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제는 손을 내밀어 늦은 설무랑에게 앉을 자리를 권하였다.
" 내가 보낸 술잔이 늦었으니 그 대 탓은 아니지. 그래, 내가 보낸 잔은 마음에 들던가?"
관지와 제공은 천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천제와 설무랑이 도리천 남쪽에 방치되어있는 채의 무덤에서 만나 나누었던 이야기와 약조를 그들이 알리가 없었다. 그 때 설무랑은 천제에게 언제든 술잔을 보내오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와 술 벗을 하겠다 약속했었고 천제는 오랜 시간이 지나 그 약속을 기억해 낸 것이다.
설무랑은 자리에 앉기 전에 붉은 비단 보자기에 싸맨 것을 천제에게 바치면서,
" 소인이 전하께 바치 올 술이옵니다. 전하께옵서 좋아하실지 모르겠사오나 제 작은 정성이옵니다."
시중 드는 시녀가 그것을 받아 천제에게 건네자, 천제는 기쁜 빛을 띄며 대답했다.
" 진정한 애주가들은 그 향만으로도 술의 종류를 알아내는 법이지. 어디....내가 맞춰보도록 할까?"
그 말에 이어 시녀가 보자기를 풀어내자, 주둥이가 두 개 달린 맑고 푸른 옥빛을 띈 연꽃 무늬의 술병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시녀는 손잡이를 잡고 뚜껑을 열었고, 그 순간 향기로운 꽃 향기가 방 전체로 퍼져나갔는데 오묘하게 조화로운 향이었지만, 천천히 음미하면 수많은 다른 꽃들의 향이 절묘하게 섞여 있었다. 천제는 왠지모를 감회에 젖은 표정으로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 이것은...이..것은...하하하하."
천제는 웃음을 터뜨렸지만 슬픈 빛이 서려있는 웃음이었다. 제공은 좀처럼 보기 힘든 천제의 그런 표정에 속으로 놀랐다.
" 자네가 내 가슴을 울리는 군. 최고의 술이야.내 기꺼이 이 술을 모두 마실것이다."
천제는 제공을 돌아다보며,
" 이름이 아깝지 않은 애주가가 거기 또 있지 않소? 증장천, 이 술이 무엇인지 아시겠소?"
" 본 왕의 짧은 지식으로는 백화주가 아닌가 하옵니다. 백 가지 꽃이 잡내없이 하나된 향으로 익은 것으로 보아 아주 귀한 술인 듯 하옵니다. 이런 술은 구하기가 무척 힘이 들지요"
제공이 겸손하게 답을 맞추자, 천제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공에게는 하고픈 말이 남아있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말할 뿐이었다.
' 백화주의 비법은 수라계에서 전해진 것이지요. 허나 알려진 비법 중에 빠진 것이 있는지 이런 완벽한 백화주는 천계에서 구할 수 없다고 들었나이다.'
천제는 백화주가 든 청화백자를 들어 설무랑에게 첫 잔을 권하였다. 차례로 술잔이 채워지고 다들 첫 잔을 비워내는데 설무랑만이 그대로 가득 찬 잔을 술상 위에 내려놓았다. 천제는 의아하여 물었다.
" 여보게, 설무랑. 어찌하여 자네는 잔을 비우지 아니하는가?"
설무랑은 난처한 표정이었지만, 솔직하게 그 이유를 말했다.
" 전하, 소인의 숙부 범천왕이 불미스런 일을 당하여 아직 상 중이옵니다. 제가 술을 마시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사옵니다. 처지를 헤아려 주시옵소서."
제공은 아무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범인이 잡히지 않은 가운데 지국천은 미루지 못해 범천의 장례식을 거행했지만 제공은 그 자리에서 설무랑을 보지 못했다. 숙부의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은 설무랑의 말에 제공은 그 뻔한 꿍꿍이가 보여 웃음 지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천제는 그저 설무랑의 마음 씀씀이가 올곧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 숙부의 죽음이 자네에게 큰 상심인 줄 아네. 나 역시 범천의 됨됨이와 능력을 높이 평하여 그를 아꼈지. 그래서 슬픔이 크다네. 허나..떠난 사람 아닌가? 그것이 범천의 현세의 복이었던 것을.
