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관계
(26) 거부 할 수 없는 제안
서로 죽일 듯 노려보는 그 세 사람 틈바구니 속에 낀 영효가 그들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와 상큼한 레몬차 한잔씩을 건넸다. 레몬차를 들이키며 왜 왔냐고 상현을 향해 먼저 물음을 던지는 영효를 보며 상현이 말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거야? 우리 처남과 사이가 좋다고 해서 그런 줄만 알았어. 네가 행복해 질 줄 알았어. 그런데 불행한 거니? 란희한테 전화 왔더라. 너 소개팅 시켜줬다고.”
상현의 앞에서 소개팅이라는 소리가 나오자, 상한과 주혁 두 사람의 시선이 나란히 그녀의 얼굴에 꽂혔다. 이상하게 불안 하다 했다. 그 입 싼 란희가 말 하고 다니지 않았을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생각이 있다면 상현에게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래도 생각이 있다면............ 그런 그녀의 생각을 조롱이라도 하듯 그세 그에게 전화까지 해서 그 이야기를 전하다니. ‘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금방이라도 어떻게 된 일이냐고, 그녀를 조를 듯한 두 남자의 시선을 피하며 영효가 상현을 보며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 온 거야? 이제 너랑 나 아무 사이도 아니야. 내가 설령 그랬다고 해도 이젠 네가 신경 쓸 그런 일이 아니라고 . 정말 모르겠어?”
오히려 그의 관심이 부담스럽다는 표정으로 영효가 저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물론 두 팔 벌려 그를 환영해 주리라고는 믿지 않았지만 저렇게 정색을 하고 우리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것을 말 할 줄은 몰랐다.
“네가 자꾸 신경 쓰이게 하잖아. 나는 신경 쓰고 싶지 않은데 네가 자꾸 신경 쓰게 만들고 있잖아!”
막상 냉정한 영효의 말을 듣자 하니 울컥 마음속에서 무언가 올라와 소리를 버럭 질러버렸다. 상현의 말에 영효가 나지막이 웃었다. 즐거울 때의 웃음이 아닌, 이상하게 허탈하게 웃는 영효의 모습을 세 남자가 동시에 쳐다보았다. 그 남자들의 시선을 피하면서 영효가 상현을 쳐다보았다.
“나 결혼 할 거야. 그러니깐 신경 쓰지 마. 내가 무슨 일을 하던, 무슨 짓을 하던. 이제 더는 신경 쓰지 마. 너 신경 쓰는 것 싫어!”
“결혼?”
결혼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영효의 말에 상현과 주혁, 그리고 상한이 동시에 그녀의 말에 결혼? 이라고 반문했다. 그들의 반문을 예상 못한 것이 아니라 영효는 덤덤하게 그 세 사람의 반응을 받아들였다.
“그래! 결혼. 뭘 그렇게 이상하게들 쳐다봐. 나도 결혼 해야지. 평생 이렇게 살 수는 없는 법이잖아.”
물론 언젠가 그녀도 결혼을 해야 하겠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그녀의 입에서 결혼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지금 이 상황에서 결혼이라니. 도대체 누구와 결혼을 하겠다는 말인가! 앞에 앉아 그녀를 쳐다보는 세 남자의 얼굴이 약간 상기가 되었다. 서로 자신만의 생각에 충만한 얼굴로 세 사람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궁금증의 질문을 한 것은 주혁이었다. 사실 서로 그 이야기를 꺼내 서로 눈치만 보고 있던 터였다.
“도대체 누구랑 결혼을 한다는 거야? 설마, 소개팅 받았다는 그 남자는 아니겠지?”
“아니, 그 남자는 아니야.”
그럼 누구? 라는 의구심 강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누구 하나 그녀에게 그 질문을 던지지는 못했다. 다만 그녀가 알아서 대답해 주기를 원한다는 눈빛을 간절히 날릴 뿐이었다.
“그동안 혼자서 생각 많이 해봤어.”
‘그래서 전화도 안 받았던 거야?’라고 성급하게 묻는 주혁을 향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달라는 눈빛을 날리고 영효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나와 주혁이와, 그리고 상한 씨와의 관계에 대해서 말이야. 오늘 이렇게 이런 자리에서 상현이 널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고, 내 계획안에 넣은 일이 아니지만, 오늘 널 보니깐 한 마디 해야겠다.”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상현이 일순간 긴장된 표정으로 영효를 바라보았다.
