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지연이 돌아간 후, 한참을 울다 눈이 퉁퉁 부어오른 채 수연은 소파에 멍하니 누워 있었다. 6 시간 정도가 지났을 무렵, 밤이 되었는지 불도 켜지 않은 아파트 안과 창 밖이 짙은 어둠으로 온통 깜깜했다. 어두운 집 안에서 살아있다는 비명처럼 전화벨과 휴대폰 음악소리가 요란하게, 지속적으로 불이라도 난듯이 울렸다.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줄 뻔히 아는지라... 도저히 받고 싶지 않았다... 수차례 날카롭게 울리던 벨이 자동응답기의 녹음상태로 돌아갔다.
" 수연아, 오빠다. 어머니께서 카톨릭 성모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셨으니 빨리 와라..."
다급하게 녹음을 하는 듯 짮게 용건만을 말하고 전화가 끊어졌다.
수연은 멍한 충격 상태에서 서둘러 거실 불을 켜고, 녹음기의 재버튼을 눌러 다시 확인한 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불을 켜고 지갑을 찾으며 흐느꼈다.
' 엄마...... '
이미 수연으로 인해 가슴이 만신창이처럼 찢겨진 엄마였다.
' 혈압도 높으시고, 심장도 그리 건강하지 못하신데... '
수연은 정신없이 코트만 집어 들어 걸치고, 지갑만을 주머니에 넣고는 길 가로 뛰어나가 택시를 잡아 타고, 엄마가 다니시던 카톨릭 성모 병원으로 달려갔다.
새해가 되고서도 어찌 그리 아픈 사람들이 많은지... 응급실 앞, 복도 침대에까지 환자가 누워 대기하고 있고, 간호원들과 의사들이 정신없이 바쁜 걸음으로 소리를 지르며 환자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수연은 그 정신없이 분주한 간호원들과 환자들... '삑-삑','뚜-뚜' 각기 소음을 내는 기계들 사이로 엄마와 오빠의 모습을 찾아 고개를 좌우로 돌려 살폈다. 오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혹시... 하는 마음에 다시 울컥 울음이 올라왔지만 엄마와 새언니라도 찾으려고 눈을 크게 뜨고서... 젖은 눈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계속 닦으며 자세히 환자들을 살폈다. 기계가 몇 대 늘어서 가려져 있던 한쪽 벽면 쪽의 침대에서 간호원 두 사람과, 의사 한 사람이 산소마스크를 쓴 엄마 옆에 서서 무엇인가 지시를 내리며 말을 주고 받는 것을 발견했다.
" 엄마! "
수연은 침대 앞으로 달려가 창백한 표정으로 시체처럼 누워있는 엄마의 찬 손을 잡았다.
의식없이 산소 마스크만를 하고 누워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수연은 가슴이 시리도록 눈물이 차올랐다.
" 엄마! 정신차려 보세요!... 엄마!... "
큰 소리로 울면서 엄마를 흔드는 수연의 팔을 간호원이 잡았다.
" 환자분 따님 되세요? 이제 괜찮습니다. 아까는 굉장히 위험했었어요. 잠시 숨이 끊어진 것처럼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는데, 심장 마사지와 전기 충격으로 잠시 정신을 차리셨지만, 아직 호흡이 고르지 않고, 심장 박동도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아, 진정제를 맞고 이제 잠이 드셨어요. 오늘 밤 경과를 보고 괜찮으면, 내일 쯤 빈 병실이 나오면 일반 병실로 옮기도록 하세요. 오빠 분이 계속 계셨는데 환자분이 주무시는 것을 보고 서류 수속하러 원무과에 가셨나 보네요. 환자분이 깨거나 놀라지 않도록 너무 큰 소리로 말씀하시지 말고, 한참 주무실테니 조용히 살펴만 보세요. "
설명을 마친 간호원이 다른 환자를 살피러 가버리고 난 후, 수연은 '쌕색' 거리는 거친 숨소리를 내며 의식없이 주무시는 엄마를 바라보며 흐느낌이 계속 새어나왔지만 소리를 죽여가며 작게 속삭였다. 수연은 엄마의 얼굴을 만지면서 흘러내린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으며 이마 뒤로 넘겨드렸다.
" 엄마, 나 수연이야... 흑.흑... 엄마... 나, 괜찮아요... 엄마도 힘내고, 정신차려서 일어나세요. 나 정말 괜찮아... 정말이예요...나... 엄마에게 할 말도 많은데... "
" 수연아..."
명환이 언제 왔는지 수연의 어깨를 살짝 짚으며 수연을 불렀다.
" 잠시 나가서 오빠랑 커피 한 잔 하자. 어머니는 이제 막 잠 드셨으니까 잠시 쉬시게 해 드리고."
수연은 명환을 따라 나가며 응급실 현관에 있는 자판기에서 진한 블랙커피 두 잔을 뽑았다. 주로 밀크 커피를 마시지만 진한 블랙커피가 마시고 싶은 밤이었다. 한 잔을 명환에게 건내주고 응급실의 유리문을 밀고 밖으로 나가 가슴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은 찬 바람을 맞았다.
명환은 종이컵에 든 진한 커피를 천천히 한모금 마시더니 수연을 조용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지연이가 왔다 갔다. "
" 응, 알아..."
" 그래... 임신했다며 창훈이와 결혼하겠다던데... 어떻게 된 일이야?"