자, 그 잔은 범천의 명복을 비는 잔일세. 우리 모두 범천의 복을 빌며 마시도록 하지."
설무랑은 천제의 권고에 못 이기는 척 술잔을 비워낼 수 밖에 없었다.
술자리는 무르 익어 갔고, 다들 기분 좋게 취해갔다. 하지만 정작 맘 놓고 마신 사람은 천제 뿐, 관지는 애초에 술이 약하여 절제하였고 제공과 설무랑은 술기운이 도는 듯 보였지만 둘 다 자신의 주량에 훨씬 못 미쳤다.
천제는 원래가 예리한 사람이라 제공과 설무랑 간에 흐르는 어색한 기운을 진작에 느끼고 있었다. 술 자리가 무르익자 그는 일부러 돌려 말을 꺼냈다.
" 증장천과 설무랑은 서로가 각별한 정을 지니지 않았소? 증장천, 설무랑이 돌아오고 회포라도 옳게 푸신게요?"
제공은 술 자리 내내 설무랑과 자연스레 얽힐 기회를 엿보고 있던 터라 천제가 마련해 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 전하, 벗이라는 이름에 창피할 노릇이오나 본 왕이 설무랑의 귀향을 능히 대접하지 못하였습니다."
천제는 제공을 보며,
" 인심 좋기로 소문난 증장천이 말이오? 큰 실수를 하셨구만. 다른 이도 아니고 지기를 그리 대접하다니 설무랑이 서운할 만도 하구려. "
제공은 천제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 이 못난 벗이 설무랑의 지난 이야기를 청하려 하니 허락해 주시겠는지요?"
천제는 받은 잔을 단 번에 비우고 제공의 잔을 채워주었다.
" 좋고말고! 안그래도 지국천을 통해 설무랑이 그 간 훌륭한 스승에게 사사받고 돌아왔다 듣고, 그 이야기가 사뭇 궁금하던 차였소. "
천제는 병으로 죽었다던 지국천의 장자가 돌아오자 지국천에게 그 내막을 물었다. 아마도 지국천은 모든 걸 숨긴 채, 부족한 아들을 깨우치기 위해 은자에게 보내 가르침을 받게 하였고, 아들의 부족함이 결코 자랑은 아니기에 모두에게 비밀로 할 수 밖에 없었다고 그럴 듯하게 둘러댄 모양이었다. 나타난 설무랑이 천제의 마음에 들었기에 천제는 그 일에 의심을 품지 않고 지국천을 나무라지도 않았다.
" 설무랑, 그 감칠 맛 나는 입담으로 스승에 대한 이야기와 가르침을 받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이야기해 주겠는가?"
천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호의적인 눈빛을 보내며 설무랑에게 말했다. 설무랑은 송구하여 고개를 조아려 그 눈빛을 무례하지 않게 피하면서,
" 보잘 것 없는 소인의 이야기를 들으시겠다니 송구할 따름이옵니다."
내내 별 말없이 자리를 지키던 관지도 호기심을 가지고 귀를 귀울였다. 300년간 죽었다고 소문을 내고 배워온 것이 무엇인지 흥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제공이 설무랑과 동시에 관지와도 뗄레야 뗄 수 없는 절친한 사이인 반면, 설무랑과 관지는 개인적으로 공유한 추억이 적은 사이었다. 어린 시절의 설무랑은 지금의 모습과는 딴 판이었다. 지극히 소극적이고 내성적이었고 그의 유일한 취미는 틀어 박혀 책을 탐독하는 것 뿐이었다. 공식적인 모임이 열려 황족과 왕족이 모여야하는 날에도 설무랑의 관심은 그저 황실 도서관이나 모임의 주인이 소유한 희귀한 책 뿐이었다. 어떻게든 아들의 사교성을 키워주려고 그를 데리고 다니던 지국천이 잠시 한 눈을 판았다치면 설무랑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러면 그는 책을 손에 쥐고 사람도 잘 다니지 않는 구석을 찾아 독서에 열중해 있기 일수였다.