“너 앞으로 내 일에 신경 쓰지 마. 예전에 똑 부러지게 이야기 한 걸로 아는데? 너 아직 까지 나한테 이러는 것. 남들이 보기에도 안 좋고, 나도 별로야. 그러니깐 앞으로는 내가 어떻게 살던 어떻게 지내던 신경 딱 꺼 줬으면 좋겠어!”
결심을 단단히 했었다. 더 이상 이상한 사랑의 감정에 휘둘려 힘들어하지 않으리. 그러기 위해서는 독해져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깨달은 그녀였다. 지금 뿐이다. 이렇게 힘든 것 지금만 지나면 한동안은 편해질 수 있다. 그런 생각에 영효는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물론 이렇게 말함으로 인해서 상현이 어떤 기분이 될 지, 또 책임감 강한 상현이 무슨 이유로 자신을 찾아왔는지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지만, 마음 약해져서는 안돼. 이 악물고 버티며, 상한과 주혁을 바라보았다. 저 두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 생각에 한 동안 머리가 지끈 거렸던 것을 생각하면 저 두 사람 앞으로 진단서를 끊어 돈이라도 청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날 그렇게 소개팅을 뛰쳐나온 이후, 처음 든 생각은 그녀의 인생에 다른 남자는 없다. 그것이었다. 아무리 세상에 반이 남자고 그 세상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산다고는 했지만 결론적으로 그녀의 남자는 저 두 사람 중에 하나뿐임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저 두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것도 확실했다. 그러나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은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영효도 알았다.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한다. 그것도 동시에.
믿기 힘든 이야기이고 감정이겠지만, 한 동안 머리가 빠지게 고민한 결과, 영효의 결론은 그것이었다. 저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고 있음을. 물론 그 사랑의 성격이 다르기는 했지만 그것은 분명 사랑. 그것이었다. 그래서 생각했었다. 그녀가 생각해 낸 제안. 그 제안이 다른 이가 들으면 ‘미쳤어. 미쳤어.’라고 말 할만 한 것임을 영효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결론은 영효 자신이고 자신이 판단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면 그것으로 되는 것이 아닌가. 영효는 이기적으로 변하기로 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상한도, 주혁도 그 둘의 입장도 아닌 오직 자신의 입장만을 내 세우기로 하였다.
“그동안 일부러 전화 안받았어. 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어. 그동안 상현씨와 주혁이 그리고 상한씨의 감정에 치여서 내 감정 정리할 시간이 없었어. 나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는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여기까지 온 것 같아.”
“그건........”
그녀의 말허리를 자르며 끼어들려는 주혁을 보며 ‘제발, 오늘은 내 이야기만 들어줘!’라고 말을 딱 잘라버렸다. 다시 숨을 고르고 영효가 말했다.
“누굴 사랑하느냐. 그 감정이 애매모호해서 난 잘 모르겠어. 생각을 해봤는데 난 두 사람 다를 사랑하는 것 같아. 한 사람만 사랑한다고 다른 사람은 사랑하지 못하란 법은 없잖아. 결국 한참을 생각해 본 결과는 그래. 내가 두 사람 다 사랑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시간이었어.”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어디 있어!”
“제발. 말 끊지 마. 싫으면 듣지 마! 제발!”
여기까지 인정하는데도 결코 쉽지 않았음을 그가 알아주길 바랬다. 물론 상한은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니깐. 그녀의 예상대로 상한은 조용히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말도 안 된다고 펄쩍 뛰는 것은 주혁이었다. 그녀의 행동패턴과 똑같이 움직이는 그들을 보자, 영효는 순간 자신들이 각본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 같다고 느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미리 짐작하고 그 사람의 행동에 따른 변화를 주는 일. 그 사람의 태도에 따라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얼마나 이상하고 묘한 일인가.
“많이 생각했어. 그동안 내 감정이 왜 그렇게 왔다 갔다 했는지에 대해서 말이야. 오래 생각하고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이야. 그러니깐 제발 생각이 있느니 없느니 미리 지레 짐작해서 판단하지 말아줘. 부탁이야.”
“우리 두 사람을 사랑한다면서 소개팅은 왜 나간거야?”