" 어디까지 말했는데?... "
" 어디까지? 후-, 어디서부터 이렇게 어긋난거니? 네가 두 사람의 사이를 알게 된 것이 약 먹을 때니? "
" 응... 말하고 싶지 않았어... 잊고 싶었고... "
" ... ... 괜찮겠니? ..."
" 응, 걱정마. 오빠. 나 정말 이젠 괜찮아... 많이 정리됐고... ... 엄마가... 많이 놀라셨겠네?..."
" 그래... 솔직히 나도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이미 벌어진 일인데... 너와 지연이... 어느 쪽도 내게는 소중한 동생인데... 휴-, 사는게 정말 힘들구나....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겠니?"
" 오빠, 나 솔직히 정말 많이 힘들었거든... 죽음까지 생각할 정도로... 그런데 병원 생활을 하면서 정말 많이 안정됐고, 상담을 통해 나 자신도 다시 살펴 볼 수 있게 됐어... 이젠 괜찮아... 죽다가도 살아났는데... 열심히 살아봐야지... 물론 창훈씨와 지연이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면 다시 조금 흔들리기도 하고, 아플 때도 있겠지... 나도 사람인데... 아직 정말 많은 시간이 흘러야 될지도 모르지만... ... 허락해줘... ... 지연이와 창훈씨 결혼... 이미 벌어진 일인데 막는다고 막아지지도 않고...... "
" 휴-... 글쎄다... 나야 그렇다 치고, 어머니는? 어머니가 걱정이다. 저번 검진 때도 네 일로 많이 놀라셔서 오른 혈압으로 심장이 많이 부으셨다고 하더라. 네게 뭐라는게 아니라... 실은 네게 말 안했다만 그때도 심장 발작이 일어나 이틀 입원하시면서 안정을 취하셨다. 네가 정신을 차릴 때 어머니가 옆에 있어주지 못한 것도 그래서고... 휴-, 스트레스를 피하고 심장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심장약을 잘 복용하고, 안정하라고 했는데... 네 일도 그렇고... 지연이의 일도 그렇고...... 솔직히 나도 마음 한 구석엔 네 자리가 조금 더 있어서인지 일을 이렇게까지 만든 지연이가 쉽게 용서되지는 않는구나... "
" 흑... 오빠...... "
수연은 명환의 어깨에 기대어 작게 흐느꼈다.
명환은 수연의 어깨를 가볍게 두 세번 두드리며 고개를 하늘로 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두운 겨울 밤하늘의 맑음에 별들이 유난히 밝게 보이는 밤이었다.
수연의 엄마는 새벽 5시가 되어가는 무렵 의식을 차렸다.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불편한 자세로 자신이 누운 침대에 두 손을 베개 삼아 얼굴을 옆으로 돌린 채 엎드려 잠이 들어 있는 수연의 안쓰러운 모습이 보였다... 얼마나 울었는지 온통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이 남아있었다. 수연 엄마는 한 손을 들어 산소 마스크를 조심스럽게 벗기고 수연이 깰까봐 눈으로만 수연을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니 ... 자꾸 두 눈꼬리의 주름을 따라 얼굴 옆으로 눈물이 흘렀다.
' 불쌍한 것... 불쌍한 것... '
안쓰럽고 불쌍한 마음에 주사 바늘이 꽂힌 주름진 손으로 수연의 검은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어 갔다.
" 음... ... 엄마?... 엄마, 정신이 들었어요?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요? "
수연 엄마는 자신의 흐르는 눈물을 손 끝으로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하고 싶은데 목이 가라앉아 목소리가 낮게 갈라져 나왔다.
" ...네.. 오빠는?..."
" 집에 갔어요. 새 언니 혼자만 있고, 엄마도 주무시고 해서 제가 가라고 했어요. 아침 일찍 다시 온대요. "
" 그래... "
" ... 엄마... 나, 정말 이젠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이야... ... 엄마도 기운내세요...
자꾸 우리 때문에 아프시지 말고... ... 엄마... 정말 죄송해요... 죄송해요... "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수연 엄마의 주름진 두 눈에 눈물이 습막처럼 번지며 떨어졌다.
"... 아니다. 다 내 죄지... 내 죄야... 미안하다... "
" 아니예요. 엄마, 아니예요.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젠 저와 끝난 일이예요. 선택도 제가 했고, 헤어진 것도 제가 했어요.... 애도 아니고... (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이며 )
얼마나 다행이예요? 생각해 보세요... 결혼하고 일어난 일이 아니잖아요. 아이도 없고...
그렇게 생각하세요. 네?... 전 이제 많이 정리됐고, 앞으로 더 열심히 힘내서 살거예요...
엄마도 힘내시고, 우리 같이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살아요... "
수연은 자신의 눈물을 닦은 후, 눈물로 범벅된 엄마의 핼쑥한 얼굴을 어루만지며 엄마의 눈주름을 따라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드렸다.
" 우리 엄마도 많이 늙으셨네... 흐... 훗...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사셔야 되는데... 흣.훗... "
수연은 자신의 엄마를 바라보며 울음섞인 웃음으로 작게 웃으며 엄마의 얼굴을 부드럽게 한참을 쓰다듬었다.
" 그래... 그래... 그러자꾸나 ... 그..래..."
수연 엄마는 수연의 두 손을 잡고 두드리며 고장난 인형처럼 눈물을 흘리며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