그리고 관지는 마계 대전 이전에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존재였다. 첫 번째 제 1황비였던 설린의 아들 후강이 공식적인 황태자의 자리에 있다가 인간 무녀인 만을 사랑한 죄로 그 지위를 박탈당하고 추방 당하였을 때, 심성이 곱지 못한 제 2황비가 아들 복주를 그 자리에 앉히려고 애쓰고 있었고 그 때 들어온 것이 제 3 황비, 즉 관지의 어머니였다. 하지만 그 시기에 천제는 채를 만났고 그녀를 제 1황비에 앉혔다. 그러나 천제가 목숨을 다해 사랑하던 채의 죽음과 비밀에 쌓인 아들 초율의 탄생에 밀려 관지는 태어날 때부터 그리 주목을 받지 못한 운명이었다. 그 뒤에 후강이 용서를 받고 궁으로 돌아오면서 황실은 후강이 다시 황태자의 자리를 얻느냐 마느냐로 소란스러웠을뿐 관지에 대해선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계 대전에서 공을 세우면서 관지는 결국 황태자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관지가 무명에 가까운 생활을 할 때, 제공과 친해지게 된 것은 모친들 때문이었다. 지금은 제 2황비로 승격한 관지의 어머니와 제공의 어머니는 처녀 시절부터 둘도 없는 친구였고 그 친분으로 관지와 제공은 어릴 적부터 가까이 할 수 있었다. 싹싹한 제공이 관지의 마음을 사로 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제공이 지국천이 아끼는 문우(文友)였던 것이 설무랑과 제공의 인연을 맺어준 계기였다. 해박하여 모르는 것이 없고 설무랑 못지 않게 독서에 관심이 많던 제공은 지국천의 초청으로 동방성을 오가면서 자연스럽게 설무랑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
물론 제공의 중계로 관지와 설무랑이 어울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비영과 소예까지 더불어 어울리는 자리였고 설무랑이 워낙 내성적이라 그런 자리도 쉬이 마련되지 않았다. 소예만큼 활발하지 못한 관지가 일부러 그와 가까워지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도 둘이 그저그런 사이가 될 수 밖에 없던 이유였다. 그래서 300년이 지나버린 지금은 미약하던 추억마저 사라지고 서로를 벗으로서 애닯아할 이유가 없었다.
설무랑은 술술 지난 300년간의 행적을 들려주었다.
" 소인이 찾아간 곳은 천계와 수라계 접경의 높고 깊은 산 속이었습니다. 제 스승님은 오래 전 무(武)의 경지에 이르러 도를 깨친 분이온데..."
그는 말을 도중에 끊고 천제를 향해 정중하게,
" 세인들에게 알려지는 것은 스승님의 뜻이 아니옵기에 존함을 밝히지 않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천제는 신비로운 은자가 궁금했지만, 캐묻는 것은 자신의 위엄을 해친다고 생각하여 허락해주었다.
설무랑의 이야기에 따르면 스승은 좀 괴팍하고 인정이 없는 노인이었다. 도를 이룬 뒤 그는 스스로 세속과의 인연을 끊고 홀로 지냈다. 하지만 사람을 멀리할 뿐 동물과 심지어 식물과도 마음을 터놓고 사는 사이어서 그들의 말까지 다 알고 있었다.
그는 처음 설무랑이 소심하게 머뭇거리며 가르침을 청하자, 콧방귀를 뀌며 산 속 깊은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그러면서 사흘 안에 죽지 않고 자신을 찾아내면 받아주겠다 하였는데, 온갖 변신술에도 능한 스승을 찾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숲은 난폭한 짐승들과 독초와 게다 수라족까지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그야말로 지옥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설무랑은 죽을 각오로 스승을 찾아다녔고 마침내 마지막 날 스승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쓰러져버렸다.
" 허허..."
천제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 스승도 대단하지만, 죽기살기로 덤벼든 자네도 보통이 아니군. 어릴 적 그대는 허약하여 곧잘 몸져 눕지 않았나? 엄청난 고통이 따랐을텐데 기어이 스승을 찾아냈는가?"
" 가족과 동방을 등지고 떠나면서 저에게는 그것이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스승을 뵙고 모예를 배우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떠난 길이옵니다."
천제는 흐뭇하게 웃으며 술잔을 비워내고는 설무랑의 잔을 채워주었다.
" 그래, 사내라면 그래야지. 자신의 한 뜻에 목숨을 내 놓을 정도가 되어야하는 법이지."