영효의 집에 들어오고 나서 상한이 처음으로 그녀에게 단독질문을 던졌다. 조금 전 그녀가 소개팅에 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묻고 싶었다. 도대체 우리 두 사람을 사랑한다면서 그 곳에는 왜 갔냐고. 왜 소개팅을 받은 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건........ 내 감정에 확신이 필요해서였어.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던 일이니깐. 그냥 한 사람은 내가 놓치기 싫으니깐, 이대로 놓아주기 싫으니깐 그런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었어. 그런 내 감정에 확신이 들기 위해서는 다른 감정이 필요했어. 그래서 그런 거야.”
“다른 감정으로 확신을 찾는다라..........”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상현이 중얼거렸다.
“휴우. 그런 게 있어. 저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막상 저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생김으로써 감정을 알게 되는 뭐 그런 종류 말이야. 다른 감정이 없었다면 평생 모를 그 감정을 그런 다른 감정으로 느끼게 되는 것을 말하는 거야.”
“정말 복잡하군.”
남의 이야기를 하듯 내 뱉는 상현의 말이 못내 얄미워 ‘원래 그래!’라고 톡 쏘아 붙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야기가 샛길로 새면 안 된다. 그러면 다시 처음부터 말을 이어야 하지 않는가? 두 번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이므로, 오늘 안으로 끝내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해 봤어. 지금은 너희 둘 다 사랑해.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를 알아보라고 나에게 주문한다면 그건 쓸데없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어. 심각히 고민을 해 봤는데 도저히 못 찾아낸 답이거든.”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그럼 우리 둘과 나란히 사귀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응. 그래!”
주혁의 말에 냉큼 영효가 대답했다.
“뭐어? 응 그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제 정신이야? 너. 제 정신이냐고!”
“말짱해. 제 정신이야. 내가 생각한 결론은 그것이야. 너희 둘 다 사귀어 보는 것. 그리고 너희 둘 중의 한 사람이랑 결혼 하는 것. 그것이 내 결론이야.”
“그게 양다리랑 무슨 차이가 있어!”
치밀어 오르는 화를 이기지 못해 벌게진 얼굴로 일어나, 영효를 향해 따지는 주혁을 보며 상한이 ‘양다리는 몰래 피는 것이고, 이건 지금 너와 나의 동의를 얻기 위해서 하는 말이잖아. 아까 영효가 했던 말 기억 안나? 싫으면 듣지 말래잖아. 싫으면 안한다고 하면 그만이야. 그렇게 부르르 할 것 없다고.’ 라고 말했다. 역시 상한이었다.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저렇게 쉽게 그리고 요점정리까지 잘 해서 똑 부러지게 말하다니.
“난 용납 못해! 난 절대 용납 못해!”
그녀를 향해 못 박듯 소리치는 주혁을 보며 영효가 작게 한숨을 내 쉬며 말했다.
“그래. 싫으면 하지 마. 네가 싫으면 안하면 그만이야. 어느 누구도 너에게 강압적으로 이 일을 강요하지는 않아.”
그녀의 말에 주혁이 입을 다물었다. 포기라. 용납을 못하면 영원히 영효에게 손을 터는 것이라고. 백기를 훌훌 들고 그녀에게 손을 떼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지금 영효는 그에게 용납과 또는 영원한 이별. 두 갈림길에서 그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었다.
“제길!”
낮은 욕지거리와 함께 다시 바닥에 아빠다리로 주저앉은 주혁이 영효를 쳐다보았다. 확신이 필요했다. 자신이 알고 있고, 느끼고 있는 것이 사실인지에 대한 확신.
“내가 용납 못하면 우리 영영 이별. 맞아? 내가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이 정확해?”
그의 물음에 영효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제길.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어떻게 당당히 두 남자를 사귀겠노라. 싫으면 떠나라고 요구할 수 있는지. 아무리 영효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봐, 세상 사람들이 네 이야기 들으면 웃어. 아무리 사람 감정이 하나가 아니라고 해도, 다른 사람들은 용납하지 못한다고. 여태껏 그런 사람 이야기 주변에서 들어 본적 있어? 난 없어. 그런 것은 없었다고. 그게 무슨 소리냐? 그건 말이 안 된다는 소리야. 정신 차려. 네가 지금 헷갈리고 있는 거라고.”
