.
“야 뭐해, 어서 안내해!”
위진호는 멈칫거리는 하인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리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위진호는 일행을 거느리고 위세 좋게 하인들의 뒤를 쫒아갔다. 잘 꾸며진 객방에 들어선 위진호일행은 마련된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 장주님께서 오실 것입니다!”
하인들이 차와 간단한 음식을 내왔다. 왕방은 진행되는 상황이 아슬아슬한 줄타기 곡예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난번에 청혼을 위해 서찰을 가지고 방문할 때와는 다르게 복잡한 절차와 격식이 있었다. 그렇다고 우호적인 분위로 손님대접을 하는 것이 아니고 기분 나쁘면 가라는 식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아무리 내키지 않는 혼사라고는 하지만 무림맹주가 주선하는 것이라 쉽게 깰 수 없는 혼담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식의 대접을 한다는 것은 분명 무언가가 있었다.
‘허! 이래서야…. 아무래도 그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조심해야겠어.’
정민은 옷 을 다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손에 접부채하나만 더 든다면 유약한 문생의 모습으로 보일 법한 모습은 아니라 다행으로 생각했다. 옷 입는 것을 도와주던 여종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흠, 그런대로 장부다운 풍모는 있구나. 어딘가 하나가 빠진 것 같은데…!’
별채의 불길을 뚫고 나온 후 처음 거울을 보았을 때에 비하면 사람다운 모습이었다. 그때 거울에 비춰진 얼굴은 머리는 물론이고 눈썹까지 몽땅 빠져 영화에 나오는 외계인의 모습과 다름이 없어 기겁을 했다. 그런대로 봐줄만한 호남형의 얼굴이었지만 사춘기 때 여드름이 심했던 관계로 멍게라는 별명을 얻었었고, 대학을 다닐 때 이후로 마른데다 여드름 자국까지 남아 있어 오이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두 번의 환골탈태를 거치면서 아기처럼 탱탱하고 뽀얀 피부를 가지게 되어 멍게나 오이지란 별명은 다시 듣지 않아도 되었지만 이제부턴 문어대가리라는 별명을 갖기 딱 알맞은 모습이었다. 그나마 위로를 얻은 것은 그 덕분에 나이가 어려 보인다는 것과 짝퉁선녀 화령이 이미 배위에서 본적이 있었기에 약간 놀라는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특히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 보인다는 것이다.
화령의 나이를 추정해 보건데 이십대 초반으로 보였기에 서른을 넘긴 나이가 연애전선에 문제가 생길까 걱정했었던 것이다. 그리고 화령의 나이가 스물둘이라는 소리를 듣고 나이를 속였다. 스물여섯 살이라고 했을 때 오히려 더 어린데 나이를 속인다는 엉뚱한 오해를 받기도 했다. 하여간 그것 때문에 기분이 좋았다, 과거인 미래에서는 제 나이를 말해도 나이를 깎으면 좋으냐는 핀잔을 들어 왔는데 이곳에서는 그 반대였으니.
“화령 아가씨, 장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으응, 유 장주가 웬일로 직접 왔지?’
방문이 열리고 유벽이 들어섰다. 유벽의 입이 자신도 모르게 벌어졌다. 유벽은 정민에 대한 첫인상 별로였기 때문에 정민의 변화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물론 하루아침이 아니라 한낮 한 시진 만에 정민의 도움으로 일어난 방중선의 변화를 보긴 했지만 실력 - 방중선의 설명에 의하면 당대 거대문파의 장로급 이상이라고 했지만 실재로 겪어보지 않았으니 믿을 수 없고 - 은 그렇다 치고 정민이 오던 날의 기억은 쉽게 지울 수 없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려 길이 질척였다. 장하걸의 눈에는 정민이 미친척하고 여염집 여인의 가슴에 얼굴이나 묻는 파렴치한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유가장에 도착한 즉시 아주 심한방법으로 미친놈의 연기를 밝혀내려고 했다. 몸이 마비되어있었기 때문에 마차에서 내릴 때 부축을 해야 했다. 장하걸이 직접 하겠다고 자청을 했다.
‘이놈, 그만 정체를 밝혀라.’
‘이 아저씨가 왜이래? 어어!’
“어어, 아이쿠!”
- 철퍼덕!
“어머, 공자님!”
정민은 보기 좋게 진창에 거꾸로 처박혔다. 얼굴을 흙탕물에 처박은 채 그 자세 그대로 움직일 줄 몰랐다. 만일 연기였다면 숨이 막혀서라도 조금이라도 고개를 움직였을 것이지만 나무토막처럼 그대로 있었다. 정민은 지금 천부무관 입경이란 책에 푹 빠져서 외부와는 완전히 의식을 차단하고 있었다. 때문에 외부의 자극과 상황 변화에 대해서 전혀 몰랐으며, 그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어차피 알고 있다고 해도 움직일 수 있는 건 얼굴 근육뿐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기에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어서 일으키세요!”
“네네, 아가씨 저리 비키세요. 어, 물에 젖어서 손이 미끄럽네요!”
장하걸은 최대한 시간을 끌며 정민이 숨이 차 스스로 몸을 움직이길 바랐지만 반각이 지나도록 그대로 물속에 코를 처박고 있었다.