“아니, 헷갈리지 않았어. 지금 어느 때보다도 더 내 감정에 대해 잘 알고 있어. 그리고 다른 사람이 뭐가 중요해? 지금 중요한건 너와 나, 그리고 상한씨 아니야?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던 내가 행복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그 방법도 존중해 줘야 하는 것 아니야? 소수의 행복도 행복이라고. 다수의 행복이 꼭 맞는다고 말한다면 그건 대단한 모순이고 착각이야!”
역시 박영효였다. 영효도 국어교육학과를 나왔던 학생이었다. 말로써는 그녀를 이길 수 없다. 저 화려한 논리적인 대답. 상현은 지금 그녀의 그런 특기가 나온다는 것이 못마땅하면서도 씁쓸했다. 그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지금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시선을 무시하면서 까지 결정을 내리려고 하는 영효의 무대뽀적인 태도를. 그리고 화려한 말로써 상대를 제압시키려고 하는 그 행동을 바라보면서 분명 자신도 그러한데 막상 자신의 싫어하는 부분을 그러면서도 하게 되는 부분을 영효에게서 보게 되자 낯선 감정에 오돌 도돌 한기가 돌았다.
“아까도 분명히 말했듯이 싫으면 안하면 그만이야. 내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난 그래서 결심 했어. 두 명 다 만나보기로. 그런데 한 명이 포기하면 싫다고 하면, 나도 내 감정. 정리 할 거야. 포기 할 거야? 확실히 말해줘. 나 질질 끌고 싶지 않아. 두 번 다시 이 일가지고 언쟁 펼치고 싶지도 않고.”
똑바로 주혁을 쳐다보면서 양 갈래 선택을 강요하고 있는 영효를 보며 그는 어떻게 그녀를 받아들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펄쩍 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영효를 놓치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가만히 앉아서 그녀의 처분만을 기다린 다는 표정으로 있는 상한을 노려보았다. 저 능글맞은 구렁이 자식! 저 자식도 펄쩍 뛰었다면 얼마든지 영효를 설득시킬 수 있었는데. 저렇게 방관하고 있는 표정이라니. 분명 저 녀석 속에는 100마리의 능구렁이가 들어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주혁이었다. 아니, 사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상한의 저런 태도가 은근히 부럽기 까지 했다. 영효의 마음에 들기 위해 본심을 감추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진정 다른 이의 생각까지도 이해하려고 하는 행동이인지 분간은 가지 않지만, 어쨌든 자신처럼 펄쩍 뛰는 일 보다는 적어도, 적어도 현명한 일 같았기 때문이었다. 펄쩍 뛰지만 않았어도 영효에게 이렇게 집중적으로 선택을 강요당하는 일은 없었을 테니깐 말이다. 어서 대답하라고 재촉의 눈빛을 연신 보내고 있는 영효와, 그런 주혁이 어떤 대답을 할지, 그리고 그 대답으로 인해 자신이 얻게 될 것을 머릿속으로 연신 돌리고 있는 듯한 상한의 표정.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상현. 그 세 사람의 집중 조명을 받으며 주혁은 난감한 표정으로 오도카니 서 있었다.
‘미치겠네. 싫다고 하면 영효를 포기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저 이중인격자와 영효를 두고 경쟁을 해야 하고. 둘 다 정말 .........’
결국 그 세 사람의 눈빛에 못 견뎌 주혁이 겨우 내 뱉은 말은 ‘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였다. 시간을 벌고 싶은 거였겠지. 어떤 것이 현명한 일인지 생각할 시간. 상한이 주혁을 쳐다보며 너도 별 수 없구나? 라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 치가 떨리게 화가 나면서도 주혁은 어쩔 수 없이 바닥에 다시 엉덩이를 붙여 앉았다. 주혁의 20년 자존심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말했듯 난 두 사람이 동의를 한다면 두 사람을 동시에 만날 생각이야. 그리고 그 만나는 시간 내에, 아, 이 사람은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면 주저 않고 다시 우리의 자리를 마련할거야.”
“그렇게 해서 나머지 하나를 떨어트리고 진정한 사랑을 찾겠다?”
비꼬는 말투로 말하는 상현을 노려보며 영효가 작게 숨을 들여 마셨다.
“그렇게 비꼬지 마. 결론적으로는 그렇지만 말이야. 분명히 말했듯이 강요는 아니야. 싫으면 안하면 그만이야.”
영효의 말에 주혁은 ‘그게 강요가 아니고 뭐야?’라고 말하려다가 역시나 방관자의 표정으로 앉아 있는 상한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이제 대답해줘. 싫은지 좋은지. 그리고 이 두 사람이 다 싫다고 해도 난 어쨌든 다른 남자를 만나서라도 결혼 할 테니깐, 상현씨는 오늘 이후로 나라는 존재를 잊어줘. 제발 부탁이야.”
조금만 더 신중히 생각하고 올 것을. 아니면 오늘이 아닌 다른 타이밍에 올 것을. 상현은 자신이 타이밍을 잘 못 맞춘 형벌을 톡톡히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영효의 말이 영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말에 못내 서운하기는 하지만, 그녀의 말에 반복할 수 없다는 것이 쓰릴 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일로, 서로 소식쯤은 알고 지냈으면 했던 것이 그의 마음이었다. 사람 마음 간사해서 아무리 지금 주리와 잘 지낸다고 해도, 못내 가슴속에 영효의 자리가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못 보면서 영 괴로워하는 편 보다야, 얼굴이라도 보면서 그녀 사는 모습을 친 오빠처럼 보살펴 줄 요량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톡 쏘아붙이는 것을 보니, 그런 이야기를 상현이 꺼낸다면 어떻게 나올지 눈에 선해, 상현은 입을 다문 채, ‘알았어.’라고 짧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그는 원하지 않은 대답. 그러나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내 뱉으며 상현은 마치 자신이 마네킹 인형이 되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라는 말만 녹음 되어 있는 마네킹 인형.
“자, 이제 대답해줘. 주혁은 시간을 좀 달라고 했고, 상한씨는 어때?”
“꼭 이렇게 해야 할 만큼 절박했어? 생각 없는 사람도 아닌데 꼭 우리 앉혀 놓고 이렇게 통보하듯 말 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던 거야?”
상한의 말에 영효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쓴 계피를 한 모금 털어놓은 표정. 그 표정으로 영효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도 모두 힘들었겠지만, 그 사이에 낀 나도 정말 힘들더라고. 그만 두고 싶다, 손놓아 버리고 싶다는 생각 한 두 번 한 게 아니야. 그만큼 나도 내 자신의 감정을 알고 싶었어. 적어도 한 사람이라고 정해지면 이것 보다는 덜 힘들겠지. 그랬거든. 그런데 아닌 걸 어떻게 해. 두 사람 다 똑같은 마음으로 똑같은 양으로 좋아하는 것을 어떻게 해. 이건 내 최후의 카드야. 이게 안 다면 난 차라리 손 털고 말래. 그만 만나고 말래. 그냥 나 혼자 마음 정리 하고 말래.”
“네가 신중히 생각하고 정했다면 할 말 없어. 그럼 난 해 볼래. 한 번 해 보지 뭐. 저 애송이랑 한 판 정정 당당하게 붙어보는 일도 뭐 긴 인생에서 썩 나쁜 게임은 아니니깐.”
“뭐? 애송이? 내가 당신보다 3cm는 더 커! 좋아. 그럼 나도 한다. 한 번 해 보지 뭐. 나도 저 능구렁이 같은 사람에게 너 안 빼앗겨!”
막상 상한이 순순히 그러마. 하니, 순간적으로 오기가 생겼다. 내가 저 남자보다 못한 게 뭐가 있어서. 키가 딸려? 외모가 딸려? 학력이 딸려? 물론 사랑에는 그 세 가지 조건 말고도 사람을 충족시킬 만한 조건이 많다는 것을 알지만, 주혁은 상한에게 만큼은 지고 싶지 않은 피가 들끓었다. 적어도 저 나이 많은 남자에게 만큼은 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주혁은 그 치열한 게임에 발빠지게 한 요인이었다. 결코 거부 할 수 없는 제안. 승자만이 그녀의 곁에 설 수 있고, 패자는 그대로 물러나야만 하는 야생의 생존 게임. 그 제안을 한 영효나, 그 것을 수락한 상한과 주혁 모두를 상현이 정말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다들 미쳤군.’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사랑은 원래 미친 짓이야. 미치지 않고서야 제대로 할 수 없는 거니깐.”