‘어, 이러다 진짜로 죽는 거 아냐!’
장하걸은 더럭 겁이 났다. 괜히 숨이 막혀 죽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야, 뭐하니! 빨리 와서 돕지 않고….”
지금까지 느긋하던 장하걸의 몸놀림이 빨라졌고, 하인들까지 재촉했다. 몸을 돌려놓고 보니 다행히 미약하게나마 숨을 쉬고 있었기 때문에 한시름 놓은 장하걸은 이어지는 화령의 질책을 한 마디 변명도 못하고 고스란히 받아야했다.
이미 전서구를 통해서 배에서 일어났던 소동을 전해 받은 유벽은 딸이 도착했다는 전갈을 받고 마중을 나왔다가 이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얼굴 여기저기에 진흙을 묻힌 채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정신을 잃고 장하걸과 하인들의 손에 들려있는 문어 대가리(?) 인간이 유벽이 본 정민의 첫 모습이었다.
그날로부터 삼일 후, 유벽은 정민이 정신을 차리고 있는 모습은 보긴 봤어도 침대에 누워 눈만 껌벅이는 모습이었다. 바로 그 다음날 아침, 대소동이 일어났다. 하루 종일 일어난 소동 후 정민의 모습은 조금은 달라졌지만 유벽의 눈에는 별로 달라진 게 없어보였다. 단지 손을 쓰고, 걷고, 말하고, 그리고 글쓰기를 할 줄 알아 다행이라 생각했을 뿐 이었다. 심각한건 말하는 것이 완전히 다섯 살 아이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혹시 출신이 오랑캐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불안했지만 생김새를 볼 때 감당 못할 이민족은 아닐 거란 생각에 일단 덮어 두었지만, 근심거리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랬던 그가, 옷을 제대로 차려 입고 긴 머리를 단정하게 묵고 나서자 옷이 날개라는 말이 이걸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해주었다. 약간 창백한 기운 때문에 전체적으로 냉정해 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입가에는 장난기가 잔뜩 묻어있는 묘한 매력을 주는 모습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유벽은 화령이 한눈에 반한 이유를 이제야 이해가 됐다.
“어때요,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지요?”
“허허, 과연 그렇구나!”
“하하, 그렇습니까!”
“네, 멋있으셔요, 그것도 아주!”
짝퉁선녀의 말 한 마디에 정민은 그동안 옷을 입으면서 떠오른 안 좋은 기억으로 인해 나빠졌던 기분이 봄눈 녹듯이 풀렸다.
“오늘 만나야할 사람이 누군 줄 아는가?”
“다시 한 번 더 말씀해 주시죠!”
‘허, 말만 잘하게 되면 금상첨화인데, 아깝다! 뭐 앞으로 차츰 나아지겠지.’
“오늘(고개 끄떡, 다음) 만나야(고개 끄떡, 다음)할 사람이(고개 끄떡, 다음) 누구인가를(고개 끄떡, 다음) 아는가?(에구 힘들다.)”
“아, 개망나니요!”
“예엣!”
“개망나니…! 하하하, 맞아 맞는다고, 하하하!”
의외의 대답에 화령은 그저 얼굴만 쳐다보았지만, 유벽은 오랜만에 시원하게 웃었다. 그동안 교응방이 유가장과 교류하고 있던 도장들이 박살내며 속을 긁어댔지만, 그저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낯짝 두껍게도 청혼을 해왔고, 오늘은 지난 일에 대한 사과를 빙자해 일방적으로 쳐들어와서 맞선까지 보겠다고 하고 있었다.
“짝퉁…! 음…,”
‘윽, 실수다!’
“낭자, 나오지 마시오.”
“예엣, 무슨…?”
“망나니 장단 맞출 필요 없소!”
‘에구 힘들다. 역시 중국어는 어려워~여!’
그놈의 사성이 먼지, 겨우 말 한마디를 하고나니 입과 혀가 완전히 꼬이는 것 같았다.
“그러니, 나오지 마시오.”
“맞다, 너는 그냥 내당에서 기다려라. 그 버릇없는 놈들의 장단에 너까지 나서서 맞출 필요는 없다.”
겨우 정민이 말을 끝내자 유벽이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화령의 얼굴은 걱정이 한가득했다.
‘에구, 예쁜 얼굴 망가져요, 얼굴 펴세요, 펴!’
“하지만 그들이 행패라도 부리며 어떻게 해요. 장 집사님 말을 들으니 험한 자들이 쫒아왔다고 하던데 시빗거리라도 줘선 안 될 것 같아요.”
“네 말도 일리가 있다만, 지금까지 그놈들이 해온 짓거리를 볼 때 우리가 한 발 물러서면 두 발 내미는 행태를 계속할 것이다. 이 번 만큼은 작은 손해를 보더라도 물러서지 않겠다.”
‘하나도 못 알아듣겠네. 흠,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쉽게 결정될 것 같지 않은데 어떤 놈들이 왔는지 살펴볼까나. 어디보자…. 으응, 이놈은!’
-----------------------------------------------------------
한글날이 국경일이 되는 그 날까지… 아자 !
한글을 사랑 합시다.
내글이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