상현의 중얼거림을 주어들은 영효가 톡 쏘아 붙이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상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영효에게 말했다.
“좋아. 난 이미 제 삼자이니깐. 여기서 빠져 주지. 한 여자에게 미친, 또는 미쳤던 남자들의 모임이라.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군.”
상현이 현관문을 열고 나갈 때 까지 어느 누구 하나 그를 잡는다던지, 그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건넨다던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그런 행동을 반기는 눈치였다. 말은 안하고 있었지만, 상한과 주혁 둘은 간만에 같은 마음을 느꼈음을, 같은 생각을 했음을 느꼈다. 상현이 나가자, 영효가 방에 들어갔다 나오며 종이 한 장씩을 상한과 주혁에게 내 밀었다.
“연애 계약서?”
“그래. 연애 계약서. 무슨 일이든 확실히 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주혁의 물음에 영효가 살며시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녀의 눈웃음에 주혁은 마녀의 무언가에 홀린 사냥꾼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씁쓰름한 표정으로 멍하니 영효를 쳐다보는 주혁을 힐끔거리던 상한은 빠르게 눈으로 그녀가 건넨 계약서를 읽어 내려갔다.
[연애 계약서]
1. 서로 다른 상대를 만나는 것에 동의 한다. 다른 상대를 만남으로써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화내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티내지 말 것. 티를 낼 것 같거나, 참지 못하겠으면 계약을 파기할 것.
“첫 번째 장부터가 파격적이군.”
상한이 중얼거리며 다시 2번째 문항으로 넘어갔다.
2. 서로 연애를 하면서 또 다른 상대를 만날 수 있다. 만나보고 그 사람이 좋으면, 이야기를 하고 계약을 파기할 것.
3. 서로 합의 하에 한 계약이므로 파기 시에도 합의를 요함.
4. 계약기간은 3개월로 하되, 그 사이에 계약이 파기 될 시에는 자동으로 종료됨.
“뭐 그렇게 어려운 것 적은 것도 아니야. 가장 기본적인 것만 적은 거니깐."
상한의 표정을 보며 영효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그 옆에서 아빠다리를 하고 앉아 계약서를 훑어보던 주혁이 ‘그럼 너도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이야?’라고 반문했다. 그의 말에 영효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나는 아니야. 나 아닌 두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조건이야. 말했다 시피 다른 사람을 만날 수가 없어서 이런 조건을 내 세운 것이고, 나 아닌 두 사람은 틀리잖아. 다른 여자 만나보고 그 사람이 좋으면 그 사람에게 가는 거야. 나 혼자만을 위해 두 사람 모두를 잡아 놓고 있는 일은 공평치 못하니깐 말이야.”
영효의 대답에 상한이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군.’이라고 짧게 응수 했다.
“다 읽어 봤으면 세 명이서 사인한 것을 서로에게 돌리자. 확실한 게 좋잖아.”
“네가 그렇게 확실한 것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다.”
주혁의 말에 영효는 그가 비꼬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어려워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계약서에 먼저 사인을 시작했다. 그녀를 기점으로 두 남자가 나란히 바닥에 엎드려 사인을 하고 그렇게 그들의 계약은 시작 되었다.
“이제부터 계약 시작인거네?”
“정말 우리 두 사람 중 한 사람과 결혼할 작정이야?”
주혁의 물음에 영효가 ‘당연히!’라고 대답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그럴 거야. 당연히 두 사람을 결혼 상대자로 올려놓고 있으니깐.”
“그럼 내가 훨씬 불리하잖아.”
주혁이 투덜거리며 말을 이었다.
“결혼이라고 한다는 게 말이야. 나한테는 너무 불리한 것 아니야? 게다가 나 군대라도 덜컥 가게 되면 어쩌려고 그래?”
“말했잖아. 우리 계약은 3개월이라고. 그 전에 군대 갈 일은 없을 거잖아. 만약 그 3개월 사이에 내가 주혁이 너한테 마음이 끌린다면 당연히 너를 택할 거야. 우리가 그 후 결혼까지 가든지, 가지 않던 지는 중요치 않아. 그렇지 않다고 해도 상대편은 만나지 않을 테니깐 말이야.”
“좋아, 한번 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